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불행과 영원한 행복

Duskwood 제이크 드림소설 커미션 / 약 8천 자

장르연성 by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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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님 (https://kre.pe/RnZl)

이블린은 오늘 하루 동안 네 번의 불행을 겪었다.

제이크와 정말 간만에 데이트를 가진 날이었는데.

예고 없이 터진 자회사의 이슈에 내리 야근해야 했던 이블린과 제이크는 데이트는커녕 잠시 만나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그러다 오늘, 이블린은 사태가 해결되고 여유를 되찾아온 기념으로 제이크와 함께 식사할 레스토랑을 예약했었다.

그들은 여기서 첫 번째 불행을 맞이했다.

원래 자주 갔던 레스토랑으로부터 오늘은 재료가 부족해 원만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온 것이다. 제이크는 다소 부실한 구성이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이블린은 오랜만의 데이트를 완벽하게 즐기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이 더 멀고 덜 익숙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단골의 입맛에 맞게 양이나 맛을 조절해 주는 서비스는 없었지만, 입맛에 맞지 않아 음식을 전부 남기거나 많은 양을 다 먹지 못해 깨작거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자동차에서 생겨났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그들은 갑자기 멈춰 서버린 자동차에서 내려야 했다. 이것이 그들이 겪은 두 번째 불행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가지 않았던 길을 달려 주인을 닮은 차가 탈이 나버린 걸까?

이블린은 차에 투자된 돈을 생각하면 이리 퍼져서는 안 된다고 열을 냈다. 그리고 반드시 제조사에 컴플레인을 넣겠다며 제이크의 앞에서 선언했지만, 그런다고 그의 차가 정신을 차릴 일은 없었다.

비교적 다행인 점은 그들의 위치가 집까지 그리 멀지 않았고 날씨가 좋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비서가 새 차를 끌고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집까지 걸어가는 것. 이블린은 둘만의 하루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아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또다시 불행을 가져왔다.

이블린은 자신의 체력이 잦은 야근으로 약해져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면역력으로는 저녁의 쌀쌀함도 춥게 느껴졌고,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재채기하고 덜덜 떨어야 했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블린은 찬 바람을 오래 쐰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기운이 없었다. 그의 피곤함을 알아챈 제이크는 이블린에게 일찍 잠에 들 것을 권했지만, 이블린은 이대로 하루를 끝내는 것이 아쉬워 제이크에게 영화를 보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제이크는 잔잔한 영화를 가져오겠다 했고, 그들은 소파에 편하게 늘어져 함께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리고 이곳에 마지막 불행이 찾아왔다. 제이크가 가져온 것은 전혀 힐링이 되는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잔잔하게 흘러갈 줄 알았던 영화는 중후반에 들어가서 큰 반전을 일으키며 긴박감이 넘치는 액션으로 변했다. 피와 살점이 흩어지고 몇 번이나 폭탄이 터져 굉음이 울렸으며, 벼락이 내리칠 땐 스크린이 번쩍여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이미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버티고 있던 이블린은 하얀빛이 자신을 덮칠 때마다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이블린은 화마의 따가움과 동굴 같은 서늘함을 동시에 느꼈다.

“영화 꺼. 그만 볼래.”

이블린은 눈을 가리고 제이크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블린의 작은 목소리는 앰프로 증폭된 스피커의 진동에 먹혀 연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끄라고!”

제이크는 이블린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고 나서야 황급히 리모컨을 조작했다.

“왜 내 말을 한 번에 못 들어.”

“미안, 미안하다.”

“영화는 왜……!”

이블린은 제이크에게 더 화를 내려다 입술을 씹었다. 정지된 프레임에 갇힌 듯 꽉 눌린 기분이 그의 목소리를 막아버리고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이로울 거라고 속삭였다.

“이런 내용일 줄 몰랐다. 내 불찰이다.”

리모컨을 조작해 방의 불까지 밝힌 제이크는 몸을 숙여 이블린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블린. 무슨 일이지?”

제이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이블린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연인에게서 등을 돌리려 했지만, 그 전에 제이크가 그를 완강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놔.”

