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커미션 신청본 | 너와 나 그리고
ⓒ보미
엘빈은 「진 조사서」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는 서류 뭉치를 무심히 넘겼다. 그들에게 진의 심문은 여간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인지, 요 며칠 사이 급히 작성된 보고서 치고는 상당한 양이었다. 조서는 단락마다 깔끔하게 소제목이 붙어 있었다. [단순 구타], [천장에 매달아 방치], [골절], [달군 쇠], [절단], [신체 조사]... 등. 엘빈은 눈에 띄는 단어들을 읊조렸다. 모두가 하나같이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문자로 나열된 문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이런 짓들을 실제로 당한 이는 지금 어떤 꼴이 됐을지 쉬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개중 [신체 조사] 항목은 더욱 가관인 것이, 고작 며칠 사이에 사람을 어떻게 굴려 먹어야 ‘인간과 유사한 장기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상황이 상황임은 이해한다. 그가 비범한 ‘다른 존재’임을 알고도 조사병단 입단 허가를 내준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가 신묘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묵시한 결과가 어떤 소문이 되어 지금의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지까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인간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가 있을 터인데. 하물며 가축들도 채찍질하면 괴롭다고 비명을 질러 대는데, 어찌 인두겁을 쓰고 개돼지에게도 못 할 짓을 행한단 말인가. 엘빈은 내용의 잔혹함에 차마 더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고문실 내부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곳 피 묻은 고문 기구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아직 혈액이 응고되지 않아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그 공간을 낱낱이 살피는 엘빈의 미간이 자연스레 좁혀졌다. 차마 같은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참상을 마주해서 그런가. 아니, 어쩌면. 조금 분노가 치미는 것 같기도 하고.
진이 헌병단에 이끌려 조사실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목과 양 손목이 연결된 구속구를 차고 있었다. 구속구의 줄은 묘하게 길이가 짧아 손을 제 위치에 두면 자연스레 고개가 떨궈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진이 딱 그러한 모습이었다. 그의 고개가 푹 숙여져 뒤통수가 훤히 보였다. 강도 높은 고문의 흔적으로 머리칼이 째로 뽑혀 두피에 구멍이 나 있기도 했다. 개같은 자식들. 그들도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며 우월감을 느꼈겠지. 높으신 분들의 취향이야 매번 비슷하니까. 별 볼 일 없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몹쓸 짓을 행하며 자존감을 채우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진의 존재란 미지의 공포 그 자체이기도 했기에, 이참에 진에게 힘의 권력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 됐던 엘빈은 지금 넝마가 된 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헌병단의 병사가 진을 거칠게 잡아채 한쪽 벽에 세웠다. 사지를 다시 벽과 바닥에 고정하고, 그를 의자에 앉힌 다음 고문실을 나갈 때까지 엘빈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병사의 손에 이끌려 힘없이 움직이는 진의 모습을 세세히 관찰할 뿐이었다.
절뚝이는 걸음걸이, 멀끔한 옷 사이로 대비되는 검붉은 멍울들. 며칠 내리 계속됐을 고문의 흔적들. 척 보아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겉에 입고 있는 옷만 멀끔할 뿐이지 맨살이 보이는 곳은 전부 피딱지가 생겼거나 짙은 멍이 슬어 있었으며, 식사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것인지 고작 닷새 사이에 삐쩍 곯아 있는 모습이었다. 이 상태로 무슨 조사를 하란 말인가. 엘빈은 조사서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분노가 다시금 차오름을 느꼈지만, 분노를 표출할 상대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기 때문에 최대한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엘빈이 진의 앞에 마주 앉자 여전히 바닥만을 응시하던 진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그간의 구타로 상처가 가득한 덕에 안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진은 엘빈을 향해 작은 미소를 띠어 보였다.
“조사를 하기 위해 왔네, 진.”
“네가 와서 기뻐, 엘빈.”
