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한 걸음 전

G19 초반부

베르다미어는 황망하게 소년을 바라보았다. 막 성인이 되었을 깨끗하고 어린 얼굴이 대도시 한가운데에서 냅다 존경한다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버린 기분을 아는가? 베르다미어는 지금 그 기분을 자의와 전혀 상관없이 생생하게 체험 중이었다. 있지, 미안한데 내 인권 같은 건 어디 간 거야? 내 수치심 같은 건 전혀 배려를 안 해주는 거야? 그는 입을 뻐끔거리다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일단... 좀 일어날래?”

“네!”

 

초롱초롱한 녹색 눈이 곧장 튀어 올랐다. 어느 모로 보아하나 청년은 아직 자라는 중인 것 같았다. 눈이며 얼굴에서 싱그러운 생기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입고 있는 갑옷이며 차고 있는 무기까지 범상찮아 보이는 청년이, 타라 왕성 정문 앞에 나타나서는 예전부터 쭉 존경하고 있었다며 악수 한 번만 해달란다. 아니, 누가 보면 유명인 된 줄 알겠, 유명인 맞긴 한데, 아, 굳이? 그는 지끈지끈한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

“그럼요! 뭐든 물어보세요! 성실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활기 넘치네. 그는 시시각각 절인 양파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네?! 밀레시안 중의 밀레시안! 에린의 수호자! 그런 베르다미어 님을 모르면 에린 사람 아닌 거잖아요!”

 

와, 진짜 미치겠네. 에린 사람 아닌 거잖아요? 그 정도야? 그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며 분장하고 다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이런 애들도 나를 알아볼 만큼 내가 유명하다고? 아니, 왜? 언제는 순 미친 사람 보듯 보던 사람들이 우후죽순이었는데. 그리고 내가 뭘 얼마나... 그래, 한 건 많지. 그래. 그의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맹렬하게 문질렀다. 그의 시원찮은 반응에 청년은 약간 당황하며 황급히 덧붙였다.

 

“아차, 제 소개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저는 베르다미어 님을 닮고 싶어서 열심히 수련 중인 알터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는 좋은데 내 이름은 제발 조용히 말해주면 안 될까. 레자르의 시선이 베르다미어를 흘끔거리고 있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곧장 돌아서서 뭘 봐, 영감탱이, 하고 싶었지만 방금 에레원에게 들렀다 오는 길이기도 했고, 왕궁 사람들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애꿎은 제 입술만 꽉꽉 씹었다.

 

“전 오래전부터 베르다미어 님의 활약상을 들어왔었고, 정말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 ... 그래...”

 

베르다미어는 에레원이 부탁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기력이 쇠하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지켜봐 줘서 고마워? 알터는 동그란 초록색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미치겠네. 존경한다는데 내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대화를 나누자니 모든 사회성을 쪽 빨아 먹힐 것 같다. 청년의 태도가 나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사회성이 썩 좋지도 않을 때 이런 사람을 만날 건 뭔가. 극심한 피로와 무력감 속에서 던컨이 작은 일을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걸 기대하진 않았다. 베르다미어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알터가 더 빨랐다.

 

“지금도 어딘가 곤란한 사람을 도우러 가시는 건가요?!”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헉, 제가 바쁘신 분 시간을 뺏고 있었군요!”

“아니... 안 바빠... 그런 거 아니야...”

 

그는 이제 약간 울고 싶었다.

 

“아닙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뵐 수 있겠죠! 그런 행운 넘치는 날이 저에게 언젠가 또 오지 않을까요? 그때 또 뵙겠습니다!”

“아니, 저기, 그냥 그렇게...”

 

가는 거야? 후다닥 사라지는 알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르다미어의 입이 황당하다는 듯 헤 벌어졌다. 또 보자는 얘기를 하지도 않았고 잘 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청년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저 할 말만 하고 사라져 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청년의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터라고 했지.

 

“... 미치겠네 진짜.”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떠돌이 개와 고양이들이 발치에 옹기종기 모여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깊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그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너희 조만간 목욕 좀 해야겠다. 생각을 읽은 건지, 고양이들은 쓰다듬음만 날름 받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등을 콕콕 쑤시던 레자르의 시선도 떠나간 것 같았고, 이제 진짜 할 일을 해야 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폐허만 남은 기분이 좀 들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바깥에 내어 둔 먼지 앉은 의자에 소나기가 지나간 듯이 좀 축축해지긴 했어도 기분은 기묘하게 상쾌했다. 그렇지만...

 

“분장하고 다니는 건 좀 생각을 해봐야겠어.”

