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23년도 트위스테 드림 어드벤트 캘린더에 쓴 글 모음

올 캐릭터 드림 (전 기숙사 & 디어 크로울리 + 학교 밖 캐릭터)


이거 (https://moonmist.wixsite.com/23-ruen-advent) 하며 쓴 글 모음집.

wix로 하나하나씩 보면 너무 불편해서 25일 지났으니 게시글로 정리해서 올립니다.


12/01

 리들 로즈하트 드림, 손난로

“아이렌, 괜찮니?”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림과 에듀스를 먼저 교실로 보낸 후 빌릴 책이 있어 도서관에 들렀던 아이렌은 갑자기 제게 말을 거는 리들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였다.

 

“죄송한데, 혹시 저랑 관련해서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제가 어디 안 괜찮아 보이나. 딱히 나쁜 일도 없었고, 오히려 점심 식사로 맛있는 걸 먹어서 제대로 기분전환 한 상태였는데.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리는 아이렌의 태도에 안심한 듯 한숨 쉰 리들은 제가 그렇게 물은 이유를 밝혔다.

 

“너는 추위에 약하잖니. 어젯밤은 부쩍 추웠으니까, 잘 잤나 걱정되어서 물은 것뿐이야.”

“아하.”

 

무슨 일이 터진 걸까 긴장했는데, 그런 거였나.

리들의 세심한 배려에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은 아이렌은 찾던 책을 꺼내 품에 안았다.

 

“아침에 감기약 먹고 나왔어요.”

“뭐?”

“그냥 몸살 기운이 조금 있어서 미리 먹어둔 거지, 아픈 건 아녜요. 예방하려고 먹은 거예요.”

 

괜찮은 척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하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안색과 안정된 호흡을 확인한 그는 후배의 말을 신뢰하기로 했으나, 걱정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담요 같은 걸 하나 선물해주는 게 좋을까.’

 

곧 크리스마스기도 하고, 어디서 들은 건데 여자는 하체를 따뜻하게 해야 좋다고 하니 이 정도 선물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아이렌은 받는 만큼 돌려줘야 하는 사람이고, 남이 챙겨주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지나치게 독립적인 사람인 것 정도인가.

리들이 고민하는 사이, 곧바로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상대의 말을 기다리던 아이렌은 결국 침묵을 못 참고 제 쪽에서 말을 이었다.

 

“선배는 안 추우세요?”

“나는 괜찮단다. 장갑도 끼고 있어서 손도 시리지 않고.”

“흐음.”

 

의미를 알 수 없는 침음을 흘린 아이렌은 얇은 목도리를 한 자신과 달리 기본 교복만 걸친 리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곤,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었다.

 

“이거, 하나 드릴게요.”

 

아이렌이 건넨 건 손바닥 크기의 흔들어 쓰는 핫팩이었다. 깔끔한 포장지 덕에 이렇게만 보아서는 무엇인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 물건을 받아든 리들은 설명서가 없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이건?”

“손난로예요. 포장도 안 뜯은 새것이니까, 언제든 추워지면 쓰세요. 얼마 전에 대량 구매해서, 기숙사에 한 박스 있거든요.”

“네가 쓰지 않아도 되니?”

“제 건 교실에 또 있어요. 늘 서너 개씩 들고 다니거든요.”

 

그것참 바람직한 태도다. 유비무환이라고, 뭐든 잘 준비한다면 두려울 게 없긴 하지.

제가 추위 타는 사람의 온기를 빼앗는 게 아니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을 터. 리들은 후배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 아이렌. 잘 쓰지.”

 

사실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포장을 뜯기도 아까운 핫팩을 챙겨 넣은 리들은 벌써 안주머니가 따뜻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12/02

에이스 트라폴라 드림, 산타클로스

 

일어날 사람은 전부 일어났을 주말 오전.

모처럼의 휴일이니 다 함께 모여 놀러 갈까 싶어 아이렌을 찾아온 에이스는 뭔가 바빠 보이는 상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아이렌, 뭐 하고 있어?”

 

이렇게 어수선한 와중 그림은 어딜 간 걸까. 앞치마 차림으로 혼자 게스트 룸에 남아 벽난로 주변을 바삐 움직이던 아이렌은 청소 도구를 내려놓고 허리를 바로 폈다.

 

“벽난로랑 굴뚝 청소.”

“갑자기?”

“곧 크리스마스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 있지.

에이스는 상대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멈칫했지만, 이내 크리스마스와 벽난로의 연관성을 떠올리고 탄식했다.

믿기진 않지만, 딱 하나 있지 않나. 벽난로나 굴뚝이랑 관련이 있는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설마, 너……. 평소엔 80살 먹은 노인처럼 굴면서 인제 와서 산타를 믿는다든가 하는 건 아니지?”

 

이 학교에서 산타를 믿을 정도로 순진해 빠진 인간이 있을 리 없다. 굳이 따지자면 카림이라면 믿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이렌은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않나. 산타는커녕 신, 진리, 하물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하느냐 마냐 고민하는 사람이 산타클로스를 믿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그러나 뜻밖에도 아이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쪽 세계에는 산타클로스 없어?”

“뭐!?”

 

설마 진짜 믿는단 말인가.

에이스는 당황했지만, 이내 상대의 말 중 ‘이쪽 세계’ 부분이 거슬려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저 녀석 세계는 마법도 없다고 하고, 뭔가 다른 점이 많으니까, 원래 세계에선 진짜 산타가 있었던 건가?’

 

산타도 요정도 인어도 수인족도 없는 곳에 산타만 있는 건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정말로 아이렌이 살던 세계에선 산타가 당연히 존재하고, 하물며 10대 후반인 청소년에게도 선물을 주는 자비로운 할아버지라면, 자신은 뭐라고 답해야 하지? ‘여기엔 없다?’ 아니면 ‘이 세계에선 우리 나이까지 선물을 받는 녀석은 없다.’ 쪽이 나은가?

 

“산타 할아버지 없어?”

“어, 음.”

“없어?”

 

역시 제 성격을 생각하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지만, 진짜 말해줘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저렇게 옷이 숯덩이가 될 정도로 청소하고 있는데, 실망시키긴 싫단 말이다.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에이스의 입매가 조금씩 일그러진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렌은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곤 시원스럽게 웃어버렸다.

 

“아하하하!”

 

진실을 알려주는 게 민망할 정도로 진지했던 모습은 어딜 간 걸까.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웃은 아이렌은 다시 청소 도구를 집어 들었다.

 

“장난이야. 이 나이까지 산타를 믿는다고 거짓말하기엔 좀 그렇잖아? 내가 그렇게 순진한 사람도 아니고.”

 

이런. 속아 넘어갔다. 연극영화부 부원 아니랄까 봐, 연기력이 제법이지 않나.

자신이 짓궂은 장난에 당했음을 깨달은 에이스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게 작은 분노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반격의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 걸 보아선 애초에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너…….”

“미안, 미안. 그런데 누구 하나쯤은 진짜 굴뚝으로 쳐들어올 거 같기도 해서 미리 청소해 두려고.”

“어?”

“정말 하실 거 같진 않은데,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몇 있더라고.”

 

어째서일까. 그 ‘흥미를 보이는 사람’의 후보가 몇 명 정도 절로 떠오른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어느 사냥꾼이라던가, 재미있는 일은 일단 실행하고 볼 같은 동아리의 인어 선배라던가, 갑자기 허공에서 거꾸로 나타나는 선배도 있고, 어쩌면 선물을 나눠주는 걸 좋아하는 인심 좋은 대부호의 장남도 의심되는데…….

 

‘후보가 생각보다 많이 떠올라서 곤란한데.’

 

그렇다고 진짜 산타 흉내를 낼까.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저지를 인간들이 잔뜩 있어 곤란한 학교다. 에이스는 왜 아이렌이 저런 농담을 했나 이해가 가서 기분이 풀렸다가, 다시 청소에 열중하는 아이렌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풉!”

“음? 왜 웃어?”

“너, 수염 생겼어. 알아?”

“응?”

 

이해가 안 가는 말에 근처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아이렌은 짧게 탄식했다. 일에 열중하느라 몰랐는데, 무의식적으로 얼굴 땀을 닦아서 그런지 손의 검댕이 꼭 수염처럼 얼굴에 묻어있었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까지 검은색이라, 얼굴의 검은 얼룩이 정말 수염처럼 보인다.

엉망이 된 제 얼굴을 보던 아이렌은 뻔뻔하게 에이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하, 하, 하. 메리 크리스마스. 에이스 트라폴라 군.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뭘 줄까!”

“하하하! 뭐야, 그게! 하하하!”

 

하여간 진지했다가 장난스러웠다가, 종잡을 수 없이 엉뚱한 녀석이다.

그러나 그런 점이 또 아이렌의 매력 아니겠나.

놀러 가자고 권유하려고 했던 것도 잠깐 있고 폭소한 에이스는 숨이 가빠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저 웃기만 하였다.


12/03

듀스 스페이드 드림, 용의주도 

“됐다!”

 

듀스는 의자에서 내려온 후 뻐근한 몸을 기지개로 풀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덕분일까. 벽에 건 꼬마전구는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예뻐 보였다.

 

“아이렌, 어때?”

“예쁘다! 도와줘서 고마워, 듀스!”

 

처음엔 왜 전구에 불이 안 들어오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간 것뿐인데, 기계 속 엉킨 전선도 풀어 주고 직접 설치까지 해줄 줄이야. 듀스의 따뜻한 배려에 벽난로를 켜지 않았는데도 추위가 한결 가신 아이렌은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그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팔짱을 낀 채 반쯤 뜬 눈으로 작업을 보고 있던 그림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걸 하자고 아침부터 난리 친 거냐고.”

“그림은 낭만이 없네. 크리스마스 하면 역시 꼬마전구지.”

“흥, 먹는 것도 아닌데 뭐가 좋냐고.”

 

하지만 입과 코가 씰룩거리는 걸 보니, 마냥 싫은 건 아닌 것 같다.

누군가를 놀릴 때면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아이렌과 듀스는 바짝 붙어 서서 그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꽤 들뜬 거 같은데, 그림?”

“맞아.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후낫! 아니라고! 누가 애인 줄 아냐고!”

 

이런 걸 인정한다고 해서 부끄러운 게 아닌데, 뭘 그렇게 질색하는 걸까.

그림은 발까지 구르며 두 사람의 말을 부정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파트너는 마수를 다루는 것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한쪽 눈썹을 까딱인 아이렌은 들으라는 듯 듀스에게 권했다.

 

“맞아, 어제 진저 쿠키 사놨는데. 듀스, 먹고 갈래?”

“진저 쿠키!?”

 

저 말에 대답한 건 듀스가 아니었다.

먹을 것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안색이 싹 바뀐 그림은 꼬리를 붕붕 흔들며 손을 들었다.

 

“이 몸, 이 몸이 가져오겠다고! 어디 있냣?!”

“부엌 냉장고 옆에 있어.”

“좋아, 당장 가져오겠다고!!”

 

네 발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림의 뒷모습이 참으로 절박해 보인다.

