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빅 피터팬

7. 빅터와 체리콤포트 (2)

빅 피터팬 Big Peter Pan 유년기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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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달빛이 나리는 밤, 그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남자가 흑백의 여성과 아이를 동반하여 빌딩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곳은 시골의 한 작은 읍내. 산과 빌딩이 잘 어울려 있는 곳. 그리고 온갖 기담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그 한 가운데서 노란 머리의 장발 여성이 먼저 질문했다.

 

“보스, 그래서 빅터는 왜 두고 나온 거예요?”

 

안 그래도 그에 대해 묻고 싶었던 오르카는 메두사의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백모래를 바라보며 답을 재촉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랩터를 추적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랩터가 ‘하얀 머리의 영매사 꼬마’와 동행하고 있다는 출처 모를 정보를 주워온 백모래가 사방팔방으로 알아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우리 외가댁 조상 할아버지네 굿할 때 불러다 썼는데….’

‘거 우리 땅문서 꿀꺽하려던 걸 어떻게 달랬는지.’

‘효과는 확실한데, 돈을 귀신같이 떼어가더만.’

 

…이런 류의 정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쨌든 이만큼 주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는 또 찾기 드물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끼를 덥석 물어 추적에 추적을 해보는 중이었다. 그에 차출된 인원은 또 이동 수단으로 동원된 라드, 그리고 동물을 통한 추적이 가능한 록산느, 그리고 메두사, 그리고 오르카…

 

그중에 빅터는 없었다.

 

“빅터?”

“네….”

 

백모래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다. 뭘 어떤 내용을 말하려고 하길래 저러나 싶어, 오르카가 조금 불안해질 때가 되어서야-

 

“빅터는 랩터를 너무 좋아해서 안 돼.”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오르카는 그 의미 모를 말을 조금 곱씹어보다가, 혹시 그가 랩터를 알고도 놓아준 일이 있는지를 의심했다. 하지만 빅터는 대부분의 일상을 여전히 오르카와 함께했고, 최근 들어서는 랩터를 보러 간 적이 전무했다. 록산느나 청실, 홍실과 함께 뒷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딱히 빅터가 그를 방해할 일이 없을 텐데. 아니, 그 전에 방해한다면 백모래가 이미 죽였을지도 모를 텐데….

 

오르카는 채 해결되지 못한 의문을 껴안고 백모래의 뒤를 따라 달렸다. 잔뜩 멋을 부린답시고 뿌린 옅은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아니,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의 장미 냄새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랩터는, 히어로와 함께 있었다.

 

“헉, 저, 정말로…!”

“말했잖아요.”

 

그는 반드시 절 따라올 거라고.

랩터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칼을 출납했다. 그 나름의 위협이자 각오를 다지는 몸짓이었다. 그 뒤에 있던 히어로도 전투 태세를 갖췄다. 금방이라도 총을 쏠 기세에, 백모래는 태연하게 말했다.

 

“랩터, 만나러 왔어. 너무 오랜만이야. 날 잊은 건 아니지…?”

“잊을 수 있을 리가.”

“날 기억해준 거야? 너무 기뻐. 아, 여기 러브레ㅌ…”

“저리 치워!”

 

팔랑팔랑, 얼마나 챙겨왔는지 모를 러브레터가 바닥에 휘날린다. 오르카는 눈치를 보다 그것을 줍기 시작했다. 참으로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랩터 곁의 히어로가 어이없어할 정도로.

결국 오르카가 구석탱이에 처박힌 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러브레터를 모두 주워낼 때까지 정적이 흘렀다. 아, 그 와중에도 백모래는 랩터를 숭배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탕- 하는 소리가 사위를 가로지를 때까지 말이다.

 

“날 잡으려고 히어로를 부른 거야? 역부족이야. 날 도와주는 동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그에는 아무도 맞아주지 않았다. 괜히 검은 자욱만 남은 바닥을 짓이길 때, 백모래는 태연하게 말했다. ‘소용없다’는 말이 진실되게 들리는 모양새였다.

 

오르카는 그 와중에 저를 보는 검은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배신감에 찬 시선. 증오의 것을 빼놓은 뒤 남은 분노는 선연히 오르카를 향하고 있었다. 할 말이 없는 오르카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문득, 빅터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내가 널 죽일 거야.”