“네가 괜찮은지만 확인하겠다.”

“싫어.”

“이블린.”

오늘은 마음에 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예민하던 중에 낯선 레스토랑에 가게 된 것도. 피곤한 몸으로 환절기의 쌀쌀함을 체감해야 했던 것도. 그러다 보게 된 영화마저 자신을 비웃듯이 끔찍했다. 완벽하길 바랐던 하루가 최악의 날이 되었다.

“이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이크는 이블린을 안은 채로 등을 천천히 토닥이고 있었다. 이블린은 저린 손에 힘을 쥐어짜며 그를 밀어냈다. 제이크는 이블린의 손짓에 스스로 물러나면서도 고집스레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힘든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필요 없어. 그냥 졸린 거라고.”

이블린은 여전히 자기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속에서 튀어나와 제이크에게 닿았고, 그는 무엇도 붙잡을 수 없었다.

제이크는 잠시 말을 고르다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리를 안마해 주겠다.”

“집에 안마의자 있어.”

“그렇다면 의자에서 잠들었을 때 침대로 옮겨줄 사람이 필요하겠군.”

이블린은 이런 때에 혼자 있길 원했지만, 제이크는 그런 순간을 알고 집요하게 함께 있으려 했다.

“……바보야. 그냥 여기서 자고 가고 싶은 거라고 말해.”

“자고 가도 되겠나?”

결국 지는 쪽은 이블린이었고, 제이크는 기계와 자신 중 누가 더 좋겠냐 물으며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이블린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제이크가 깨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이블린은 그가 다가와 팔을 쓰다듬을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자신이 아직 꿈을 꾸는지 생각해 봐야 했다.

“이블……린!”

이블린은 제이크가 자신을 한 번 더 부르자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는 제이크가 자신을 바로 옆에서 부른다는 것,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눈꺼풀 너머가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몽사몽이었던 정신이 확 맑아진 이블린은 눈을 뜨고 옆을 보았다.

해가 고개도 내밀지 않은 새카만 밤에, 밤보다 어두운 머리카락을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적신 연인이 자신을 부르며 뒤척이고 있었다. 질끈 감은 눈과 몸의 떨림이 그가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이블린은 그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제이크. 일어나봐.”

제이크는 금방 깨어났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이블린이 제이크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듯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이블린을 발견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이블린?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네가 자고 간다고 했잖아.”

잠에서 갑작스럽게 깨어난 제이크는 아직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블린을 침대에서 끌고 나오며 말했다.

“도망가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11분 47초……아니. 23초.”

“제이크. 왜 그래? 여긴 우리 집이야.”

“신분이 파악될 만한 것만 챙겨서 나와. 여권, 지갑. 사진과 저장장치들은 전부 파기한다.”

“제이크? 제이크?”

이블린은 제이크의 팔을 잡고 끌려가지 않으려 매달렸다. 그때, 두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가 절전 중이던 공기청정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띠리링.

영롱한 알림음을 시작으로 모터의 잔잔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컴퓨터가 켜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고, 그곳을 향해 제이크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제이크가 중얼거렸다. 안돼.

“제이크!”

이블린은 벌써 세 번째로 제이크를 불렀다. 하지만 제이크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 이블린을 붙잡고 외쳤다.

“젠장, 차단기. 전기를 내려야 한다. 당장!”

제이크는 당장이라도 침실을 뛰쳐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차단기를 찾아 내릴 것 같았다. 이블린은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앞을 가로막고 껴안았다.

“꿈이야.”

이블린은 조금의 틈도 없이 붙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이것이 자신이 떠는 탓에 흔들리는 줄로만 알았지만, 그는 제이크도 떨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너무 낯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블린은 본능적으로 제이크가 오늘 밤 자기 전 자신에게 해주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힘이 다 풀려가는 한 손을 들어 제이크의 등을 미끄러뜨리듯이 토닥였다. 그리고 방망이질하는 심장에 대고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여긴 안전해.”

