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늦은 티타임

드림 2주년 기념 연성

어느 날 알베리크는 제자의 왼손 약지에서 뜻밖의 물건을 발견했다. 설마 아니겠지, 싶어서 캐물었더니 에스티니앙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해묵은 다툼에 관해 사과를 건네며 민망해하던 얼굴과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쑥스러워하는 제자를 봤다는 충격에 알베리크는 이어지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잠깐만, 뭐라고? 어디서 뭘 해?’ 그렇게 알베리크는 에스티니앙이 오래 사귄 애인과 단둘이 식을 올렸고, 심지어 그게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축하를 건네야 할지 어이없어해야 할지 몰라 의미 없는 감탄사만 연신 내뱉었다.

제자의 애인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그간 에스티니앙을 통해 듣기로는 제법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고 보니 끼리끼리 사귄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알베리크가 충격을 소화하는 사이 에스티니앙은 머쓱한 듯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놀라지 말고 들으라며 경고부터 날렸다. ‘아실이 인사하러 오고 싶다는데 언제가 편해?’ 알베리크는 한숨을 쉬었다. 점화 신호도 없이 대포를 쏴 놓고서 명중한 포탄 수를 보고하면 어쩌란 거냐고.

에스티니앙은 거절해도 된다고 했지만, 알베리크는 약속을 잡았다. 저쪽도 새삼 안면을 트고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알베리크 개인으로서도 궁금했다. 제자의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성도의 영웅에 관해 알려진 사실만으로는 그의 됨됨이를 추측하기 힘들었으니까.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알베리크는 긴장했다. 일정을 확인하러 들른 제자 놈은 남의 속도 모른 채 ‘평소보다 불만 좀 더 때면 된다’ 같은 소리나 했다.

상견례 당일, 알베리크는 성 레네트 광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에스티니앙은 집으로 가는 길 정도는 안다고 말했다가 동행인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성도의 영웅은 온갖 방한구로 무장하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던 거라고는 에스티니앙이 애인을 제법 살뜰하게 챙긴다는 점이었다. 알베리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자가 누군가를 보살필 줄 안다는 게 낯설었다. 푸른 용기사가 된 에스티니앙의 위상을 실감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선전용으로 부풀린 활약상이며 최전방에 출전한 기사들의 호평을 듣다 보면 알베리크도 그 녀석이 정말 할드라스의 재림인가 싶었다. 막상 만나면 딱히 변한 점이 눈에 띄지 않아 의아하기만 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자의 변화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이리라.

당부받았던 대로 알베리크는 평소보다 따뜻하게 불을 때 두었다. 손님은 집 문간에 서서 차근차근 목도리며 볼끼, 모자를 벗었다. 성도의 영웅은 듣던 대로 미청년이었다. 그러나 오늘 알베리크가 제자의 태도를 보며 떠올린 미인상과는 꽤 달랐다. 제자의 애인은 추위만 좀 탈 뿐 건강해 보였다. 성도의 영웅인 만큼 누군가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야 할 정도로 유약한 인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에스티니앙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에게서 방한구를 받아 대신 옷걸이에 걸었고, 겉옷 벗는 것을 도왔다. 알베리크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저건 마치 배우자를 대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고. 그는 뒤늦게 에스티니앙의 왼손 약지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손님의 왼손에서 같은 모양의 반지가 빛나고 있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적응할 수 없었다.

중간에 낀 에스티니앙이 자연스럽게 소개를 맡았다. 알베리크는 이 대목에서도 무척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제자는 인간관계가 좁았다. 알베리크는 녀석의 상사나 부하, 심지어는 친구와도 이런 식으로 통성명한 적이 없었다. 아이메리크에 관해서도 ‘요즘 자주 붙어 다니는 녀석’ 정도가 다였다. 에스티니앙 본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소갯말은 무척 짧았다. 알베리크에 관해서는 ‘들었겠지만, 스승님이다.’였고 아실에 관해서는 ‘보시다시피, 애인이야.’가 끝이었다. 서투른 중개인 탓에 당사자들은 알아서 통성명을 했다.

초반 대화를 끌고 간 사람은 아실이었다. 사교적인 태도에서는 관록이 느껴졌다. 알베리크는 경계심과 어색함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대화에 임했다. 길쭉한 귀와 눈에 띄는 외모만 아니었더라면 아실이 성도에서 한철 지내고 떠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소식에 대해서는 영 어두웠지만, 그조차 이방인의 무지라기보다는 커르다스 구석 오지로 파견을 나갔다가 막 돌아온 병사의 무지와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어느새 편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주된 화제 역시 다음 계절의 추위 대비책, 기사단 상사를 두고 하는 사적인 농담, 이번 분기 의회가 저지른 잘잘못에 관한 잡담 등으로 바뀌었다.

한창 서민원 의원직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점쳐 보던 알베리크는 문득 아실이 에스티니앙의 팔꿈치를 친밀하게 잡은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둘의 관계며, 아실과 자신의 관계를 떠올렸다. 그제야 너무 격의 없이 떠들었나, 싶었다. 이후로 화제는 눈에 띄게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방문할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됐는지, 에스티니앙이 같이 살면서 속을 썩이지는 않는지…. 그동안 에스티니앙은 부엌 찬장이며 식료품 보관실을 뒤지느라 바빴다.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부엌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을 즈음, 그는 집주인이라도 된 양 차를 내왔다. 사베네어 식으로 끓인 밀크티는 색이 진하고 향이 묘했다. ‘향신료는 챙겨왔고, 찻잎은 미안하지만 좀 빌렸어. 우리 집 찬장에 있던 것도 다 떨어져서.’ 알베리크는 에스티니앙이 찻잎을 찾아낼 만큼 부엌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자 녀석이 주전자에 찻잎을 얼마나 털어 넣었을까, 하는 걱정은 찻잔을 두 번째로 채우고 나서야 떠올랐다.

늦은 티타임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에스티니앙은 마중 나올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애인을 방한구로 단단히 싸맨 뒤에야 스승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집을 나섰다. 손님들이 모퉁이를 돌아나간 뒤에야 알베리크는 에스티니앙이 먼저 나간 이유를 깨달았다. 바람을 막아봤자 고작 몇 분인데도 참 유난스러웠다. 잡혀 사나? 생각하다 그는 문득 웃었다.

알베리크는 불타버린 마을에서 거둔 제자를 늘 걱정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복수심에 잡아먹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뒤에는 녀석이 자기만의 삶을 잘 꾸릴 수 있을까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제자는 잘 해내고 있었다. 순전히 혼자서 이룬 업적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실은 에스티니앙이 만든 낯선 차 맛에 익숙해 보였으니까. 알베리크는 남은 차를 잔에 마저 따랐다. 입에 남은 향신료의 풍미가 오묘하고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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