“…”

 

그때, 랩터는 짓씹는 듯한 한 마디를 겨우 뱉어내었다. 백모래는 드물게도 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제야 듣는 랩터의 목소리를 감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애들이 당했던 것처럼… 널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라고!”

 

아, 그것은 이 관계의 파탄.

오르카는 단 몇 년 사이에 변해버린 관계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누가보나 다정한 감정을 담고 있던 눈동자에는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 차 있었으며, 쌍방을 향하던 감정은 일방으로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백모래의 잘못이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랑을 돕는 것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이 관계는 결국 누가 죽느냐의 싸움이었다. 랩터의 마음, 혹은 백모래. 그리고 오르카는 그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았다.

 

얇은 외나무다리에 몸을 맡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랩터… 네가 날 사랑해준다면, 난 기꺼이 네 손에 죽을 수 있어. 하지만 히어로로 나를 잡는 건 잘못된 선택이야.”

“대화는 거기까지다, 백모래. 순순히 잡히지 않는다면 억지로-”

 

우드득,

오르카는 지면을 뚫고 다가오는 두꺼운 나무줄기의 끝을 간단히 엮는 것으로 제압했으나, 곧 뒤로 물러섰다. 자아를 가진 듯 저들끼리 엮인 것을 끙끙대며 푸는가 싶더니, 다시 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베어낼 무기가 없는 오르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르카, 물러서.”

“네, 메두사 님.”

 

그것을 간단히 멈춘 것은 메두사의 섬유. 옷자락에 꽁꽁 묶여 콘크리트에 고정되다시피 한 그것은 새로운 줄기를 만들며 더 뻗어오려 했으나, 그마저 오르카가 짓밟자 우드득,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백모래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차라리 나랑 가자. 가서… 날 사랑하고, 내가 네 안에 1순위로 자리할 때, 그때 날 죽여. 그러면 되잖아. 응? 히어로들로부터는 우리가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

 

-사랑해줘….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메두사와 오르카는 새삼 탄식을 금치 못할 발언이기 때문이었고, 랩터는 아까부터 분노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히어로들은 백모래의 또라이 같은 사상을 이제야 접한 탓이다.

게다가 ‘히어로들로부터 지켜준다’는 발언이라니. 보통 범죄자의 표적이 되는 피해자를 지켜야 하는 쪽은 히어로가 아니던가? 나름 정상의 범주에서 생각하는 오르카는 특히 더 골이 아팠으나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어쨌든 오르카는 이런 사람을 보스로 모셔야 하는 사람이다.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

“널 잡는 건 나야.”

“랩, 터….”

“그리고 난 히어로가 될 거고. -그럼 히어로가 널 잡는 거네?”

 

오르카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박수를 치고 싶었으나, 백모래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고개를 저었다. 백모래의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은 이미 여러 추격전에서 확인한 바가 있다. 행운의 여신은 명백히 백모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같이 행운의 여신의 가호를 받는 자가 아니라면 백모래를 잡기는 어려우리라.

 

휘익, 탁!

그때, 랩터가 기습적으로 던진 단검이 백모래를 스쳐 지나갔다. 백모래는 고개를 조금 돌렸을 뿐, 제대로 피하지도 않은 바람에 볼에 긴 선이 그어졌다. …오르카는 정말로 백모래라면 랩터에게 기꺼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당장 죽어.”

 

그리고 휠체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드는 칼날, 이 정도의 살의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다급하게 뒤쫓아오는 히어로들,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나이프.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칼과 주먹이 난무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이프는 볼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백모래를 들고 무사히 도망쳤고, 히어로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 폭발하는 폐건물에서 겨우 빠져나와야 했다.

 

참, 달이 하얗던 밤의 일이다.

 


 

“어, 빅터다.”

“오늘도?”

“너네 오늘 쉬는 날이라며. 빅터랑 놀래?”

“나 학원 가야 하는데.”

“졸업하면 어차피 히어로로 취업할 거라던 애가 학원은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다는 듄이 학원에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유다와 다나만이 빅터의 앞에 남게 되었다. 제가 사 왔다며 자랑스럽게 내미는 겨울의 호두과자를 받은 두 사람은 결국 빅터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에 빅터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영화 같이 봤던 누나!”

“뭐? 너 그날 빅터 봤었어?”

“얘가 난데없이 보호자로 데려가서.”

