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프리지아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도

말레우스 드라코니아 드림

 

바람이 차가운 새벽. 말레우스는 습관적으로 고물 기숙사로 발을 옮겼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기숙사 건물 밖. 출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건 말라서 비틀어진 꽃이었다. 줄기부터 잎, 꽃까지 싱싱한 곳이라곤 없이 바싹 마른 꽃은 생기라곤 없었지만, 땅에서 올라온 찬 기운 때문인지 밤이슬이 맺혀 살짝 젖어있었다.

 

‘이건, 분명…….’

 

눈에 익은 꽃이다. 저건 일주일 전, 아이렌이 학교 밖으로 놀러 갔다가 사 온 꽃이지 않은가.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길거리 노점에서 꽃을 싸게 팔길래 한 묶음 샀다고 했던가? 꽃병이 없어서 빈 유리병에 임시로 꽂아 게스트룸에 두었던 걸 분명 보았는데. 어느새 시들어 저리 버려지다니. 새삼스럽게 식물의 수명이란 얼마나 짧은지 실감 되는 말레우스였다.

 

‘아쉬워하고 있겠군.’

 

아이렌은 꽃을 좋아했다. 정확하게는 자연 그 자체를 좋아한다고 하여도 좋으리라. 물고기가 뛰노는 강과 호수,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하늘. 커다란 나무와 작은 들꽃, 공격보다는 도망에 더 재능이 있는 산짐승부터 아무렇지 않게 침입자를 공격하는 맹수까지. 사람을 꺼리는 만큼 그 외의 것들을 사랑하는 아이렌이 이 이별을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제게 꽃을 사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웃던 아이렌의 표정을 선명히 기억하던 그는 거의 죽은 꽃 앞에 섰다. 다른 이들이라면 똑같은 종류의 꽃을 사주는 게 고작이겠지만, 제겐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손에 마력을 실은 그는 생기를 거의 잃은 꽃을 집어 들었다. 밤이슬을 흡수하며 점점 푸른 빛을 되찾아가는 꽃은, 이내 완전히 기운을 되찾고 향기롭게 피어났다.

 

“이 정도면 됐겠지.”

 

샛노란 프리지아 꽃잎을 손끝으로 쓰다듬어 남은 밤이슬을 훔쳐낸 그는 불이 켜져 환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이면 아이렌은 늘 깨어서 개인적인 취미 활동을 하거나 과제를 하고 있었으니, 노크만 한다면 문을 열어 줄 게 분명했다.

슬며시 제가 피워낸 프리지아를 등 뒤로 감춘 말레우스는 현관 앞에 서서 헛기침했다. 겨우 꽃을 선물해 주는 것뿐인데도 이리 긴장되는 건, 제가 그만큼 상대를 아끼기 때문이겠지.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희미하게 ‘예’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문 너머로 유난히 선명히 들리는 발소리에 그의 가슴도 빠른 속도로 뛴다. 문이 열려도 부딪히지 않도록 두어 걸음 물러선 말레우스는, 다소 편한 차림으로 나타난 아이렌에게 인사했다.

 

“좋은 밤이군, 아이렌.”

“말레우스 선배?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오셨네요.”

“……음. 그렇지.”

 

특별히 걸음을 서두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밖으로 나섰더니,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 뿐이었지.

제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산책을 나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말레우스는 어영부영 대꾸하고 말을 돌렸다.

 

“아이렌, 이걸.”

 

괜히 시간을 끌 생각이 없던 그는 곧장 감춰두었던 프리지아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키도 크고 몸체가 큰 탓에 그의 등 뒤에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던 아이렌은 익숙한 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거…….”

 

제가 사 왔던 꽃인 걸 알아볼까. 아니면 시든 꽃에 생기를 되찾는 마법이 있다는 걸 모르는 탓에 전혀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이렌의 반응을 기다리는 말레우스의 눈은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를 풍기는 프리지아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아이렌은 슬쩍 선물을 받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 주시려고 일부러 준비해 오신 건가요?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 역시 모르는 건가. 꽃은 개체 하나하나의 특징이 크지 않으니, 못 알아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분명 제가 상대와 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 그러니, 서운해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 놀랄 테니 좋은 일 아닌가.

말레우스는 고개를 젓고 꽃을 든 아이렌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이 꽃은 네가 산 꽃이다.”

