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실버 드림
* 23년 실버 생일 기념 연성. 선배 생일 축하드립니다. 다음 가챠엔 좀 일찍 나와주세요...
5월 15일. 디어솜니아 기숙사의 생일 파티장. 오늘의 주인공인 실버는 케이크 곁에 앉아 멍하니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파티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밝은 미소와 여기저기 놓인 선물들. 고향에서 아는 이들만 모여 보냈던 생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그는 이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자신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다니, 어찌 싫을 수 있겠나.
그러나 그의 표정과 눈빛은 실버 자신이 느끼는 바와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뭐냐, 실버. 생일인데도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군.”
출입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던 실버는 곁에 다가와 의아하다는 듯 묻는 세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보이나?”
“네 녀석은 원래도 표정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얼빠져 있지 않나.”
“……그런가?”
요란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즐겁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실버는 왜 세벡이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시원찮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세벡은 옛날부터 제 태도에 관해 이런저런 참견을 하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 거겠지. 그리 생각한 실버는 그 지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세벡만이 느낀 위화감이 아닌 모양이었다.
“실버, 무슨 일이라도 있나?”
“예?”
“표정이 썩 밝아 보이지 않는군.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나?”
세벡이 자리를 뜬 후, 선물을 전해주러 온 클래스 메이트가 권한 과자를 맛보던 실버는 한발 늦게 파티장에 등장한 말레우스의 물음에 저작운동을 멈추었다.
‘아뇨,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실버는 슬슬 자신의 얼굴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 제 표정이 어떻기에 다들 이런 질문을 해온단 말인가. 지금 먹고 있는 과자가 고소한지 달콤한지도 모르는 채 입 안의 내용물을 삼킨 그는 유리잔에 비치는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촉촉하게 묻은 유리잔에 비치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적어도,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의미였다.
“실버여, 혹시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느냐?”
유리잔 속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실버에게 말을 건 것은 그의 수양아버지였다. 이윽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의 물음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실버는 잔을 내려놓고 릴리아와 마주 보았다.
“다들 그렇게 물어보는군요. 제가 그렇게 이상해 보입니까?”
“후후. 다들 네게 관심이 많으니 작은 것도 걱정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서, 무슨 일이지?”
“그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거짓말을 할 만큼 심각하고 부끄러운 일이 있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실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자신이 평소보다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알지 못했으며 제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응? 정말로?”
“예. 오히려 다들 왜 그렇게 묻는 건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릴리아는 제 수양아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맑은 오로라 빛 눈동자는 진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딘가 쓸쓸한 한기가 돌고 있었다.
“으음.”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는 굳은 입매와 완만한 기울기의 눈썹에선 어떠한 심상도 느껴지지 않지만, 영혼의 창인 눈동자는 확실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해 보이고, 홀로 걷는 나그네처럼 쓸쓸해 보이는 실버의 눈을 살피던 릴리아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희미하게 웃었다.
방금까지 실버가 바라보았던 출입문을 힐끔거린 그는 양팔을 허리춤에 얹고 고개를 저었다.
“하긴, 원래 자기 자신의 감정이 가장 알기 힘들 때도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제 마음을 직면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고, 너는 아직 어리니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당연해.”
“……그렇습니까?”
“그럼.”
역시 자신을 길러준 이라서 그런 걸까. 릴리아는 무엇이 문제인지 금방 눈치챈 모양이다. 실버는 부디 상대가 친절이 이 상황을 설명해주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제 아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답은 천천히 찾아도 되니, 부디 기분이 풀리면 좋겠구나. 오늘은 좋은 날이지 않으냐.”
“……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실버는 그게 정말로 궁금했지만, 릴리아를 독촉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정말 심각하거나 급한 문제였다면 현명한 제 수양아버지가 진작 답을 알려주었을 터. 상대를 전적으로 믿고 있는 실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제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자신이 웃지 않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러니, 웃지 않는 게 문제는 아닐 터. 커피를 잔뜩 마신 덕분에 졸음이 몰려오는 것도 아니고, 피곤하지도 않은데. 대체 자신은 무엇이 문제인 걸까. 무엇이 불편하여,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는 걸까.