제이크는 이블린의 미약한 손짓에도 정신을 차린 듯 그를 마주 안았다. 자신의 요란한 잠꼬대가 연인을 깨우고 놀라게 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블린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이블린도 그제야 어깨에 힘을 빼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잠을 깨워버렸군.”

“지금 그게 문제야?”

“그리고……놀라게 했다.”

“바보야, 그 전에.”

“…영화는 정말 나도 몰랐다. 하지만 네 말을…….”

“그게 아니잖아!”

이블린은 제이크가 자신을 끌고 침대를 나섰던 것처럼 반대로 침대로 이끌었다. 제이크는 이블린이 가리키는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무슨 꿈을 꾼 거야?”

“별일 아니다.”

“날 속이려 하지 마. 보자마자 도망가야 한다고 했잖아.”

“…….”

이블린은 침대 위로 올라와 제이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이크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이불을 주물렀다 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해?”

“네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하고 있다.”

“그냥 지금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을 해봐.”

“이 집의 차단기가 어디에 있었지?”

“……처음부터 얘기해야겠다.”

“응.”

제이크는 다시 한참 말없이 이블린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목숨의 위협을 여러 번 느껴봤다. 그리고 그중엔 내가 자초한 일도 있었지.”

“실수했다는 이야기야?”

“내가 상황을 일부러 의도했다는 말이다. 성공하면 더 큰 수확을 불러올 수 있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제이크의 말을 들은 이블린은 그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내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제이크는 이블린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시선을 피해 고개를 더 숙이며 몸을 웅크렸다. 그는 반성하고 있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이블린의 손을 찾아 다시 팔을 뻗었지만, 이블린은 제이크에게 넘어가지 않고 말했다.

“목숨으로 도박을 했다는 이야기네.”

“그래. 하지만 이젠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

“당연하지. 그럴 일이 있으면 안 되지.”

“응.”

이블린은 제이크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어야 계속 이야기를 할 것처럼 굴어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손을 툭 내려놓았다. 제이크는 다시 이블린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엄지로 쓰다듬으며 속을 털어놓았다.

“늘 승산은 있었다. 릴리에 의해 위치가 발각되었을 때도, 출구가 봉쇄된 광산에서 FBI를 피해 도주해야 했을 때도. 난 그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으니 자신이 있었어.”

“…….”

“그런데 처음이었다. 그렇게 공포를 느낀 적은.”

제이크는 처음 느꼈다. 잃는 것의 두려움을. 머릿속에서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되는 공포를.

“그렇게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너였다. 이블린.”

이 손을 잡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고작 텍스트로밖에 전송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이상 그를 궁금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블린과 관련된 그 모든 것을 잃는 게 원통하고 끔찍하게 두려웠다.

“나는 내 시간과 미래를 그저 자원으로 여겨왔다. 그것을 모조리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는 대가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목숨을 걸었지. 하지만 널 알아가면서 내겐 너와 함께할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이 생겨났다. 그 가능성은 전부 내 안에서 기대로 자리 잡았고.”

그리고 이블린과 멀어졌던 순간, 그 기대는 공포가 되었다.

그는 잃는 것의 두려움을 깨달았고, 이블린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제이크는 이블린을 다시 얻을 때까지 그를 잃을 모든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도망쳤다. 그의 목숨은 이블린 다음으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잠은 4시간 간격으로 30분씩. 경계 센서를 제외한 모든 전기를 차단해 신호를 단절시킨 상태로 취침. 기상 후엔 추격자가 없는지 정찰. 만약 추격자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15분 내로 모든 기록을 말소하고 도주할 것.”

제이크가 담담히 읊는 것은 그리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다. 하루 동안 3시간을 잘게 쪼개서 자며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삶. 제이크는 이블린을 만나기 전까지의 고통을 네 개의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것이 어떤 기분일지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어 이블린은 말없이 제이크의 품에 안겨들어 갔다.

“내 개인 집에서는 아직 차단기를 내리고 자고 있다. 그래야 잠이 오더군. 기계 소리에 쉽게 깨기도 하고.”