 

그러곤 으쓱이는 어깨. 빅터는 그런 다나를 보며 그날은 고마웠다며 악수를 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어색하게 잡은 다나는 무심코 힘을 쥐었지만 빅터의 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시 나이프의 맷집을 담당하는 빅터다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다나가 눈에 불꽃을 튀기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빅터는 물었다.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

“다나.”

“응, 다나 누나!”

 

이렇게 보면 한없이 해맑기만 한 아이같다. 하지만 그것을 특기로 꾸며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나는 다시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빅터로서는 어리둥절할 일이었다.

 

…뭐, 그럴 눈치도 없어 보였지만.

 

“넌 안 먹어?”

“응? 난 지금은 못 먹어! 먹으면 또 뱉을걸.”

“또?”

 

역시 저 모습은 특기인가. 영물이나 혼혈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데 먹을 수 없다는 것은 특기의 한계라고 볼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유다는 그냥 사정이 있나, 하고 넘기는 모양이지만-

 

“다시 간다, 유다 풍차!”

“와하학!!!”

“…너네 이러고 놀았냐.”

 

아니, 그냥 별생각이 없는 걸지도.

 

어느새 세 사람은 놀이터에 자리 잡았다. 유다가 태우고 있는 뺑뺑이에는 빅터를 비롯한 다른 집 아이들이 여럿 타고 있었고, 빅터는 그들을 다 잡고도 남아 안정적으로 뺑뺑이를 태워주고 있었다. 다나는 그런 그들을 어이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고, 그네로 곡예를 하고, 정글짐을 들어 올리고, 시소는 그것을 부수기 전에 겨우 멈췄다. 유치하다 못해 아예 어린애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니 기가 찬 다나는 사진상으로 봤던 다 큰 모습의 빅터를 다시 연상했다. 더욱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기분이 복잡했다. 저 모습이 바로 ‘원래의 빅터’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하아, 하… 야, 그만하고 쉬자.”

“응!”

“저 체력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야, 다나 넌 뭐하냐? 설마 아무것도 안 하고 지침?”

“생각한다 이 자식아.”

 

이럴 순 없어.

다나는 지금이야말로 때라고 생각하곤 유다에게 말했다.

 

“야, 먼저 가라.”

“뭐?”

“나 얘랑 말할 거 있어.”

“뭐길래 나만 보내놓고?”

“일이랑 관련된 거. 그러니까 얼른 가. 던져버리기 전에.”

“야… 야!”

 

너, 학교에서 보자!

유다는 다나가 진짜로 그럴 마음이 있다는 걸 빠르게 눈치채고선 저 멀리 멀어지며 단단히 경고했다. 빅터의 어깨를 잡고 ‘저 누나가 무슨 짓을 하면 바로 도망쳐라’라는 조언을 남기고서 말이다. 다나는 그게 의미 없는 경고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주먹을 쥐었으나, 이미 유다는 저만치 사라져 있었다.

 

어차피 얜 빌런이고, 무슨 짓을 해도 얘가 먼저 하지 않겠냐… 그보다 나 얘 잡아야 하거든?

 

여러모로 한숨만 나오는 대화를 뒤로한 채, 다나는 빅터와 마주 보고 섰다. 아직 성장기가 오지 않은 자그마한 남자 초등학생과 여자치고도 키가 한참 큰 여자 고등학생의 시점은 한참이나 차이가 나서, 다나는 한참이나 고개를 내려서 빅터를 바라봐야 했다.

그런 빅터를 내려다보다, 다나는 공원의 구석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주변 주민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의 멱살을 털 순 없지 않은가. 다행히 웬 양아치들이 삥을 뜯는 자리가 있었다. 다나는 그들을 한주먹에 물리치고선 드디어 단둘이 남은 자리에 바로 섰다.

 

“…?”

 

그 모든 광경을 봤을 빅터는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손에는 아직 본인은 먹지도 못할 호두과자 봉지가 잡혀 있었고, 심지어 하나는 다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먹으라는 듯이. 다나는 하나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웬 호두과자?’

‘형아가 저번에 생각난다며!’

‘헐.’

 

빅터는 어떤 인물인가?

