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식칼을 사용해 평화롭게 경쟁자를 제거하는 법

제이드 리치&쟈밀 바이퍼 드림

“아이렌, 무슨 일 있어?”

 

농구부 활동이 막 끝난 체육관 앞. 밖에서 기다리는 아이렌을 위해 후다닥 씻고 나온 에이스는 제가 나온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상대에게 물었다.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동아리 활동이 끝난 걸 알게 된 아이렌은 눈짓으로 에이스를 반긴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길래.”

“아…….”

 

제 표정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는 아이렌은 가볍게 제 얼굴을 문질렀다.

 

“별일 없어. 그냥, 잠봉뵈르 먹고 싶어서.”

“어?”

“아니, 어제 마지카메를 보는데 누가 잠봉뵈르 사진을 올렸더라고. 근데 너무 맛있어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먹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게 진지하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는 건가.

잠깐이나마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참으로 시답잖은 해답을 들은 에이스가 반사적으로 탄식했다. 아이렌은 그 허무함을 이해한다는 듯 멋쩍게 웃더니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 먹을까 싶어서 여기저기서 레시피를 찾아보고 있었어.”

“사 먹지는 않고?”

“이 근처에는 파는 곳이 없더라고.”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다른 부원들도 하나씩 체육관을 떠나간다. 아이렌과 에이스는 자신들에게 인사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손짓이나 고갯짓을 해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흠, 만들 수 있겠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데…….”

“너 정도면 할 수 있겠지. 그럼, 내일 아침은 이걸로?”

“아니, 재료 쇼핑도 해야 하니까. 당장은 무리겠지. 아직 냉장고에 먹을 게 있기도 하니까.”

“흐음. 그렇구나.”

“어쨌든, 이건 이거고……. 얼른 과제 하러 가자. 듀스랑 그림이 기다리겠다.”

 

아이렌은 제 일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대화를 대충 마무리하고 에이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란히 도서관으로 향하는 두 사람은 함께 해치워야 할 과제로 화제를 돌렸지만, 체육관 앞을 지나가는 귀들이 기억하는 이야기는 1학년들에게만 중요한 과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틀 뒤. 등교가 한창일 이른 아침.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기숙사를 나서려던 아이렌은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파트너의 모습을 보곤 몸을 낮추었다.

 

“그림, 리본이 비뚤어졌잖아.”

“흠? 그렇냣?”

“응. 아무래도 뒤통수엔 눈이 없으니 모를 수도 있지. 가만히 있어 봐.”

 

아예 새로 묶어야 할 정도로 흐트러진 건 아니니, 조금만 손봐줘도 될 거다. 그리 판단한 아이렌은 리본을 여기저기 당겨 모양을 잡았고, 양쪽 리본 끈의 길이까지 맞춘 후 일어났다.

 

“자, 됐다. 가자.”

“으으, 오늘은 첫 수업부터 지겨운 과목인데……. 가기 싫다고…….”

“저런. 대마법사가 되실 분이 수업을 빼먹으려고 하면 쓰시나.”

 

장난스럽게 그림의 투정을 받아준 아이렌은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아무 생각 없이 활짝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후낫!”

 

갑자기 나타난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에 그림이 소리치고, 아이렌은 어깨를 움츠리며 멈춰 선다. 놀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반응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요란법석을 떨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2m에 가까운 그 존재감은, 이미 구면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림 씨. 아이렌 씨.”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에 인사한 제이드는 자연스럽게 아이렌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께에 손을 얹고 심호흡하던 아이렌은 경계를 풀고 물었다.

 

“제이드 선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전해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제게요?”

“예.”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이드는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내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건 작은 가방이었다. 책가방과는 확실하게 다른, 내용물의 모양에 딱 맞춘 작은 가방.

 

“괜찮다면 점심으로 드셔주세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얼떨결에 선물을 받아 든 아이렌은 직접 들어보고 나자 이게 무엇인지 바로 눈치챘다.

이 모양새. 이 무게. 게다가 점심으로 먹으라는 말까지. 이건 분명…….

 

“혹시 이거, 도시락인가요?”

“예. 그림 씨 몫도 넣어두었으니, 같이 드시기를.”

“……이 녀석 몫도 넣으려면 이 정도 도시락통으론 안 될 텐데.”

“그게 무슨 소리냐, 꼬붕!”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아이렌의 중얼거림에 그림이 버럭 소리치자, 제이드는 흥미롭다는 듯 소리 죽여 웃었다.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제법 묵직한 도시락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아이렌은 습관적으로 겸양의 말을 내뱉으려다가, 제 이런 태도를 여러 번 지적받은 점을 떠올리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먹을 걸 거절하는 건 너무 정 없지 않나. 이걸 만들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을 텐데.

도시락 준비가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지 잘 아는 아이렌은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배. 잘 먹을게요.”

