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9월 편
빌 셴하이트 드림
“선배, 어때요?”
빌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는 아이렌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가를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빌은 진지하게 제 모습을 찍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수고했어.”
“휴…….”
이번에도 다시 찍자고 했다면 진짜 울어버리지 않았을까. 아이렌은 8번 만에 떨어진 OK 사인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몸이라 해도, 설마 이렇게까지 사진을 찍게 할 줄이야.
아이렌은 몇 번이나 자세와 위치를 바꿔 가며 연속촬영 버튼을 눌러야 했던 손가락을 가볍게 주무르며 제 자리에 앉았다. 사진을 찍는 사이 다 식어버린 커피에선 김도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선배, 촬영장에서도 이렇게 하시는 거죠?”
“어라,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이건 SNS에 올리는 사진이니 이 정도로 해둔 거지, 상업용 작업물이라면 작가도 나도 당연히 만족할 때까지 촬영하지.”
“아…….”
하긴. 평소에도 철두철미하긴 하지만 일 앞에서는 누구보다 직업정신이 가득한 빌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아이렌은 어색하게 말 끝을 흐리더니,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인 후 대화를 이어갔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외출했을 때 사진을 부탁하세요?”
“루크처럼 사진을 잘 찍는 쪽이라면 부탁하지.”
“아니라면요?”
“그러면 그냥 혼자 찍는 게 나아. 사람들은 남이 자연스럽게 찍어 준 사진을 제일 좋아하지만, 셀카도 분명 수요가 있으니까.”
“하긴, 미남의 셀카는 귀중하죠.”
자신은 거의 찍을 일이 없긴 해도, 남의 사진은 자주 보는 아이렌은 빌의 계정에 가득한 셀카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누가 보아도 공들여서 각도와 조명을 신경 쓴 그 사진들에 달린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들은, 그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스타인지 알려주는 듯했지.
‘흐음.’ 아이렌의 미소를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조용히 침음을 흘린 빌은 제 몫의 차를 홀짝였다.
“너도 한 장 찍어줄까?”
“네? 아뇨. 됐어요.”
“……일말의 고민도 없는 거절이구나.”
“저 사진 찍는 거 싫어하시는 거 알면서.”
가볍게 손을 젓는 아이렌은 애써 눈을 피했다.
아, 저것 보아라. 말로는 단호하고 부드럽게 거절하긴 했지만, 강제로라도 시키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표정이지 않은가.
모난 곳도 튀는 점도 없는 흰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빌은 뜻밖의 변수를 추가해 물었다.
“나랑 같이 찍는 것도 싫니?”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걸까. 아이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빌을 마주 보았다.
“누추한 제가 어떻게 귀한 분이랑 한 컷에…….”
“솔직하게 말하렴. 사진 찍는 게 그렇게나 싫은 거니, 아니면 나랑은 찍기 싫다는 거니?”
“사진 찍는 것도 싫고 선배같이 예쁜 사람 옆에 찍기도 민망해요. 그림체가 안 맞잖아요.”
갑자기 저게 무슨 이데아 같은 소리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리 생각한 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것 같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제 옆에 잘 꾸미지도 않는 본인이 나란히 사진을 찍는 건 이상하지 않겠냐는 거 아니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배려다. 보통이라면 제 옷차림이 어떻든 유명인과 사진을 찍을 기회가 생기면 얼굴부터 들이밀고 보는 이들이 한 트럭인데. 이 애는 왜 사적인 사진에서까지 미감(美感)을 따지는 걸까.
“왜, 왜 그러세요?”
갑자기 침묵하는 빌의 태도에 아이렌이 긴장하여 묻자, 빌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렇게 까지 사진 찍기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그건 선배가 연예인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내 주변 사람은 다 연예인인 줄 아니?”
다는 아니라도 한 60%는 연예인이지 않을까. 학교 사람들을 빼면 거의 90%가 유명인일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맞는 말을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겠지. 중요한 건 빌의 지인이 어떤 인물로 구성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일반인도 다 사진 찍는 건 좋아한다는 걸 말하려는 거니까.
아이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괜히 따지기보다,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애초에 제 사진 같은 건 어디다 써요? 일단 전 필요 없어요. 영정사진도 빈 액자로 둘 거니까.”
“그건 좀 극단적이지 않니?”
“아니면 추상화라도 놓아두죠, 뭐. 루크 선배에게 부탁할까 봐요.”
‘그 녀석이라면 네 사진 한 장 정도는 몰래 가지고 있을걸.’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진실을 애써 혀 밑에 감춘 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를 좁혀왔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서로의 앞머리가 섞일 것 같은 거리. 딱 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빌이 보란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지고 싶다면?”
“예?”
“말 그대로야. 내가 가지고 싶다면?”
특별히 쓸 곳이 있어서 가지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이 애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제 스마트폰에서 가끔 꺼내 볼 수 있을 사진이 필요할 뿐이지. 다른 이들이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그리하듯 말이다.
하지만 아이렌은 그 당연한 이유를 추리하지 못하는 건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진심으로 하시는 소리예요? 아니면 그냥 해보는 말이세요?”
“내가 왜 너한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겠어?”
빈말이라는 건 약자가 강자에게 얻어 낼 것이 있어 하거나, 서로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하는 것일 뿐. 친밀한 사이에는 필요 없는 말이다. 가까운 이들끼리 하는 이런 말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당연한 진리를, 분명 아이렌도 알고 있을 터.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이렌은 금방 대답하지 않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빌은 의심 가득한 제비꽃색 눈동자를 읽어내고 선수를 쳤다.
“진짜니까 두 번 묻지 마.”
“……선배, 독심술 할 줄 아세요?”
“흥.”
하여간, 자신은 이리도 상대를 잘 파악하는데 어떻게 아이렌은 제 진심을 이리도 몰라주는 건가. 아니면, 이미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그는 슬쩍 아이렌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당기며, 스마트폰의 카메라 어플을 켰다.
“좀 더 가까이 붙으렴. 화면에 다 안 들어오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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