동급생의 식탐을 잘 아는 듀스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림에게 맡겨도 되는 거야?”

“만약을 위해 반으로 나눠서 보관해 뒀으니 걱정하지 마.”

“……요, 용의주도하구나.”

 

그렇게 된다면 조금 먹고 가져오든 다 먹어버리든 상관없게 되려나. 제 파트너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는 아이렌의 선구안에 소리죽여 웃은 듀스는 제가 고쳐 걸어놓은 꼬마전구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불이 켜진 것도 보고 싶으니, 저녁에 또 올까.’

 

그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려나. 듀스는 제가 너무 티를 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망설였지만, 아이렌은 그 망설임을 단번에 날려주었다.

두 손으로 살그머니 듀스의 한쪽 팔을 안은 아이렌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속삭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듀스. 이제 이 장식을 볼 때 마다 듀스가 생각날 거 같네.”

“어? 으응. 어……. 뭘 이 정도로.”

 

나중에 다시 와도 되겠다. 아니, 밤까지 있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부터 정수리까지 순식간에 새빨간 색으로 물이 든 듀스는 계속해서 코밑을 손등으로 훔쳤다.


12/04

 트레이 클로버 드림, 맞춤 케이크

「카티, 올해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뭐가 좋아?」

 

이른 아침. 등교 준비를 마치고 기숙사 방에서 나오던 중 트레이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은 카타리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힐끔 바라보았다.

 

“벌써 준비하는 건가?”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늦어.」

“그런가? 하긴, 슬슬 크리스마스 케이크 예약 이야기가 나오던 것 같기도 하고.”

 

뭐든 빨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게다가 자신들은 지금 멀리 떨어져 있으니 케이크가 배송되는 시간도 생각해야 할 테고.

카타리나는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후 통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아무거나 좋다네.”

「정말?」

“음. 네가 만들어 준 케이크는 늘 맛있었으니까.”

 

카타리나는 먹을 것에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큰 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위장을 가진 데다가, 살기 위해서 식사할 뿐 먹는 재미로 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먹는 게 귀찮아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있었으니, 정말 어떤 케이크라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트레이의 케이크는 뭐든 정말로 맛있기도 했고 말이다.

‘으음’하고 잠깐 앓는 소릴 낸 트레이는 고민 끝 내린 제 선택을 공유했다.

 

「그럼, 레드벨벳 케이크로 할까.」

“맛있겠군. 매년 고마워. 나도 선물을 보낼 테니까 기대하도록 해.”

「아냐. 만드는 김에 하나 더 만들어서 보내주는 거니까.」

 

원래 이런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제 케이크를 만들어 보내는 게 큰일이 되겠지만, 자신은 기숙사 일 때문에라도 늘 뭔가 만들고 굽고 있지 않던가. 트레이는 정말 괜찮다는 둣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다가, 사뭇 진지하게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카티가 내 케이크 말고 다른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 먹는다면 그건 좀 서운할 것 같거든.」

 

참고로 이건 진심이었다. 제가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이 만든 케이크를 먹냔 말이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니 제 케이크보다 맛있는 케이크는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제 연인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만큼은 제가 책임져 주고 싶다. 그건 트레이 나름의 고집과도 같았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그 고집이 오히려 고마운지, 살짝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하긴, 매년 너희 집 케이크를 먹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되게 만들 거고.」

“그거 든든하군.”

 

‘아마 2년쯤 뒤엔 함께 케이크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학과과정과 제가 재학 중인 코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학과과정을 손가락 꼽아 비교해 본 카타리나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12/05

케이터 다이아몬드 드림, 어느 쪽이 좋아?

 

[ >> | 케이터, 이 셋 중에서 뭐가 제일 나랑 잘 어울려? 학교 크리스마스 파티 때 입을 건데. ]

 

‘아, 또 시작이네.’ 여느 때처럼 밴드부에 모여 부원들과 10분 연습 후 50분 티 타임을 가지고 있던 케이터는 블라섬에게 온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블라섬은 자주 제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곤 했다. 그리고 그 고민 중 선택의 부담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것은 거의 없었으니, 케이터는 가끔 이런 질문이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어도 웃으며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몇 없는, 아니, 유일한 소꿉친구가 주로 물어보는 것은 패션에 관한 게 많았다. 사고 싶은 가방의 색이 고민된다던가,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 중 뭐가 더 귀여운지 모르겠다던가, 머리를 자를까 말까 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가끔은 SNS에 유행하는 심리테스트 같은 걸 묻기도 했고, ‘남학교, 혹은 남학생은 진짜 이래?’ 같은 걸 물을 뿐이니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엑…….”

 

그러나 이번 사항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케이터는 메시지 속 첨부된 사진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릴 내었다. 블라섬이 보낸 크리스마스 파티 의상이라는 것들이, 죄다 위도 아래도 길이가 애매한 미니 드레스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이걸 입는다고? 학교에서? 아니, 뭐 여자애들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솔직히 그렇게 노출이 심한 건 아니다. 과시하길 좋아하는 마지카메 사용자 중에선 이것보다 더 아슬아슬한 옷을 입는 사람들도 널렸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면 멋스럽고 유행에 맞는, 정석적인 선택지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케이터는 제 친구에게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고 싶진 않았다. 설령, 상대가 재학하는 곳이 여학교이며 학교 행사 때 외부인도 출입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어떤 걸 골라도 ‘이건 좀’이라는 마음이 드는 케이터는 결국 선택을 회피해 버렸다.

 

[ << | 셋 다 예쁘네~! ]

[ >> | 진지하게 골라 줘! 성의없이 그게 뭐야? 【・ヘ・?】 ]

[ << | 하지만 다 잘 어울릴 거 같은데? ]

[ >> | 그래도 제일 나은 건 있을 거 아냐. 빨리 대답 안 해도 되니 솔직하게 의견 말해. ]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럼 셋 다 포기하고 천을 더 많이 쓴 드레스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대답은 별로 현명한 대처도 아닐 테고, 오히려 제 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꼴이 될 테니 마음속에만 담아둬야겠지.

 

‘그럼, 최대한 노출 없는 걸로…….’

 

원래 투표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고르는 것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세 후보를 찬찬히 살펴본 케이터는 상대적으로 치마 길이가 더 길고, 어깨도 덜 드러나는 옷을 선택했다.

 

[ << | 그럼 2번일까? ]

[ >> | 그래? OK 고마워. (. + ·`ω · ') ]

 

정말 셋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주기만 하면 괜찮았던 걸까. 아니면 이대로 의견만 묻고 자기 마음대로 골라 입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블라섬이 만족한 듯하니 잘 됐다고 생각한 케이터는 땅이 꺼지게 한숨 쉬었다.

 

‘여학교라 다행이다.’

 

그리고 블라섬도 제 말을 들어줘서 다행이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그는 말없이 차만 홀짝거렸다.


12/06

레오나 킹스카라 드림, 민스 파이

 

“선배, 이거 드실래요?”

 

아이렌이 내민 종이 상자에서는 고소한 향이 확 풍겼다. 뭐가 들어있는지 정확하겐 알 수 없지만, 익은 단백질의 향과 불을 쬔 탄수화물의 향이 느껴지는 걸 보니 어떤 음식이 들어있는지는 대충 알 거 같기도 하다.

 

“뭔데 이게?”

“다진 고기를 넣은 파이요. 크리스마스에 만들어 먹어야지 싶어서 미리 연습 겸 만들어봤는데, 꽤 나쁘지 않은 거 같아서 여기저기 나눠주고 있어요.”

“러기가 좋아할 것 같군.”

“안 그래도 맛있다고 잔뜩 드시더라고요.”

 

그런데도 전부 주지 않고 굳이 하나 남겨서 제게 주러 온 건가. 가끔 생각하지만,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하여도 퍽 귀여운 면이 있지 않나.

눈썹을 까딱이며 씩 웃은 레오나는 가볍게 손을 까딱였다.

 

“하나 줘봐.”

“예.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넘겨받은 종이 상자를 열자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고기파이가 들어있다. 일단 겉보기에는 맛있어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평소 아이렌의 요리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레오나는 별 의심 없이 파이를 들어, 포장 종이를 대충 벗겨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입에 넣고 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뭘 그리 성급하게 묻나. 제 반응을 살피는 아이렌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우스워진 레오나는 내용물을 얼른 삼키고 대꾸해 주었다. 예상대로라고 할까. 파이 맛은 나쁘지 않았다. 이만하면 마스터 셰프 과정에서 7점은 받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할까.

 

“나쁘지 않네.”

“맛있나 보네요.”

“하, 자기 좋을 대로 듣는군.”

“선배는 맛없으면 솔직하게 말해주실 분이니까요. 그 점이 좋고요.”

 

실실 웃으며 말하는 얼굴에선 악의란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파이를 마저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레오나는 자신을 흐뭇하게 보는 아이렌에게서 ‘모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코웃음 쳤다. 분명 저쪽이 족히 4살은 어린데, 눈빛만 보면 무슨 자식을 위해 사냥을 해온 어미 맹수 같지 않나.

제가 먹는 것만 봐도 좋다는 듯 미소가 귀에 걸린 후배의 시선이 괜히 껄끄럽게 느껴진다. 얼른 파이를 먹어 치운 그는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크리스마스에도 구울 거라고?”

“예. 다들 자기 기숙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 같지만,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눠 먹게요.”

“내 것도 남겨놓도록 해. 찾아가든, 러기를 시켜 가져오게 하든 할 테니.”

 

아이렌은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레오나를 빤히 바라보며 누가 봐도 들뜬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지.

아, 누가 보면 제 쪽에서 선물을 주는 건 줄 알겠다.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이 기뻐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레오나는 상대의 기쁨이 이해가 가지 않아 꼬리만 휘휘 저었다.

아이렌은 카림과는 달리 모두에게 가진 걸 베풀 만큼 사교적이거나 개방적이지 못했다. 저 자신이 가진 물질과 정신 에너지가 한정되어있음을 알고, 소수의 사람에게만 열과 성을 다하는 효율적인 헌신을 보였지. 심지어 그렇게나 애착을 보이다가도, 돌연 변덕스럽게 등을 돌리는 게 그였다.

그런 불안정한, 그러나 한정적이고 강렬한 애정을 제게 떠넘기다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지고, 겁 없는 후배인가. 자신보다 작고 어리지만 절대 저 목을 쉽게 물어뜯을 수 없는 상대를 지그시 보던 레오나는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아뇨.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싶어서요. 더 맛있게 만들게요.”

 

‘쯧.’ 혀를 찬 그는 앉은 자세를 고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07

러기 붓치 드림, 스웨터

 

“아이렌 군, 진심임까?”

“예.”

“……그걸 입으라고요?”

“그렇게 이상해요?”

 

아니, 이건 이상하다기보다는 좀 지나치게 귀엽지 않나.

러기는 아이렌이 내민 스웨터를 훑어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제 앞에 놓인 흰색 스웨터에는 호랑가시나무 무늬와 실루엣뿐인 루돌프가 아기자기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대뜸 기숙사로 찾아와서 선물이 있다기에 뭔가 했는데, 설마 이런 걸 내밀 줄 어찌 알았겠나.