“특별히 이 몸도 먹어주겠다고, 제이드! 그런데 뭘 만들었냣?”

“그건 비밀입니다. 나중에 드실 때 확인 해 보세요. 자, 교실로 갈까요?”

 

그림에게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만 보고 있는 제이드가 신사답게 손을 내민다.

아이렌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그의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몇 시간 뒤, 점심시간.

도시락이 생긴 김에 소풍 기분을 내고자 그림과 단둘이 중원에 자리 잡은 아이렌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시락통을 열었다.

 

“앗.”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의 취향을 생각해보면, 산에서 발견한 식물들로 만든 음식이거나 버섯 요리일지도 모른다.

딱 그 정도의 추측만 하며 내용물을 확인한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예상과 달리 도시락통에 담겨있는 건, 어디서 많이 본 샌드위치였다.

옆에서 침을 흘리며 배를 채우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림은 도시락의 정체를 확인하곤 귀를 쫑긋거렸다.

 

“이건, 샌드위치?”

“잠봉뵈르다!”

“잠……, 뭐?”

 

‘빵 사이에 재료를 끼운 건 다 샌드위치지, 잠봉뵈르는 또 뭐냐.’ 그림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렌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귀신같이 제가 먹고 싶다고 생각한 걸 만들어 온 제이드가 놀랍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아신 거지?’

 

제가 종일 레시피를 찾아보던 걸 우연히 본 건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잠봉뵈르 먹고 싶다!’라고 외치기라도 했던가?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제이드라면 절대 우연히 먹고 싶은 걸 맞춘 게 아니니라 생각하는 아이렌은, 대체 상대가 어떻게 정보를 얻은 걸지 궁금해서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 사이, 냉큼 제 몫의 빵을 가져간 그림은 망설이지 않고 잠봉뵈르를 베어 물었다.

 

“음! 이거 맛있다고! 빵이 바삭바삭해서 좋은데!”

“제이드 선배는 솜씨가 좋으니까, 당연히 맛있겠지.”

 

일단 지금은 추리보다는 식사할 시간이다. 아이렌은 위장이 블랙홀이나 다름없는 제 마수 파트너가 제 점심까지 먹어 치우기 전에 잠봉뵈르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물우물. 묵묵히 몇 입 베어 물며 입안에 퍼지는 촉감과 식감을 음미하던 그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이거, 모스트로 라운지에서 팔아도 되겠는데.’

 

농담이 아니라 돈 주고 팔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맛있다. 만약 마스터 셰프 심사에 이 잠봉뵈르가 나왔다면, 자신은 10점짜리 점수판을 혼자서 세 개 들었을 거다.

제가 먹고 싶어서 환장했던 게 입에 들어오니 금방 입꼬리가 올라간 아이렌은 조용히 식사 시간을 즐겼다. 그러나 먼저 식사를 시작한 그림은 벌써 제 몫을 먹어 치운 후, 간절한 눈으로 아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꼬붕, 너 그거 다 먹을 거냣?”

“왜? 더 먹고 싶어?”

“겨우 이거 먹어선 배가 안 찬다고!”

“그래? 이걸 어쩌나. 나도 이 정도는 먹어야 배부른데.”

 

사실 사 온 거였다면 조금 나눠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제이드가 만들어 준 게 아닌가. 이 귀한 걸 덥석 나눠 주기는 좀 아깝지.

하지만 아이렌은 좋게 부탁하면 잘 들어준다는 걸 아는 그림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라댔다.

 

“조금만 나눠주면 안 되냣?”

“그냥 나중에 식당 가서 뭐라도 사 먹어.”

“으으, 치사하다고!”

“치사해? 진짜 치사한 게 뭔지 보여줄까? 제이드 선배에게 네가 내 몫까지 뺏어 먹었다고 이르는 건 어떨까?”

 

‘아. 이대로라면 본전도 못 뽑는다.’ 그걸 직감한 그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기회를 노리는 그림은 침만 꿀꺽 삼키며 도시락통에 있는 남은 잠봉뵈르 반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너, 이미 점심 먹고 있었냐?”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두 사람에게 다가온 것은 종이봉투를 든 쟈밀이었다.

입 안의 내용물을 꼭꼭 씹어 삼킨 아이렌은 가볍게 입가를 훔치고 고개를 꾸벅였다.

 

“쟈밀 선배, 안녕하세요.”

“…….”

“……선배?”

 

왜 불러놓고 말이 없지.

아이렌은 제 점심을 빤히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에 한 번 더 쟈밀을 불러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아이렌의 부름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는 고갯짓으로 잠봉뵈르를 가리켰다.

 

“네가 만든 거야?”

“이거요? 아뇨, 제이드 선배가.”

“아.”

 

그 한마디에,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던 무표정이 확 구겨진다.

