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발자취와 활자 ; 03

셰익스피어 ~ 드라마 시즌 2까지의 이야기.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자리엔 고요가 머물렀다.

모리안은 셰익스피어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고 에레원은 대관식 준비 때문에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왕성으로 돌아갔다. 다음부터 에일리흐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해 주겠다는 얘길 들은 것 같긴 한데, 별 관심은 없었다. 네 일이나 잘해, 라고 말했더니 에레원이 어떻게 곧 여왕이 될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펄펄 뛰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왕이고 자시고 아직 애라니까. 베르다미어는 실소하며 언덕에 불어오는 바람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탈틴의 바람은 다른 곳보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 티르 코네일처럼 상대적으로 북쪽에 있어서 그런가. 그는 가볍게 스치듯 생각하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

소란 이후에 남겨진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변한 것도, 잃은 것도 있었다. 이전에도 느낀 거였지만 에린의 신들에겐 에린이 가장 중요했고, 나머지는 부차적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걸까? 그들이 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에린이니까. 그들을 숭배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고. 이어 베르다미어는 모리안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여신이 밀레시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여신은 필요 때문에 소울 스트림을 열었고 그곳으로 밀레시안이 들어왔다. 다른 세계에서 온 무보수 용병인 셈이었다. 세계는 그들에게 타락이나 야욕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 그들이 에린을 해칠 위험도 거의 없었다. 여신이 다루기에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래서 베르다미어는 모리안이 딱히 사악한 목적을 가지고 밀레시안을 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편리한 도구에 대고 나쁜 마음을 품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사라져 줘야겠다는 위협을 가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에린이 위험하니까, 그들이 에린에 위협이 되고 있으니 그렇게 행동한 것 뿐이었다. 여신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좀 더 뼈아팠다. 여신은 말하자면 푸르게 가꾸던 숲에 도움이 될 법한 외래종을 선뜻 들여놓고, 숲이 죽어가자 그것을 잡아 죽이기 위해 활과 화살을 집어 든 사람과 같았다. 밀레시안은 필요하다면 여신에게 있어서 언제든 활로 쏘아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는 무릎을 모아 앉아 그 위에 턱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철저한 이방인 취급이었다. 에린에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들로 바라보는 시선. 그들이 정말 에린에 속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빤한 처사.

 

“밀레시안의 종식이라는 말이 그렇게 쉬운 줄은 몰랐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눈꺼풀 뒤에서 꿈의 잔상이 선득하게 살아났다. 즐비한 별의 시신들과 내려꽂히는 칼날, 붉게 물들어 생을 앗기는 감각이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나쁜 꿈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누구 마음대로 종식이네 마네인가? 필요해서 들였다가 필요 없어지니 내다 버리는 물건 같지 않은가. 우린 이렇게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베르다미어는 다리를 쭉 펴고 아예 풀밭에 누웠다. 하늘 위로 한가롭게 구름이 흘러갔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타르라크의 일지가 떠올랐다. 에린에 살아가는 이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라고, 정갈하고, 단정하게 설명해 두었던 노트가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기며 팔락팔락 넘어갔다. 몇 번이고 주민들과 마주해도 금세 잊어버리는 건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일까? 언젠가는 그런 식으로 에린에서 떠나갈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는 뭉실뭉실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다 팩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삽질 하지 말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러는 거겠지. 세계의 만듦새가 그렇게 되었는데 뭘 어쩌겠어. 잠시 침묵하던 이가 곧 눈을 감았다. 실바람이 코끝을 간질이고 나뭇잎이 사사사 흔들리는 소리가 그에게 잠깐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이 모조리 날 잊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좀 슬픈데. 그는 눈을 감은 채 졸음의 경계를 더듬었다. 그에게 정말 좋아한다고, 헤어지기 싫다고 말하던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가 그의 마음속에 뭉글뭉글 모습을 비췄다. 지금쯤이면 바다를 다 건넜을까? 아니면 그 자식들이랑 아직도 파도 위를 떠돌고 있을까. 바사니오고 안토니오고 피시스 앞바다에 처박았어야 했는데. 그의 입매가 차갑게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포셔는 날 잊는 쪽이 편안할지도 모르지. 뒤에 미련을 남긴 채 떠나면 미련이 마음을 짓누르게 된다. 포셔에게 다른 미련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베르다미어는 그 애에게 기왕이면 가벼운 무게가 되고 싶었다. 질이 썩 좋지 않은 두 놈을 정리해준 후 여행을 배웅해 줬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 애는 더 자유로울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었다. 베르다미어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복잡다단한 머릿속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한쪽을 정리하려 들면 다른 쪽에서 더 많은 고민과 기억이 솟아났다. 모리안이 남긴 말이 슬그머니 난장판에 발끝을 디밀었다.

