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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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드림_침상 3

Key by 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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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우리 집 침대 위로 동양 무협풍 남자가 떨어진 것에 대하여

  • 청명 네임리스 드림

침상_2 [00:45]



"부인, 진정하시오! 나일세."

검은 실루엣이 내 양어깨를 잡고 강하게 말했다. 

"청명 씨?"

"그래, 청명."

"⋯불 좀 켜봐요."

그가 나를 놓고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곧장 스위치로 직행한 검은 그림자가 그것을 누른다. 갑자기 들어온 불에 눈살을 찌푸렸다. 방을 밝힌 청명이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 앞의 나는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벽에 붙어있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이 영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심장께를 꾹 눌렀다. 지금 워치라도 차고 있었으면 분명 경고음이 울렸을 게 분명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돌아간 거 아니었어요?"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자려고 누우니 당신이 있었네."

"네?"

"백매관에서⋯, 내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그대가 있더이다."

그러니까. 본인 집에서 자려고 눈 감으니 우리 집이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어쩌겠나, 사실인데. 어제는 믿었잖은가."

아니⋯ 그건 믿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니까 믿은 거지. 지금도 믿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기는 한데.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머리가 어지럽다. 정신 차리게 뭐라도 해야겠다.

"저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곳에서 기다리겠다는 듯 침대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 위에. 그의 무게를 온전히 받은 이불이 아무리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아, 나는 이불을 당기며 말했다.

"비켜줘야죠."

"아."

그가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나를 따라오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무작정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어지러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지금 나온 이야기를 보면 저 사람이 자면 내 집으로 떨어진다는 것 같은데⋯. 어제만 나타난 게 아니고 오늘도 나온 거면 이게 설마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말이야? 고개를 돌려 화장실 문과 거실 너머에 있을 내 방을 바라봤다. 매일 밤 저 사람이 내 침대로 떨어진다고? 나한테 딱히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머리가 긴 잘생긴 남자랑 매일 밤 침대에서 만나야 한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분명 세수를 했는데.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딴생각이 흘러들어온다. 이거 꿈인가? 내 볼을 슬쩍 꼬집어보아도 아픈 걸 보면 확실히 현실인데. 

"하–."

다시 찬물로 얼굴을 거세게 문질렀다. 이건 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잠을 자는 순간 내 집으로 오게 되는 거면 쫓아낼 수도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 조선시대 사람을 험한 현대의 길거리로 무자비하게 쫓아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냉정하지도 못하다. 아니 애초에 소파에서 재웠는데 내 침대에서 나타난 거면 내보내도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거 아니야? 저주 인형도 아니고 이게 무슨.

"부인?"

그가 밖에서 나를 부른다. 생각을 너무 오래 했나.

"네, 나가요, 나가⋯."

일단, 나에게 당장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밤 한정 동거인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수 밖에.


마음을 다잡고 방으로 돌아가자 보인 것은 남자가 내 휴대폰을 만지작대고 있는 광경이었다. 내가 화장실에 그렇게 오래 있었나. 아마 심심하던 찰나에 베개 근처 어디에 던져둔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남의 휴대폰 막 만지면 실례인데. 무어라 한 소리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옛날 사람이 핸드폰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 잠금을 푸는 방법은 고사하고 켜는 방법도 모를 텐데. 

"저 왔어요."

그가 나를 보며 슬쩍 핸드폰을 배게 밑으로 집어넣었다. 잘못한걸 들킨 사람처럼 눈치를 보는 것을 모르는 척해주며 침대 가에 앉아 손을 꼼지락대며 말을 어떻게 꺼낼지 고민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음,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방금 청명 씨가 본인 집에서 주무셨는데 저희 집에서 깨어나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입을 한 번 다셨다. 내가 내놓은 결론인데 말을 꺼내기 영 힘들다.

"비록 두 번이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 봐서는 잠에 들면 저희 집에 오게 되시는 것 같거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제가 오늘 정말, 너무 놀랐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규칙을 미리 정하는 게 어떨까요? 다음에 또 이러면 저 정말 심장 떨어질 것 같거든요."

"오늘은 미안했소. 푹 잠든 듯 해 머리칼을 정리해 주려 했는데. 그때 깨어날 줄은 몰랐지."

눈을 꾹 감았다. 잠든 사람 자리 정돈해 주는 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에서나 해주는 일 아닌가. 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나를 부인이라 부른다. 이 정도는 당연히 괜찮겠거니 싶었을게 뻔하군.

"앞으로는 오시면 그냥⋯ 저 그냥 두고 밖에 소파베드 펼쳐둘 테니 거기에서 주무세요."