한없이 아이같다. 쉽게 사람을 좋아한다. 저보다 어린 아이와도 서슴없이 어울릴 만큼 순수한 면이 있으며, 가끔은 남을 배려한다. …더없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이프다. 사람을 서슴없이 죽이는 나이프. 그 목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조직. 그중에서도 제일 폭력적이라 말할 수 있는 행동대장. 두 이미지는 정면으로 충돌하여 다나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으나, 다나는 중심을 잡고 버티고 섰다. 그에겐 냅킨의 부서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나는 다짜고짜 빅터의 멱살을 잡고 물었다.

 

“너, 나이프지?”

 

그에 동공이 크게 그 모양을 바꾸며 이지러진다. 다나는 그 반응에서 충분히 대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빅터는 그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다나는 그것이 빅터가 단순히 연기에 서툴러서인지, 혹은 어려서인지 일부러 판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모습은 보고된 바가 없지만- 넌 나이프의 빅터다. 그렇지?”

“다, 다나, 누나아….”

 

더듬더듬, 멱살 잡은 손을 더듬어오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그에 힘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가 지금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조차,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이럴 때의 빅터는 한없이 약자 같아서- 다나는 괜히 자신이 나쁜 짓을 하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어린 모습은 특기겠지. 연기용?”

“…연기는 아닌데,”

“일부러 나를 찾은 건 염탐인가? 냅킨의 부서장이라서-”

“그것도 아니야!”

“아지트는 어디지?”

“윽, 이익-”

 

빅터는 무용한 몸부림을 치며 끝까지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다나는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더욱 단단히 붙잡아뒀다. 유다의 말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했으니 그를 따돌릴 정도의 몸놀림이면 다나로서도 다시 붙잡을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미안.”

 

푸쉭-

분명히 제 손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던 빅터는 흔적도 없이 기화해버렸다. 다나는 당연히 빅터의 특기가 어려지는 종류이거나 제 위에 환상을 덧입는 거라고 생각했던 제 예상이 아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은 뒤는 이미 늦었고, 다나의 손에는 젖은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호두과자 봉지가 발치에 나뒹굴었다.

 

-빅터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듬해 연초의 어느 졸업식.

 

“야, 유다! 너 동생 있었냐? 어떤 꼬마애가 형아한테 전해달라던데.”

“뭐? 혹시 검은 머리에 키가 요만한….”

“어! 맞아! 특이하게 눈이 은색이더라!”

“이 꼬맹이가!”

“…나까지?”

 

다나와 듄, 유다는 친구를 통해 세 사람분의 풍성한 꽃다발을 받았다. 하나같이 그들의 색을 보고 고른 듯 선명한 제 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주인을 찾아가자, 그 꽃에는 카드가 꽂혀 있다.

 

“‘그동안 못 찾아가서 미안하다, 내 탓이니까 다나 누나한테 뭐라 하지 말고,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역시 너 때문이네! 대체 뭘 했길래 그 해맑던 애가 집에서도 못 나오고-”

“다나, 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시끄러.”

 

유다는 그렇다 치고 듄 너도 눈치 못 챘냐.

다나는 카드를 들고 얼떨떨하게 서 있는 듄을 잰 눈으로 째려보고, 유다의 머리통을 가볍게 내려치며 카드를 들었다. 아직 다나 몫의 카드는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마웠어요. 그리고 정말정말 잘못했어요.]

 

정말로 남자 어린애가 쓴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체. 구석에 작게 그린 공룡 그림. 다나는 다시 혼란에 빠져야 했다. 이건 정말로-

 

딱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정신연령이잖아.

 

다나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범죄자의 입장에 이입해버린 것이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범죄자가 가족이었던 아이에게, 그럼에도 순수를 유지하는 아이에게.

 

그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자꾸만 빅터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의 해맑게 웃는 모습과 놀이터조차 처음이라던 모습. 그가 만약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아, 그런 가정이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

 

다나는 결국 그 모든 생각들을 한숨 한 번과 함께 날려 보냈다. 냅킨의 부서장에게는 하등 필요 없는 생각이니까. 다나에게 필요한 것은 입장의 정리다.

 

그는 빌런, 그리고 다나는 히어로. 다나는 그를 잡아야 한다. 자초지종은 그때 알아내면 될 일.

 

만약, 그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면…

 


“내 사랑이 내 능력을 못 믿는 것 같아.”

