00:45
청명 드림_침상2
부제:우리 집 침대 위로 동양 무협풍 남자가 떨어진 것에 대하여
청명 네임리스 드림
침상_1[23:30]
우리 집 침대 위. 마주 보고 앉은 썩 잘생긴 남자와 나. 심지어 남자는 울어 발갛게 오른 눈가로 나를 바라본다. 이 광경에서 한 톨의 낭만도 느끼지 못하는 건 이 남자가 불법침입자이기 때문이겠지⋯.
내 앞에 있는 남자. 청명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그의 침대에서 아주 얌전히 잠을 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을 뜨니 부인의 침대 위.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부인에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껴안고 울어버린 것이라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는 나를 껴안은 것은 둘째 치고, 그가 내 방에 나타난 것은 제 의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 말하려는 순간,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로 애처로이 바라보는 눈빛과, 다 녹은 얼음이 든 주머니를 볼에 대고 있는 모습에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래.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하지 못하고 제 뺨을 치는 이가 정말 제 발로 이곳에 왔을까? 만약 저게 거짓말이라면 아주 연기를 잘하는 사기꾼일 것이다. 심지어 그의 복장, 용모, 어투까지 마치 옛날 사람 같으니, 외계인보다는 갑작스레 원치 않는 시간여행을 하게 된 조선시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가 납득하기에도 쉬웠다.
사소한 자기 합리화와 납득을 마친 뒤 직면한 진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의 불법침입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건 알았다. 진짜 문제는 아까부터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이 남자,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부인이라 부르고 있다. 방금도 설명 도중 그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부인'이 나인 듯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건 어떻게 해결을 봐야 한다.
"저기, 청명 씨?"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또 우는 거 아니지? 걱정이 무색하게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오, 부인."
또.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 저한테 자꾸 부인이라고 하고 계시거든요."
"착각하진 않았소만."
"네? 아니, 저는 청명 씨 부인이 아니라니까요?"
"맞는데."
"아니라니까요? 아까 이름 알려드렸잖아요. 이름으로 부르세요. 왜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부인이니까 부인이라 부르지."
"아니 무슨, 아니라고요. 정말 왜 그러시는거예요."
그가 입술을 꾹 내리누르듯 입을 다문다.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려 아래를 바라보는 것에 어이가 없어진 것은 나였다. 아니, 이름을 알려줘도 부인이라고 부르던 것도 저고, 부르지 말라 하고 왜 그렇게 부르냐 물어도 '부인이니까.'라며 뻔뻔히 대답한 것도 저면서 뭐가 그리 억울하다고⋯!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하니 나를 흘끗 본 그가 손수 턱을 닫아주려 손을 뻗는 것까지 아주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아까까지 울던 사람은 대체 어디갔는데?
이 무의미한 말싸움에 두손 두발 다 든 것은 결국 나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겨.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데.
결국 호칭 교정에 포기한 내가 어깨에 힘을 빼고 늘어지자 그의 입가에 번지던 만족스러운 미소란. 왜 온지 모른다는거 거짓말 아니야? 의심으로 가득찬 나의 눈에 또다시 그의 볼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녹아 물렁해졌는데도 여전히 제 볼에 딱 붙인 얼음 주머니도 함께.
"하아⋯."
왜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지. 어쩔 수 없다. 이 사람의 말을 믿기로 하기도 했고, 그러면 이 사람도 제가 모를 장소에 떨어져 혼란스러운 것도 매한가지할테니까.
"그래요, 청명씨⋯."
"부인이야말로, 왜 자꾸 그리 부르시오?"
"네?"
"⋯조금 더 편히 불러도 된다는 뜻이오."
"음, 제가 편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말을 꺼낸 것인지, 대답을 듣고는 민망한 듯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한것이오?"
"아, 그러니까⋯ 청명 씨의 사정도 이해했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이야기 했잖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저희 일단 잠을 좀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는건 어때요? 제가 지금 좀 많이, 굉장히 피곤하거든요."
술도 마셨고, 우는 사람도 달랬고. 집에 낯선 사람이 있는데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니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당장에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내가 그의 호칭문제를 더 건드리지 않은 것은 분명 이 과도한 피로감 탓도 있으리라. 하품이 나온다.
"그래⋯."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친구가 오면 쓰려던걸 낯선 남자에게 먼저 내어주게 될줄이야. 거실로 나가 소파를 죽 당겨 침대로 만들었다.
"자, 여기에서 주무세요. 이불은⋯ 이거 덮으시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꾸물대는 그의 닫힌 입가가 보였지만 모른 척 했다. 잠시 기다리니, 그가 순순히 일어나 펼쳐진 소파로 향했다.
"불 끌게요."
드디어 집에 어둠이 찾아왔다. 불을 끄는 순간 어둠 속에서 그가 움찔 하는 것이 보였지만, 지금은 더 신경써줄 여력이 없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한시 반. 체감상 세 시는 된줄 알았는데. 꾸물대며 침대에 들어가 배게에 머리를 뉘였다. 잠이 쏟아진다. 멀리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잠에 빠져들어간다.
너무 잤다. 배게 아래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오후 한시. 열 두시간을 내리 잤네. 난장판이 된 머리칼을 문지르며 집 안을 둘러봤다.
청명 씨는 벌써 일어났나? 불룩해야할 소파침대가 평평하다. ⋯그런데 어딜 간거지. 우리 집은 거실에 방 하나가 딸려있는 구조다. 거실에 없으면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청명씨?"
화장실에 갔나? 화장실인지 어떻게 알고? 아니, 이건 편견인가. 조선시대 사람처럼 보이는 미래인이라 화장실 사용법은 알 수도 있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청명씨? 계세요?"
대답이 없다. 문고리를 돌리자, 부드럽게 문이 열린다. 아무도 없다. 급히 거실로 나가 이불을 들췄다. 눈으로 본 것이 틀림 없이 텅 비어있다. 현관의 문고리를 확인했다. 내가 안에서 잠근 그대로다.
"청명씨?"
답도, 인기척도 없다. ⋯집에 간건가? 올 때 예고 없이 나타난 것 처럼, 갈 때도 예고 없이 사라졌다면 말이 된다.
"하⋯."
안도의 숨을 쉬었다. 상호간 다행이지. 청명씨는 집에 돌아가고, 나는 평안한 내 집을 돌려받고. 아, 일이 해결됐다고 생각하니 또 잠이 몰려온다. 참지 않고 하품을 뱉어냈다. 우려하던 일이 저절로 해결되었으니, 나는 이제 짧은 주말을 즐겨야겠다.
그를 다시 마주한 것은. 오늘서 내일로 넘어가는 새벽. 내 침대 위.
선잠에 든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던 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재회의 감격스러운 첫 대사는 비명.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