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드림

태양의 기억

이리스 이야기

실낙원 by 엘리아
8
0
0

라하브레아 친구 드림 + 베네스 스승 드림(베네스 이전 아젬 설정)
+ 라하브레아 제자 겸 유사 양녀 드림(아젬)
+ 라하브레아 연인 드림(빛의 전사)

파이널 판타지 14 드림글입니다.
이후 공개되는 설정 및 그에 따라 수정되는 드림 설정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라하브레아, 이리스의 다른 스승들이었던 두 사람과 이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들려줄 수 있나요?”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술식을 적던 라하브레아는 베르니체의 물음에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늘 이리스와 라하브레아 자신, 혹은 그녀가 어릴 때 이야기나 시민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두던 이는 오늘 처음으로 이리스의 다른 스승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렵지야 않지.”

라하브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앉아있는 접객 테이블로 걸어가 맞은 편에 앉았다.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고, 라하브레아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마지막 아젬–이리스의 첫 스승은 라하브레아의 동문이기도 했던 아르얀로드라 불리는 자였다. 라하브레아가 불 마법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그는 바람 마법에 그러했고, 그가 만들어 낸 바람 계열의 창조 생물도 제법 많았다. 그런 이가 난데없이 아젬이 된 것은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아모로트를 떠날까, 해.”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우리는 많은 생물을 별에 내보냈잖아? 하지만 엘피스와 아카데미아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된 안정적인 환경이고, 이 별의 자연은 달라. 어떤 때는 맑고 화창하다가도 어떤 때는 폭풍우가 몰아치지. 나는 그런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환경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어.”

그렇게 그는 아모로트를 떠났다.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관찰 이후 돌아올 것이라 했으니, 라하브레아가 되기 전의 그, 헤파이스토스는 그러려니 하고 자신의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몇 개월에서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헤파이스토스가 라하브레아의 좌를 물려받을 무렵 그 역시 아젬의 좌를 물려받았다. 여행을 떠난 와중이라 한들 머무는 장소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곧장 14인 위원회로 서신을 보내 대처 방안을 묻거나 큰 자연재해가 관측된 곳의 피해 사실을 보고하는 등, 14인 위원회에 직접적인 보고가 있거나 그러기 이전 그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해결해 준 것이 당시 아젬의 마음에 들었던 탓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14인 위원회가 되어 별과 인류를 위해 봉사했고, 특히 아젬–아르얀로드는 그것을 위해 안건뿐 아니라 창조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이들의 창조물을 14인 위원회로 가져와 각 위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해가 끝나기 전 희망하는 이들을 데려와 아카데미아에 입학시키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별을 위하던 어느 날, 아르얀로드가 그에게 어떤 것을 가져왔다.

“이건?”

“한 번 보게.”

그것은 은은한 무지갯빛의 작은 새였다. 생명을 얻은 존재는 아니지만, 그 환영체는 꽤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걸 만든 아이는 무척 어린아이였어. 대단하지 않아?”

“어느 정도로?”

“글쎄. 이제 겨우 내 허벅지에 닿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허벅지 중간쯤을 손날로 그었다. 그 정도라면 몹시 어린아이다. 게다가 이미 별에 풀려난 야생의 창조 생물과도 잘 어울리고 있었다는 말을 한 그는 라하브레아의 손에서 다시 제 어깨로 올라온 새의 턱을 손끝으로 긁어주고 말했다.

“마치 아이테리스의 맑은 하늘로 자아낸 듯한 머리카락과 이 별을 담은 듯한 푸른 눈의 아이야. 얼마나 비범한지! 아모로트로 데려오지 않으면 큰 손해일 거야. 그래서 어느 정도 자라면 아모로트로 데려올 생각이네. 그전까지는 주기적으로 들러 창조 능력을 확인할 생각이고, 다음에 찾아갈 때는 창조 마법 개론을 가져다줄 생각이야. 자네가 최근 다시 쓴 그것 말이지.”