조금 전의 미소는 어디로 간 건지, 기쁘다는 말을 내뱉는 진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조사, 그래. 또 조사로군. 쉬이 끝나지 않을 거라곤 예상했다. 그래도 엘빈 스미스, 저자를 이런 자리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인간들이 자신에게 조사를 가장한 가혹 행위를 일삼는 것은 일정 정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명백히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상황이었다. 능력을 직접 목격했으니, 진을 두려이 여기는 것은 당연지사. 당신들의 사고로는 이해 할 수 없는 현실의 폭풍에 더욱이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 발밑에 두고 싶겠지.
매번 그래왔었다. 그리고, 엘빈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미 여러 세계를 떠돌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온 진이었기에, 인간들의 행동이야 정말 불 보듯 뻔했다. 이제 와 남은 기대는 없다. 이번 세계에서 엘빈과 조금 친하게 마음을 붙이며 지낸 것은 사실이오나 그 역시 연약한 필멸자에 불가하다. 개중에서도 엘빈은 ‘인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니, 자신과 같은 존재 어찌 여길 것인지는 오래 고뇌하지 않아도 금세 답이 나오는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진은 천천히 고문실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평소보다는 기구의 가짓수나 잔혹함이 훨씬 덜하긴 했지만, 여전히 엘빈의 옆에는 자신을 고문하기 위한 기구들이 잔뜩 놓여져 있었다. 그 역시 나를.......
“우선 좀 들게. 먹고 얘기하지.”
진은 이어지는 풍경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고문해 정보를 뜯어내려 할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엘빈은 김이 폴폴 나는 수프를 가득 뜬 수저를 내밀고 있었다. 진은 그대로 벙찐 채로 엘빈과 수저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런 진의 반응에도 엘빈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얼른 입을 벌리고 한 입 삼키라며 재촉하듯 엘빈은 수저를 다시 제 쪽으로 내밀기까지 했다. 진은 엘빈이 주는 음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으며 생각했다. 며칠을 내리 굶어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고, 눈앞에는 빵과 수프가 있고, 나는 양팔이 구속된 상태다. 그러니 지금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진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엘빈은 따뜻한 수프에 빵을 푹 적셔 다시 진의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한동안 음식을 잘 먹지 못한 뒤의 첫 식사는 신경을 써서 먹어야 한다는 둥, 그런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으면서. 그렇게 엘빈은 진이 음식을 머금고, 천천히 씹어서 넘길 때까지 그릇을 든 채 그를 기다렸다. 퍽퍽한 빵에 목이 멘 듯 보이면 따뜻한 우유를 마시게 했다. 그러면서도 엘빈은 자신의 본문을 잊지 않았다. 진이 음식을 삼키는 중간중간 질문을 이어 나갔다. 다만, 그 질문의 내용은 조사와는 하등 관련이 없어 보였다. 몸은 좀 어떤지, 아픈 곳은 없는지, 그간 잠은 잘 잤는지 따위와 같은 안부 인사들. 진은 대충 긍정의 대답을 표했다. 엘빈은 그 대답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를 다시 채근하지 않았다.
이후로는 둘 사이 정적이 내려앉았다. 엘빈의 요청으로 지하 감옥을 모두 비운 상태였기에 주변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한 상태였고, 덕분에 식기에 수저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구조물에 부딪혀 널리 울려 퍼져나갔다. 음식물을 섭취한 진의 얼굴에도 다시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되자, 엘빈은 자신의 진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지.”
“얼마든지.”
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음식이 들어가니 조금 살 것도 같았다. 아직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기에는 어림도 없이 부족했지만 일단 영양을 충분히 공급한 것이 어딘가. 엘빈은 진의 안색이 좋아진 것을 확인하고 마음 한편으로 안도했다. 그는 진을 다시 마주한 순간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잇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싶네. 자네가 원하는 만큼만 이야기 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입을 열지 않아도 좋아.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어.”