제가 입기엔 좀 지나치게 귀여워 보이는 스웨터를 보며 착잡해진 러기는 할 말을 잃고 마른세수했다.

 

‘이 정도면 양반인가? 아니 그래도…….’

 

흔히 말하는 어글리 스웨터에 비하면 이 스웨터는 매우 양반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렌이 입으면 적당히 귀엽고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할까. 그런데 17살이나 먹은 남학생이 입기엔, 역시 좀 그런 것 같다.

러기가 눈에 띄게 망설이고 있자, 아이렌은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싫으시면 강제로 드리진 않을게요. 이거, 원 플러스 원이 행사할 때 사서 똑같은 게 두 벌 있는데 저랑 키가 비슷한 분 중 떠오르는 사람이 몇 없더라고요. 옷 자체는 넉넉한 크기라 남자가 입어도 될 거 같은데.”

“아…….”

 

확실히, 아이렌은 여자치곤 큰 편이지만 아이렌이랑 키나 덩치가 비슷한 사람은 많지 않지. 그 설명을 듣고 나자 러기의 머릿속에서 문득 ‘몇 없는’ 옷의 후보들이 떠올랐다.

 

‘에이스 군이나 듀스 군, 거기에……. 조금 더 큰 사람까지 치면 쟈밀 군까진 들어가려나? 작은 쪽으로 치면 카림 군이나…….’

 

자신 말고도 이 옷을 줄만 한 사람은 한 손안에 들 만큼은 있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먼저 찾아온 거라면, 역시 기회를 잡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어떻게 제일 먼저 찾아온 걸 아느냐고? 그거야 당연하지. 저기 후보 중 아이렌의 스웨터를 거절할 만한 녀석이 있는가? 에이스랑 듀스는 덥석 받아 갔을 거고, 쟈밀도 처음엔 질색했을지라도 다른 놈에게 주느니 제가 가져갈 테고, 카림은 호의를 거절할 줄 모르는 호인 아닌가.

 

“아이렌 군은 그거 입고 다니려고 산 거죠?”

“당연하죠. 입을 게 아니면 왜 사겠어요?”

“아니, 크리스마스 날만 입을 수도 있으니까여.”

“평소에도 입을 거예요. 저는 진짜 귀엽다고 생각해서 산 건데…….”

 

그거야 당연하지. 시커먼 사내놈들이 입으면 안 귀엽겠지만, 귀여운 사람이 입으면 당연히 귀여울 거다. 사실 아이렌은 귀엽다는 말보다는 어른스럽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러기는 결국 스웨터를 받아 갔다.

 

“잘 입을게여.”

“억지로 받으시는 거 아녜요?”

“아니, 그건 아니고……. 제가 왜 공짜로 받는 걸 싫어하겠슴까?! 그냥 제가 입기엔 좀 귀엽지 않나 하는 것 뿐이져.”

“선배는 귀여우니까 괜찮아요.”

 

자기보고 귀엽다고 하는 건 할머니 정도뿐인데. 키가 비슷하다고 해도 저쪽이 후배인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하지만 귀여움받는 건 썩 나쁘지 않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특권 아니겠는가. 러기는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옷을 챙겨 넣었다.


12/08

잭 하울 드림, 꼬리

 

잭은 제 꼬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존재감에 귀를 쫑긋거렸다.

‘추운데 10분만 꼬리 빌려줘.’라고 말했던 건 분명 한참 전이었던 것 같은데, 왜 아이렌은 아직 제 꼬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걸까.

꼬리 털을 빗겨 주는 손길에 간지러움을 참기 힘든 그는 결국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아이렌,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곤란해하는 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아이렌이 손을 멈춘다.

제가 생각해도 좀 오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잠깐 고민하던 그는 잭에게 대뜸 엉뚱한 소릴 했다.

 

“잭. 역시 이 꼬리 나 주라.”

“나 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건 내 몸의 일부라고.”

“그럼 잭을 가져가면 되겠네. 겨울 동안만 같이 지내자.”

 

킥킥거리며 웃은 아이렌이 껴안고 있던 꼬리를 무릎 위로 올린다. 한결 갑갑함이 사라진 꼬리를 가볍게 흔든 잭은 아무렇지 않게 태평한 소릴 하는 아이렌을 보며 한숨 쉬었다.

 

‘뭐, 아예 수인족이라는 게 없는 곳에서 왔으니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제 꼬리를 좋아해 주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꼬리 때문에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말은 자칫 위험하게 들리지 않나. 수인족에게 있어 귀나 꼬리, 뿔 같은 건 여러 차별과 대상화 때문에 소소하게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인간 외의 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아예 마법조차 없는 곳에서 온 아이렌이 뭘 알겠나. 게다가 다른 수인들에게도 이러는 게 아니라, 제게만 이런 소릴 하는 거니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입을 다문 잭이 기분 상한 것처럼 보였던 걸까. 아이렌은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불편해?”

“불편하다기보단 민망하다만.”

“민망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내 몸의 일부라고. 반대로 생각해 봐. 내가 종일 널 껴안고 있으면 민망하지 않겠어?”

 

이것 이상의 적절한 비유는 없다. 그러니까 아이렌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잭의 생각과 달리 아이렌은 두 눈을 빛내며 잭과 마주 보도록 몸을 기울였다.

 

“따뜻하겠다, 그거.”

“뭐?”

“나는 이득이지. 말 나온 김에 반대로 할까?”

 

꼬리를 완전히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렌은 잭의 정면으로 와 두 팔을 벌렸다. 아니, 가만히 품을 열고 서 있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겁도 없이 그 품에 파고들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든 잭은 제게 안겨드는 따뜻한 몸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확 뺐다.

 

“넌 여자애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뭐, 뭐야. 왜 혼내는 거야?”

“하아…….”

 

다른 남자에게도 이렇게 안기려 드는 건 아니겠지. 아니, 레오나에게 하는 걸 보면 이미 충분히 그러는 거 같은데. 세상엔 좋은 남자도 많지만 나쁜 남자도 많고, 특히 이 학교에는 불량한 녀석이 한가득 있다. 그런데도 마력도, 날카로운 이나 발톱도 없는 주제에 너무 조심성이 없는 아이렌을 보고 있자니 의지와 상관없이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결국 잭은 완전히 상대를 밀어내는 대신, 어중간하게 아이렌을 무릎 위에 앉혀두고 마른세수할 뿐이었다.


12/09

아줄 아셴그로토 드림, 핫초코

 

달그락.

테이블과 식기가 부딪치며 나는 맑은소리에 고개를 들자,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아줄이 보인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아이렌 씨.”

 

뜻밖의 상황에 의아해진 아이렌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평소라면 모스트로 라운지 구석에 앉아 업무 중이거나 상담 일로 바쁜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너무 바빠서 직접 일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라운지 안을 둘러본 아이렌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줄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지배인이 직접 서빙하는 경우도 있나 해서요.”

“보통은 없지요. 이건 특별 서비스입니다.”

“그래요?”

“그럼요.”

 

태연하게 대꾸한 아줄은 가지고 온 음료를 아이렌 앞으로 내민 후, 뭔가가 담긴 작은 접시를 하나 더 내려놓았다. 쟁반 위 식기를 모두 테이블에 옮긴 그는 뒤따라온 후배에게 빈 쟁반을 넘긴 후, 자연스럽게 아이렌의 옆에 앉았다.

지금 보니 이거, 서빙이 본 목적도 아닌 거 같다.

보통이면 앉아도 되겠냐고 물은 후 앉을 텐데, 이리도 덥석 자리를 차지하는 걸 보니 뭔가 긴히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아이렌은 어쩐지 들떠 보이는 아줄의 모습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른 후, 이것저것 올려진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머그컵에 담긴 데운 우유. 고급스러운 티스푼. 서비스로 나온 쿠키. 여기까지는 익숙한 구성이지만, 작은 접시에 담겨있는 내용물은 처음 보는 것인데.

아이렌은 당구공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초콜릿 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제가 시킨 건 그냥 핫초코 한 잔인데요.”

“압니다. 그건 서비스입니다.”

“흐음.”

 

천하의 아줄이 서비스라. 아마 다른 학생들이 이런 일을 겪는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준 게 분명하다!’라고 외쳤을 거다.

하지만 아이렌은 알고 있었다. 아줄은 감성적인 말을 내뱉거나 상냥하게 대하는 것 대신, 물질적이고 실속있는 도움으로 호감을 표현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엔 좀 낯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이 선배에게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

주는 것에 익숙한 탓에 무언가 받는 건 익숙하지 않지만, 제가 그 호의를 받음으로 상대가 기쁨을 느낀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아줄을 위해서라도 사양하지 않는 게 답임을 아는 아이렌은 장난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따라 서비스가 너무 과하신 거 아녜요?”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면 안 됩니다. 아이렌 씨에게만 해드리는 거니까요.”

“네. 입 꾹 닫을게요. 고마워요, 선배.”

 

고맙다는 그 한마디에, 아줄은 금방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웬만하면 뭘 받아도 일단 사양하는 말부터 나오는 아이렌이 제 호의를 단번에 받아준 것이 기쁜 것이었다.

그리고 우스운 것은, 아이렌은 또 그런 아줄을 보며 대단히 흐뭇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지.

티스푼으로 머그컵 안을 가볍게 저은 그는 접시의 초콜릿을 톡톡 건드렸다.

 

“이거, 코코아 밤(Cocoa Bomb)이죠?”

“예. 최근 핫초코를 자주 드시기에 준비했습니다. 만들어 진 걸 마시는 것도 좋지만, 이런 건 또 다른 재미가 있으니까요. 찾아보니 이게 가장 인기가 좋은 제품이라는 것 같더군요.”

“흠. 그럼 이제 이것도 옵션으로 파는 건가요?”

“아뇨. 팔려고 준비한 게 아닙니다. 당신만을 위해 마련한 거니까요.”

 

그거참 다정한 배려 아닌가. 오해의 여지가 없는 직설적인 표현에, 아이렌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 동요는 아니지만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상대의 반응에 한층 더 기가 산 아줄은 상대를 부드럽게 독촉했다.

 

“자, 식기 전에 넣어서 녹이세요.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이런 제안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아이렌은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티스푼을 이용해 코코아 밤을 우유 속에 넣었다. 내용물이 튀지 않게, 천천히 뜨거운 액체에 입수한 코코아 밤은 금방 형태를 잃고 무너져 안에 들어있는 마시멜로를 토해냈다.

아이렌은 단맛이 잘 퍼지게 열심히 핫초코를 저으며 물었다.

 

“선배는 안 드셔보셨나요?”

“예. 아무래도 단 음료는 최대한 멀리하려다 보니.”

“단 걸 싫어하시는 건 아니죠?”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머리를 써야 할 때라면 초콜릿 하나 정도는 먹곤 하니까요.”

 

‘그렇구나.’ 혼잣말인지 대꾸인지 모를 한 마디를 중얼거린 아이렌이 혀가 데지 않게 조심하여 핫초코를 맛보았다. 늘 마시던 것과는 또 다른 제품이라 그런 걸까. 오늘의 핫초코는 한층 더 깊은 단맛이 나고 있었다.