"소파베드?"

영어는 못 알아듣겠구나.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라 무심결에 말해버렸다. 

"어제 내어드린 잠자리요. 침대."

"아, 그거. 내가 직접 할 테니 방법만 알려주게. 별로 어렵진 않아 보이던데."

"으음⋯. 혹시  밤늦게 주무시는 편인가요? 어제는 거의 자정이고 오늘은 새벽인데. 청명 씨가 새벽에 그거 펼치는게 더 수고스럽지 않을까요."

"그냥 펼쳐두는 건?"

"그건 또 거실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애초에 소파베드를 두는 건 공간 확보가 주목적이다. 무엇보다 저걸 펴두면 거실 겸 주방의 60퍼센트를 못쓰게 된다. 곰곰이 생각하고 있으니 그가 툭 말을 꺼냈다.

"그냥 같은 방에서 자면 되는 거 아닌가. 여기로 옮기면 될 것 같은데."

"네?"

"여기 와서 문 열고 나가 침상을 만드는 것보다 그게 낫겠네."

진심인가. 얼굴에 철판을 깐 건지 뻔뻔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다. 놀라 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내가 그대를 해치거나 강제할 일은 없으니 안심해. 내가 그래도 명색이 도사야."

말하는 내용도 충격적이고, 그와 함께 말투도 엄청나게 거슬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진중한 어르신 같은 말투였다면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가볍고, 편안했으며 무엇보다 반말이었다. 뭐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얼굴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나를 바로 알아본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자꾸 내게 딱딱하게 구는 게 말투 때문에 그런가 싶어서. 나도 좀 더 편하게 하기로 했어."

그러겠냐고요.

"그런데 말이야."

뭐지? 불안하다.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제 계속 볼 사이인데 청명 씨는 너무 정 없지 않나?"

어이가 없어 입이 절로 벌어진다. 이 사람은 알까. 내가 지금 자신을 불법침입자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는 걸. 자의든 타의든 우리 집에 불법 침입한 건 맞잖아. 초자연적 시간여행 현상에 의한 불법침입. 심지어 지금 보니 본인도 그걸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 말이 불퉁하게 나간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

그가 입을 꾹 다문다. 거 봐, 본인도 모르면서.

"그냥 계속 청명 씨라고,"

"상공이라고 불러."

"상공?"

순간 눈썹을 움찔거린 그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상공. ⋯친분이 있는 남자를 부르는 말이야."

너무 의심스럽다.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본인은 그냥 친분이 있는 남자라고 부르라고? 

"아니면 가가哥哥도 괜찮고. 이쪽은 오라비라는 뜻."

"⋯상공으로 할게요."

"그래, 그럼."

그가 다시 기분 좋게 웃었다. 순간 엄습한 불안감에 그를 더 추궁할까 하였으나 저 뻔뻔한 얼굴로 절대 진실을 이야기해 줄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검색해서 알아볼까? 배게 밑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쥐었다 내려놓았다. 핸드폰을 꺼낸다고 해서 내가 무얼 하는지 알 수 있을 리는 없을 테지만, 이야기 중 대놓고 핸드폰을 꺼내기에는 좀 눈치 보인다. 이건 나중에 따로 찾아보거나 해야겠다.

"그런데 청명상공."

"이름 때고 상공이라고 하면 돼."

"⋯그런데 상공, 왜 자꾸 반말하세요? 저랑 나이도 거의 차이 안 나시는 것 같은데요."

"몇 살로 보이는데?"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얼굴에 주름도 없고, 피부도 괜찮고⋯. 어깨는 딱 벌어져 몸도 튼튼한데, 이건 나이가 좀 들어도 그럴 수 있으니까. 사실 처음 마주했을 때나 방금 나를 깨울 때를 떠올려보면 말투가 굉장히 어르신 같아 어색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외견만 보면 꽤 젊어 보인다.

"한 30대쯤?"

내 말을 들은 그가 픽 웃었다.

"망구(望九)는 지났지. 부인은 몇인데?"

"스물 중반 정도⋯. 그런데, 망구가 몇이예요?"

"망구를 몰라?"

"나이 세는 단위예요? 처음 들어보는데⋯."

"여든하나 정도 되지."

여든하나? 그가 방금 망구는 지났다고 했으니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나이는 적어도 여든둘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여든둘이나 되었는데 저렇게 젊어보인다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가끔 티비에도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젊은 외모의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는가. 20대 외모의 여성이 사실은 50대였다.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 말이다.