“예? 제가요?”

“그래. 전에 네가 사 온 프리지아지.”

 

이런 설명으로는 마법 세계의 일을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일까. 아이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자연스럽게 제가 꽃을 버렸던 곳을 바라본 제비꽃색 눈동자 한 쌍이 잘게 떨렸다.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시든 꽃이 어느샌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전후 상황을 이해하게 된 아이렌은 그제야 말레우스를 바라보았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말레우스는 이 정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완전히 말라 죽지 않아서 살릴 수 있었지. 관리를 잘했던 모양이군.”

“아, 으음. 예. 이왕이면 오래 보고 싶긴 했으니까요.”

 

직접 비스듬하게 잘랐던 줄기 끝을 매만지고 나서야 완벽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인 아이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커 보이는 동그란 눈. 소리 없이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마른침을 삼키는 기다란 목까지.

마냥 긍정적이라 보기엔 힘든 변화에 내심 당황한 말레우스는 조심스럽게 진심을 물었다.

 

“왜 그러지? 무언가 문제라도?”

“아뇨.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그런가? 하지만 상당히 곤란해 보이는 표정인데.”

 

그의 눈은 정확했던 건지, 아이렌은 자신의 표정에 변명하지 않고 입을 닫을 뿐이었다.

생기를 되찾은 꽃을 매만지던 아이렌은 처음 프리지아를 보았을 때와는 다른, 난처함이 묻은 미소로 대꾸했다.

 

“억지로 살리는 건 좀 불쌍하잖아요.”

“불쌍하다고?”

“예. 꽃도 꽃 나름의 수명이 있고, 보내 줄 때가 되면 흙으로 보내 주어야죠.”

 

그건 이상한 말이다. 좀 더 오래 곁에서 볼 수 있으면 좋은 거지, 왜 저런 생각을 하는 걸까.

말레우스는 진실로 아이렌의 생각에 공감할 수 없어, 제 나름대로 해명했다.

 

“내 마법은 남아있던 꽃의 생기를 부풀려 준 것뿐이지, 완전히 죽은 꽃을 무리해서 되살린 것도 아니다만.”

“하지만 가만히 두었으면 완전히 시들어 죽었을 거잖아요. 선배가 나쁘다는 게 아녜요, 제가 꽃을 좋아하는 걸 아니까 이런 호의를 베푸신 건 알지만…….”

 

제 말이 곡해되어 상대에게 전해지는 건 싫은지, 아이렌은 잠깐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한결 안정시킨 그녀는 실망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대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니까요. 이 꽃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보냈으니,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야죠. 꽃이라면 새로 사도 되고, 식물원에 가서 볼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 꽃들이 이 꽃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텐데.”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도 굳이 이 꽃을 보내 주겠다?”

“꽃에도 안식이 필요할 테니까요. 말려서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 걸어 둘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지도 못한 채 억지로 저에게 얽매여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건 불합리하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아이렌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해도 그 시간이 그대로 돌아오는 건 아닌 법이죠. 시곗바늘을 멈춘다 해도 의미와 감정이 그대로 멈추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순리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끝이 있는 생명이 더 가치가 있죠. 영원한 건 소중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잃거나 망가질 거란 걱정을 안 하게 되어서일까요.”

“100년도 살지 않는 인간이 할 생각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이 프리지아에게는 제가 장생종일 걸요.”

 

다소 말장난같이 들리는 대꾸과 함께 웃음소리를 흘린 아이렌은 빈손을 말레우스의 손 위에 올렸다. 어느새 아이렌의 손 사이에 제 손을 끼운 형태가 된 말레우스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체온에 한숨 쉬었다.

 

“이 꽃은 다시 시들 때까진 제가 잘 돌볼게요. 하지만 다음에는 흙으로 보내 줄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은, 이 아이를 영원히 살려 둘 수 있다면 영원히 그렇게 하고 싶은데. 어째서 찰나를 사는 아이렌은 이별에 이토록 의연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오랜 세월을 살며 진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어떠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저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암석처럼.

 

‘나에게도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좋을 텐데.’

 

그 진리를 알게 될 때까지만 곁에 있어 달라고 하는 건, 제 성장까지만 함께 살아달라고 하는 건 욕심일까.

말레우스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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