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가의 일기장

04

실리안×여 실린 모험가



 "여자란 자고로 비밀이 있어야 더 신비로워 보이는 법이지."

그것은 틈틈이 자고라스 요새를 순찰하던 중, 병사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카멘의 공세로 루테란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그 중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자고라스 지역은 병력지원과 사기 독려를 위해 엘리아데가 자주 순찰을 가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순찰을 돌며 상황을 돌아보던 중에 듣게 된, 별 시덥잖은 잡담일 뿐이었다. 

 "무언가 숨긴 듯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얼마나 유혹적인지 몰라."

 "예끼, 이 사람아! 비밀은 무슨 비밀? 감당 못할 거짓말이나 비밀이면 어쩌려구 그래! 산귀신이 와서 유혹한대도 그대로 홀려갈 사람이구먼."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으흐흐흐."

하지만 그런 잡담을 그저 흘려듣지 못하고 계속 곱씹게 되는 이유는 왜일까. 그건, 근래들어 실리안과 자주 대화하지 못했던 것이 첫번째요, 피네로부터 실리안을 좀 더 신경써주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두번째인 까닭이었다. 

병사들이 절망적으로 주저앉은 상태보다는 차라리 농담으로 노닥거리는 상태가 낫긴 하지. 마저 가볍게 둘러본 뒤 막사로 발걸음을 돌린 엘리아데의 머리 속에선 아까의 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로 걷고 있자니 어느새 막사 앞에 도착해 있었고, 안에는 하셀링크와 자고라스 성주인 미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왕의 기사님."

 "현재 폐하께서는 다른 정무로 오지 못한다 하시어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 엘리아데는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어둠군단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했다. 자주 있는 전술 회의였으나, 과감하고 섣부른 판단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에 전술이 달라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언제나처럼 비슷한 결론을 내린 채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회의가 끝난 이후 다른 이들은 자리를 파했고, 막사에는 미한과 하셀링크, 그리고 엘리아데, 이렇게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탓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미안한듯한 표정을 지은 하셀링크가 말을 걸어왔다.

 "바쁘실텐데, 왕의 기사님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진작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셀링크 경. 궁금한 것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음…… 보통의 사내들이라면.. 비밀을 품고 있는 신비스러운 여인을 더 좋아하나?"

예상치못한 질문은 하셀링크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평소에 질문은 커녕 좀처럼 개인적인 이야기조차 먼저 꺼내지 않는 사람이 묻는다는 질문이 사랑과 관련된 것이라니. 딱히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평소 왕의 기사님의 친분이나 인간관계를 고려할 때 질문의 의도와 대상은 명확했다. 아마,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하셀링크가 생각을 갈무리하느라 대답이 잠시 늦어지는 동안, 엘리아데 또한 그의 표정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에 하셀링크의 표정에서 잠깐이나마 당황하는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보았기에. 그는 눈치가 꽤 빠른 사람이므로 질문의 의도 또한 파악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기도 했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하셀링크가 입을 열어 찬찬히 답변했다.

 "그건… 100명이 있다면 100명의 생각이 있을 것이고, 80명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한들, 생각이 다른 20명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폐하의 의중이 어떠하신지는 폐하께 여쭤보심이 가장 정확하실 겁니다."

그의 대답을 유심히 듣던 엘리아데는 정곡을 찌르는 대답에 움찔했다. 하긴,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었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하셀링크에게 참고하겠다며 답했다. 그 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미한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실리안 폐하께서는- 왕의 기사님도 아시다시피 형제가 따로 없으십니다. 예전에 제가 또래 친구들과 검술수련을 하고 있으면 늘 제 쪽으로 오셔서 대련하자고 하셨던 분입니다. 죽은 섭정 슬하에 폐하 또래의 사촌이 있었지만... 그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왕의 기사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실리안 폐하는 왕자이실적에, 그러니까 선왕께서 살아계셨던 아주 어리실 적부터 홀로 많이 외로우셨을 겁니다."

이야기를 마친 미한을 바라보던 엘리아데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가끔은 눈치없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큰 조언을 받게 되었다.  좋은 조언들 고맙군, 도움이 되었어-라며 짤막한 감사인사를 전한 엘리아데는 루테란 왕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 실리안 폐하한테 좀더 다정하게 대해주는 건 어때?'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엘리 네가 폐하께 너무 무심해 보일 때가 많아서 하는 말이야.'

 '허....?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오지랖 넓은 성격이라서 엘리 너와 이만큼 가까워질 수 있었는걸.'

피네의 가벼운 핀잔에 괜스레 발끈한 반응을 내보였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섬세하고 다정한 성정의 실리안은 언제나 먼저 그녀를 배려해주었고, 왕위를 되찾기 전의 시절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동하다 날이 저물어 잠을 청해야할 때면 기사 된 자의 도리로 숙녀에게 불편한 자리를 제공할 수 없다며 본인의 간이 침상도 양보해주곤 했으니까.

 "왕의 기사님께서 진정으로 폐하를 위한다 하시면,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편이 더 좋을 겁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깊게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실리안의 집무실 앞까지 도달해있었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던 궁인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 왕의 기사님이 오셨다고 아뢸까요? 조금 전에 잠깐 눈을 붙이겠다곤 하셨지만, 기사님 소식은 바로 보고를 받고 싶어하셔서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고개를 살짝 저은 엘리아데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자신이 자리를 지킬테니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며 일러두었다.