 

그는 일말의 결연함까지 담아 중얼거렸다. 저런 사람이 또 안 나타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카즈윈은 조원에게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시하다 게이트 한쪽에서 일어난 소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터가 타라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잔뜩 흥분한 갈색 머리가 방방거리는 게 몇십 걸음 떨어진 반대편까지 보였다. 아벨린이 ‘알터, 제발 진정하렴.’이라고 피곤하게 말하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알터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들뜨는 일은 잘 없었는데, 뭐라도 보고 온 것 같았다. 카즈윈은 매우 희미한 호기심이 잠깐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문이 열린 이후로 아발론 게이트는 두 배쯤 더 바빠졌다. 옛날에 게이트가 깨끗하던 것을 바라보며 늘 이랬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리던 행정 담당자들은 게이트의 청결보다 그들의 눈 밑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고, 루나사는 항상 인력 충원이 필요할 정도로 온종일 뛰어다녔다. 전투조는 그중에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그들이 주 업무로 삼고 있는, 선지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사도를 상대하는 일이 가볍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지만, 일의 많고 적음을 따지면 적은 쪽이었다. 선지자들은 쓸데없이 신출귀몰하기야 했지만, 그것도 일단 움직이는 거니 한계가 있지 않은가. 동선과 동향이 한 번 정해지고 나면, 깊은 속셈이 없는 이상 큰 폭으로 변하지 않았다.

카즈윈은 지시를 마치고 나서 천천히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알터는 아직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벨린이 이마를 싸쥐고 한숨을 내뱉었다. 견습 기사 몇몇이 고무 공처럼 뛰어다니는 알터의 목소리를 흥미롭게 듣는 게 보였다.

 

“직접 뵌 건 처음이었어요! 정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한 번만 더 말하면 열 번째야, 알터. 차분히 알아 온 걸 말해줄 수 있겠니?”

 

그렇다는 건 아벨린이 저 말을 열 번째 하고 있다는 뜻이다. 카즈윈은 그의 인내심에 무의식적으로 약간 감탄했다. 아벨린은 대체로 엄격하다는 평을 듣는 기사였지만, 이따금 저런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동생을 참을성 있게 훈육하는 손위 누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쳐 보인다고 할까. 알터는 아마도 밀레시안을 만나고 온 것 같았다. 저만한 반응을 보일 만한 대상은 평소에 존경스럽다고, 닮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그 사람뿐이었다. 알터가 덤벙거린다는 평이 있긴 해도 명색이 정식 기사였고 저 정도로 신이 나서 흥분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카즈윈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묘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이름을 신경 쓰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 밀레시안은 항상 ‘밀레시안’ 혹은 ‘그 밀레시안’ 정도로 불렸다. 공식 문서상이나 되어야 이름 몇 자가 거론되곤 했다. 카즈윈은 곧 기억을 되짚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름을 기억하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추상적인 테두리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카즈윈은 아벨린의 한숨 소리와 알터의 평소보다 한 톤쯤 높은 목소리를 배경 삼아 한쪽에 미뤄둔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문이 열리기 전보다 보고서의 양이 많았고, 그 내용도 훨씬 다급했다.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중요도 순으로 보고의 내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사도의 출현이 점점 더 빈번해지고, 그 모습과 힘도 진화하고 있었다. 선지자들은 골치 아프게 성실했다. 카즈윈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풀어냈다. 사도를 처형하고 붙잡힌 영혼을 풀어주는 방법이야 오랫동안 다듬은 기사단의 방식이 있었으니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기사단은 한정되어 있다. 상처를 입거나 은퇴하게 되면 전력에 문제가 생기는 셈이다.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면 나머지 인원의 부담도 커지게 된다. 그러니 기사단이 계속해서 견습 기사들을 물색하고 있는 거기도 했다.

생각은 슬그머니 다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인원에게 닿는다. 카즈윈은 귀찮다는 듯 그 생각을 한쪽으로 밀쳐 두었다. 그건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이제 알터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걸 물꼬로 뭔가 달라질 수야 있겠다만. 그는 가능성을 가늠해보다 금세 그만둔다.

 

“아벨린 님, 언젠가 그분과 함께 싸울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니? 타라에서 뭘 알아냈는지 다시 말해주렴.”

 

아벨린은 이제 칼같이 알터의 말을 끊어내고 있었다. 카즈윈은 한동안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를 떴다.

 


베르다미어는 시드 스넷타를 꺼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묘하게 피하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코요테의 날카로운 추억 때문은 아니었고, 그가 겪어 온 것들을 가만히 헤아리자면 쉽게 발을 딛을 수 없었다. 영영 겨울이 오롯한 길목 끝에 있을 무덤을 생각하면 그저 발을 멈추게 됐다. 그는 흰 입김을 내뿜으며 발아래에서 눈이 뽀득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가? 알터가 아벨린에게 혼나는 걸 보고서도, 아벨린이 분명한 목소리로 관여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붉은 머리의 마법 선생 때문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라사의 맥박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부상이 크지는 않은 것 같았고, 주변이 좀 춥다는 것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법사들은 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까? 그는 멀린을 잠시 생각하고 자기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업고 가야 하나.”