“어린아이에게는 어렵지 않겠나.”

“부모가 그 도시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어. 창조 마법과 관련된 분야는 아니었지만, 그 두 사람이라면 그 내용을 아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거야.”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터라, 라하브레아도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다. 하지만 아모로트에는 훌륭한 이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자는 당연히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라하브레아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대로 잊어버렸다.

이후 시간이 지나 아젬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아르얀로드는 위원회로서 별을 이끌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즐겁지만, 그 자신보다 사람을 돕는 것을 더 기쁘게 여기는 이를 찾았다며 자리를 넘긴 것이다. 라하브레아가 자리에 앉은 이후 바뀐 아젬은 베네스였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기적인 것을 밝혀낸 그녀는 아르얀로드에게 여행을 권유받고 함께 한 번씩 아모로트를 떠났다가 홀로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많은 일들을 해냈고, 그것을 본 아르얀로드가 그녀에게 아젬의 좌를 맡기기로 한 날 라하브레아에게 말했다.

“베네스는 모험가라는 말이 어울려. 자유롭게 행동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을 느끼고, 인류를 위해 행동하지. 학식은 말로 할 것도 없어. 게다가 나는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것을 보기 위해 나가는 겸 세계를 둘러보고 오는 것이지만, 베네스는 달라. 그라면 나보다 더 뛰어난 아젬이 될 거야.”

그렇게 그는 다시 학자로서 여행을 떠났다.

아르얀로드의 말대로 아젬의 좌에 오른 베네스는 뛰어난 학식으로 별과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문제라면 들고 돌아와야 할 안건을 현지에서, 굳이 위원회가 나서지 않아도 될 문제도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굳이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에서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 위원회에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곳이 있어서 한 번 가보려고 합니다. 그 도시 전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 돼서요.”

그리고 그녀가 말한 도시는 오래전 아르얀로드가 재미있는 아이를 발견했다고 말했던 그 도시였다. 도시 전체에 변고가 생겨 연락이 끊긴 것이라면 확실히 큰일인지라 위원회 전체가 동의했고, 아젬–베네스는 그곳으로 떠났다.

그 후로 그가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던가 의심이 될 만큼 즐거운 목소리로 아젬이 말했다.

“재미있는 아이를 발견했어요. 아직 어린데도 사건 해결 능력과 그를 위한 마법 실력을 갖춘 아이였습니다. 그 도시에서 연락이 들려오지 않은 것도 그 아이가 모두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더군요.”

“어린아이에게 위험할지도 모를 일을 맡기는 건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른들이 말리기도 전에 해결을 위해 가버리는 터라,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쫓아가지도 못하고, 혼자 힘으로 어려울 것 같다면 언제든지 돌아오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있다고 해요. 게다가…….”

보고하다 말고 웃음을 꾹 누른 베네스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지만, 몹시 어린 나이인 그 아이가 성인인 아젬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를 먼 곳으로 내쫓아 버리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에스케프나 전송 마법과는 달랐어요. 마치 공간 그 자체를 잇는 마법 같았죠. 어떻게 한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첫 만남에 미운털이 박혔지 뭐예요.”

“어린아이라고 하지 않았나. 공간을 잇다니, 그 정도 되는 마법을 어린아이가 할 수 있을 리 없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분명히 그 마법이었어요. 공간을 이어 결절점을 만들고, 그 결절점을 문으로 이용하는 마법.”

라하브레아는 그 말이 너무나 낯익었다. 정확히는, 비범한 능력의 어린아이인 것이 걸렸다.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은 것만 같은 기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문득 머리를 스쳐 간 외모를 입으로 뱉었다.

『마치 아이테리스의 맑은 하늘로 자아낸 듯한 머리카락과 이 별을 담은 듯한 푸른 눈의 아이야. 얼마나 비범한지! 아모로트로 데려오지 않으면 큰 손해일 거야.』

“혹시 그 아이가 하늘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의 아이인가? 이미 별에 풀려난 생물들과도 잘 어울리는?”