 

“맛있다…….”

“다행입니다. 입에 맞으신 모양이군요.”

“네. 너무 달기만 한 게 아니라 씁쓸한 풍미가 있어서 좋네요.”

 

뜨거워서 한 번에 마시지 못하고 조금씩 내용물을 홀짝거리던 아이렌은, 흐물흐물해진 마시멜로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렇게 입안에 초콜릿과 마시멜로의 맛이 잔잔히 퍼졌을 즈음. 돌연 아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의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겹쳤다.

쪽. 아주 잠깐이지만 확실하게 닿은 체온에 화들짝 놀란 그는 고개를 확 뒤로 빼며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 아이렌 씨?”

“선배가 주신 건데, 맛이라도 보시라고요.”

 

물론 겨우 입술이 스친 것 정도로는 핫초코 맛이 제대로 느껴질 리 없으니, 이건 그냥 수작질일 뿐이었다. 아줄은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렌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12/10

제이드 리치 드림, 꼬리 없는 순록

 

비는 소리를 퍼지게 하지만, 눈은 소리를 흡수한다고 한다.

제이드는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렌을 지그시 바라보며,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뽀득뽀득. 눈이 밟히며 압축될 때 나는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 발자국이 남겨진다. 마치 눈을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돌아다니고 있는 아이렌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이드의 시선은 눈치채지도 못한 건지, 도무지 돌아볼 기미도 보이지 않고 눈밭을 떠돌 뿐이었다.

 

‘겨우 눈 하나로 저렇게 신나시다니.’

 

고향이 눈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건 올해 첫눈도 아니지 않나.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소탈한 성격과는 별개로 매사에 진지하고 늘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가 기저에 잠들어있는 아이렌이 저렇게나 들떠있는 걸 보고 있자니, 이 얼음 결정이 참으로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익숙하지 않다고 무조건 열광하는 건 아닐 텐데.’

 

심지어 아이렌은 추운 걸 싫어하지 않은가. 지금도 입술에 푸른 기가 슬쩍 도는 것이, 추위 타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게다가 눈 쌓인 나무나 설경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는 아이렌의 붉게 물든 손끝을 보라. 저대로 둔다면 아마 내일은 감기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제이드는 쉽게 상대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마치 혼자 산에 가 야생동물과 마주쳤을 때처럼.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그는, 문득 앙상하게 가지만 드러낸 나무들 사이에 선 아이렌을 보고 어느 육지 동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절묘하게도, 뒤에 있는 나뭇가지가 아이렌의 머리 부분과 겹쳐서 꼭 뿔처럼 보인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높게 뻗은, 매년 새롭게 돋아나는 생명력의 상징인 사슴뿔 말이다.

물론, 암사슴은 뿔이 돋아나지 않는다곤 하지만……. 순록은 암컷도 뿔이 난다는 모양이니, 너무 고증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겠나.

눈밭에 우두커니 선 꼬리 없는 사슴에 흥미가 생긴 그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겨 상대에게 다가갔다.

 

“제이드 선배?”

 

아무리 눈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190cm나 되는 장신이 걸어오면 그 기척을 모를 순 없는 법이다. 아이렌은 가까이 다가온 제이드가 제 코트를 만지는 걸 내버려 둔 채,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제이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비꽃색 눈동자에 눈웃음 지어 보이더니, 코트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주었다.

 

“감기 걸리십니다. 옷은 여미고 다니세요.”

“선배는 안 추워요?”

“제 고향은 꽤 추운 곳이라서,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코트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 후 비뚤어진 목도리도 매만져 준 그는, 문득 드러난 새하얀 목을 보곤 마른침 삼켰다. 평소에도 목이 가늘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까 잠깐 떠올린 상상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독 가늘고 길게만 보인다.

 

“선배?”

 

무언가에 홀린 듯, 조금씩 내려가던 고개는 이내 아이렌의 목에 닿았다. 따스한 숨결이 목선을 타고 흘러갈 즈음. 살짝 이를 세운 제이드는 아프지 않게 바디 미스트 향이 남은 목덜미를 깨물었다.

‘힉!’ 갑자기 날카로운 고통이 닿는 탓에 화들짝 놀란 아이렌은 급히 몸을 빼며 목도리를 빈틈없이 꽁꽁 둘렀다.

 

“뭐, 뭐예요?”

“그냥, 아이렌 씨가 좋아서요.”

“…….”

 

실없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걸까. 할 말을 잃은 아이렌이 입만 뻐끔거린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얼굴이 붉어져 있는 걸 보면, 이 갑작스러운 스킨십이 싫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열기가 오른 상대의 얼굴이 꼭 전설 속 루돌프의 코 같다고 생각한 제이드는, 결국 ‘후후’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12/11

플로이드 리치 드림, 전기 담요

 

“아기새우야, 따뜻해?”

“네.”

“헤에, 얼마나?”

“이대로 평생 살고 싶어요. 아니, 봄이 올 때까지만…….”

“흐음. 그 정도야?”

 

더는 목소리를 내기도 귀찮은 걸까. 아이렌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플로이드는 자신의 품에서 무기력하게 안긴 채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렌을 보며 히죽 웃었다. 평소에도 무릎 위에 앉혀 껴안고 있으면 저항 한번 않고 가만히 있긴 하지만, 오늘따라 더 얌전하게 있는 건 분명 새로 산 담요 덕분이겠지.

전원만 켜면 따뜻한 열이 오르는 이 전기담요는, 수온이 차가운 곳에서 태어나 자란 플로이드에겐 솔직히 크게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추위에 쥐약인 아이렌에게는 달랐으니, 방과 후 ‘좋은 걸 샀으니 써봐라’라며 기숙사로 상대를 끌고 온 플로이드는 냅다 제 아기새우를 전기담요로 둘러싼 후 전원을 켰다.

그리고 그 결과, 아이렌은 그대로 흐물흐물 녹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온몸이 뜨끈해진 상대를 껴안은 채 기숙사 담화실 소파에 앉아있는 플로이드는 제가 상상한 대로, 아니 그 이상의 기호성을 보이는 아이렌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이대로면 익어버리는 거 아냐? 아, 새우구이 먹고 싶다.”

“혹시 절 잡아먹는다면, 아프지 않게 한입에 먹어주세요.”

“아하하! 뭐야 그게? ……흐음, 근데 아기새우는 한입에 다 안 들어올 거 같은데.”

 

자신에 비하면 한참 작은 아이렌이지만, 그래도 역시 한 입에는 안 들어오겠지. 자신과 동갑인 리들이나 카림은 물론, 3학년인 릴리아 보다도 크지 않나?

그렇다면 몇 번 정도 베어 물어야 입에 다 들어올까. 3번? 아니면 4번?

 

“저기, 뭐 해요. 선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품 안의 몸에 볼을 비비고 있자니, 뒤쪽에서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플로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막 귀가 한 것인지, 얼떨떨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멜로드는 아이렌과 플로이드를 힐끔힐끔 번갈아 보았다.

 

“보면 몰라?”

“모르겠으니 물어본 건데요……. 아이렌은 왜 여기 있고?”

“잡혀 왔어.”

 

담백하게 진실을 말한 아이렌은 작게 하품했다. 보아하니, 따끈따끈한 담요와 플로이드의 손길 때문에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상대가 몸에 두른 알록달록한 담요가 전기담요임을 눈치챈 멜로드는 흥미를 갖고 다가왔다.

 

“처음 보는 담요인데, 아이렌 네 거야?”

“플로이드 선배 거야.”

“엑, 진짜?”

“응.”

 

제 선배가 추위를 그렇게 타는 사람, 아니, 인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멜로드가 사실이냐고 묻는 듯 플로이드를 보자, 어깨를 으쓱인 그가 아이렌의 대답을 정정했다.

 

“이제 아기새우 거야. 돌아갈 때 줄 거니까.”

“아, 네…….”

 

평소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기분 따라 아이렌을 끌고 다녀서 주변을 헷갈리게 해도, 이럴 때 보면 기본적으로 참 상대를 좋아하는구나 싶단 말이지. 물론 그 애착이 성숙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소유욕이나 원초적인 애착에 더 가까워 보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사랑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지 사랑 아닌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둘을 보며 좋은 구경 한다는 듯 히죽거리던 멜로드는 방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괜히 근처를 맴돌았다.

 

“이러다 아이렌 녹겠어요, 선배.”

“아. 녹으면 한입에 들어가겠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니, 물론 농담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플로이드가 저런 소리를 하면 덩말로 아이렌을 삼켜버릴 거 같단 말이지. 멜로드는 날카로운 플로이드의 치아를 떠올리곤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런 치아라면, 솔직히 사람도 씹을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든, 사감이랑 부사감이 이 모습을 보면 질투할 테니까 적당히 해두세요.”

“질투를 왜 해? 아기새우는 원래 내 건데.”

“와…….”

 

하여간 대단한 선배다. 문제는 저건 허세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라는 거지. 아이렌이 만인의 연인이라 해도, 그의 최우선이 누구인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으니 말이다.

그럼, 닭살 커플이 좋은 시간 보낼 수 있게 자신은 이만 빠져 줘야지.

멜로드는 부디 아이렌이 중간에 깨서 무사히 돌아가길 바라며 걸음을 돌렸다.


12/12

카림 알아짐 드림, 택배

 

“이사르! 이거 네 거 아냐?”

“응?”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하나둘씩 기숙사로 돌아오는 시간.

친구들과 함께 2학년 기숙사로 돌아온 이사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부름이 들린 쪽을 바라보자, 담화실에 놓인 커다란 상자와 그 근처에 모여든 동급생들이 보인다. 택배의 주인이 오지 않아 저들끼리 내용물의 정체를 추리하고 있는 소녀들은 들뜬 표정으로 속닥거리고 있었다.

 

“뭔데, 뭔데?”

“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온 소포잖아?”

“근데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큰 거야?”

 

상자 크기만 봐서는 가전제품이라도 들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있을 건 다 갖춰져 있는 이 코벤의 기숙사에 누가 가전제품을 사겠나? 무엇보다 택배 주인인 이사르는, 저런 걸 산 적이 없었다.

 

“얘들아, 잠깐만!”

“아, 택배 주인 왔다~!”

 

이사르가 오자 동급생들은 바다가 갈라지듯 흩어져 순식간에 상대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기대를 품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멋쩍게 웃은 그는 누가 보낸 택배인지를 확인했다.

수신인은 확실히 자신이 맞고, 발신인은 ‘A.K.’라고만 적혀있다.

그것만으로도 누가 보낸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 이사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카림이 보낸 거구나!’

 

곧 크리스마스니까 선물을 보낸 걸까. 제 쪽은 아직 선물을 고민하고 있는데, 참으로 빠르지 않나.

서두르는 것과는 맞지 않은 카림이 벌써 선물을 보낸 걸 보아하니, 분명 쟈밀이 ‘택배가 밀리지 않게 일찍 보내라’라고 조언한 게 분명했다.

 

“뭐야? 빨리 열어봐!”

“알았어, 알았어! 어디 보자…….”