 

진지한 고민이 눈송이 사이로 흘렀다. 계속 두면 감기 걸릴 것 같잖아. 밀레시안은 질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건 밀레시안들만의 이야기였다. 그가 업을지 안을지 고민하던 찰나, 사방이 고요해진다. 베르다미어는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끼며 곧장 뒤를 돌았다. 기묘한 빛과 함께 나타난 생물체는 기이하게도 ‘위험하다’라는 기분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았다. 전사의 본능은 이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정신 교란 같은 건가? 그는 지체 없이 긴 채찍과 같은 검을 뽑아 들었다. 에아렌에게 넘겨받은 힘은 이제 길든 맹수처럼 고분고분했고, 그의 귀에 더 이상 속삭이지 않았다.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그는 반쯤 비꼬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대한 괴수는 손에 든 스태프를 휘두르며 그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보아하니 괴수가 든 스태프는 평범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괴수가 크게 스태프를 휘두를 때마다 흉악한 날들이 튀어나와 허공을 찢었다. 누가 봐도 적을 찢고 부수겠다고 외치는 무기였다. 어디서 저런 게 나오나 몰라. 베르다미어는 혀를 찼다. 그때, 알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외쳤다.

 

“베르다미어 님!”

 

어라, 넌 언제 여기 온 거야. 그는 눈을 둥그렇게 깜박거렸다. 흘긋 옆을 보니 아벨린도 함께 있었다. 기사의 얼굴에 잠시 낭패라는 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당장 닥친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벨린은 베르다미어의 왼쪽에, 알터는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늦지 않았군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유사시에는 보조하도록 하죠.”

“... 알았어, 고마워.”

 

베르다미어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끼어들지 말라며? 물론 지금은 끼어들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괴수를 내버려 두면 티르 코네일로 넘어가 난동을 부릴 가능성도 있었다. 라사도 아직 저기 쓰러져 있었고 말이다. 그는 무기를 고쳐 들고 크게 휘둘러지는 스태프 아래로 몸을 낮추어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가 체인 블레이드를 휘두르면 단단하고 거친 피부에 채찍 같은 검날이 박혔다. 그대로 찢어내면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귀를 뒤흔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괴물에게서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알터는 거대한 검으로 스태프를 받아쳤고, 아벨린은 빠른 속도로 창을 내질러 빈틈을 만들었다. 베르다미어는 싸우는 동안 이 괴수가 대체 어떤 물건인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특이하리만치 방어도가 높았다. 살갗이 딱딱하고 견고했다. 마치 누군가가 정교하게 짠 직물처럼 무기로 찢어내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무식하게 괴수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아무리 강한 적이어도 말랑한 부분이 한 구석은 있었다. 아니면 골렘처럼 허술해서 찌르고 들어갈 틈새가 있던가. 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왔다. 일단 머리는 아니군. 그는 그를 붙잡으려는 괴수의 손을 가뿐히 피해 땅에 착지했다. 그럼 어디지? 약한 부분이 없게 느껴진다면 힘이 부족한 것일 테니 좀 더 세게 쳐야 하나? 오랫동안 그와 함께 한 전사의 혼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시드 스넷타의 눈밭 위에 여러 개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때, 그는 알터와 아벨린이 푸른 빛에 휩싸이는 것을 목격했다.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힘이 그의 뺨에 닿았다. 베르다미어는 입이 약간 벌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모르는 힘이라고? 오만하게 들릴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이미 신의 힘까지 손에 넣어보았고, 핀카라 안에서 고대의 뒤틀린 마력까지 경험했다. 아니, 그런데 이 땅에 또 뭐가 남아있단 말이야? 그가 두들기다 포기한 괴수의 머리에 거대한 검이 내리쳐졌고, 머리를 보호하던 괴수의 장신구는 뚝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아마 한 번 더 두들기면 끝날 것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시드 스넷타를 우렁우렁 울렸다. 베르다미어는 뿌연 입김을 내뱉으며 아벨린과 알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규율이네 직접 해야 하는 일이네 하는 말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한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들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전투 방식을 바꿨다. 그편이 훨씬 효율이 높을 거란 판단이었다.

 

“알터!”