“부사감, 촬영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오. 그래. 고생했네.”
1학년 학생의 외침에 대답한 릴리아는 생각에 잠긴 실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실버여, 우선 사진을 찍도록 하지. 말레우스와 세벡도 기다리고 있을 터. 두 장을 찍어서 하나는 로세우스에게 보내주자꾸나.”
“예.”
아. 신기하기도 하지. 고향에 있을 제 수양어머니의 이름을 듣자 놀랍게도 정신이 명료해진다. 실버는 그제야 아까 먹은 과자의 다크 초콜릿 맛이 혀에서 살아나는 걸 느끼고 숨을 삼켰다. 이렇게 보니 자신은 확실히 얼이 빠져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는 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자각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혹시 로세우스 님과 관련된 일 때문인가?’
15살 생일까진 함께한 이가 없으니 쓸쓸한 것인가. 하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작년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어야 할 텐데, 그건 아니지 않나.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고쳐 쓰고 모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있는 이들의 가운데에 선 실버는 표정을 가다듬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럼 찍겠습니다!”
사진을 찍어주기로 한 1학년은 제 일에 막중한 책임감이라도 느끼는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초읽기 했다. 셋, 둘, 하나. 귓가를 스치는 숫자와 상관없이 의젓한 듯 무미건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실버는 저도 모르게 촬영자 뒤쪽에 있는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작게 탄식했다.
“아.”
꽤 떨어진 거리임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흰 얼굴. 가볍게 나부끼는 치맛자락과 새까만 땋은 머리.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는 제비꽃색 눈동자와 품 안에 있는 선물상자까지.
바쁜 걸음으로 나타난 아이렌을 발견한 아이렌을 발견한 실버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 셔터가 눌리고 플래시가 두 번 터졌다.
‘오오.’ 진심으로 감탄한 촬영자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실버 선배. 멋진 미소네요. 사진이 아주 잘 나왔어요!”
“응? 아…….”
제가 웃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챈 실버는 촬영자에게 무어라 말하려다가,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렌에게 다시 주의를 빼앗기고 말았다.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속절없이 끌려가는 수양아들의 시선을 눈치챈 릴리아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그런 거였나. 후후.”
“예? 무슨…….”
“아니다, 아무것도. 그것보다 얼른 아이렌에게 가보거라. 네 선물을 가져온 모양이니.”
실버의 등을 떠밀며 재촉하는 릴리아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온 힘을 다해 미는 손길에 얼떨결에 아이렌 쪽으로 서너 걸음 나아간 실버는 뻐근한 왼쪽 가슴께에 손을 얹고 느리게 숨을 내뱉어보았다.
아까까지는 무디기만 했던 모든 감각이 날을 세운 칼날처럼 예리해진다. 긴 잠에서 깨어난 듯 한꺼번에 솟구쳐 몰아치는 오감이, 제게 있었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은 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이라 바빴기 때문인지 방과 후까지 자신을 만나러 와주지 않은 아이렌이 얼른 제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면서도, 정말 오지 않으면 그 점에 제가 서운해해도 되나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는데. 왜 자신은 이 모든 걸 잊고 있었을까?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고민한다고 해서 아이렌이 더 빨리 오는 게 아니라서?
“실버 선배.”
머리로는 이유를 찾으면서 걸음은 착실하게 상대를 향해 나아가던 실버가 상대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새하얀 장미 한 송이와 선물상자를 든 채 인사하는 아이렌의 모습을 제 두 눈에 깊게 새긴 그는, 평온한 얼굴로 상대를 반겼다.
“어서 와, 아이렌.”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혀끝에 걸린 솔직한 말은 뜨거운 들숨과 함께 실버의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