 

친구들의 재촉에 상자를 뜯어보는 이사르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살피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가장 신난 건 연인에게 택배를 받은 이사르 쪽이었다.

 

“우와~!”

 

커다란 상자를 열자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무릎 높이까지 오는 상자 안에 가득 찬 것은 전 세계에서 모아온 듯한 수많은 과자와 사탕, 초콜릿들이었다.

종류도 개수도 다양한 디저트들을 보며 눈을 빛내는 친구들은 이사르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놀려대었다.

 

“부럽다, 이사르! 남자친구가 이런 것도 보내주고!”

“이 정도면 크리스마스 파티에 안 가도 되는 거 아냐?”

“아~ 부러워라~!”

 

이사르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언젠가 제가 먹고 싶다고 말했던 과자들이 상자 안에 모두 들어가 있는 걸 확인한 그는, 몰려오는 감동 탓에 주변 목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전부 흘리듯이 말한 거고, 어떤 건 직접 말하지도 않고 마지카메 게시글에 반응한 게 전부인 간식도 있는데, 이걸 다 어떻게 찾은 걸까? 아, 물론 이것도 혼자 한 게 아니라 쟈밀이 도와줬을 거 같긴 하지만…….

 

‘쟈밀도 자기 여자친구 챙겨주느라 바쁠 텐데, 고생이네~’

 

나중에 카림에게 선물을 보낼 때 쟈밀 것도 하나 챙겨줘야겠다. 아, 이왕이면 쟈밀의 여자친구 것도 준비하면 좋겠지. 누군가를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이사르는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혼자 실룩거리며 웃다가 주변 친구들에게 말했다.

 

“저기, 이거 다 같이 나눠 먹을래? 이 정도면 다 모여서 먹어도 될 거 같은데!”

“와, 이사르 최고!”

“먹을래, 먹을래!”

 

카림이라면 아마 제가 혼자 다 먹는 것보단, 다 같이 나눠 먹는 걸 더 좋아할 거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물론, 제가 가장 많이 먹을 거지만 말이다.

과자들 사이 있는 크리스마스카드만 쏙 빼서 챙겨둔 이사르는 과자를 근처 테이블로 옮겼다.


12/13

쟈밀 바이퍼 드림, 겨울엔 스튜를

 

“어때?”

“마히어오.”

“……입에 음식 넣은 채로 말하지 마.”

 

쟈밀의 가벼운 핀잔에 아이렌이 멋쩍게 웃으며 씹고 있던 내용물을 꿀꺽 삼켰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 수저를 저을 때마다 김이 올라오는 쟈밀의 비프스튜는 추위를 잊게 만들기엔 딱 좋았다. 입안의 감칠맛을 음미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이렌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삼스럽지만, 선배 정말 요리 잘하신다.”

“그거 고맙네.”

“역시 선배에게 시집가야겠다.”

 

이젠 저 소리를 너무 들어서 장난인지 진심인지도 모르겠다.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쟈밀은 작게 한숨 쉬더니,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럼 너, 내가 요리 못하면 시집 안 올 거냐?”

 

보통은 ‘그러던가’라고 은근슬쩍 받아주던가 ‘그렇게까지 칭찬 안 해도 된다’라고 멋쩍어했지만, 언제까지 장난에 당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쟈밀의 다소 짓궂은 장난에 숟가락질을 멈춘 아이렌은 눈만 깜빡이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선배 얼굴이라면 하루에 냄비 세 개 태워 먹어도 가야죠.”

“얼굴이 중요한 거냐고…….”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선배는 잘생겼고 능력 있으니 요리 정도는 못 해도 되는 데 요리도 잘하시잖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칭찬을 쏟아붓는 건 여전하다. 쟈밀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아이렌 때문에 마른세수를 했다. 차라리 대놓고 아부하는 거였으면 모르겠는데, 반박은 거절한다는 듯 진지하게 대꾸하는 꼴이란.

다른 녀석들에게도 늘 이렇게 진지하게 칭찬하겠지. 그걸 생각하면 조금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칭찬을 외면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입맛을 맞추는 건 까다로운 일이고, 입맛을 길들여 놓는 것만큼 확실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없지 않던가.

제가 만든 요리를 깨끗하게 비워가는 아이렌의 모습에 감출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 쟈밀은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며 대꾸했다.

 

“다음에 또 먹고 싶으면 말하고.”

“레시피 알려주시게요?”

“됐어. 해주러 올게. 조리법이 같다고 다 같은 맛이 나는 건 아니니 말이야.”

 

요리라는 건 결국 기술이다. 아이렌의 요리 솜씨는 나쁘지 않지만, 가끔 자기가 먹는 건 대충 조리하는 걸 보면 직접 해줘야만 할 것 같다. 남에게 대접할 때는 정성을 다 해도, 아침에 바쁘다고 타기 직전까지 구운 빵에 아무 잼이나 발라 먹고 온 걸 생각하면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단 말이다.

쟈밀의 살뜰한 대우에 수저만 오물거리던 아이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지금 결혼해버릴까?”

“학원장이 들으면 기절하겠군.”

“하하.”

 

하지만 뭐, 학원장만 눈감아 주면 그냥 저질러 버려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겨울엔 매일 따뜻한 국물 요리를 해주고, 여름엔 시원한 음료도 만들어 주며 알콩달콩 지낼 텐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쟈밀은 다음에는 아이렌에게 뭘 만들어 줄지 고민했다.


12/14

빌 셴하이트 드림, 코트

 

어느 평화로운 날의 오후, 폼피오레 기숙사의 담화실.

빌이 가져온 유명 패션 잡지의 12월호를 보던 아이렌은 빌이 모델로 나온 광고를 보곤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평소엔 교복 차림이나 기숙사복 차림을 많이 봐서 그런 걸까. 유명 브랜드의 옷을 걸치고 있는 빌은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잘생긴 건 잘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꾸미고 나니 아예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로 보인다고 할까.

이대로 박물관으로 가져가도 될 것 같은 근사한 빌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렌이 진심을 담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잘생겼다.”

“뭘 당연한 말을 하는 거니?”

“그럼 이제 하지 말까요?”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한 대꾸에 빌이 미간을 구겼다. 그 즉각적인 반응에 괜히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린 아이렌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아예 말을 돌려버렸다.

 

“이 코트 따뜻해 보이는데, 어땠어요?”

“나쁘지 않았어. 한겨울에 입기엔 좀 얇지만 초겨울이나 늦가을 즈음에 입긴 좋다고 할까.”

“흐음.”

 

평소라면 제 얼굴 위주로 우선 훑어본 후 마지막으로 사진 전체를 감상하고 잡지를 덮는 아이렌인데. 오늘은 어째 진지하게 화보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아까 물은 코트를 입고 찍은 사진만 보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옷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빌은 슬쩍 아이렌의 뒤로 다가가 물었다.

 

“마음에 드니?”

“예. 이 사진 예쁘네요.”

“아니, 코트 말이야. 내 사진이야 당연히 마음에 들겠지.”

 

저 자신감을 보라. 아이렌은 넘치는 상대의 자기애에 탄식했지만, 그걸 반박하진 않았다. 맞는 말에 반박하는 건 거짓말을 하는 꼴이 되지 않나. 빌이라면 파파라치 사진도 아름다울 걸 아는 아이렌은 헛웃음만 흘리다가 능청을 떨었다.

 

“예쁘네요. 선배가 입어서 그런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구나.

어느새 아이렌의 돌려 말하기 기술에 완전히 익숙해진 빌은 눈대중으로 아이렌의 치수를 생각해 보았다. 이 정도 키에 체격이라면, 아마…….

 

‘……그 사이즈면 맞겠지.’

 

아이렌의 신상 정보 같은 건 모르지만, 옷에 대한 건 제가 제일 잘 안다. 자신의 눈썰미를 믿는 그는 제가 입은 색상 외에 어떤 색이 가장 아이렌과 잘 어울릴지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며 슬쩍 웃었다.


12/15

에펠 펠미에 드림, 타르트 타탱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가 되니 완전히 그쳤다.

평소보다 조용한 고물 기숙사. 그림은 춥다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아이렌 혼자서 담화실에서 담요를 두른 채 쉬고 있을 때. ‘전해 줄 것이 있다’라는 전언을 받고 찾아온 에펠은 거의 소파에 눌러 붙어있는 아이렌을 보고 놀라 탄식했다.

 

“뭔가 신기하네.”

“응? 뭐가?”

“아니, 아이렌 군은 확실히 밖보단 안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늘어져 있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서.”

 

아이렌은 평소 기숙사에 머무를 때도 늘 바쁜 편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도 하고, 예습이나 복습을 하기도하고, 책을 읽거나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즐기느라 바빠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일은 드물었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난 아이렌은 담요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한숨 쉬었다.

 

“추운 건 딱 질색이야.”

“하하, 그래 보여.”

“사람도 겨울잠을 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곰처럼.”

“하지만 아이렌 군은 눈을 좋아하잖아. 겨울 동안 자면 눈은 볼 수 없을 텐데?”

“흠……. 그건 그러네.”

 

새하얗게 변한 창밖 풍경을 힐끔 보고 웃은 아이렌은 부엌으로 가버렸다.

잠시 후. 잘 포장된 애플파이 한 판을 들고 온 그는 기다리고 있는 에펠에게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자. 이거, 에펠 군이 전에 전해 준 사과로 만든 타르트 타탱이야. 에펠 군이 전해 준 거니 맛이라도 보라고 불렀어.”

“그런 거야? 고마워. 잘 먹을게!”

“후후. 트레이 선배랑 같이 만든 거니, 분명 맛있을 거야.”

 

그거라면 정말 맛없기 힘들겠지. 사과도 사과로 만든 요리도 질리도록 먹으며 큰 자신이지만, 트레이의 제과 제빵 솜씨는 학교 제일이 아니던가. 거기에 어느정도 손재주가 있는 아이렌까지 함께 만들었다면, 맛이 없는 쪽이 이상하리라.

달콤한 향기가 나는 타르트 타탱을 가만 바라보던 에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기서 하나 먹고 가도 돼?”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아무것도 안 하고 한가하게 있는 아이렌과 같이 담소라도 나누고 싶다. 마침 그림도 없고, 다른 이들도 없지 않나.

거의 오지 않는 독점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에펠이 기회를 향해 손을 뻗자, 아이렌은 그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그럼. 핫초코 타올 건데, 먹을래? 아니면 홍차가 좋을까?”

“난 아이렌 군이랑 같은 거면 돼! 고마워.”

“천만에. 그럼, 타르트 이리 줄래? 잘라서 올게.”

 

아, 역시 뭐든 말해보고 볼 일이다.

선물을 다시 돌려준 에펠은 아이렌이 덮었던 담요를 무릎 위로 끌어와, 남아있는 온기를 품었다.


12/16

루크 헌트 드림, 설국

 

“응?”

 

달도 얼어붙을 것 같은 추운 겨울밤. 늦은 시간 외출 후 기숙사로 돌아가던 루크는 저 멀리서 움직이는 검은 물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느릿느릿. 거리를 오가는 그것은 분명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는 쉽게 그게 제가 본 것을 믿지 못했다. 사람이 돌아다니기엔 늦은 시간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당장 자신도 지금 귀가 중이지 않나?

