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소중하게 여겨줘

빌 셴하이트 드림

* 드림 포인트컬러 합작 참여작.

좀 더 예쁘게 편집된 버젼은 합작 홈(https://qorgk06073.wixsite.com/pointcolo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깜빡깜빡. 빌은 자수정 색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눈앞에 있는 후배의 처참한 몰골을 응시했다.

자신은 그저 내일 있을 촬영에 대해 간단한 안내도 할 겸 아이렌의 얼굴도 볼 겸 고물 기숙사에 온 건데. 어째서 이런 끔찍한 꼴을 보게 된 걸까. 마음의 준비 없이 시각적 자극이 들이닥치다니, 이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떨리는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황당함. 당황스러움. 분노. 허망함. 그리고 기막힘까지.

아이렌은 제 머리카락에 고정된 빌의 시선에 헛웃음만 짓다가, 바닥만 바라보며 땋아 내린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평소의 새까만 빛을 잃은 그의 머리카락은 밝은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정확하게는 분홍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이 얼룩덜룩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지. 마치 두 가지 색의 물감을 섞다 말고 방치한 듯, 뒤죽박죽으로 말이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전부 설명하도록 해.”

“예? 그, 정말 긴 이야기인데요?”

“그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해.”

 

이렇게나 완강하게 나오다니. 제 몰골이 그렇게 보기 싫은 걸까.

하지만 이해한다. 빌은 아름다움을 가꾸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제 주변 사람……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건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건 어찌 보면 독선적인 친절로 보일지 몰라도, 아이렌은 알고 있었다. 정말 관심이 없는 상대면 잔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아끼는 이가 절벽으로 걸어가는 걸 가만두지 못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니, 어찌 저 완강함을 원망하겠나. 조금 어깨가 움츠러들긴 해도, 아이렌은 그의 관심 표현이 싫은 게 아니었다.

 

“음, 그러니까 말이죠.”

 

잠깐 뜸을 들이던 아이렌은, 조금 전 있었던 사건을 설명해주었다.

방과 후. 오늘은 동아리 활동이 없어 곧장 기숙사로 돌아온 아이렌은 조금 쉬었다가 미뤄둔 기숙사 청소를 하기로 하고 게스트 룸에서 그림과 함께 간식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 뒤. 갑자기 플로이드가 찾아와서는 ‘재미있는 마법약을 샀다’라며 함께 먹어보지 않겠냐고 권해왔고, 그것이 이 얼룩덜룩한 머리카락을 만들어 내고 말았지. 말해 무엇하랴. 그 재미있는 마법약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일회용 헤어 염색약이던 것이다.

흰색과 붉은색. 두 종류의 마법약을 사 온 플로이드는 각각 하나씩 먹어보자고 권했지만, 이내 약을 마시려던 순간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저기, 이 두 개. 섞어 마시면 어떻게 될까? 두 가지 색이 전부 나오려나? 아니면 분홍색으로 염색될까?’

무모한 호기심이 샘솟은 둘은 그대로 서로의 약을 반반씩 섞어 들이마셨고. 그 결과, 이런 최악의 결과물이 나오고 말았다.

 

“대체 넌 왜 이렇게 겁이 없는 거니?”

 

끝까지 꾹 참고 이야기를 빌은 기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선명한 질색에 더 머쓱해진 아이렌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뺄 뿐이었다.

 

“왜,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

“화낸 적 없어. 답답하니까 묻는 것뿐이야.”

“…….”

 

아니, 누가 봐도 노여워 보이는데.

하지만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 지금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니까. 사적인 대화서 쉽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싸움을 부추길 뿐이다. 현명한 대화법을 아는 아이렌은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 얌전히 묻는 말에 답했다.

 

“먹고 죽는 약도 아니니까,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요.”

“……하아.”

 

결국은 호기심이 독이 된 것인가. 참으로 황당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렌다워서 할 말이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에 고함을 쳐도 물은 도로 담기지 않는다. 현명한 빌은 쏟아내려는 말을 도로 삼킨 후, 엉망이 된 상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예쁘게라도 염색되었으면 모르겠는데, 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그렇게 흉한가요? 나름대로 느낌 있지 않나요? 그, 야수파 그림처럼.”