“네, 맞아요! 제가 만났을 때도 야생 동물의 곁에 있었을 정도예요. 어, 그런데 라하브레아가 어떻게 그걸…….”

“……아르얀로드가 아젬일 적, 그 도시에서 특이한 아이를 발견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 정도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베네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다음 여행은 그 아이를 또 찾아가 봐야겠다고 하는 베네스에게, 라하브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르얀로드에게 서신을 보내 만나러 가라고 할 테니, 자네는 위원회 업무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어.”

“제 임무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어요. 게다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만큼 만회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르얀로드 님이 이미 아는 사이라면 그분께 소개장을 받을 필요는 있어 보이네요.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러주겠어요?”

그 이후 세 사람이 모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서신을 보낸 이유가 그 아이를 만나라는 내용이니 이유를 물으러 돌아온 아르얀로드와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소개장을 받으러 온 베네스까지, 라하브레아의 사무실에 모여 차를 마시면서 그간의 안부를 나누던 중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르얀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 무례한 사람이 너였어, 아젬?”

“벌써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럼, 들었지. 그때 함께 있던 짐승의 새끼가 입구가 좁은 구덩이에 빠져서 나오지도 못하고 뺄 수도 없으니까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던 날 맞지? 그 구덩이 앞에서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네가 그 어미를 공격하려고 했다며? 단단히 화가 났던데?”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매우 위험해 보이지 않나. 화를 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손에 든 것을 유심히 보던 라하브레아가 고개를 들고 한 말에 아르얀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베네스도 뺨을 긁으며 어색한 미소를 짓기에, 라하브레아가 좀 더 상황을 묻자, 이번에는 베네스가 답했다.

“사실, 그 아이를 만나려고 했을 때 이미 그 아이는 도시에 들어왔던 야생 동물을 데리고 나갔다는 말을 들었어요. 근데 하필 그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숲의 주인’이라 불릴 만큼 강해진 랍토르라고 해서 곧장 데려오겠다는 말만 하고 그 뒷말은 듣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도시 시민들 처지에서는 자극하거나 영역 중에서도 굴이 있는 곳까지 접근하지만 않으면 위협하는 선에서 그치는 정도라 외지인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바람에 오해가 겹친 거지. 게다가 그 시기에 그렇게 사나워진 이유도 그 새끼가 있기 때문이었고 말이야. 평소에는 숲에서 길을 잃은 인간을 숲 밖으로 내보내 주기도 한대.”

라하브레아는 그 말을 듣고 그 이리스라는 아이가 두 사람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괴짜일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사람의 안전과 동물의 안전을 동일선에 두는 것은 그들도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르얀로드가 입술을 축이고 다시 베네스를 보았다.

“그래서, 그 새끼는 어떻게 구했대? 잘 구했다고만 들었거든.”

“그 구덩이 안쪽에 결절점을 열어서 꺼낸 모양이었어요. 무례한 짓을 하긴 했지만, 저를 다른 곳에 보내는 과정에서 해답이 떠올랐으니 그 점은 감사하다고 한 걸 생각해 보면요.”

물론 그렇게 해도 만회는 되지 않았다며, 오히려 탈진한 새끼를 동물 학자에게 데려가 수액을 맞추는 동안이나 그 아이가 짐승들을 숲으로 돌려보낸 후에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며 베네스가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소개장 좀 써주지 않겠어요? 대화를 해 보고 싶거든요.”

“아예 함께 만나러 가는 건 어때? 어차피 나도 만나러 가야 하니까 말이야. 라하브레아가 직접 만나러 가라고 했을 정도면 라하브레아도 관심을 가진 모양인데?”

“결절점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다니 흥미가 있을 뿐이야. 그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면 아모로트에서 정진해 별을 위해 힘쓸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으니.”

