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캐해석의 중요성

빌 셴하이트&네쥬 르방셰 드림


* 약간 미래 시점(약 3년 후) 이야기입니다.

아이렌은 기본적으로 인맥이라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다. 그건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여서 그걸 마음이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을까. 도덕적 판단조차도 생리적 역겨움을 토대로 판단하는 인간의 뇌로 그런 짓을 하는 건 무리라고, 아이렌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무리를 짓고 혈육 외의 존재를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고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종족. 제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집단에 헌신할 줄 아는 존재. 그렇지만 그 ‘집단’ 밖의 무리에겐 무한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들. 그게 바로 인간이지 않던가.

 

개인은 현명할 수 있어도 집단이 되면 멍청해지는 족속들. 외로움을 못 이겨 제 살을 파먹는 짓을 하고 야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이란. 얼마나 지긋지긋한가.

그래서 아이렌은 항상 공과 사를 구별하려고 했고, 이득만을 위한 인간관계 같은 걸 싫어했다.

이득을 위해 남에게 애교를 부리느니 손해를 보는 게 낫고, 아양 떨어 받아 낸 평가 따위는 아무 득이 안 되니 함부로 고개를 숙이고 빈말을 하여 칭찬을 구걸하지 않는. 어찌 보면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대쪽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 아이렌이 그런 성격이라는 걸, 그와 함께 학교생활을 보낸 이는 모두 알고 있었는데.

 

‘억울해 미치겠네.’

 

문제는, 이걸 학교 밖 사람들이 알 길은 없었다는 거지.

아이렌은 자신을 힐끔힐끔 보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대본만 뒤적거렸다. 밋밋하게 아무 무늬도 없는 표지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건 아직 제작 중인 드라마의 제목. 그리고 이 대본의 작가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니, 에릭 씨가 얼마나 일에 철저한지 업계 사람인 본인들이 더 잘 알 텐데. 나보고 낙하산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오히려 에릭 씨라면 어쭙잖은 여자애가 자기 아들에게 집적거리며 작가 데뷔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리하셨을걸?’

 

무엇보다 빌 본인도 성에 차지 않는 시나리오나 각본을 온정만으로 읽어줄 리 없는데. 제가 빌의 학교 후배이자 친밀한 사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런 음해를 당하다니. 억울해서 마력도 없는데 오버블롯 해버릴 거 같다. 아니. 차라리 오버블롯했으면 좋겠다. 사고인 척 헛소리하는 것들을 주님 곁으로 보내버리면 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나.

정수리 끝까지 스트레스가 한가득 차오른 아이렌은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비록 실제로 실행할 건 아니라지만, 뇌라는 건 단순해서 상상만으로도 심신의 안식을 찾기도 하는 게 다행이었다.

 

‘굳이 일일이 찾아가 해명하고 화내는 것도 바보짓이지. 연예계라는 게 원래 이런 법이니까. 나는 그냥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야.’

 

화는 꼭 참는다고 좋은 게 아니지만, 감정을 드러내며 날뛰는 건 멍청한 짓이다.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존재들에게 기름진 먹이를 던져주는 꼴이고, 제가 얼마나 감정적인 인간인지 광고하는 게 되어버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의연하게, 항의하거나 경고할 때는 단호하게. 설령 마음속에 분노가 일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아 본인 외에는 누구도 모르도록 다스리고, 정말로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면 차라리 자리를 떠버리는 것. 그게 어른이고 사회인이지 않나. 물론, 자신은 아직 졸업하지 않았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인은 아니지만. 곧 졸업할 4학년이니 사회인이라고는 해도 되지 않을까?

 

“아이렌 양, 좋은 오후!”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하느라 고개 숙이고 심호흡하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곤란하게 되었다. 제 곤란한 처지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나.

정신이 번쩍 든 아이렌은 볼 안쪽 살을 몇 번 씹은 후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 들었다. 그 미소는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크게 보기 흉하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네쥬 선배.”

“뷔 군은 아직 안 왔어? 왜 혼자 있는 거야?”

“……음,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사실은 혼자 있는 게 좋고, 자신을 빌과 친해지기 위해 징검다리로 쓰려는 불순한 관심을 피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지만……. 정말로 생각할 거리가 있기도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지 않나.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아이렌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네쥬는 슬그머니 옆에 앉더니, 아침 산새 같은 맑은 목소리로 대본에 대해 조잘거렸다.

 

“아이렌 양의 대본, 정말 좋았어! 나 이런 역은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그 이상으로 두근두근해.”

“그래요? 그런데도 출연을 결정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아냐.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하고 싶어서 나온 거니까! 게다가, 뷔 군이랑 같이 출연할 수 있잖아?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줘서 고마워!”