명확한 표정 변화와 들고 온 종이봉투로 상황을 추리해 낸 아이렌은 조심스레 상대를 떠보았다.

 

“혹시…….”

“……하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런가. 한숨 쉬는 쟈밀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는 아이렌은 얌전히 종이봉투를 받아들 뿐이었다. 민첩한 하루가 되지 못한 쟈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투로 말했다.

 

“일단 너 주려고 만든 거니 먹어. 들어갈 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있어요. 저, 그렇게 소식가가 아니라고요.”

“억지로 먹지는 말고.”

“제 한계는 그렇게 작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한창일 나이의 남자애들만큼 먹진 못해도 어디 가서 입 짧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자신이다. 아이렌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하곤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건 반으로 자른 잠봉뵈르 두 조각. 누가 보아도, 2인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이거 먹고 싶어 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그저께 에이스랑 대화하는 걸 들었지.”

“아하.”

 

그럼 제이드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이드는 농구부가 아니지만, 그의 쌍둥이인 플로이드가 농구부니까 말이다. 만약 플로이드가 듣고 전해준 거라면, 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먹고 있던 잠봉뵈르를 입에 넣어 마무리한 아이렌은 손도 안 댄 도시락통 속 잠봉뵈르 한 조각과 봉투 속 잠봉뵈르를 번갈아 보고 고민에 빠졌다. 자신 있게 외쳐놓고 이런 생각을 하긴 좀 그렇지만, 이걸 다 먹으면 저녁은 굶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그 고민은 옆에 앉아있는 파트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 걸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림이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꼬붕. 그거 먹을 거면 도시락통에 있는 건 나 주면 안되냣? 아니면, 쟈밀이 준 걸 내게…….”

“너, 먹을 거 앞에선 진짜 끈질기구나.”

 

하지만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아이렌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도시락통을 슬쩍 그림 앞으로 내밀었다.

 

“자.”

“야호!”

 

원하는 걸 얻은 그림은 금방 신이 나서 양보받은 잠봉뵈르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어찌어찌 제 위장의 여유와 쟈밀의 선물을 지켜낸 아이렌은 쟈밀이 만든 잠봉뵈르를 먹어보았다.

 

“어때?”

 

상대의 반응이 궁금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쟈밀이 긴장한 마음을 감추고 묻는다.

바게트 안쪽에 올리브유를 발라 바삭하다기보다는 부드러운 빵의 식감과 고소한 풍미에 표정이 확 밝아진 아이렌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저 스카라비아로 편입해도 되나요?”

“그 정도냐.”

“그 정도예요. 맛있다…….”

“……입에 맞으면 다행이고.”

 

대답은 담백하지만, 표정에서 뿌듯해하는 게 선명하게 티가 난다. 차마 제이드가 만든 것과 대놓고 비교해 달라는 말은 할 수 없는 쟈밀이었지만, 오물오물 잘 먹는 상대를 보고 있으면 굳이 묻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배고파하는 그림에게 제걸 나눠주는 대신 제이드 걸 나눠주지 않았나. 쟈밀은 그걸로 충분했다.

 

“꼬붕, 나도 한 입 달라고!”

“너 그거 벌써 다 먹었어?”

“헹! 이 몸의 배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이건 안 돼. 넌 한 개 하고 반이나 더 먹었잖아? 나도 먹고살자.”

“으으!”

 

게다가 제 건 그림에게 나눠주지도 않았다. 사실, 딱히 나눠주어도 상관없지만 등교하기 전 애써 시간 내어 만든 음식이 아이렌의 입에만 들어간 건 분명 의미가 컸다.

 

“또 먹고 싶은 건 없냐?”

 

저렇게 맛있어하는 걸 보자니 뭐라도 더 만들어주고 싶다. 다른 사람이 제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도 성취감을 느끼긴 했지만, 아이렌이 좋아하는 걸 그 이상의 보람이 느껴진다고 할까.

즉. 어디까지나 저 좋자고 물은 쟈밀이었지만, 아이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저, 너무 얻어먹기만 하는 거 아닌가요?”

“겨우 오늘 하나 받아먹은 걸로?”

“이렇게 맛있는 잠봉뵈르를 ‘겨우’라고 표현할 수는 없죠.”

 

말투는 장난스럽지만, 저 말은 진심이었다.

빈 봉투를 버리기 쉽게 곱게 접은 아이렌은 도시락통을 챙겨 일어났다.

 

“더 챙겨주시지 않아도 돼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다음에 뭔가 만들어 드려야겠네요.”

“……뭐, 알았어.”

 

뭔가 보답받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다. 그렇지만 굳이 챙겨주겠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않나.

쟈밀은 제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는 아이렌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아, 목마르다. 뭔가 마시러 가자.”

“좋다고! 이 몸은 아이스크림으로!”