라하브레아는 손에 들고 있던 랍토르 모형을 내려놓았다. 손에 들어올 만큼 작으면서도 자잘한 크리스탈로 비늘을 표현하고, 관절 하나하나가 에테르로 연결되어 있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자세를 만들 수 있는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그리고 이 정도 솜씨면…… ……흠. 알로그리프나 알티마가 좋아하겠군.”

“그렇지? 안 그래도 내가 두 사람이 보면 좋아하겠다고 했더니 여행 선물로 가져가라면서 주더라고. 네가 쓴 책도 잘 읽고 있는 모양이야.”

“라하브레아도 그 창조물이 마음에 든 것 같은데요? 아르얀로드가 꺼내두자마자 집어 들고는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었잖아요.”

라하브레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처음 아르얀로드가 이야기했을 때가 몇 년 전. 당연한 소리겠지만, 창조 마법 또한 제법 실력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라하브레아는 턱을 짚은 채 생각하다가 아르얀로드를 보았다.

“그 아이, 언제쯤 아모로트로 데려올 생각인가.”

“음, 글쎄. 사실 슬슬 부모와 이야기해 보고 그 아이도 동의하면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아젬이 이렇게 미움받아서야…… 별을 이끄는 14인 위원회의 인상이 나쁘면 곤란하니, 일단 오해가 풀리면 그 이후에 다시 이야기해 보려고.”

그 이후, 그 아이가 아모로트로 온 것은 몇 년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베네스와의 오해가 안 풀린 것이냐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이 라하브레아의 연구실에서 만난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함께 그 아이를 찾아갔고, 그 무렵에는 그 아이의 화도 풀린 후여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만 좀 더 관계가 녹을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은 베네스가 지나갈 일이 있으면 들르거나, 아르얀로드가 꾸준히 찾아가며 그 아이의 성장을 관찰하다가 마침내 데려온 것이다.

라하브레아가 처음 그녀를 마주한 것은 회의가 끝나고 대의사당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은빛 새가 날아간다 싶더니, 그 뒤를 쫓아 작은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다가 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부딪쳤다. 어찌나 서둘러 달리고 있었던지, 작은 몸에 비해 충격이 보통 거센 게 아니라 라하브레아도 휘청였고, 달려오던 아이는 자리에서 뒤로 넘어졌다.

“이런, 괜찮느냐, 아이야.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안 보고 뛰느라…….”

흘러내린 후드에서 하늘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가면의 눈구멍 아래로 푸른 눈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 라하브레아는 그가 아르얀로드와 베네스가 말한 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 아이도 14인 위원회를 알아보았는지, 눈을 깜빡이며 라하브레아가 건네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다치지는 않았나?”

“아, 네. 저기, 혹시 아르얀로드 님 못 보셨을까요?”

“아르얀로드? 그러고 보니 오늘 도시로 돌아온다는 서신은 받았는데……. 아직은 보지 못했지만, 알아봐 주지. 따라와라.”

“라하브레아, 혹시 하늘색…… 아, 여기에 있었구나. 미안해, 거주관에 네 등록 절차를 전달하고 나도 복귀했다고 학술원에 알려야 했거든.”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아르얀로드의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날아갔던 은빛 새가 소녀의 어깨 위에 앉았고, 아르얀로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일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았나. 자네가 데려온다고 했던 아이 중 하나가 이 아이인가?”

“그래. 네가 인상 깊게 여기던 피조물들의 창조자지.”

“설마 그 많은 것을 다 기억하라는 소리는 아니리라 믿지. 데려가라.”

라하브레아는 그 아이를 아르얀로드의 손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몇 달이 지나 학술원에 무사히 입학했고, 라하브레아는 그를 자신의 학술원으로 데려왔다. 그 아이의 자유로움은 아젬과 어울린다고 베네스와 아르얀로드가 장난스레 투덜거리기야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아이는 라하브레아원에서 정진하면서도 두 사람의 말대로 자유로운 바람과 같았다.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어딘가에서 어른들의 잡다한 일을 돕고 있고, 또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자료실에 처박혀 자료를 찾고 있고, 또 또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동식물을 창조하는 학술원에서 창조물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라면 별종이라고 여기고 끝이었을 터였다.