 

아벨린이 알터를 부르자 알터가 허공에서 여러 개의 빛줄기를 불러냈다. 빛줄기는 즉시 괴수의 사지를 꿰뚫어 움직임을 차단했고, 아벨린은 다시금 거대한 검을 불러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괴수의 정수리에 꽂아 넣었다. 베르다미어는 약간의 경외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겪어 온 신의 힘과는 기묘하게 격이 다르다는 기분이었다. 괴수가 쓰러지자 그는 숨을 고르며 자세를 천천히 되돌렸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소리도 없이 누군가가 그를 공격했고, 그는 본능적으로 내질러지는 주먹을 방어해냈다. 그가 반응하지 못했다면 어딘가가 찢겨나갔을 게 뻔했다.

 

“베르다미어 님! 괜찮으세요!?”

“빌어먹을, 어떤 자식이야?”

 

알터가 허겁지겁 뛰어와 그의 곁에 섰다. 어느새 그의 옆자리에 자리한 아벨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걸 막아내다니, 역시 대단하구나. 들려오던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한 명의 늑대인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이건 또 뭔가 싶어 미간을 구겼다.

 

“인사는 이 정도로 해 두지. 자네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볼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누구 맘대로 자네야? 나 알아?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뱉고 싶은 걸 참았다. 그가 미처 뭔가를 하기 전에 늑대인간이 사라졌고, 시드 스넷타의 눈송이가 조용히 내리며 서서히 주변의 소리를 지워냈다. 먼저 쳐 놓고 도망을 가?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반 죽여 놓겠다고 다짐하며 베르다미어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둘 다 괜찮아?”

“정말 대단한 전투였어요!”

 

아, 아니, 또 시작이네. 베르다미어는 어색하게 웃으며 알터를 쳐다보았다. 이럴 땐 선수를 쳐야 했다.

 

“근데 그 괴수는 뭐야?”

“앗, 어... 그게...”

“제가 말씀드리죠.”

 

아벨린의 얼굴에 수심 비슷한 것이 스쳤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점 미리 양해를 부탁드려요. 이 괴물은 한때 사람이었던 존재입니다. 다른 세상의 부정한 기운에 오염되어 자신을 잃어버린 자의 말로죠.”

“딱히 부정하다는 느낌은 안 들었는데.”

 

베르다미어는 그동안 겪어 왔던 ‘부정함’을 생각하며 말했다. 괴수에게서 느껴지던 건 그런 결은 아니었다.

 

“네, 그게 이 괴물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흠, 기분 나쁘네.”

 

아벨린은 순간적으로 가볍게 웃었다. 베르다미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기사의 얼굴은 말끔했다.

 

“그럼 아까 그놈은? 늑대인간 말이야.”

“그 녀석이 이런 괴물을 만드는 주범입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녀석만이 아니죠. 파악된 것만 셋... 아마도 그 이상의 숫자가 대륙 전역에서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베르다미어를 엄습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또 위기야? 루에리를 보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위기야? 그는 마음의 입을 눌러 닫았다. 문이 열렸다더니 그 여파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투덜거릴 자격이 없었다.

 

“그럼 마지막. 너희는 대체 누구야?”

“죄송합니다. 그것에 대해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그저 이들과 싸우고 있는 자들... 정도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아벨린의 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알터를 노려보았다. 베르다미어는 찔끔하는 알터의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일하는 조직인데 허락도 없이 외부인을 끌어들였으면 속에 천불이 나긴 하겠지. 그는 슬쩍 알터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외면했다.

 

“본래 이렇게 만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 알겠어. 더 묻지는 않을게.”

“네, 감사합니다. 이젠 가 봐야겠군요.”

 

베르다미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라사의 곁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라사는 아직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번에야말로 안고 갈지 업고 갈지 결정해야 했다. 그가 긴 머리카락을 어떻게 치워야 업고 가기 좋을지 고민할 즈음, 발길을 돌리던 아벨린이 문득 말했다.

 

“만약의 일이지만.”

“응?”

“이 괴물들과 싸울 일이 있게 되면 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는 눈을 끔벅이며 아벨린을 바라보았다. 기사는 농담이나 가벼운 격려를 하는 게 아니었다.

 

“당신은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베르다미어는 묘한 얼굴로 다시 등을 돌리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는 게 무슨 의미지? 시드 스넷타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속눈썹을 만지고 지나갔다. 내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뜻이야? 그는 그렇게 묻지는 않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당신은 여기에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성스러운 빛의 기사의 길을... 그는 생각을 그만둔다. 이런 얘기는 들은 적 없었다. 아마 그럴걸.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알터가 아벨린을 따라가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알터는 뭐라도 결심한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베르다미어에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히 가세요, 베르다미어 님!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어요!”

“알터!”

“네... 넵! 아벨린 님!”

 

베르다미어는 알터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고 손을 내렸다. 아벨린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를 쳤다.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그의 붉은 눈동자가 왼쪽 위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영웅이기 때문에? 그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얼음장 같은 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생각을 밀어 놓는다. 곧 라사를 등에 업은 밀레시안이 티르 코네일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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