잠깐, 머리에 삐죽 튀어나온 저 하얀 새치⋯. 새치 치고는 양이 많은데 새치가 아니라 저기만 샌 건가? 설마. 내가 생각한 거지만 말이 안됐다. 생각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실사례가 있는데 무작정 거짓이라고 의심할 수도 없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어투 같은 것들을 고려하면 믿지 못할 말도 아니다.

"그럼 반말 하셔야죠⋯."

실컷 반말 하라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내 대답을 들은 그가 시원스레 웃었다.

"부인도, 원하면 편하게 말해."

"아뇨, 저는 유교 사회에서 자라서요. 존대가 편하네요."

"내가 괜찮다는데."

"제가 안 괜찮아요."

단호히 거절하자 그가 쳇하는 소리를 내고서는 고개를 돌려 제 다리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말하지 말걸, 하는 이야기는 덤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존대를 더 듣고 싶어할 텐데. 특이한 사람이다. 묘하게 불편해 입을 한 번 다셨다.

"지금 자꾸 이야기가 새는데, 저희 규칙을 정하려고 하던 거였잖아요."

"이 침상을 안쪽으로 더 밀고, 밖의 침상을 가져오면 되겠군."

그가 우리가 앉아있는 침대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는 아까 그가 주장한 '거실의 소파를 안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결정되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아뇨! 그냥 제가 자기 전에 펼쳐두면 되는 일이니까 이 이야기는 끝내죠. 방문도 열어둘 테니 그대로 나가서 주무시면 돼요. 오늘처럼 제 자리 정리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청명 씨도,"

"상공."

"네, 사실 상공도 자리로 가서 잘 주무시고 저도 제 자리에서 잘 자면 끝날 일이니까요. 지금 펼쳐드릴 테니까 어서   주무세요. 벌써 세시네요."

그에게 말을 쏟아내고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그를 두고 일어났다. 그가 여든이 넘었다는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그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순간, 그의 의도대로 대화가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지금 시간도 시간이고 혼란스러운 점이 너무 커 내가 어서 넘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던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똑같이 혼란스러울텐데도 능청스럽게 태도를 바꾼다던가, 규칙에 대해 말하려하자 자연스레 제 주장을 내세운 점이라던가. 호칭도 결국 그가 처음에 말한 것으로 유도되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니 그에게서 연륜이 느껴짐을 부정할 수 없다.

"하."

소파를 당기다 몰래 숨을 토했다. 괜찮을까? 그가 나한테 위해를 끼치지 않을거라 여기고 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오늘 자는 사이에 다가오기도 했으니 조금 불안한 마음이 없잖아 생긴다.

"부인, 혹시 잠옷은 따로 없어?"

"저희 집에 남성복이 없어서요. 맞는 게 없을 거라⋯ 다음에 준비해드릴게요."

"아냐."

그가 몸에 두른 것들을 벗는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뭐 하시는 거예요!"

"옷 벗는데."

"아니, 그러니까 제가 아직 있는데⋯!"

"이건 그냥 여기에 두면 되나?"

그는 가벼운 내의만 남기고 제가 벗은 옷가지들을 소파 언저리에 던져두었다. 옷을 벗었다고는 해도 갖춰 입을 것은 다 입고 가릴 곳은 다 가린 것에 난리를 피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네, 그냥 두세요⋯. 아마 돌아가실 때 같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아마도?"

아침에 대충 개어두었던 이불을 가져와 그에게 건네줬다. 그가 이불을 받으며 말했다.

"잘자, 부인."

"네, 상공도요."

나를 계속 바라보는 그를 두고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갔다. 어째서일까. 내가 뒤를 돌기 전 마주한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얼굴. 겨우 두 번째 만난 사람을 향해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걸까. 깊은 외로움이 느껴지는 그 얼굴을 떠올리며 조금 뒤척이다가도,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우려한 것과 달리 그와의 생활은 큰 문제 없이 흘러갔다. 그는 처음 같은 방에서 자겠다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도착하면 바로 거실로 가 잠들었다. 그와의 만남이라고는 내가 새벽까지 깨어있던 때나, 자다 깨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와 잠에 든 그의 모습을 보는 것 정도였다. 

문제가 생긴 것은 어느날 아침, 소파를 다시 접기 위해 걷어낸 이불 아래에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망구(望九):약 81세.

사실 가가哥哥는 그냥 오라비라는 뜻은 맞다고 하네요. 연인에게 쓰기도 하고 통용되는 느낌인 듯 해요.

[1.형 2.친척 중의 동년배로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3. 사랑하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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