“.......”
“하지만, 나는 자네를 돕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부디 나를 잘 이용하길 바라지.”
무슨 수로 나를 돕겠다는 건지. 그의 의중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간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네 능력의 범위는 어떻게 되지?”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빈은 개의치 않았다. 진작 쉽게 알려줄 생각이 있었다면 이 꼴이 되어 지하 감옥에서 마주하고 있는 일 따위야 없었을 것이다. 진이 곱게 실토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엘빈이 지금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진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능력을 어떻게 인류에 바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방법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인류니 뭐니 그런 거창한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자네 능력으로 이곳을 탈출한 뒤 이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나?”
그저 진이라는 사람을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어지는 질문에 진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첫 번째로는 지난 며칠간 이곳에서 고문을 당하며 들어온 그 모든 질문들과 너무나도 다른 갈래의 질문이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이 말을 한 당사자가 엘빈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건 마치 그 조사병단의 유능한 단장인 엘빈 스미스가 진정으로 ‘나만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엘빈이 상냥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달군 쇠로 지진다든가, 국소 부위를 절단한다든가 하는 식의 고문 행위를 행하지 않고 따뜻한 수프를 건네줄 수 있었겠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하고서도, 나를 향해 ‘돕기 위해 왔다.’는 말을 내뱉고, 정말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나는, 정말로 엘빈을 믿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진에게 있어 이곳을 탈출하는 일 따위야 고민할 것도 없이 간단한 일이었다. ‘꿈’을 사용하여 인간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시간’을 사용해서 능력을 사용하기 전으로 돌아가면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능력을 사용하여 일을 타개한다니. 그것은 진이 그려가고 있는 삶의 궤적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일어난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멈춰버린 자신의 시간에 진짜 ‘시간’을 부여하는 행위. 그게 진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채 영원과도 같은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는데, 엘빈의 발언은 진을 통째로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믿을까. 한 번 정도는 기대도 괜찮지 않을까. 나를 진정으로 대해주는 이 사람을, 엘빈 스미스라는 남자를. 진이 머릿속이 복잡한 감상들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빈이 대답을 종용하듯 말을 이어갔다.
“진. 적당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저들은 영원히 자네를 이곳에 가둘 걸세. 그리고 아마 다음 차례는... 내가 될 테지.”
엘빈은 진의 두터운 머리칼 사이로 동요하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자신은 괜찮고 나는 걱정이 된다 이 소리인가. 참 미련한 사내였다.
‘다음 차례는 내가 될테지.’ 진은 엘빈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은 이런 고문쯤이야 얼마든 견딜 수 있었다. 뜨겁게 달군 쇠로 피부를 지져도, 신체를 절단해도, 치유 능력을 쓰면 그만이었다. 긴 삶을 살아온 진에게 종류의 고문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엘빈은 어떠한가. 엘빈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런 인간이, 자신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었다. 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인간들은...... 정말 사랑하기 힘들어.”
“나도 인간이지만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몰라.”
엘빈의 대답에 진은 소리 내 웃었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 지어 보였던 미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엘빈은 진의 밝은 모습을 보며 안도하면서도 자신이 뱉은 말의 의중이 스스로 파악되지 않아 혼란스러움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게 더 빠르다니. 내가 그런 자를 앞에 두고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어쩌겠어. 인간을 사랑해야지.”
엘빈은 그 순간, 어떠한 큰 감정의 파도를 마주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의 조사는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진의 심문 결과 보고서를 아래와 같이 제출하오니 확인 바랍니다.
진 심문 결과서
질문.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치료해 왔는가.
답.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고전적인 의술을 사용한다.
질문. 약을 사용한다면 어떤 약물을 사용하는가.
답. 환자의 고통 억제를 위해 환각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가스형 약물을 사용함. 공격당했다고 여긴 의원들의 상처가 전혀 남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방에 진입하며 가스형 약물에 중독돼 환각을 본 것으로 추정됨.