“그건 마시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생각 없이 흘린 한 마디는, 곧바로 쟈밀의 다음 목표를 만들어주었다.

─정확하게는, 쟈밀만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 맛있는 카페오레 마시고 싶다. 기성품은 별로인데.”

 

 


 

 

그날 저녁. 해가 지고, 모두가 저녁 식사를 마쳤을 즈음.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뒤처리까지 마친 후. 보온병 가득 직접 끓인 카페오레를 담아 온 쟈밀은 고물 기숙사 정문 앞에서 껄끄러운 얼굴과 마주치고 말았다.

 

“이런.”

“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두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발견하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서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하고 있긴 했지만,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오늘은 라운지 일이 없나?”

“그건 쟈밀 씨가 신경 써 주실 일은 아닌 거 같군요.”

 

‘차라리 욕을 해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날이 선 대답이다. 하지만 쟈밀은 저 말 하나만으로 불쾌해 하진 않았다. 상대가 제이드 리치라면, 솔직히 좋게좋게 말하는 쪽이 더 기분 나빴을 테니까.

온화한 척 웃고 있어도 혀에는 가시가 돋쳐 있는 꼴이란. 하여간 옥타비넬 녀석들은 다 속내가 새까매서 기분 나쁘지만, 저 녀석이 그중에서 제일 시꺼멓다.

못마땅한 마음을 가득 담아 상대를 흘겨보던 쟈밀은 제이드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우유와 드립백이 든 것을 발견하고 헛웃음이 터졌다.

아이렌이 여기저기 먹고 싶은 걸 떠들고 다녔다면 혹시 또 모르지만, 제가 아는 그는 그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다. 아마 카페오레 이야기도 점심시간에 목을 축인 후에는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 그런데도 제이드가 저런 걸 가지고 왔다는 건, 한 가지 경우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 요리를 먹은 아이렌의 반응이 궁금해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었던 쟈밀은 쉽게 상황을 추리해낸 후,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리고 말았다.

 

“덩치도 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숨어서 듣나 모르겠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갑자기 사람을 모함하는 짓은 그만둬 주시지 않겠습니까?”

“모함은 무슨.”

 

냉소적으로 대꾸하는 쟈밀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드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반격했다.

 

“그러는 쟈밀 씨도 참으로 한가한가 보군요. 아니면 카림 씨 말고 다른 사람의 종자가 되기로 하신 겁니까?”

“나는 유능해서 일이 많아도 금방 해결하는 덕분에, 여유 시간이 많거든.”

“자기 입으로 유능하다고 말하다니. 재미있군요.”

“딱히 틀린 말도 아닌데 뭐가 문제지?”

 

두 사람 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초점이 없다. 아마 여기가 보는 눈이 나타날 가능성이 전혀 없을 공간이었다면, 아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가져온 걸 내려놓고 매지컬 펜을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기는 학교 안. 심지어 고물 기숙사 앞이다. 혹시라도 아이렌이 자신들이 싸우는 걸 보면, 곤란해할 게 뻔했다. 대단하신 박애주의자인 이 학교의 홍일점은 제가 아끼는 이들끼리 싸우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그 갈등의 원인이 자신이라면 더 곤란해하겠지.

그래서 두 사람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좋은 말로 상대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냥 지금 돌아가는 게 어때?”

“무슨 소립니까?”

“내 커피랑 비교 당하느니, 그냥 전해주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이런. 모스트로 라운지에서 항상 아이렌 씨가 마실 음료를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하시는 말인지 궁금하군요.”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한 마디씩 얹어주고 있자니, 어째 점점 손이 근질거린다.

‘그냥 몰래 처리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여러모로 뒤처리에는 도가 튼 두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순간.

 

“저기, 여기서 뭐 하세요?”

 

기숙사 쪽이 아닌 거리 쪽에서 다가와 말을 거는 건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였다.

제이드는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 아이렌에게 인사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아이렌 씨,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산책요. 그래서, 두 분은 뭐 하고 계시는 건지…….”

 

그걸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제이드도, 쟈밀도. 아니, 애초에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아이렌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어쩌다가 여기서 싸우고 있냐’라는 의미로 물은 걸 텐데.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하는 선배들을 찬찬히 번갈아 본 아이렌은 아주 작은 소리로 한숨 쉬더니, 이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어 보였다.

 

“일단 들어갈까요?”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렌은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단 모른 체하긴 했어도, 다가오며 대화를 전부 들은 이상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그가 바보인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생기면 고스트들에게 살려달라고 해야지. 아니, 이미 죽은 자들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니. 좀 웃기는데.’

 

애초에 순하디순한 제 기숙사 고스트들이 이 무서운 양반들을 이길 수 있을까.

걱정은 되지만 냅다 둘 다 쫓아낼 수 없는 아이렌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 비어있는 제 위장에 감사하며 기숙사 현관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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