제이크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린 이블린의 뒤통수를 빗어 내리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꾼 꿈에선……그날의 일을 다시 겪었다.”

“그날?”

“광산.”

이블린은 제이크가 언급한 것에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영화에서 봤던 장면의 진동과 눈부심이 다시 살아나 그 속으로 다시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광산처럼 식어버리기 전에 제이크가 그의 등을 쓰다듬어 이블린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FBI를 따돌리기 위해선 나를 잠시라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게 추적을 따돌리기에 가장 유리한 방법이었으니.”

그들로부터 시간을 벌기 위해선 폭발의 조짐을 알고도 피하지 말아야 했다. 폭발의 영향을 받는 반경 내에 있되 목숨은 건질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몸을 바짝 숨기며, 그는 이블린을 다시 만날 기대와 그 기대를 저버리게 될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제이크는 그 기분을 털어내려는 듯 이블린의 어깨에 이마를 마구 비볐다.

“오늘 밤의 일은 그저 잠시 지나갈 악몽이었을 뿐이다. 난 너를 이렇게 안고 있으니, 이젠 괜찮아. 그 증거로, 나는 이 집의 차단기 위치를 모른다.”

“…….”

“하지만 정전을 대비해서 알아둘 필요는 있겠군. 위치를 알아도 깜깜한 어둠에서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말 돌리지 마.”

“들켰나?”

이블린은 고개를 들어 제이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의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이 시야에 잡히며,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낸 것과 다르게 어렵게 속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련해?”

“조금.”

제이크는 이블린의 볼에 떨어진 땀을 파자마 소매로 닦아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편한 이야기를 참고 들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저 감사를 받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끝내선 안 됐다. 오늘의 모든 불행을 끝내고 완벽한 밤을 맞이하려면, ‘이젠 네가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려면, 그동안의 아픔을 악몽으로 여기려면, 이블린은 제이크처럼 그날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가 보여준 것을 모두 본 이블린은 오늘 깨달은 것을 그저 하룻밤의 악몽으로 여길 수 없었다. 그래서 이블린은 목소리를 내었다. 정지된 프레임을 억지로 재생시켰다.

“난……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어.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어. 그러려면 너를 마지막에 봤던 순간을 떠올리고 그 일을 생각하게 될 테니까.”

이번엔 이블린이 제이크의 손을 주물렀다. 그러니 그를 꽉 잡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 말할 용기가 생겨났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블린은 제이크의 손가락 끝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날……그 사고를 생각하게 되면 여기부터 안 움직여. 눈도 깜빡이지 못할 만큼 꽉 붙잡히는 것 같아. 사진 속에 갇힌 것처럼.”

“…….”

“그리고 사진을 삭제해 버리는 거야. 그럼 거기 갇혀있던 나는 없었던 셈이 되는 거지.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어.”

하지만 그런다고 정말 없어지는 것은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제이크가 견뎌낸 시간까지 없었던 일로 삭제할 수는 없었다.

“너에 대한 것도 지우고 살았어. 나도 널 잃는 것이 너무…두려웠나 봐. 그 가능성을 짐작하는 것조차 끔찍해서 세상에서 없애버렸나 봐. 그리고 제일 아프지 않은 방법을 찾는 거지. ……네가 날 버렸다든가, 원래 사랑하지 않았다든가.”

“이브…….”

“좀 기다려봐,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어.”

제이크는 드문드문 말끝을 늘이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는 이블린을 보며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그래도 이블린은 끝까지 말을 이어나갔다.

“이젠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 그리고 날 얼마나 찾으려고 했는지도 알아. 그러니까 나는……괜찮아질 거야.”

“응. 우린 괜찮아질 거다.”

이번엔 제이크가 이블린의 품에 파고들듯이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베개로 밀어 쓰러트리며 나란히 눕고 말했다.

졸리군. 응.

새벽의 밤보다 깊은 대화를 나눴던 연인은 다시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이따금 울리는 청정기의 모터음도, 계절이 변화하는 쌀쌀한 추위도 이젠 그들의 잠을 깨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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