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요, 주인님!
결제는 소장용/ 메이드 알바하다 고죠에게 걸렸다!
전편!
01.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맨 허벅지가 발갛게 익을 정도로 팽팽 돌아가는 노트북을 본다. 문서 몇 개 동시에 돌린다고 과열되는 골동품을 주다니. 발가락으로 보고서를 쓰는 게 더 빠르겠다.
그 애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양팔 다리를 쫙 핀다. 이지치가 사준다는 도쿄 명물 오므라이스에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무려 한 시간 반 정도를 농땡이 피운 대가가 이거다. 오므라이스는 너무 맛있었는데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
그 애는 자신의 방에서 지갑을 꺼내서 나온다. 커다란 티셔츠 차림에 반바지 차림은 아무리 봄이라지만 추울 게 분명해서 부들부들한 카디건을 꺼내 입는다. 고죠의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편의점이 있으니까 잠도 깰 겸 걸어갔다 오면 될 것 같다.
"어디 가?"
고죠가 방에서 나오며 묻는다. 그 애는 현관에서 신발 끈을 묶다 말고 고개를 든다. 고죠가 벽에 어깨를 기대 서 있다. 옆머리가 살짝 뜬 걸 보니 쪽잠을 잔 모양이다.
"편의점 가려고요. 뭐 사다 드릴까요?"
물론 고죠 사토루의 돈으로. 그 애는 고죠가 생활비에 쓰라고 준 블랙카드-24시간 붙어있는 비서나 다름없는 직원에게 이 정도 복지는 괜찮잖아.-를 주머니에서 꺼내 든다.
"그러고 갈 거야?"
"네? 네."
고죠가 일부러 보라는 듯이 그 애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성질낼 준비를 하는 건데.
"유코. 험한 도쿄 바닥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어?"
잘요.
"같이 가."
고죠가 입을 벌리며 하품을 내뱉는다. 고죠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다. 손바닥도 솥뚜껑만한데 얼굴도 작아서 입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가린다.
고죠가 슬리퍼에 양발을 집어넣고 홈웨어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구겨 넣는다. 그 애는 현관문을 연다.
-
"이걸 다 사요?"
"응."
이건 장을 보는 거나 다름 없는데?
그 애는 작은 편의점 바구니에 꽉 찬 것도 모자라 고죠가 품에 안은 과자를 본다. 자신도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고죠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우르르, 고죠가 카운터에 과자 상자를 내려놓는다. 그 애는 편의점 직원의 눈을 피한다.
"아, 맞다."
과자가 가득 든 비닐봉지가 바닥에 하나둘 놓이고 계산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고죠가 발걸음을 돌려 진열대로 걸어갔다 와서 콘돔 상자를 내려놓는다.
음. 괜히 불편하네.
그 애는 시선을 돌린다. 물론 고죠 사토루는 성인이고 피임 도구야 그 애도 언제든지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게 여기저기 넣어서 가지고 다닌다. 그냥, 고죠의 사생활 따위 알고 싶지 않다.
"어린애도 아니고 왜 그렇게 민망해해?"
고죠가 콘돔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삐딱하게 말한다. 고죠는 그 애가 양손에 든 비닐봉지를 모조리 모아 한 손에 쥐고 편의점을 나간다.
이참에 규칙을 정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보다 고죠의 집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 그 애는 종종걸음으로 고죠의 곁으로 걸어간다. 그 애가 옆에 서자 고죠가 그 애의 보폭에 맞춰 걷는다.
"고죠 씨. 이참에 규칙을 정하면 어때요? 동거인이지만 너무 자세한 사생활은 알고 싶지 않거든요."
그 애가 봉투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껍질을 까 고죠의 입에 물린다. 오늘따라 고죠의 기분이 저조해 보여 지레 겁부터 먹었다. 단 걸 입에 물리면 그나마 좀 평온해지니 긴급 처방을 내렸다.
"동거인? 너무 삭막하다, 유코."
"그럼 뭐라 그래요. 사용인?"
고죠가 눈을 한 바퀴 돌리며 시선을 천장으로 올렸다 내린다. 태도가 상당히 불량한데. 오늘 규칙 협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급한 일도 아닌데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그 애는 고죠와 같은 사탕을 까 입에 넣고 입을 다문다.