 

그 와중 비유는 왜 저렇게 청산유수인가. 태평하고도 아름다운 비유에 이마를 치고 싶어진 그는 침착하게 마법약에 대해 조사하였다.

 

“지속 시간이 어느 정도라고?”

“3시간이었던가? 생각보다 짧더라고요.”

“몇 시간 남았니?”

“음……, 1시간 40분 정도네요.”

 

스마트폰으로 슬쩍 시간을 확인한 아이렌은 꽤 깔끔한 대답을 내놓았다. 보아하니, 당사자도 이 모습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바보짓을 그렇게 후회하는 건 아닌지, 아이렌은 상대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은데도 태연하게 결과물의 감상평을 내놓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반은 빨강, 반은 흰색으로 염색되었으면 했는데 말이죠. 크루웰 선생님처럼 말이에요. 아니면 빌 선배처럼 자연스럽게 색이 바뀌는 형태라도 예쁠 것 같고요. 릴리아 선배같이 겉과 속이 다른 것도 예뻤을 텐데.”

“그렇게 염색할 거면 헤어 살롱을 가야지.”

“그건 그렇죠. 하지만 소망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참고로 플로이드 선배는 ‘와, 아줄의 색도 금붕어의 색도 아니게 되었네!’라며 즐거워하셨어요.”

 

그래, 고작 세 시간짜리 염색이니 이렇게나 낙관적으로 구는 거구나. 빌은 속으로 한탄하며 세 가지 색이 뒤섞인 머리카락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그 석탄같이 새까만. 이 세상 모든 빛깔을 집어삼킨 듯한 머리카락이 좋았는데.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라면 네쥬도 유명하지만, 두 사람의 체모에는 확실한 온도 차이가 있었다. 네쥬의 흑발이 흑단과 같은 생명력 담긴 따뜻한 빛의 검정이라면, 아이렌의 흑발은 석탄같이 차갑고 응축된 검정에 가까웠지.

 

“너는.”

 

탄식과 함께 첫 마디를 내뱉은 빌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제 진심을 내뱉었다.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도록. 이 진심이 상대의 마음속에 박히기를 바라며.

 

“검은 머리가 제일 잘 어울려.”

“그런가요?”

“그래.”

“음, 퍼스널 컬러 적인 의미로요?”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걸까.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지식은 어떤 종류든 흡수해서 새겨두는 잡학다식한 성격이라 아는 걸까.

빌은 제 말을 흘려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칭찬의 의미를 찾고 있는 아이렌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검은색이 어울린다는 뜻이 아냐. 네 머리카락의 검은색이 아름답고, 너와 잘 어울린다는 거지. 굳이 그 아름다운 색을 다른 색으로 물들일 필요가 있니?”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하지만 더 나은 것은 있는 법이고, 굳이 바꾸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도 얼마든지 있었지.

아이렌의 머리카락 또한 그러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이 애를 흉내 내면 몰라도, 무엇 하러 이 애가 다른 이들 흉내를 내겠나? 아이렌은 그 다운 게 가장 보기 좋은데. 물론 아이렌은 남을 흉내 낼 성격도 아니고, 그런 짓은 시도해 보려고 해도 반드시 실패할 만큼 지나치게 주관이 뚜렷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빌이 말하고 싶은 건 완벽에 가까운 걸 고작 호기심 하나 때문에 망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깊은 의미는, 아무래도 조금 엇나가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빌의 일장 연설을 들은 아이렌은 제비꽃색 눈을 깜빡이며 입을 떡 벌렸다.

 

“뭘 그렇게 놀라니?”

“선배, 어디 가서 아무 여자한테나 그런 말 하고 다니면 안 돼요. 분명 오해받거나, 스캔들 기사가 나거나, 어쨌든 귀찮아질 거예요!”

“뭐라고?”