 

올해 드디어 10살이 된 빅터는 꿀떡을 냠냠 주워 삼키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곳은 남성조 숙소의 거실. 그리 넓지 않은 자리에 11명이 모두 모여 앉는 바람에 복닥복닥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것이 싫었는지, 세월과 레이디는 슬쩍 뒤로 빠져 있는 게 보였지만 빅터는 부러 지적하지 않았다. 싫으면 싫은 거지 뭐.

 

하지만 그거랑 궁금한 건 별개다. 빅터는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무슨 능력?”

“당연히- 내 사랑을 히어로들에게서 보호할 능력이지!”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빅터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빅터의 생각에 나이프로부터 히어로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은 랩터였으니까. 하지만 백모래의 입장에서 능력을 증명할 수단은 히어로를 깨부수는 것에 있다는 걸, 빅터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굳이 힘자랑을? 빅터는 벌써부터 부정적인 입장에 설 준비를 하며 백모래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부디, 그것이 온건한 방법이기만을 바라며.

 

“그러니까, 포트를 없애자.”

“네에?”

“큰일이 되겠습니다.”

“아~ 귀찮네.”

“저희의 특기가 필수가 되겠네요.”

 

그리고 파격적인 선언. 빅터는 입에 물고 있던 꿀떡의 꿀을 줄줄 흘리려던 것을 스읍, 하고 주워 먹었다.

백모래가 말하는 ‘없애자’는 발언은 단순히 조직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큰 확률로- 몰살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빅터는 그것이 싫었다.

 

그들이 아무리 나이프를 적대하고 있더라도,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더라도 빅터는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강자의 여유라고 해도 좋고, 빅터의 신념이라 해도 좋았다. 빅터는 피를 보는 게 싫었다. 대장이 생각나고, 아이들의 시체가 생각나고, 그동안 백모래와 메두사와 오르카가 만들고 밟아온 모든 시체가 생각났으니까.

그것은 하나하나가 모여 빅터의 악몽을 만들어냈다. 빅터는 그것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죄가 고스란히 빅터의 죄로 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뭐, 랩터가 히어로들이랑 힘을 합치면 곤란한 것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 미리 없애두면 좋지 않겠어?”

“냅킨은요?”

“음~ 그건 생각 중. 일단 포트를 없애고 생각하려고.”

 

빅터는 조금 낯설어졌다. 자신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가족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입에 담는 이 상황에서 익숙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아마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나이프 중 빅터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양심과 윤리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이 중 빅터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수의 비정상 중에 소수의 정상이 한 명 끼어있다면 그 중 눈치를 보는 쪽은 소수여야 한다. 혼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빅터는 눈치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 안 죽이면 안 돼?”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 빅터는 괜히 어깨를 떨었으나, 애써 당당하게 등을 피고 평소처럼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에 대해 나이프는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뱉었다.

 

“빅터, 네가 살인을 한 적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할 건 해야지.”

 

라드의 조언부터,

 

“어중간한 마음으로 할 거면 오지 마십쇼.”

 

가리의 일침.

 

“빅터, 그냥 집에 있을래?”

 

그리고 메두사의 물음까지.

 

빅터는 그에 하나하나 쏘이고 있는 것처럼 움찔움찔 떨며 스르륵 손을 내렸다. 결국 풀이 죽어버린 것을 달래듯 말을 꺼내놓은 것은 백모래였다.

 

“오기 싫으면 빅터는 집에 있어도 돼. 대신 방해하지 말기다?”

“-맞아요. 빅터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록산느의 동의. 빅터는 그것이 되레 서글퍼졌다. 그것이 결국 빅터 혼자 양심을 지키는 길임을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그것은 빅터가 하고 싶은 일과 달랐다. 혼자 깨끗한 척하는 것은 빅터의 신념과 달랐다.

 

빅터가 하고 싶은 것은… 히어로들을 지키는 일. 그리고 나이프가 더 이상 죄를 짓는 것을 막는 일. -모두가 떳떳해지는 길.

 

하지만 그러기엔 빅터의 힘은 너무 미약했고 방법을 떠올릴 정도로 야무지지 못했다. 그리고… 나이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족을, 그의 일상을, 이 평안한 집을-

 

빅터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만, 이기적인 방관을 선택했다.

 

“…응.”

 

그래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말랑한 양심이며 신념과 같은 것들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빅터?”