“아!”

늘 그렇듯 라하브레아의 연구실에 찾아와 조잘거리던 아이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혔다. 하지만 그곳은 평범한 벽이었고, 라하브레아의 눈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감각에도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러나.”

“라하브레아, 저 아모로트 밖에 나갔다 올게요!”

“뭐?”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아이의 말에 황당함을 느끼고 쳐다보았지만, 이리스는 서둘러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연구실을 뛰쳐나가려고 했다. 염령을 불러내 그를 붙잡은 라하브레아는 염령의 입에 로브를 물려 대롱거리면서도 당장 가야 한다며 그녀의 이름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제 스태프를 들고 어쩔 줄 모르는 아이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 네가 어딜 간다는 말이냐.”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네? 제발요!”

“안 된다. 허락할 수 없어.”

“사람들 대피시켜야 해요!”

아이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빤히 보고 있으니, 마침 라하브레아를 찾아온 아르얀로드가 상황을 보더니 무슨 영문인지 물었다.

“마침 잘 됐군. 아젬과 함께 도시 밖에 다녀올 수 있나.”

“응? 어렵지는 않은데, 갑자기 왜? 그리고 어디를?”

“바다 건너 소대륙 북단 산악 도시요!”

아이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위치를 짚었다. 라하브레아는 아이를 빤히 보다가 지도를 주었고,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후 방문자에게 다시금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지도를 보던 아르얀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아젬이랑 함께 가본 적 있는 도시라 에테라이트를 쓰면 금방이야. 둘이 가서 무슨 일인지 보고 올게.”

“부탁하지. 이 녀석이 가야 한다고 떼를 쓰는 통에 곤란하거든. 자네 용건은 그 이후에 들어도 되겠나.”

“그냥 놀러 온 거라 괜찮아. 그럼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아르얀로드가 방을 다시 나가고, 라하브레아는 여전히 염령의 입에 물려 있는 아이를 보았다.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한결 얌전해져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스태프도 사라진 후였다.

“이제 만족했나.”

“……네.”

“만약 그들이 가서 별 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혼날 줄 알거라.”

“이상을 발견했다고 하면 라하브레아는 절 못 믿은 걸 사과해 주세요.”

라하브레아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꾸하며 염령에게 아이를 놓아주도록 명령했다. 아이는 다시 자리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도 불안한지 계속 벽을 쳐다보았고, 몇 시간 지나서 베네스와 아르얀로드가 함께 돌아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들의 차림새는 갔을 때와 달리 엉망이었다. 아르얀로드는 들어오자마자 흙투성이의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이리스, 너 대체 어떻게 알았어?”

“무슨 일이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산사태가 일어나서 도시 한 쪽이 휩쓸렸어요. 그래서 구조 작업을 돕느라 이제 왔고요. 전조도 없었던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데다 규모가 제법 큰 터라 파다니엘원에 요청해서 근처 지질을 좀 조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에메로롤스원에도 의료 지원을 부탁해야 할 것 같은데요. 부서진 건물 복구도 필요하니 듀달폰원의 도움도 필요하겠고요.”

라하브레아는 그들의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다가 이리스를 보았다. 그 아이는 이제 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넘어 당당하게 라하브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너무 늦지는 않았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이리스. 위원회에서 파견에 동의하면 당신 힘으로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요? 여기서 그곳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요……. 괜찮다면 함께 가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돌아올 때도 도움을 받고 싶거든요. 사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아젬. 이 아이는 도시 밖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어려. 결절점을 여는 것도 얼마나 크게, 오래 유지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이 아이의 마력은 그렇게 넘치지 않아.”

라하브레아는 베네스의 말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이 마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반응에 세 사람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아, 아뇨.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말하지 않았군요. 이리스의 ‘게이트’는 마법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문을 열 뿐이죠. 그래서 여는 형태나 시간은 큰 문제가 아닌 모양이에요.”