“선배같이 잘생기고 능력 있고 빈말은 안 하는 사람이 칭찬하면 여자, 아니 남자라도 착각한다고요. 아시겠어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이렇게나 달콤한 칭찬을 하면 반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겐 하지 말라는 소리겠지. 그래. 의도는 알겠으나……. 저건 꼭 연하를 타이르는 말투 같지 않나. 나이는 제가 두 살이나 더 많은데 말이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 구구절절 주의를 늘어놓는 아이렌을 황당하다는 듯 본 빌은 쥐었던 머리카락을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넌 진짜 이상한 녀석이야.”

“음, 알고 있어요.”

“저놈의 입…….”

 

하지만 저런 능청스러운 면도 아이렌의 매력적이지. 자신은 그리 자주 보지 못하는 면모라는 게 아쉽지만 말이다.

빌이 놓아준 머리카락을 도로 등 뒤로 넘겨 정리한 아이렌은 여전히 상기되어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몰랐네요. 제 머리카락 색을 좋아하실 줄이야. 선배의 머리카락이 훨씬 예쁜데. 화사한 밝은 금발에, 끝부분은 신비한 라벤더색이잖아요. 엄청 우아한 느낌이라 전 좋아요.”

“그래? 고맙구나.”

“하지만 선배는 흑발도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조금 더 차갑고 고혹적인 느낌이 들려나요.”

 

글쎄다. 과연 어떨까.

사실 검은 머리도 이미 해본 적 있다. 모델 생활을 할 때 의상에 따라 염색을 하거나,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며 이미지 변신을 위해 염색을 하는 일은 흔하니까. 하지만 그 결과 느낀 건, 제게는 이 본래 머리카락 색이 제일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도 한 번 만져본 빌은, 한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나는 뭐든 잘 어울리지만, 그래도 네 새까만 머리카락은 네게 제일 잘 어울려.”

 

마치 사랑 고백같이 수줍고 사랑스러운 대답이다. 아이렌은 그런 생각이 들어, 안 그래도 피가 몰려있던 얼굴이 더 빨갛게 변했다.

아, 얼굴이 붉어지니 저 얼룩덜룩한 분홍 머리가 더 거슬린다. 비슷한 톤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기껏 좋아진 기분이 다시 가라앉은 빌이 날이 선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해독약을 만들까.”

“곧 원래 색으로 돌아오니까 진정하세요.”

 

이제는 저 예민한 반응에도 적응한 걸까. 그다지 움츠리지 않고 웃어넘기듯 답한 아이렌은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감상을 털어놓았다.

 

“신기하네요.”

“무엇이?”

“아니,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거든요. 제 머리카락 색 말이에요.”

 

아이렌은 저 자신에게 아주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걸 바라고 피하고 싶어 하는지, 제가 느끼는 감정의 이유는 무엇인지, 제가 어떤 걸 할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파고들어 분석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내면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과 별개로 남에게 보이는 면에는 상당히 무관심한 편이었지. 제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제게 어울리는 색은 무엇인지. 그런 것엔 큰 흥미가 없는 아이였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제 외모에도 긍정적 의미로도 부정적 의미로도 큰 생각이 없었겠지.

하지만 이번에 빌이 해준 말은, 아무래도 아이렌에게 좀 특별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근데 오늘 이후로는 더 좋아질 것 같네요. 선배가 좋아해 주니까, 소중하게 느껴져요.”

 

아, 아마 아이렌은 절대 몰랐을 것이다. 제 딴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대꾸겠지만, 빌에게는 이 말이 얼마나 크고 벅차게 다가올지는 말이다. 드디어 자신의 뮤즈가 본인의 장점을 직시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벅차오르는 일인지는 결코 당사자밖에 알 수 없겠지.

 

“……그래. 소중히 여기렴. 꼭.”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절대 연기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샛별 같은 미소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에 번진다.

아이렌은 그 눈부신 미모에 정신이 아찔해져,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TMI : 플로이드가 붉은색과 흰색 염색약으로 고른 건 아줄이랑 리들을 떠올리고 고른 게 맞습니다.

자기 주변서 놀렸을 때 가장 타격감 좋은 동급생이 누구인가 심하게 잘 아는 똑똑곰치.

참고로 플로이드도 야수파 머리가 되었고, 더듬이만 안 물들어서 제이드가 폭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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