루크가 제 눈을 의심하는 건 상대의 옷차림이 너무 얇다는 것. 그리고 그 얇게 차려입은 이가 원래라면 지독하게 추위를 타는 사람이라는 것.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꿈이나 환각은 아닌 듯한데.’

 

나부끼는 긴 치마,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땋은 머리, 발끝에서 자라난 그림자까지. 모두 눈밭과 대비되어 필요 이상으로 검게 보인다. 마치 잉크라도 부어놓은 듯 모든 것이 새까만 아이렌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고만 있던 그는, 결국 걷는 속도를 부쩍 올려 상대에게 다가갔다.

 

“아이렌 군?”

 

눈을 쓸어두어 깨끗한 거리와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루크의 걸음 때문에, 상대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 자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멍하니 앞만 보며 걷던 아이렌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고, 이내 자신을 부른 루크에게 인사했다.

 

“루크 선배, 안녕하세요.”

 

폐까지 찬 공기가 들어간 건지 파랗게 질린 입에서는 입김도 나오지 않았다. 루크는 그 점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잠깐 말을 잃었다.

역시 환상인가.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데.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잘게 떨리는 아이렌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크는 상대의 손을 잡아보았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차가운 게 느껴지는 손은 새빨갛게 굳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니? 게다가, 이 차림은…….”

“계속 잠이 와서요.”

“뭐?”

“잠 깨려고…….”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한 아이렌은 잡힌 손을 빼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이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후배가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아, 괜히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세상 그 누가 춥다고 이런 날에 겉옷 하나만 걸치고 밖에 나온단 말인가. 심지어 여름에도 냉방이 잘 되는 곳에 가면 춥다고 하는 사람이 말이다.

할 말은 많지만, 그 모든 게 지금 아이렌에게는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 그걸 아는 루크는 최대한 말을 정제하여 짧게 말했다.

 

“왜 필사적으로 졸음을 쫓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감기에 걸리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구나.”

“괜찮……, 에취!”

“이런.”

 

이럴 줄 알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반응이 나타난 게 신기할 지경이라 할까.

슬쩍 팔을 당겨 상대를 끌어안은 루크는 확 끼쳐오는 차게 식은 체취에 탄식했다.

 

“몸이 얼음장 같구나. 일단 어디든 들어가 따뜻한 걸 마시도록 할까?”

“괜찮아요.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씻고……. 아, 그럼 더 졸리려나.”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깨어있으려는 이유가 뭘까. 공부? 취미 활동? 그것도 아니면, 창작 활동이라도 하는 걸까?

이래저래 고민하던 루크는 제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아이렌의 귀에 속삭였다.

 

“해야할 일이 있는 거라면, 옆에 있어 줄까?”

“네?”

“졸면 깨워주고, 도와줄 게 있다면 도와주도록 할게. 어떠니?”

 

적어도 그게 잠 깨려고 영하에 가까운 기온의 밤에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 점은 아이렌도 공감하는지, 잠깐 눈동자만 굴리며 고민하던 희게 질린 얼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럼.”

“잘 생각했어, 몽 르나르.”

 

일단은 벽난로 근처에 앉히고 코코아라도 마시게 해야겠다. 담요도 둘러주고, 해야 할 일이 뭔지도 차근차근 들어봐야지.

어째 제가 더 신이 난 루크는 가볍게 아이렌을 들어 올려 안은 채 고물 기숙사로 향했다.


12/17

이데아 슈라우드 드림, 예약 메일

 

포플러 애틀랜틱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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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월) 00:00 발신

 

[첨부 1개] 78KB 저장 | 바이러스 검사

 

안녕. 포플러 씨.

갑자기 편지를 보내서 당황했으려나. 하지만 뭔가, 직접 대화하는 건 멋쩍어서. 아날로그하지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고 할까. 아니, 애초에 아날로그라고 하기에는 전자 메일이니 완전 아날로그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이거, 좀 조크같네.)

 

코벤에서는 크리스마스 같은 큰 행사 때는 커다란 홀에 모여서 파티를 연다고 하던가? 나 같은 아웃사이더는 생각만 해도 기운이 쭉 빨리지만, 포플러 씨는 사람 대하는 법도 꽤 잘 아니까 즐기고 올지도. 그쪽 학교에 여자친구(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그거 누가 봐도 여자친구고…….) 케이터 씨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파티 때는 정장이나 드레스도 입는다고 하던데. 포플러 씨는 어떤 드레스를 입었을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딱히 보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 기념 사진 같은 게 있다면 궁금할지도. 응.

 

우리 기숙사에서는 크리스마스 파티……, 라고 할 것까진 없고. 그냥 이런 행사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기분만 낸다고 내부에 조명 좀 놓고 전자 트리를 두고 과자나 잔뜩 까먹기로 했어. 누가 콘솔 게임을 가져와 게임 대회를 열 거라고 하기도 하던데, 어차피 누가 우승자가 되든 마지막에는 이 몸이 나서서 사감의 위엄을 보여 줄 생각이라오. 내가 있는데 다른 누가 게임 챔피언을 하겠어? 어림도 없지.

 

첨부파일로 같이 보내는 건, 그, 전에 같이 하자고 한 게임의 시리얼 코드야. 포플러 씨가 흥미를 보인 게 기뻐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할까? 그런 거로 보내는 거니, 부담가지지 않고 받아주었으면 좋겠구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에, 그, 인게임 속 광장에 같이 접속해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밤늦게까지 파티를 하지 않을 거 아냐. 그렇지?

 

회신 기다릴게.

 

그……, 메리 크리스마스. 포플러 씨.

다음엔 통화로 직접 이 말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네.


12/18

오르토 슈라우드 드림, 밤하늘

 

“레르네, 정말 안 가봐도 돼?”

「괜찮아요.」

“하지만 모두가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잖아. 레르네만 빠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저 말고도 빠지는 학생이 꽤 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변명 같은데.

오르토는 화면 너머로 보이는 무덤덤한 레르네의 표정에서 이데아를 떠올리고 한숨 쉬었다.

 

“형도 그렇고, 르니안도 그렇고, 우리 쪽 사람들은 왜 이렇게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걸까?”

「천재는 원래 고독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천재가 아니지만.」

“그런가? 나는 레르네도 아주 우수하다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긴 하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다. 인간의 감각이 아닌 데이터와 분석을 통해 상대의 기분을 파악한 오르토는 쉽게 다음 대화를 생성해내지 못했다.

상대와 함께 자라온 오르토는 어째서 레르네가 이 칭찬에 마음 편히 기뻐하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우수한 이들만 모인 탄식의 섬. 그 안에서도 제 형인 이데아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천재였고, 레르네의 오빠이자 자신들의 방계 친척인 르니안 또한 천재에 가까운 지능을 가진 인간이었으니까.

더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자신은 논외로 치더라도, 레르네는 두 연장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우수했으니 남들이 아무리 똑똑하다 해줘도 받아들일 수 없는 거겠지. 분명 고향 밖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지능을 평가하자면, 상대 또한 대단히 우수한 인재일 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도련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아까부터 자꾸 이동하고 계신 것 같은데.」

“후후, 궁금해?”

 

오르토는 짓궂게 웃을 뿐, 제대로 된 상황을 설명해 주진 않았다.

기숙사를 나와 거울을 방까지 지나온 그는 영상통화의 화질을 조정하더니, 갑자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흔들리는 화면과 빠르게 바뀌는 배경. 명백하게 이상한 상황에 당황한 레르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화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르토 도련님?」

 

그렇게 얼마나 날아올랐을까. 혹시 바람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전해져 상대의 귀를 괴롭게 할까 봐 일부러 소리를 차단한 채 날아올랐던 오르토가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그는 꺼두었던 마이크를 켠 후, 카메라를 조정해 밤하늘이 잘 보이게 고정했다.

 

“레르네, 잘 보여?”

 

날씨가 맑은 덕분에 오늘 밤은 별이 참 잘 보였다. 별자리도 보이고, 달도 보이고, 희미하지만 다른 행성들도 보인다.

아마 맨눈으로는 이렇게 밤하늘을 자세히 볼 수 없겠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른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레르네가 지금 재학 중인 코벤 유니버시티 칼리지는 산중에 있어 야간 비행은 힘들다 들었다.

그러니 아마, 우주를 좋아하는 레르네라면 이 풍경에 기뻐해 주지 않을까. 웬만해선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밤하늘이니까 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레르네! 별건 아니지만, 내가 주는 선물이야!”

 

오르토의 생각이 먹힌 걸까. 무감각하게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채 화면만 바라보던 레르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어릴 때와는 달리 활짝 웃어주지는 않았지만, 늘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가 이 정도라도 웃어주는 건 기적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제 머리 위의 별들보다 반짝거리는 레르네의 미소에 뿌듯함을 느낀 오르토의 푸른 머리카락 끝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갔다.


12/19

말레우스 드라코니아 드림, 빙과와 티켓

 

타닥타닥. 벽난로가 타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가득 채운다.

제 방에 소중한 이를 초대해 기분이 좋은 말레우스는 맞은편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깨작거리는 아이렌에게 물었다.

 

“아이렌, 빙과는 입에 맞는가?”

“맛있어요.”

“그거 다행이군.”

 

하지만 대답과 달리 아이렌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초콜릿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확실히 맛있었지만, 아이렌은 이 자리가 마냥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편해…….’

 

말레우스가 불편한 건 아니다. 단둘이 있어서 불편한 것도 아니고.

제가 정말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살짝 열린 방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금빛 시선이었다.

저 질투와 경계의 눈빛을 보라. 이래서야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체하게 생기지 않았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밖에 있는 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건, 분명 평소 자신과 말레우스 사이를 꾸준히 못마땅해한 동급생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고 보니 너도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빌었나?”

 

자신의 종자(從者)가 손님의 눈치를 주는 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말레우스는 태연하게 아이렌에게 물었다.

 

“저요? 아뇨. 그런 걸 믿을 나이는 아니라서…….”

“그런가?”

 

16살이면 충분히 환상의 존재 같은 걸 믿을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나이로 16살은 어리지 않은 걸까. 말레우스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다가, 문득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너는 항상 크게 원하는 게 없었지. 무욕(無慾)인지 무념(無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초연한 인간도 있나 신기할 지경이야.”

“제가 좀 별나긴 하죠.”

 

이 인간의 아이는 소속감이나 동질감 같은 건 원하지 않았다. 그저 제가 평화로울 수 있다면 그걸로 그만인. 함께여도 좋지만, 혼자라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죽음도 필멸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때로는 혼돈을 들여다보는 것도 두려워 않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었지.

이토록 특별한 아이는 뭘 원할까.

말레우스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다. 자신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들어줄 힘이 있었으니까.

 

“그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없나?”

 

고개를 숙여 서로간의 거리를 줄이며 묻자, 아이렌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가까이 다가온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던 아이렌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티켓.”

“응?”

“좋아하는 밴드가 나오는 페스티벌 티켓이 가지고 싶은데, 아무래도 취소표는 안 나올 것 같아서 포기했어요. 안 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렌은 남아있는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세속적인 요구에 눈만 깜빡이던 말레우스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턱을 괴었다.