 

빅터, 정확히는 빅터의 분신. 그는 오르카 몫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포트의 건물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무턱대고 찾아오기는 했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건물 로비는 충분히 넓고 사람이 많아서, 빅터는 몸을 숨기고 궁리를 할 수 있었지만….

 

“힉, 빅터?”

“아, 아뇨. 아는 동네 꼬마입니다.”

“그런 것치곤 꽤 닮았는데… 우연인가?”

“‘진짜’ 빅터였으면 진작에 특기가 풀렸겠지. 듄 특기 알잖아.”

“-듄 형아?”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빅터는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통성명을 한 뒤 함께 대화한 것은 고작 몇 번밖에 없었지만, 듄은 나름 빅터를 예뻐했던 것이다. 동생이면 좋았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빅터 역시 듄을 좋아했다. 조금 깐깐한 구석이 있어도 나름 좋은 보호자였으니까.

 

“형아 히어로예요?”

“어어, 그렇지.”

 

봐라, 지금도 빅터를 보고 파이프를 바로 끄지 않는가. 빅터는 손에 들고 있던 호두과자를 한 움큼 잡아, 건네며 말했다.

 

“나랑 나가요!”

“…빅터, 난 지금 일하는 중이고-”

“뭐 어때. 일 들어오면 연락할 테니까 꼬맹이랑 놀고 오라고. 네가 좋은 모양인데.”

“선배….”

“선배도 같이 가요!”

“뭐, 나도?”

 

결국, 빅터는 제일 단순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제일 단순하고 비효율적인 방법, 그것은 히어로들의 주의를 끌어 포트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다.

빅터도 대강 계획은 알고 있다. 그들의 눈을 피해 곳곳에 청실과 홍실이 실그물 겸 함정을 만들고, 건물에 히어로들이 제일 많을 시점에 팽팽히 잡아당기는 것이다. 그러면 히어로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감각을 잃게 되고, 나이프가 처단. 지원 연락을 통해 뒤늦게 달려올 히어로들이야 그냥 상대해도 좋을 만큼 나이프의 전력은 충분했다.

 

-빅터는 그 자리에 없겠지만.

 

지금은 한창 청실과 홍실이 히어로들의 눈을 피해 실그물을 짤 시점이다. 제일 고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은 눈에 띄기만 해도 발각이니까.

그렇다는 말은, 제일 공과 시간을 많이 들이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 기회. 빅터는 아는 사람인 듄을 구할 겸 그들의 팀을 통째로 끌고 택시에 올라탔다. 용돈을 내밀며 제일 멀리 가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 꼬맹이, 어디 가는 줄은 알고 가냐?”

“응? 몰라요!”

“대책 없는 꼬마구만.”

“얘가 원래 이러지는 않는데….”

 

그렇게 빅터의 용돈만큼 멀어진 곳은 강변공원이었다. 사실 그것은 택시 기사의 배려였으나, 택시는 두 번째라며 희희낙락 웃는 빅터는 그것도 모른 채 잔돈을 받았다.

그렇게 오자마자 향한 곳은 자전거 대여소. 빅터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자전거 가르쳐주세요!”

“실화냐.”

“뭐 어때. 난 좋은데? 잠깐 어울려 주지 뭐.”

“빅터, 오늘만 이러는 거야. 다음부턴 어른들 일하는데 방해하면 안 되는-”

“어이 듄, FM 같은 소리는 그만하고 와서 자전거 가져오자. 네 발 자전거면 되겠지?”

“난 두 발이 좋은데!”

 

듄을 포함한 팀원은 총 3명이었고, 자전거는 두 대를 빌렸다. 빅터의 것은 당연히 네 발이었다. 초심자에게 두 발은 무리라는 히어로들의 의견 덕분이었다. 그에 빅터는 입술을 댓 발은 내밀었으나, 결국 군소리 않고 자전거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듄은 뒤에서 자전거를 밀어주는 역할을, 다른 한 명은 곁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역할을 맡고 나니 한 명은 손이 비었다. 그에 빅터는 호두과자 봉지와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맡겼다. 제 체형보다 훨씬 큰 그것은 빅터가 파묻히다시피 해야 하는 크기라, 모두의 의문을 샀다.

 

“이건 뭐야, 꼬맹이?”

“간식!”

“빅터, 밖에서는 뭐 못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응, 형아들 꺼니까 괜찮아!”