 

‘이제 이 세계는... 신의 의무를 지게 된 밀레시안들에게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체 누구 맘대로? 그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왜 신들이란 끝까지 제멋대로인가? 누군가의 삶을 휘저어 놓고 의무를 버린 채 떠나면 그만인가? 그게 보상이 될 수 있는가? 그는 눈을 반쯤 떴다. 뭐든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피로가 물씬 밀려왔다.

온몸에 힘을 빼고 누워 있던 베르다미어가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악, 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날카로운 고통이 그의 오른쪽 눈에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이따금 이랬다. 힐러의 집에 찾아가도 따로 처방받지 못했고, 혹시나 해 마법 선생들에게도 들렀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진통 효과가 있다는 물약 몇 개를 받아왔을 뿐이다. 그는 가방에 들어있던 물약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삼키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오른쪽 눈 위를 손으로 덮고 끙끙거렸다. 뭔지도 모르겠는데 날이 갈수록 더 괴로워지니 죽을 맛이었다. 아드니엘에게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의미를 모르겠는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이놈의 황금 도마뱀, 나이 먹더니 능글거리기만 하고.”

 

그는 감히 ‘위대한 골드 드래곤’을 ‘황금 도마뱀’ 따위로 격하시키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댔다. 물론 아드니엘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던 대로 행동하곤 했다. 아, 이게 혹시 나 닮은 거야?

 

“... 시간 나면 티르 코네일 여관에 가서 방을 빌려야겠어.”

 

그리고 일주일 내내 죽은 듯이 자야지. 베르다미어는 피로에 찌들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즈윈은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언덕에 발을 들였다. 한창 바쁘다 겨우 낼 수 있었던 쉬는 시간이라 일 초가 귀중했다. 본래 조원이었을 적에도 견습 기사일 때처럼 쉴 수는 없었지만, 최근 조장이라는 직위를 받고 나서부터는 말 그대로 하루가 일 분 같았다.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해가 졌고, 그가 전투조로서 어느 정도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잠을 자야 했으므로 그의 하루하루는 거의 똑같은 과정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카즈윈은 조장이라는 두 글자를 남들처럼 아주 특별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 이름에 딸려 오는 책임과 사명이 더 무거워졌음을 알고 명심했을 뿐이다. 젊은 나이에 조장이 되었다며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영광스럽지 않았다거나 별거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정도로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작은 하품을 하며 나무 아래로 걸어가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의 머리 위를 맴돌던 부엉이가 작은 스크롤을 그에게 던졌고, 그는 익숙하게 그것을 낚아챘다. 읽지 않아도 내용이 뭔지 알고 있었다. 막 바뀐 조장에게 적응하고 있는 조원들이 각자의 보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예상한 것보다는 답장이 빠른데, 누가 보낸 거지? 그는 한가롭게 생각하며 종이를 펼쳐 보았다. 간결하고 필요한 정보만 적은 글씨를 훑은 카즈윈이 도로 종이를 말아 가방에 넣었다. 답장은 따로 하지 않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그는 뭔가 더 하는 대신 나무에 등을 기대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전 헤루인 조장은 퇴역한 후에도 가끔 그에게 조언을 주곤 했는데,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말은 ‘뭐가 됐든 네 방식대로 해라.’였다. 그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그의 시선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 조 내부의 규칙을 바꾸고, 조장에게 매이지 않고 조원 개개인이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되 주요할 땐 협력에 중점을 둘 수 있는 방식을 천천히 찾아 나갔다. 조원들은 파격적인 변동 때문에 처음엔 우왕좌왕했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았다. 헤루인 조 밖에서는 ‘그냥 조장이 건드리는 걸 싫어하는 거 아니냐?’라는 의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카즈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조가 잘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는 천천히 한쪽으로 치워 둔 생각의 타래들을 끌어왔다. 평소에 그가 신경 써야 할 것들,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문제, 이번 회의의 중점 같은 게 차분하게 그의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탈틴의 언덕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머리가 명료해지고 판단을 가르는 기준을 다듬기에 좋은 온도였다. 덕분에 쪽잠을 자려는 생각은 달아났지만, 나쁠 건 없었다. 그는 그대로 등을 기대어 앉아 몇 분 동안 침묵을 지켰다. 푸른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살랑거리고 바람이 스친 팔이 온기를 내어줬을 즈음, 그는 도로 눈을 떴다. 아직 다른 답장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조원들이 늦거나 그가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말했듯이, 쉬는 시간은 일 초가 귀중하다.