질문. 어디에서, 누구에게 이러한 의술을 배웠는가.
답. 고향 전통으로 내려오는 고전 의술임. 진의 고향은 외딴곳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이어왔기에 도시의 의술과는 차이가 클 것으로 예상됨.
질문. 사람을 치료하는 것 외에 해를 입힌 적이 있는가.
답. 없음.
질문. 그는 인간인가.
답. 답변 거부.
질문.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답. 답변 거부.
조사병단 단장 엘빈 스미스 드림.
*
엘빈은 종일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덕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진의 조사 건으로 헌병단의 지하 감옥에 다녀오는 사이 병단의 업무가 밀려 그 일을 쳐내는 것으로도 벅찬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어떤 사건’까지 덮쳐 그의 신경은 잔뜩 골이 서 있었다. 엘빈은 깨질 것만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상황은 벌어졌기에, 그는 이 사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천천히 정리를 해 보자. 엘빈은 며칠 전 진의 조사 결과서를 제출한 뒤 소환 명령을 받았다. 엉터리 조서를 제출했으니 이 정도 화풀이는 예상하던 바였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 집행일이었기에, 엘빈은 이른 아침부터 몸을 정갈히 하고 체포를 기다렸다. 이윽고 단장실의 문이 열리고, 조심스레 벌어진 문틈 사이로 들어온 것은 헌병단이 아닌 진이었다.
진은 엘빈을 향해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건넨 뒤 곧장 단장실을 나갔다. 그러고선 여느 때와 같이 병사들을 치료하고, 그들을 돌봐주고, 함께 웃고 떠들었다. 엘빈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귀신이 되어 돌아온 건가. 진이 아무리 재생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 반 송장 상태에서 고작 며칠 만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저 발치에서 동료들과 함께 서 있는 진은 작은 생채기 하나 없는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역시 귀신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가설 두 번째. 진이 무턱대고 지하 감옥을 탈출한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이 역시 말이 안 됐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강도 높은 고문들을 왜 가만히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단 말인가. 엘빈은 한참 진의 모습을 살피다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그에 관한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일과 관련된 서류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분명히 존재했던 사건이 말끔히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다니. 이것이 정말 가능한가. 아니면, 내가 꿈을 꾼 것일까. 거인을 상대하다 드디어 미쳐버린 것인가. 생각할수록 엘빈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진은 종일 밀려오는 환자를 상대한 덕분에 딱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벌써 오늘만 해도 열댓 번은 더 들은 ‘한 명만 더’ 소리를 겨우 끊어내고선 단장실로 향했다. 예의상 노크 두어 번을 하고, 들어오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진은 문을 벌컥 열고 단장실의 내부로 들어갔다.
“어떻게 볼 때마다 일을 하고 있어. 오늘도 야근할 생각이야? 난 오늘 야근 절대 못 해. 사양이야. 오늘은 진짜 병사들이,”
“이봐.”
진의 응석은 이어지지 못했다. 엘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진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진은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그는 문장을 고르는 듯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몇 분째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궁금한 게 많겠지. 차마 어떤 질문을 해야 이 상황의 해답이 될 것인지, 온갖 방식으로 고문을 하고 못살게 굴어도 굳게 입을 다물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자신이 답을 주긴 할지. 이렇게까지 이 인간의 속내가 읽기 쉬웠던 적이 있었던가. 마치 엘빈의 머리가 도르륵, 하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진은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불쌍한 중생을 어떻게 내버려두겠어. 내가 도와줘야지. 그는 천천히 엘빈의 볼을 쓰다듬으며 먼저 말꼬를 텄다.
“정식 심문 시간은 이미 끝이 났지만... 딱 한 가지 질문만 더 받을게.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도 돼.”
길지 않은 고민이 이어진 뒤 엘빈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
“너, 그리고 나.”
여전히 진의 손은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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