 

연약한 마음을 가진 히어로들은 순식간에 감동하며 양지바른 곳을 골라 자리를 폈다. 빅터의 가방에서는 별것이 다 나오고 있었다. 샌드위치에, 체리 콤포트를 잔뜩 얹은 타르트, 콘치즈 스콘과 보온병의 레모네이드…. 가방이 무거울 만도 했다.

속이 허했던, 그리고 격한 업무강도에 시달리는 히어로들은 그것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빅터에게 몇 개를 권했으나, 실시간으로 부에엑, 뱉는 모습을 몇 번 보이자 포기하고 보답을 약속했다. 빅터에게는 살아남아 주는 것이 유일한 보답인데 말이다.

 

그래, 살아남는 것.

빅터는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곧 나이프가 쳐들어갈 시간이다. 진짜 빅터는 감시 없는 감옥에 갇혀 분신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빅터가 그들을 방해했다는 것을 들킬 거고, 그러면 실망할지도 모르고….

 

몰라, 계산하기가 복잡했다. 일단 해가 질 녘 즈음에나 들어가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로 한 빅터는 히어로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그때였다.

 

부우웅-

“아, 이제 다음 업무 들어왔나.”

“오랜만에 오래 쉬나 했는데. 받아봐.”

“어. 잠시만.”

 

그리고 굳어지는 히어로의 표정. 빅터는 그 핸드폰을 낚아채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저것이 지원요청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그랬다간 추궁을 당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빅터는 ‘정말로’ 저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미움받아버릴 것이다.

 

애초에, 포트에게서 충분히 멀리로 데려온다니. 얼마나 허술한 계획인가. 애초에 아무 각오도 하지 않았던 빅터의 꼼수는 초장부터 망한 계획이었다. 빅터는 저들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벌써 정이 들어버린 저들을 사지로 보내 버리고 말 것이니까.

 

그것이 히어로니까.

 

“야, 가자.”

“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해?”

“-프가 쳐들어왔대.”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어서 가봐야,”

 

빅터는 듄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가 살았으면 하는 한 사람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의 최후의 노력이기도 했다. 목소리가 한없이 떨리며 나왔다.

 

“가, 가야 해?”

“…얘 어쩌냐.”

“듄, 네가 데려다주고 올래?”

“하지만 저도 가야-”

“그렇다고 애 하나 두고 갈 수도 없잖아. 미아 된다.”

 

히어로들은 저들끼리 숙덕대나 싶더니, 결정한 듯 듄을 빅터에게로 보냈다. 그런 듄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쯤은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빅터는 그것이 저 때문임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의도로 그들을 유인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떠났다. 빅터는 침묵에 잠겨 듄과 함께 동행했고-

 

마침내 듄만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빅터는 불현듯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빅터는 그를 따라 방 안에 딸려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곧 역한 냄새가 나서, 환풍기를 키며.

 

“형아…?”

“빅, 터.”

 

그리고 그곳엔 변기를 붙잡고 있는 오르카가 있었다. 빅터는 그가 오늘 포트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손에도 분명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단 것 역시도. 피에 젖어있는 단검도. 피가 튄 얼굴도.

아마 그것은 오르카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너무 역겨워서, 오르카는 게워내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였겠지. 빅터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상흔이었다. 절로 잘린 목이며 시체를 삼켜내는 기분이 된 빅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상을 떨쳐 보냈다. 대신해서 오르카의 등을 짚었다.

 

“괜찮아?”

“…아니.”

 

실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오르카의 약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이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빅터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거야, 라고 말 못 하겠어.”

“빅터.”

“형이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내내 이랬으면 좋겠다 싶기도 해.”

“…”

“그럼 언제까지고 나랑 같을 수 있잖아….”

 

그것은 이타적이고 또 이기적인 바람. 오르카를 위한 것이기도, 빅터를 위한 것이기도 한 그 바람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적어도 나이프 안에서는. 그것을 오르카도, 빅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장실에는 그저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뚫고 오르카가 말했다.

 

“난, 네가 크지 않았으면 해.”

“뭐?”

“12살 정도면, 슬슬 경험해볼 때가 됐다고… 보스가 그랬으니까.”

 

연구소에서….