카즈윈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풀숲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그는 희미한 호기심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흥미를 잃었다. 딱히 특이한 것 없는 빈 약병이었다. 누가 길을 잃고 여기서 잠깐 쉬어간 모양이지. 그는 태평하게 생각하며 졸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베르다미어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도 아닌 표정이었다. 지난한 악연이 검을 맞대는 순간은 격렬한 급류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핀카라의 고요한 마력이 주변에서 수만 개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는 듯했다. 밀레시안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루에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서 이전의 모습을 찾기란 모래밭 사이에서 작은 거울 조각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동시에 그만큼 쉬웠다. 베르다미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무기를 쥔 채 머뭇거렸다. 먼저 입을 뗀 건 루에리였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 되겠군.”

“...”

“전력을 다해봐라, 베르다미어.”

 

베르다미어는 목 아래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을 열면 수만 개의 말이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입을 꽉 다물었다. 많은 말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을 했다. 무기를 쥐고 전투를 준비하는 모든 호흡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 그는 결국 악연을 가로막을 것이다. 끝까지 그 길을 방해하는 가장 어려운 적이 될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베르다미어는 속으로 조소했다. 영웅 같은 거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정말이지 내 생에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는 단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영웅이라는 이름에 그를 밀어 넣었다. 운명이란 제멋대로 달리는 마차처럼 그를 끌고 달려 나갔다. 바퀴 아래에 무엇이 깔려 부서지는지, 네 개의 발굽이 무엇을 무참하게 밟고 지나가는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베르다미어는 최후에 웃는 것을 택했다. 우스꽝스럽고 어색하고 고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매달렸다. 그는 루에리의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루에리는 그의 검을 제단 바닥에 가볍게 스치듯 긁었다.

짧고 가늘고 높은 그 소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기라도 한 듯이, 그들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유성처럼 부딪혔다. 고요한 주변을 찢고 지나가는 예리함이 숫제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밀레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충돌하고, 베고, 피하고, 베이고, 구르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다. 피 냄새가 났다. 마치 처음 코요테를 상대하던 때 같다. 그 순간만큼 처절하고 필사적이다. 그 순간만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본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자와 반드시 막아내야 하는 자가 호흡을 소진하여 서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그는 죽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다. 루에리는 그렇지 않다. 서로의 피가 바닥을 적실 무렵, 루에리의 모습이 변한다. 베르다미어는 눈을 질끈 감는다. 혀를 끊어내는 심정으로 묻는다.

 

“그걸로 된 거야?”

 

단조로운 한마디였다. 이제 인간이라고 부르기 힘든 모습의 사내가 밀레시안을 직시한다.

 

“그게 다야?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

 

밀레시안은 울지 않는다. 무기를 쥔 손은 굳건하고 바닥을 디딘 두 다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에리는 대검을 고쳐 쥔다.

 

“그래.”

 

베르다미어는 목덜미에 내리박히는 패배의 예감을 느낀다. 지키기 위해 온 생명을 건 자를, 무한한 생을 가진 자가 무슨 수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오직 하나 있는 것을 내놓은 삶을 무슨 수로 불멸하는 삶이 거꾸러뜨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포기하는 법이라곤 몰랐다. 이를 악물고 검을 쥔다. 두 개의 빛이 사정없이 충돌한다. 바닥을 박차고 공간을 가른다. 제단이 솟구치고 아이가 눈을 감은 동안 두 사람은 지칠 줄을 모르고 싸웠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등한 자리에 서서 검을 맞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늘의 끝에 제단이 닿고, 밝은 빛이 아로새겨졌다. 루에리가 돌연 몸을 돌려 제단의 중앙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밀레시안은 그다음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루에리의 목소리만이 선명했다.

 

“부족했던 힘도! 나의 고통도! 이렇게, 이렇게...”

 

바닥없이 낙하하며 그를 지나쳐 떨어지는 존재는 속삭임에 가깝게 중얼거렸다. 베르다미어는 멀린의 마력이 그를 붙잡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검이 꿰뚫지 못한 가슴을 작은 목소리가 깊게 베고 지나갔다.

 

“... 드디어... 끝난다.”

 

오랜 악연 또한 끝이 났다.

그는 아래를 바라보지 않았다.

 


 

멀린은 트레저헌터와 옥신각신하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밀레시안이라 몸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 척 봐도 상태가 안 좋았다. 멀린은 끙, 소리를 내며 뒤통수를 긁적이다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척척 다가갔다.

 

“야, 괜찮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 이거 어쩌냐. 보아하니 떨어진 사람과 제법 인연이 있던 모양이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충격을 주기는 충분한 사건이긴 했지. 멀린은 딴에는 조심스럽게 베르다미어의 어깨를 잡고 슬슬 흔들었다.

 

“야, 야. 그, 뭐냐, 꼬맹이 데려다주고... 일단 좀 가서 쉬어라. 큰 매듭은 지어진 것 같으니까. 으으, 물론 상황이 좀 안 좋게 끝나긴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야. 알겠어?”

 

베르다미어는 하늘을 보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가, 곧 고개를 들어 멀린을 보았다.

 

“쉬라고.”