그네들이 돌아가자, 엘리아데는 발소리를 낮추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너른 책상 위에는 여러 지도나 글이 담긴 종이들-아마도 서신인듯 했다.-이 이리저리 널려있었고, 그 앞에는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는 실리안이 앉아 있었다. 문가에 구두를 벗어 두고 맨발로 살금살금 들어온 그녀는 실리안의 곁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늘 단정했던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피부결이 까칠해진 얼굴, 커다랗고 딱딱한 갑옷때문에 편치않은 자세로 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새삼 그가 떠안은 자리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 때, 고개를 숙인 실리안의 목덜미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독수리반지를 건네줄 때, 그에 대한 답으로 그에게 걸어주었던 그녀 소유의 엔비스카의 부적이었다.

뺨을 쓰다듬으려 천천히 들던 손을 멈춘 엘리아데는, 실리안이 앉은 의자 옆 바닥을 소매로 대강 닦아낸 후 주저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실리안을 비추고, 고요함 사이로 잠든 실리안의 숨소리가 들렸다. 평화롭지 않은 순간에 느끼는 평온함이 참 기묘하다. 바닥에 앉아 올려다본 잠든 이의 얼굴에는 평소에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했던 책임감, 부담감, 고단함 같은 것들이 드러났다. 처음엔 앳된 티가 나는 어린 왕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깨지고 부딪치며 한층 성장한 지금은 성군이 되어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새삼… 잘생겼군. 곧게 뻗은 콧대며, 반듯한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 풍성한 속눈썹까지. 꼬맹이 시절에 같이 놀던 남자애가 말하길, 고개를 숙인 사람의 얼굴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못생겼다며 키득거렸더랬다. 그치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보면…

일각여의 시간이 흘렀을까, 닫힌 눈꺼풀이 움찔하더니 잠에 취한 푸른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 그대 왔군. 오래 기다렸나?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가볍게 실리안에 뺨에 자신의 것을 맞댄 엘리아데는 실리안의 머리를 정돈해준 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착석했다. 따뜻하고 발그레한 뺨, 잠에 취해 살짝 허스키해진 목소리. 귀엽네, 큰 소리로 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멋쩍었는지 실리안의 귓가가 붉어졌다.

 "흠흠… 아, 그러고보니 자고라스 성의 순찰 소식은 들었네. 그대의 어깨에 짊어지게 한 것이 많아 늘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커다란 손이 작은 손을 감싸쥐었다.

 "그대의 영광스러운 공적의 뒤편에는 많은 고뇌도 있을 테지. 그 무거운 짐을 그대 홀로 감당하려 하지는 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나 주저없이 말해주게. 나는, 그대를 지키는 단 한 명의 기사가 되겠노라고 맹세했지 않은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이 떠오를 때면 죄책감에 잠을 종종 설치곤 했는데, 그런 모습들을 우연히도 본 모양이었다. 굳이 내비치기엔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어 앞에서 보이지 않으려 했었던 부분이었지만.

 "변수가 다양해지면 생각이 꼬여버리는 불상사가 생기다보니, 혼자 생각하고 결정내린 뒤에 행동에 옮기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치만 너의 요청이라면야."

 "고민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대가 좀더 그대에 대해 소상히 말해주었으면 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그대가 해주는 것이라면 마다하지 않아."

노력해보도록 하지. 엘리아데가 옅게 미소지었다. 실리안은 잠시 뜸을 들이며 시선을 회피하더니,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맞춰 왔다. 평소의 자상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장난끼가 섞인 것도 같은 미소였다. 저 표정은 대체… 무슨 의미지? 

 "난 비밀이 많고 신비스러운 여인보단 나에게만 솔직한 그대가 더 좋으니 말이야."

실리안의 발언이 한마디 한마디 더해질 때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엘리아데는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대화를 함께 나눈 사람은 몇 없었는데… 다시 살펴보니 책상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서신 중에 익숙한 인장들이 눈에 띄었다. 하셀링크, 그리고 미한. 지원군과 관련된 내용의 서신들 뿐일거라 생각했었다. 그러고보니 자고라스 지역에 전서구를 보내는 장소도 있었지. 움직이려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엘리아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뾰족한 귓바퀴의 끄트머리까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괜찮은가? 그대의 고민을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통해 듣게 되어 가볍게 놀려주려고 했을 뿐인데… 이런… 많이 놀랐나? 미안하네."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의자에 앉힌 실리안은 팔이나 다리에 상처가 나진 않았는지 꼼꼼히 살폈다. 그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인 그대가 그토록 놀랄 줄은… 몰래 뒷조사를 한 형국이 되어버렸군."

 "나도 좀더 솔직해지도록 하지. 거기서 서운해 줄은 몰랐어." 

실리안을 한참 바라보던 엘리아데가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기왕 솔직해지기로 했으니 편하게 얘기해볼까. 오늘 밤엔 너와 함께 있고 싶군. 네 침실이든, 내 침실이든 상관없이."

예전에 네가 내게 침상을 양보하고 막사를 뒤돌아 나갈 때, 너의 망토자락을 붙잡고 싶었어. 곁에 있어달라고. 그 때 그 상황에선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말하지 못했지만, 

 "그럼, 메리안에게 침실 정리를 부탁하도록 하지."

 앞으로 지나갈 모든 밤에는 네 곁에서 보내고 싶어, 부끄러움에 차마 말하지 못한 뒷말은 다음에 용기를 얻으면 그 때 말해줄게.


와.. 오래걸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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