 

‘릴리아에게 물어봐야 하나.’

 

이런 건 제 주변에선 릴리아가 가장 잘 알 것 같으니, 그쪽에 물어봐야지. 아무리 자신이라도 없는 티켓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뮤직 페스티벌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상대가 가고 싶다는 말에 흥미가 생긴 말레우스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12/20

릴리아 반루즈 드림, 원피스

 

이건 백전노장으로서 말하는 것인데. 몇백 년을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되는 진리 중 가장 으뜸 되는 것 하나를 꼽자면, 그건 바로 간절함만 있다면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타개책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릴리아 선배?”

 

여성복 전문점 앞. 진지한 얼굴로 원피스가 걸린 옷걸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릴리아는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혼자 쇼핑이라도 나온 거였을까. 사복을 입고 나타난 아이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아는 때맞춰 나타난 이성(異性)의 후배를 반기며 상대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아이렌이여! 마침 잘됐군, 나 좀 도와주겠나?”

“예?”

“옷을 고르려고 하는데, 고민이 되어서 말이야.”

 

그 말만 듣고 뭔가 큰 오해를 한 걸까. 갑자기 얼굴이 희게 질린 아이렌은 옷과 릴리아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가 입을 건가요?”

“뭐? 푸핫!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구나.”

 

보통 이럴 땐 누군가에게 선물해주는 거냐고 물어볼 텐데. 이 후배는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닐까. 릴리아는 그런 엉뚱한 반응조차도 귀엽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고향에 있는 지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낼 거란다. 내 눈에는 어떤 것도 전부 다 예뻐 보이다 보니, 동성의 조언이 필요해서 말이네.”

“아하…….”

 

아이렌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행거의 옷들을 쭉 살펴보았다. 뒤적뒤적.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다양한 스타일을 살펴보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릴리아를 마주 보았다.

 

“그, 실버 선배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분에게 보내는 건가요?”

“이런. 들켰느냐?”

“그냥 넘겨짚은 건데, 맞나 보네요.”

 

과연 그럴까. 릴리아는 아이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어도, 상대가 보통 아이들보다 비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눈치도 빠르고 직감도 좋으며 관찰력도 있는 이 후배는 자신과 실버의 관계도 금방 눈치챘고, 자신이 18살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해 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정확히 몇 살인지, 왜 이제야 입학했는지 같은 민감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참으로 좋았지. 하여간, 릴리아에게 있어 아이렌은 꽤 믿음직한 후배였다. 때때로 몇백 년 살아온 자신마저도 뒷골이 얼얼할 만큼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오싹했지만 말이다.

 

“죄송한데 그분, 연령대가……?”

 

선물 받을 상대가 누구인지 알자 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어진 걸까. 아이렌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물어왔다.

 

“음, 나보다 조금 연하지.”

“……죄송합니다. 질문을 정정할게요. 외견상 몇 살로 보이나요?”

“이런.”

 

그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참으로 영민하기도 하지.

후배의 예리한 질문에 쿡쿡 웃은 그는 재치 있는 대꾸로 대응했다.

 

“그래, 자네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지.”

“구체적이질 않네요.”

“후후. 하지만 외견상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않는가? 몇 살로 보이든, 언제나 귀엽고 정숙한 요조숙녀였는데.”

“실버 선배랑 비슷한 느낌이려나요.”

“오. 그럴지도. 물론 실버 녀석보다는 훨씬 조심스럽고 내향적이지만 말이야. 후후.”

 

이 정도 정보라면 충분한 걸까. 아이렌은 더 질문하지 않고 원피스를 골라냈다.

후배가 고른 원피스를 본 릴리아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통이 넓은 긴 소매와 프릴이 우아한 느낌을 주는 새하얀 원피스는, 확실히 선물 받을 이와 잘 어울릴 거 같이 보였다.

 

“그런데, 제가 골라줘도 되는 건가요?”

“음?”

“저라면 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가 골라 준 원피스를 선물로 주면 좀 찝찝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한 아이렌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보아하니 묻는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래. 보통은 이 후배의 말이 맞겠지. 하지만 릴리아는 그 걱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 눈으로 보기엔 아이렌은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밖에 되지 않아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이 후배는 다른 임자가 있지 않은가.

 

“글쎄다? 며느리가 골라 준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예?”

“후후.”

 

실버와 아이렌이 함께 하는 수많은 애틋한 순간을 떠올리며 웃은 릴리아는 후배의 손에서 원피스를 받아 갔다.

 

“괜찮으니 이리 주게. 로세우스는 그렇게 아량이 좁은 아가씨가 아니니.”

 

자신들은 사소한 일에 질투하고 시기하기엔 너무 늙어버렸으니, 정말로 괜찮다.

과거의 모든 걸 말해줄 수는 없기에 그저 상대를 치켜세우는 말로 상황을 얼버무린 릴리아는 후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준 후, 카운터로 향했다.


12/21

실버 드림, 모자

 

* 20일(릴리아 드림) 글과 이어집니다.

“정말 받아도 되나요?”

“그럼! 내 쇼핑을 도와주지 않았나. 이 정도는 사줘야지 보답이 되지! 미리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도 겸한다 치고 받아주게!”

“보답치곤 좀 거창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늘 생각하지만, 자네는 검소하구먼. 후후.”

 

멀리서 들리는 대화 소리는 정겹고 익숙하다.

내일 있을 동아리 활동 때문에 마사(馬舍)에 다녀왔던 실버는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자신의 의붓아버지와 홍일점 후배가 사이좋게 걸어오고 있었다.

 

‘둘이서 같이 외출한 건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고, 들려오는 대화를 보면 따로 가게를 들린 것도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두 사람이 같이 외출이라니. 이상할 건 없지만, 꽤 보기 드문 조합이지 않나. 게다가 분명 릴리아는 혼자 외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쩌다가 둘이서 다녀오게 된 걸까.

의아함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실버는 두 사람이 점점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엿들었다.

 

“선배는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음. 선물을 포장해야 하니까. 자네는?”

“글쎄요. 별일 없으니까 아마 기숙사로 가겠죠?”

“그럼 가서 차라도 한잔 어떤가?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지!”

 

그렇게 말하는 릴리아는 갈림길 앞에서 멈춘 아이렌을 거울의 방 쪽으로 이끌었다. 그 모습을 본 실버는 조금만 더 걸으면 마주칠 정도로 가까워지기 전에 서둘러서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다.

이유는 모른다. 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고, 미리 들어가서 릴리아를 맞이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감정에 이끌려 먼저 디어솜니아 기숙사로 들어온 실버는 제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출입문이 있는 복도에 서서 곧 들어올 두 사람을 기다렸다.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릴리아와 아이렌은 나란히 기숙사로 들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릴리아 선배.”

 

실버가 마치 우연히 마주친 듯 말을 걸자, 릴리아는 크게 반가워하며 제가 팔짱을 끼고 끌고 온 후배의 등을 떠밀었다.

 

“오, 실버여. 마침 잘 만났네.”

“예?”

“아이렌이 왔으니 담화실에 데려가서 차라도 내어주겠나? 둘이 이야기 좀 하고 있도록 하게. 나는 이걸 포장해야 해서.”

 

기껏 손님을 데려와 놓고 할 일을 하러 가버리다니.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제 수양아버지가 자유분방한 면이 있다 해도 예의는 있는 걸 아는 실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릴리아에게 떠밀려 실버의 바로 코앞에 서게 된 아이렌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실버 선배.”

“음. 좋은 오후다, 아이렌.”

 

이상하기도 하지. 분명 아이렌과는 전혀 어색할 게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단둘이 남겨지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뚱멀뚱 선 아이렌을 가볍게 위아래로 훑어본 실버는 상대를 담화실로 이끌어야 한다는 건 잊은 건지, 대뜸 손에 든 쇼핑백을 보며 물었다.

 

“릴리아 선배랑 함께 외출한 건가?”

“아뇨. 밖에서 만났어요. 전 산책 겸 나간 거였는데, 릴리아 선배랑 마주친 것뿐이에요.”

“그런가.”

 

역시 우연히 마주한 거였나.

여전히 쇼핑백을 바라보고 있는 실버는 아직 궁금한 게 많은지 질문을 이어갔다.

 

“그건?”

“릴리아 선배가 사주셨어요. 모자인데, 추울 땐 머리의 열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이걸 골라 주시더라고요. 쇼핑 도와줘서 감사하다며 사주셨는데…….”

 

대답하는 아이렌의 표정이 썩 개운치 않다. 어딘가 멋쩍은 듯 웃는 상대의 표정을 읽어낸 실버는 다소 직설적으로 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예? 아뇨, 그건 아녜요. 전 작은 조언을 해드린 것뿐인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 싶은 것뿐이죠.”

“아버……, 아니, 릴리아 선배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사준 걸 테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

“그런가요?”

 

그런 조언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걸까.

여전히 명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렌이 쇼핑백 안을 힐끔거린다.

 

“근데, 제가 쓰기엔 좀 귀여운 모자인데.”

“……그런가? 어떤 모자길래?”

“어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던가. 아이렌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직접 모자를 꺼내 보였다.

 

“이거요.”

 

가방에서 튀어나온 건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털모자였다. 다만 보통 털모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수리에서 조금 떨어진 양옆에 동물의 귀를 연상시키는 장식이 있다는 것뿐일까.

개……, 아니, 이 둥그스름한 모양은 곰의 귀일까.

썩 앙증맞은 모자와 뚤어져라 보던 실버는 솔직한 감상을 전했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요?”

“응.”

 

오히려 왜 안 어울릴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렌은 여자치고 큰 편이긴 해도, 아직 16살밖에 안 되었고, 세벡처럼 커다란 것도 아닌데. 물론 이 후배가 나이에 비해서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분위기인 건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귀여운 모자가 안 어울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모자를 내려다보는 실버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였을까.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써, 써볼까요?”

“……음.”

 

실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미지근한 대답과는 다른, 참으로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그 온도 차이가 재미있었던 걸까. 아이렌은 소리죽여 웃더니, 들고 있는 모자를 슬쩍 머리에 얹었다.

아, 역시 잘 어울리지 않나.

순식간에 곰 수인같이 변한 후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옅게 웃은 실버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12/22

 세벡 지그볼트 드림, 쪽지


12/23

롤로 프람 드림, 보고싶어요

 

모두가 들뜬 크리스마스의 저녁. 노블 벨 칼리지의 학생회장실에는 오늘도 벽난로가 요란하게 타오르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자신 앞으로 온 크리스마스카드들을 확인하던 롤로는 다른 모든 카드는 한쪽으로 밀어둔 채, 먼 곳에서 온 카드 하나만을 따로 빼내어 살폈다.

 

‘정말로 보내왔군.’

 

오늘을 기념하여 나온 듯한 우표가 붙은 그 카드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온 것이었다.

본래라면 자신과 연락할 인물은 없어야 할 곳에서 이리 편지가 온 것은, 모두 저번 교류회 때 있었던 일 덕분이었지.