“어? 어.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거울 보면 놀랄걸? 저기 사막 망령이 동료인 줄 알고 찾아오겠다, 찾아오겠어.”

 

그는 얕게 호흡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은 그가 정말로 말을 알아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 더 건드려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깨를 토닥여 준 멀린이 손을 떼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연락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둬. 푸욱!”

 

베르다미어는 다시 고개만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타르라크가 그를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고, 터덜터덜 걸어간 뒤로 발자국이 생겼다. 트레저헌터가 멀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악.”

“쟤 괜찮은 거 맞아?”

“내가 독심술사인 줄 알아? 에휴, 그러길 바라야지 뭐. 지금은 쉬게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야.”

“흐음.”

“맞아, 야.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그들이 남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밀레시안은 제 손을 잡은 온기를 내려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걸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지나간 자리가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항구에 다다를 무렵, 그의 손을 잡아당기는 작은 손이 느껴졌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누나, 괜찮아요?”

 

베르다미어는 한동안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응.”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내놓을 만한 답은 그것뿐이었다.


 

피르아스는 당황한 얼굴로 오랜만에 들른 반가운 손님을 바라보았다. 책정된 숙박비에 비해 주신 금액이 너무 크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생각했다. 나중에 여관을 나설 때 말씀드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노련한 여관 주인의 정신이 말하길, 지금은 휴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노라, 목욕물을 데워 주렴.”

“네, 삼촌!”

“... 그럼, 2층으로 올라가서 바로 보이는 방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모쪼록 푹 쉬세요, 베르다미어 씨.”

“고맙습니다.”

 

베르다미어는 단조롭게 인사한 뒤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가만히 서 있다가 몇 걸음을 옮겨 침대에 곤두박질친다. 쉬어야 하는데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그가 지나쳐 온 과거가 차례로 춤을 추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베개에 한쪽 얼굴을 파묻고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영웅의 이름 따위는 원한 적 없었다. 유명세도, 구원자라는 이름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얻었다. 바라지 않은 것을 쥐여주는 것이 세계의 뜻인가? 지키려 하는 자는 모두 이러한 길을 걷는가? 이방인으로서 주제넘은 짓이었나? 방 안에는 그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눈을 감는다.


“베르다미어 씨? 목욕물 다 데웠는데... 어머.”

 

노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가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손님은 이미 잠든 것 같았다. 데워 둔 목욕물이 아깝긴 했지만, 피르아스가 만약 잠들어 계시면 절대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둔 참이었다.

 

“많이 힘드셨나 보다.”

 

그는 다시 조심조심 문을 닫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왔다. 물건을 정리하던 피르아스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주무시니?”

“네. 엄청 피곤하셨나 봐요.”

“얼굴이 좋지 않으시더라니. 혹여 큰 소리 내지 않게 조심하렴.”

“알겠어요. 내일 아침은 좀 맛있는 걸로 준비해야겠는걸요. 케이틴한테 부탁 좀 하고 올게요!”

 

노라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 여관의 문을 나섰다. 음, 아침 식사로는 뭐가 좋을까. 역시 크림수프일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수프를 약간 짜게 한 게 좋을지도 몰라.”

 

울고 계셨던 것 같으니까 물도 많이 준비해야지. 노라는 씩씩하게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티르 코네일의 고요한 풍경이 밤의 안온함에 잠기고 있었다.

 


기사단엔 조용한 비상이 걸렸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장들이 게이트로 모두 모였고, 조원 중 정예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들에게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문이 열렸다.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기사단에는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 닥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즈윈은 진작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실 문이 열린다는 건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중 하나였고, 기사단은 그에 대한 대비책을 단단히 쌓아둔 상황이었지만, 곤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카즈윈은 다른 조장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강직하게 굳어 있는 사람도 있었고, 자연스레 회의의 주도권을 쥐는 사람도, 부드럽게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조용히 경청하는 축이었다. 루나사 조원이 간략한 정황 설명을 위해 모두의 앞에 섰다.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채웠다. 카즈윈은 중요한 정보 몇몇을 머릿속에 기록하다, 한 지점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기사단 측에서 이전부터 주시하고 있던 ‘그 밀레시안’이 해당 사건과 깊게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따로 질문을 하진 않았다.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톨비쉬가 뭔가를 묻는 게 들리긴 했지만 그것 역시 대부분 사실 확인의 목적이었다. 밀레시안의 주도였는지, 단순한 사고였는지는 제대로 알기 힘들었다. 명확한 것은 하나였다. 밀레시안이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여전히 노력하는 자라면, 언젠가 기사단과 접촉하게 될 것이다. 뜻이 맞는 자들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때가 되면 깊이 숨겨져 있던 사실들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마음속 책장에 쌓인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조만간 대면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예감은 대부분 들어맞는 편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