빅터는 바짝 굳어버렸다. 당시 12살이었을 오르카에게 어떤 언어들로 살인을 설득했을 백모래가 절로 상상되었으니까. 심지어 빅터는 그때가 오르카의 첫 살인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캐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 위협은 이제 빅터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빅터는 꿀꺽, 침을 삼키고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야말로, 괜찮을 거야.”

“뭐?”

“난 변하지 않을게, 형. 형을 위해서 꼭 이렇게 남아있을게. -응,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를 봐, 형. 내가 형의 순수가 될게. 그런 내가 되어서 형의 위안이 될게.

그것은 공수표였다. 오르카가 변해가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는 의지로 꽉 찬 선언. 계속되는 폭력과 방관 아래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다짐. 빅터는 의지를 다졌다. 그 어린 신념은 아직 덜 여물고 연약했으나-

 

한 사람 정도는 품을 수 있으리라.

 


 

“…빅터에게 특기가 있다고?”

 

무거운 침음이 적막한 서장실을 채웠다. 이제 포트가 아닌 냅킨의 서장실, 세이지가 아닌 마티오의 것이었다.

 

이제 포트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 포트가 한 명을 남기고 전멸한 것이 벌써 한 달 전. 듄이 털어놓은 얘기를 들은 것이 고작 이틀 전이었다. 그동안 포트의 전멸을 놓고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들썩들썩하려는 여론을 돈으로 막아 잠재운 것은 간부들의 힘이었고, 세상은 겨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은 히어로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나이프의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나이프의 존재는 그리도 위험했으니까. 만약 그들을 알아보는 일반인들이 괜히 늘어났다가는 그들은 도망치기보다는 죽이고 다닐지도 몰랐다.

 

그런 판단의 결과, 나이프는 여전히 비공개 범죄조직이었고 포트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냅킨이 채웠다. 나이프를 쫓는 포트의 주 업무조차 냅킨으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시민의 민원과 인력 부족 문제를 때우는 등의 평화로운 업무만 수행하던 냅킨의 히어로들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포트에서 넘어왔던 염력의 히어로 선배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대규모 사직 사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아와서, 지금의 주제는 무엇인가?

 

‘빅터가… 날 막았어.’

 

빅터의 기묘한 행동과, 그의 특기이다.

 

포트가 전멸하던 그날, 빅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투 중이던 포트의 전보와 마지막 목격자인 듄의 진술을 수합하여 나온 결론. 그것에 대해 모든 히어로가 의문을 갖고 있었다.

 

포트의 전멸 사건 당시, 빅터는 왜 나서서 행동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두 사람, 마티오와 다나는 의견을 모으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자신과 닮은 분신을 만들 수 있는 걸로 보입니다.”

“오- 그건 언제 알았어?”

“지난 해, 제 친구가 우연히 그 분신과 어울렸는데- 돌아갈 때마다 기체로 화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 뜬금없이 우리 쪽 히어로보고 웬 아이를 쫓으라고 했다던데. 그게 그거였어?”

 

다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다가 빅터를 만날 때마다 다나도 그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매번 위험이 있는지는 아닌지 감시와 보고를 시킨 것이다. 다나 못지않게 감이 좋은 유다를 속여 넘기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나… 히어로의 특기는 그보다 대단했다.

 

“빅터와 닮은 외형, 이름도 숨길 생각이 없고, 평소 언행에서도 청실, 홍실, 백모래나 ‘누나’라 이르는 메두사의 얘기가 나왔으니- 확정이죠.”

“여태 말하지 않은 이유는?”

“제가 추궁해서 잡으려 한 이후로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 보고하려 했으나 심문이 불가능해서 증거도 부족했고….”

“-끙.”

 

마티오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깊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꺼내 빅터의 파일을 펼쳤다. 그리고는 ‘추가사항’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간단히 정리했다.

 

-자신을 닮은 분신을 만들 수 있으며, 이는 마음대로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다나 네가 말하려던 건 이게 끝일 것 같지 않은데. 얘기하려는 게 뭐야?”

 

다나는 잠시 말을 고르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개인적인 의혹이라 치기엔 너무 제 몸치를 불린 것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듄의 증언이 너무 생생했다. 그의 행보와도 어쩐지 일치하는 면이 있었고. 하지만 역시, 사실…

 

이것을 어떤 의도로 말하고자 하는지 다나로서도 자신할 수 없었다.

 

“빅터의 실험내용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가 정말로 ‘순수한 아이’인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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