 

‘하긴, 나도 보냈으니 별나게 생각하는 것은 자승자박인가.’

 

이렇게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이제 익숙해져 버렸다. 처음에는 답장이 망설여졌던 거 같기도 한데, 어느샌가 편지가 오지 않으면 괜히 신경이 쓰여 빈 편지지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차라리 먼저 연락해 볼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쩐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다.

아직도 자신의 코앞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아이렌의 목소리가 선명한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 상대가 보낸 카드를 봉투에서 꺼냈다.

붉은색과 녹색으로 꾸며진 카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나지만, 루돌프나 산타클로스 같은 요란하고 익살맞은 그림은 그려져 있지 않아서 참으로 정갈해 보였다. 그야말로 그 여자 다운 선택이다. 그런 생각이 든 롤로였다.

과연 내용은 뭐라고 적었을까. 언제나처럼 장문의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을까.

기대인지 걱정인지 모를 마음으로 접혀있는 카드를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그를 방해해 왔다.

 

“회장, 안에 계신가요?”

 

아, 이 목소리는.

면식이 있는 이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 쉰 그는 카드를 봉투 안에 도로 넣고 답했다.

 

“들어오십시오.”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이는 학생회 소속의 1학년 후배였다.

크리스마스라고 들뜬 걸까. 평소에도 웃는 상이긴 하지만 한층 더 밝아 보이는 얼굴의 매튜는 정중하게 인사 후 안으로 발을 들었다.

 

“매튜 군.”

“조금 있으면 파티가 시작되는데, 다들 회장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 그래. 얼마 전부터 요란하게 준비하던 그 크리스마스 파티 말인가. 그런 요란한 곳은 딱 질색인데, 귀찮기도 하지.

딱히 다른 이들, 특히 마법사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는 롤로는 손수건으로 일그러지는 입매를 가리며 답했다.

 

“저는 조금 있다가 가겠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으음, 오시긴 하나요? 혹시 시간이 안 난다면, 제가 잘 변명해놓겠습니다.”

 

저 말은, 오지 않아도 된다는 걸까.

롤로가 눈썹을 까딱이며 매튜를 보자, 심성 고운 후배는 원하는 대로 말해보라는 듯 눈을 빛냈다.

성실하고 다정한 이 후배는 자신을 억지로 파티에 권할 성격은 아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이는 혼자 있게 내버려 두는 배려 정도는 몸에 익은 듯했으니, 조금은 이용해도 되지 않을까.

롤로는 슬쩍 고개를 저은 후 입을 가렸던 손을 거두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회장!”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매튜는 그대로 나가버린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후배의 등을 가만 지켜보던 롤로는 쓴웃음과 함께 아이렌의 카드를 다시 꺼냈다.

 

‘눈치가 빠른 건지, 말을 잘 듣는 건지.’

 

물론 본직이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제 말을 잘 듣고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되찾은 그는 카드를 열어 첫 문장을 읽어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허무하기도 하지.”

 

보고 싶어요, 선배.

인사보다 먼저 쓰인 그 말은 진심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간교일까. 그리고 거기에 ‘나도 그러하다’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롤로는 정말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12/24

아르체미 알체미예비치 핀커 드림, 키링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날.

실습하고 있는 연구소를 나와 현자의 섬 시내를 돌아다니고 온 셜린은 품 안의 짐을 고쳐 들며 한숨 쉬었다.

 

‘이 심부름만 마치면…….’

 

그러면 오늘 일은 끝이다. 공식적으로 할 일이 끝난 후에는, 내일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코벤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지.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가 동급생들을 볼 생각에 들뜬 셜린의 긴 꼬리가 좌우로 가볍게 흔들렸다.

 

‘다들 잘 지낼까? 바빠서 연락도 거의 못 했는데.’

 

코벤의 4학년생들은 둘로 나뉜다. 학교에 남아 면학에 힘쓰며 마법사 면허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과, 취업을 위해 실습에 나서는 학생들. 물론 후자도 마법사 면허 시험을 준비해야 하긴 하니 실습에 나서는 건 괜히 짐만 많아지는 선택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좀 더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고 싶거나 빠른 취업을 위해 방도를 찾는 이들에게 실습 제도는 참으로 유용했기에, 셜린처럼 이렇게 현장에 뛰는 학생도 적지 않았으니까.

다만, 셜린은 하필 연구소로 간 탓에 다른 실습생보다 조금 더 바쁜 게 흠이라고 할까.

얼굴 본 지 오래된 친구들을 떠올리며 한숨 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골목길 모퉁이를 돌았다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머리와 그대로 마주쳤다.

 

“오, 찾았다.”

“히익!”

 

깜짝 놀란 셜린은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가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목 아래의 몸을 드러낸 체냐는 두 팔로 가볍게 셜린을 붙잡아 세우고 바짝 다가섰다. 온전한 모습을 한 상대를 가볍게 위아래로 훑어본 셜린은 기어들어 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 안녕. 체냐 군?”

“이제야 만냐네. 어딜 갔는지 한참 찾았다고.”

“나를?”

“내일이면 코벤으로 가지않냥? 그러니까, 미리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평소보다 더 장난스럽게 웃은 체냐는 주머니에서 작은 키링을 꺼냈다. 보라색과 분홍색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 인형이 달린 그 키링은 고리 부분에 빨간 리본이 엉성하게 묶여있었다.

귀엽긴 한데, 왜 자신에게 이런 걸 주는 것인가.

그걸 고민하던 셜린은 곧 자신이 내일 자리를 비우는 이유를 떠올렸다.

 

“이거, 혹시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아무래도 그렇지? 다른 의미도 있을 수 있으려냥?”

 

체냐는 언제나처럼 아리송한 말투로 어깨를 으쓱였지만, 셜린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크리스마스 연휴 전까지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누군가에게 선물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나, 나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어!”

“으응? 괜찮다구.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발만 동동 구르는 셜린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같이 보였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보다 한 살 연상이라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은 체냐는 슬쩍 제가 원하는 바를 속삭였다.

 

“정 신경 쓰인다면, 크리스마스 이후 시간 내 줄 수 있냥?”

 

명백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누가 보아도, 아무리 연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상황이라면 체냐의 말을 ‘연말 데이트 신청이로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셜린은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상대의 관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걸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던 그는 잠깐 망설인 그는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 주말이라면 가능해.”

“으응. 그럼, 연말에 보자구 셜린.”

 

전하고 싶은 걸 건네고 원하는 것을 얻어낸 체냐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나타날 때와 반대 순서로 사라져 버렸다.


12/25

디어 크로울리 드림, Happy Christmas

 

괴상한 장식과 어느 위인의 사진이 마구잡이로 걸려있는 코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학원장실.

밖으로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몸가짐을 단장하는 이셀라의 스마트폰에서, 옛날에 유행한 드라마의 OST가 울려 퍼진다.

 

‘누구지?’

 

이 시간에 전화라니. 역시 제 등장만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 중 한 명인가.

별생각 없이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게 전화를 건 것은 제 학생이 아닌, 저 멀리 현자의 섬에 있는 어느 남학교의 학원장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전화를 가만 바라보던 이셀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이셀라, 당신 사전에는 ‘여보세요’라는 말이 없습니까?」

“있긴 한데 네 사전에도 있는지는 몰라서.”

 

유치한 말싸움에 웃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7살 먹은 아이들처럼 진지하게 서로를 디스하는 두 남녀는 도무지 한 학교를 책임지는 학원장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나는 곧 파티장에 가봐야 해서 바빠.”

「그러고 보니 코벤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전교생이 다 같이 모여 했지요.」

“우리 학교는 단합력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무엇보다, 인원수도 적어서 전부 모여도 크게 북적이지 않고. 4, 5학년은 대외활동이 바빠 불참하기도 하거든.”

「그거, 너무 허술한 단합력 아닙니까?」

“자율성이 있어야 단합이지. 자율성이 없다면 통제라고, 크로울리.”

 

그 말에는 동의하는 걸까. 크로울리는 ‘으음’하고 침음 할 뿐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전화했어? 나 지금 나가지 않으면 7학년 학생 대표가 잔소리하러 올 거라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학생에게 잔소리나 듣다니, 당신도 여전하군요.」

“……너, 네 평판을 전혀 모르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다. 모르는 게 약이지.”

 

자신이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을 모두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학교의 전반적 분위기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우수한 악동인 소년들은 대부분 학원장, 그러니까 크로울리를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걸 익히 들어 아는 그는 사실을 말해줄까 하다가 입을 닫았다.

어차피 말해줘 봐야, ‘저같이 상냥한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듣는 겁니까!’ 같은 소리나 하겠지. 지금은 이 원수 같은 녀석과 말장난할 틈이 없는 이셀라는 얼른 할 말이나 하라고 재촉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떼려는 사이.

크로울리가 먼저 침묵을 깨고 통화의 목적을 밝혔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십시오, 이셀라.」

“뭐?”

「다음에 또 밥이라도 먹지요. 전에 사준 그 연어 스테이크는 맛있었습니다.」

 

기분 탓일까. 통화를 끊기 전,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이셀라는 통화 종료 화면만 보여주는 스마트폰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뭐야?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갑자기 이렇게 달게 구는 이유가 뭔가. 자신들이 긴 세월 동안 지지고 볶고, 이런 짓도 저런 짓도 한 사이지만, ‘요즘’은 그런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아닌데? 분명 2년 전 즈음 이럴 거면 관두자고 한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술김에 다시 사귀자고 했나?’

 

사귀고 깨지고 다시 사귀고 헤어지고를 너무 반복해서 이젠 자기들이 어떤 사이인지도 오락가락하는 이셀라는 얼른 파티장에 가야한다는 것도 잊고 멍하니 스마트폰만 바라보았다.


글 관련 TMI 

  1. CUC(코벤 유니버시티 칼리지)는 핼로윈이나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같은 때에 다같이 모여서 파티합니다. 기숙사도 학년제고 학생회도 없어서(학년 대표는 있음) 전체적으로 동년배끼리 가장 친하다는 느낌. 여긴 7년제인데 4~5학년때 실습나가서 셜린은 현자의 섬의 어느 연구소에 실습나와 있습니다. (그러다가 체냐를 만났고 이하략...)

  2. 세벡이랑 멜로드랑 주고 받은 쪽지에 있는 잉크 얼룩은 세벡이 대답 고민하다가 흘린 잉크입니다. 와카사마를 미끼로 던지면 쉽게 무는 귀여운 악어... 둘이 필담 나누는 거 옆에서 뒷자리에선 다 보였을 거 같은데 다들 '잘 노네...' 라고 생각했을 듯...

  3. 지금 정리하다 보니 크루아니를 안 썼구나 깨닫고 만 사람. 이럴 줄 알았다면 크리스마스 합작을 크루웰 드림으로 썼었어야 하는데... 싶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죠...

  4. 드디어 체냐 드림이랑 학원장 드림 써봐서 재미있었습니다. 1월 내로 드림주 페이지 갱신하는 게 목표입니다. 일단 12월 말까지 본업이 너무 바빠서...

  5. 체냐 말투 살리기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본명도 너무 외우기 힘들어요 규탄한다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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