너무 자세한 사생활? 그러니까 내 성생활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그 애는 서로 편하자는 얘기를 하는데 고죠는 어쩐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 그 애가 내뱉는 말마다 얄밉게 이를 세워 피부를 긁는 느낌.
"너무 무심한 거 아니야, 유코? 네 주인님이 다른 사람들과 놀아나도 상관 없다는 말이야?"
"그야, 주인님의 사생활이니까요. 유코는 주인님의 사생활에 관여할 권한이 없는 걸요."
"권한을 주면?"
고죠의 말에 그 애는 고죠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렇게 된다면
"계약 종료."
"......."
"겠죠?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이대로'의 유코니까."
계약 종료다. 그건 유사 연애가 아니라 정말로 관계를 엮자는 말이니까. 농담으로 주고받기에는 다소 섬뜩한 내용인데. 고죠 사토루야 흥밋거리 하나를 잃는 거지만 이쪽은 주거 문제가 달려있다. 그 애는 이왕이면 이 기회를 잘 활용해 최대한 안정적으로 그의 집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어쩐지 오늘 유코 얄밉네-."
휙. 고죠가 다시 보폭을 넓혀 걸어간다. 그 애는 입을 벌리고 고죠의 뒷모습을 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를 뒤따라 걸어간다.
02.
임무가 끝나자마자 그 애는 고죠보다 앞서 당당하게 걸어가 놓고 차를 세워둔 곳을 찾지 못해 헤맨다. 고죠는 손을 뻗어 그 애의 손을 마주 잡고 부드럽게 잡아 이끈다.
"유코, 이쪽이야."
"아."
그 애가 덜떨어진 얼굴로 얌전히 고죠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고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뻔뻔한 표정인 그 애를 보고 피식 웃는다.
그 애는 혼자 야무진 척하며 돌아다니면서 가만 보면 엉성한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다. 지금처럼 툭하면 길도 못 찾고.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데 그 애는 길치다. 이 꼬락서니를 보니 현장 사전 조사는 절대 보내면 안 되겠다. 어디서 길 잃고 질질 짜고 있을 테니까.
"유코, 이 근처에 사진 예쁘게 나오는 카페가 있대."
고죠가 한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엄지를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며 말한다. 그 애는 여전히 고죠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좌우로 힘주어 꺾는다. 유코가 등장할 때가 된 것인가. 그 애는 보조개가 파이도록 입꼬리에 힘을 줬다가 입 모양을 바꾸며 턱 근육을 푼다.
"...너 준비운동 하는 거야?"
"네? 네. 유코짱 사진 찍으시려는 거 아니에요?"
진짜 골때린다. 고죠가 중얼거린다. 그 애는 고죠의 말을 흘려듣는다. 어째 날이 갈 수록 유코 흉내에 정성을 들이는 기분이다. 나 진짜 왜 이렇게까지 하지? 일부러 SNS에서 예쁜 포즈를 찾아 연습할 필요도, 자연스럽게 웃기 위해 얼굴 근육을 풀 필요도 없는데.
"여기 풍경이 좋네. 유코 사진 예쁘게 나오겠다."
고죠가 핸드폰을 보며 웃는다. 그 애는 힐끔 고죠의 얼굴을 봤다가 시선을 정면으로 옮긴다. 아, 그래. 저 표정 때문인가 보다. 정말로 즐거워하는 저 얼굴 때문에. 그 애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숨을 가볍게 내뱉는다.
03.
"유코, 케이크 접시 살짝 왼쪽으로. 응, 됐어."
굳이 다음 임무 시간을 미뤄가면서 찾아온 카페는 산꼭대기에 있어 정말 풍경이 아름답다. 그 애는 멍하니 풍경을 내려보다 고죠의 요구에 재빠르게 케이크 접시를 옮긴다.
"유코, 여기 봐."
"오늘은 셀카 모드예요?"
"응."
고죠는 유코의 단독 사진만 찍을 뿐 유코와 함께 찍는 사진을 포함해서 본인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별일이네. 그 애는 화면 앵글 속 고죠의 얼굴 옆에 자신이 나오도록 자세를 바꾼다.
"잘 나왔다."