“그냥 우리가 문을 여닫듯이, 이리스는 원하는 곳에 원하는 곳으로 이어진 문을 여닫는 것뿐이야. 에테르의 흐름을 만드는 것과는 다르지. 별의 힘을 빌린다고 하던가……?”

“……그거, 원래 어려운 거예요? 아르얀로드 님도 그렇고 아젬 님도 그렇고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셔서 안 쓰고 있긴 한데…….”

이리스의 물음은 정말 악의 하나 없이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그것을 보며 웃은 아르얀로드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특별한 거란다. 별의 목소리를 듣고, 생명과 죽음을 들으며,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게 흔한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것이라면 더욱 이리스의 힘을 사람들 앞에서 사용하게 할 수는 없어. 차라리 에메트셀크에게 전송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아.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회의 시간에 이야기하지.”

“그래요. 내일 봐요. 이리스, 같이 돌아갈까요?”

“네! 라하브레아 님, 내일 봬요!”

그 무렵 이리스는 아르얀로드뿐 아니라 베네스도 잘 따랐다. 그러면서도 라하브레아를 졸졸 따라다니며 함께 하다 보니 그는 라하브레아의 창조를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하고 직접 가르침도 받으며 라하브레아원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창조 마법의 특성상 아젬원에서 비행 생물을 창조하는 것조차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창조자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창조자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아젬이었던 자와 아젬에게 제자로 길러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변을 감지하는 능력 때문인지 그는 베네스나 아르얀로드의 손을 잡고 자주 도시 밖으로 떠나고는 했다.

“……또 그 아이가 도시 밖으로 나갔다고? 아젬과?”

“응. 못 들었어?”

한 번은 늘 따라다니는 아이가 코빼기도 안 보여 또 어딜 갔나 싶어 찾으러 간 곳은 아젬원이었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아르얀로드의 말을 들은 라하브레아는 이마를 짚었다.

“대체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또 재해를 감지한 건가?”

“한동안 도시 밖에 나가지 못했으니 가볍게 바다 건너에만 다녀온다더군. 소풍이라던데?”

“가볍게…… 가볍게라……. 지난번에 그리 데리고 나가서 그 아이가 옆구리에 상처가 나서 온 건 기억하지 못하던가? 에메로롤스원에 긴급 이송됐을 정도의 상처로 기억하는데.”

“그건 아젬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시한 걸 이리스가 듣지 않은 거지, 아젬 잘못은 아니잖아. 그러고 반성문도 썼고, 외출 금지까지 당했다가 막 풀린 건데 설마 이번에도 말을 안 듣지는 않겠지.”

너무나도 자유로운 바람. 그는 선대 아젬들만큼이나, 어쩌면 그들보다 더 자유분방했다. 나중에 가서는 그 두 사람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이곳저곳 쏘다녀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다쳐올 때도 많았지만, 그 성향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런 이리스의 성향을, 그리고 그의 능력을 아는 14인 위원회는 자연스레 그를 주목했다. 그 물꼬를 튼 것은 아젬–베네스였다. 회의가 마무리되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말할 것이 있다는 그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때는 이리스가 성인식을 치르고도 몇십 년 지난 후였다.

“슬슬 후임을 정할까, 해요. 적합한 인재가 있어서요.”

“……이리스를 말하는 건가?”

“맞아요, 라하브레아. 그 아이라면 훌륭한 아젬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세상을 느끼고, 원하는 곳 어디든 가는 힘에 별의 이변을 감지하는 능력에 전투 실력까지…… 게다가 최근 만든 소환 마법은 더없이 적절하죠.”

“아젬의 업무는 문제를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야. 게다가 그 녀석은 주위의 기쁨에 잘 휘둘려. 최근에도 정서적 휴식을 위한 환영을 창조했다가 사람들이 즐거워하니 환영 창조가 지나치게 많아져 휴게실이 엉망이 된 적이 있다.”