 

아. 이렇게 순수하게 기뻐하고 감사하다니. 보고 있는 제가 다 정화될 것 같은 순수함이지만, 너무 밝아서 조금만 더 가까이 갔다가는 잿더미가 되어서 사라질 거 같다. 누가 봐도 고맙다며 절해야 하는 건 제 쪽인데. 네쥬는 빈말도 아니고 진지하게 감사를 전해오고 있지 않나.

머쓱함에 귀 끝이 붉어진 아이렌은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주제로 말을 돌렸다.

 

“해본 적 없는 캐릭터인데,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셨어요?”

“내 역할 말이지? 으음, 그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살포시 눈을 감은 네쥬는 얕게 침음 했다. 잠시 후. 그가 눈꺼풀을 들자 아까보다 더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아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연기해야 하는 ‘바이스’는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고 주변을 돕고 싶지만, 아는 것이 없어서 선의로 한 행동이 악의처럼 오해받는 캐릭터잖아? 마음 여리고 착한 소년이지만, 마을의 재난을 불러오는 비극의 시작이 되는 인물이지.”

“그렇죠. 악역은 아니지만, 주인공과 대립하게 되는 반동 인물이라고 할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바이스를 옹호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 양쪽으로 나뉘고. 그 와중에도 바이스는 마을 사람들을 화합하고 싶어 하지.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말이야. 거기에 뷔 군이 연기하는 ‘검은 인도자’가 와서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바이스에게 깨달음을 주잖아?”

 

조곤조곤 작품 줄거리를 읊는 네쥬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말을 이어갈수록 생기가 넘쳐흐르는 그는 마치 막 피어나는 꽃과도 같았다.

그 압도적인 에너지에 어느새 서먹함도 잊은 아이렌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몰입하여 네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바이스가 진정한 선함은 지식에서 온다는 걸 깨닫고 자발적으로 검은 인도자를 따라나서는 게 좋았어. 마음만 앞설 뿐 힘은 없는 바이스가 진짜 선인(善人)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고 할까? 우리 모두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내가 표현하고 싶었어.”

“……그랬군요. 그걸 그렇게 해석했구나. 네쥬 선배의 바이스, 재미있겠네요.”

“그래? 후후, 아이렌 양이 기대해 준다면 기쁠 거야! 나, 열심히 캐릭터 연구해왔으니까…….”

 

그때.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길쭉한 종이컵이 불쑥 나타난다. 마치 습격처럼 나타난 존재감에 놀란 아이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뺐지만, 네쥬는 그리 놀라지 않은 건지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조금 뒤. 익숙한 프렌차이즈 카페 로고가 그려진 일회용 컵을 확인한 아이렌은 그걸 들고 있는 손의 주인을 찾았다.

자신과 네쥬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검은 인도자’의 연기자였다.

 

“둘이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중이야?”

 

방금 막 도착한 건지 바깥의 찬 공기 냄새가 몸에 희미하게 감도는 빌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기분 좋아서 웃는 게 아니다. 빌에 대해서 나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아이렌은 조각상 같은 우아한 미소 아래에 감춰진 칼날을 눈치챘다.

왜 기분이 언짢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마른침을 삼키며 커피를 받아든 아이렌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녜요. 그냥 작품 이야기 좀 했어요.”

“그래?”

“네. 그, 커피 감사합니다. 안 사 와주셔도 되는데…….”

“어차피 걱정되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이거라도 마셔야 정신 차리지. 따뜻한 라떼야, 마셔.”

 

아이렌이 빌에 관해 잘 아는 것처럼,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다음 날 컨디션까지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상대에게 관심이 많은 빌은 자신이 사 온 커피를 얌전히 홀짝이는 아이렌을 내려다보았다.

의기양양함. 혹은 만족감 같은 게 가득 찬 빌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네쥬는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방긋 웃었다.

 

“뷔 군은 아이렌 양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악의라곤 없는 순수한 감탄에 빌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마 저 ‘좋아한다’라는 말은 호불호의 의미지, 사심을 담은 호감을 말한 게 아닐 거다. 아니. 어쩌면 후자일 가능성도 있긴 하다. 네쥬 르방셰라는 남자는 사랑에 눈을 뜬다고 하여도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지, 은근슬쩍 질투하거나 견제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아, 이래서야 일부러 대화 중인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든 자신만 바보 같지 않나. 그 와중, 이쪽으로 점점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지는 빌은 네쥬에게 손짓했다. 아이렌이 편히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은 슬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우린 준비하러 가자. 시간 끌어 봐야 모두에게 손해니까.”

“좋아, 같이 가자. 뷔 군! 아이렌 양, 다녀올게!”

“앗, 네.”

 

뜨거운 커피를 혀가 데지 않게 조심조심 마시던 아이렌은 간단히 대꾸 후 두 사람에게 눈인사한다.

‘저 커피를 다 마시기 전까진 돌아와야지.’ 그리 다짐한 빌은 바쁘게 네쥬를 데리고 탈의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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