고죠가 사진을 확인한 후 만족한 듯 웃는다. 후루룩, 그 애는 빨대로 커피를 마신다.
"유코는 역시 보조개가 예쁘네. 얼굴이 사과 모양이라 그런가, 사랑스러워."
"...감사해요!"
그 애는 고죠의 말에 오랜만에 당황하며 말한다. 얼굴에 열이 끼쳐오른다. 그 애는 커피 속 얼음을 꺼내 입에 문다.
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그 애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본다. 갑자기 당황한 탓인지 얼굴까지 붉어진 게 마음에 안 든다. 왜 홀로 고죠 사토루에게 휘둘리는 것 같을까. 왜 넌 당황하는 법이 없어?
"몇 장 더 찍자."
화면 속 고죠가 부드럽게 웃는다. 그 애는 화면으로 고죠를 흘겨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상체를 숙인다. 고죠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붙이고 고개를 돌려 볼에 짧게 입술을 맞댄다.
찰칵, 셔터음이 들린다.
고죠가 눈을 크게 뜨며 그 애를 돌아본다. 코 앞에서 고죠와 시선을 나누던 그 애가 먼저 상체를 들고 멀어진다. 생각했던 반응보다 더 크게 놀라네. 그 애가 고죠의 눈치를 본다.
"음. 과했어요?"
"...응? 아니야."
고죠가 이내 고개를 돌려 사진을 확인한다. 볼이 발갛게 물든 그 애가 눈을 질끈 감고 고죠의 볼에 입술을 맞대고 있다. 푸학! 고죠는 웃음을 내뱉는다. 용감하게 입을 맞추면서 표정은 잔뜩 긴장했다.
"어설프네-, 유코."
고죠가 사진을 보며 말한다.
04.
고죠는 생화로 가득 찬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서류에 서명하다 말고 고개를 돌린다. 난 여기 있는 꽃들보다 유코가 더 예쁜 것 같은데. 고죠가 볼펜 촉으로 꽃잎을 톡 건드린다.
오늘따라 유코를 지명하는 손님이 없어 그 애는 자잘한 서빙을 보고 있다. 화려한 꽃 속에 파묻힌 유코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님이 원하는 케이크를 열심히 나른다. 고죠는 팔랑이는 그 애의 머리리본을 보다가 그 애의 앞치마 허리의 리본이 풀리기 직전인 걸 본다.
"유코."
팟. 그 애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고죠를 본다. 고죠는 웃음을 참고 그 애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린다.
"부르셨어요?"
"응. 뒤돌아봐."
그 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메뉴판을 가슴에 안고 뒤돌아선다. 고죠는 부드러운 면 리본을 손가락에 감고 단단하게 리본을 묶는다.
"됐다."
"아, 리본 풀렸었구나. 감사해요!"
"오늘따라 한가하네, 유코."
"그러게요."
"그럼 오랜만에 손님 대접 해줘."
고죠의 말에 그 애는 고죠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고죠는 그 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제자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수하고 서명한다.
그 애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고죠를 본다. 자기 일만 할 거면서 왜 잡아둔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좀 쉬고 좋긴 하다만.
손님 대접이라.
그 애는 며칠 전 자신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던 고죠의 얼굴을 떠올린다. 매번 자신이 고죠에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고죠의 그런 얼굴을 보니 질 나쁜 희열에 전율했다.
"주인님."
"응?"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네가-."
고죠가 반사적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나도 네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역시, 주인님 뿐이에요."
"영광이야."
"유코는 주인님이 정말 좋아."
그 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숙여 고죠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인다.
"좋아해요."
뭐?
고죠는 볼펜을 쥐고 멍하니 그 애를 올려본다.
"주인님."
"하."
주인님. 그 애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는다. 고죠는 헛웃음을 내뱉는다. 얘가 날 가지고 노네.
"유코짱!"
"네, 갑니다!"
그 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리본 끈을 팔락이며 사라진다. 고죠는 볼펜을 손등에 올려 손가락 사이로 이리저리 돌리다 피식 웃는다. 고죠는 다시 보고서를 손에 쥔다. 어김없이 메구미와 유지의 보고서를 반반 베껴서 쓴 노바라의 보고서를 반려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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