“알아요. 하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라하브레아에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아이의 감정 조절을 도와주세요.”

“그런 교육이 필요한 자를 위원회의 자리에 앉힐 수는 없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테미스 이전의 엘리디부스가 그들을 말렸다.

“두 사람 다 진정해. 두 사람의 의견이 정 그러면 우선 교육을 진행하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늘 그렇듯 추천된 자를 아젬으로 앉히는 건 어떤가. 그녀가 해온 일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이의 없다.”

“그렇게 할게요.”

그때 베네스의 표정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리스 외의 다른 아젬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 라하브레아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네스의 확신은 들어맞았어.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이리스는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지 않게 됐지. 날이 갈수록 차분해지고, 날이 갈수록 점잖아졌다. 여전히 나만 보면 어리광을 부리긴 했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얌전했지.”

라하브레아의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차분해져서도 무언가를 느끼면 갑자기 뛰쳐나가는 성향은 그대로여서, 오히려 그것이 신비함을 더 느끼게 했다는 말을 더하는 그에게 베르니체가 기대었다.

“아젬의 좌에 앉히는 걸 반대할 정도로 철부지였나 보군요.”

“……그것도 그것이지만, 어릴 때부터 내 옆에 있었던 자라 위험한 일에 뛰어들 게 훤해서 그 접근성이 더 높은 자리에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비록 내가 원해서 그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던 건 아니라도 어쨌든 내가 그의 보호자였으니 위험한 곳에 접근할 가능성을 낮추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젬의 좌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훌쩍 떠났다가 돌아올 자였다며 고개를 저은 그는 베르니체의 허리를 좀 더 끌어안았다. 베르니체는 그의 말에 썩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 에리크토니오스한테도 좀 그랬으면 좋아요?”

“에리크토니오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헤파이스토스’를 분리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친자식이었기에 포기했던 편도 조금은 있지. 좋은 기억을 끔찍한 것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 한 사람으로 자립할 수 있다면 원망해도 좋았으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자라는 동안에는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정작 친자식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포기했다며 자신을 비웃은 그는 베르니체를 무릎에 앉히더니 좀 더 끌어안고 말했다.

“게다가 그 아이가 매일 나에게 와 너처럼 내 일부로 자리한 탓에, 그리고 워낙 천방지축이라 보이지 않으면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있을까 봐 불안하더군. 차라리 시야에 두는 것이 편하기도 했고.”

“에메트셀크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당신.”

“나와 에메트셀크랑은 정반대에 있는 자 아닌가. 그의 방식은 우리 시대에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아니기도 했고.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화산 분화를 막겠다고 이프리타의 이데아를 들고 간 건 둘째 치고, 지금의 다날란까지 끌고 간 것 말이다.”

베르니체는 너무나 극단적인 예시 아니냐며 그에게 투덜댔다. 지금 생각해도 할 수 없을 발상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것이 떠올랐다. 이프리타와 아젬. 그 둘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두 신에 대해서.

“그래서 아말쟈의 전승과 인간의 전승이 다날란에서 겹치는 거군요.”

“어떤 전승 말이냐?”

“아말쟈에게 있어서 다날란은 이프리트의 불꽃으로 정화된 땅이고, 인간에게 있어서 사골리 사막은 아제마가 살리아크를 지나치게 뜨거운 시선으로 본 탓에 강이 말라버려 생긴 곳이라고 하거든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라하브레아가 “그런 전승이 있었지”라며 미소 지었다.

“열두 신은 하이델린의 작품이며 전승 또한 세계가 갈라진 이후의 생명들이 각자 살을 덧댄 것이지만, 아마 그 뿌리는 아젬이 한 짓이 전승됐을 확률이 높지. 포도가 맛있다며 불 속성 에테르가 넘쳐 터지기 직전인 것을 창조물로 바꾸어 사막에서 토벌한 것이 아말쟈와 인간에게 나뉜 것일 터. 이프리타를 아말쟈에게 신의 형태로 전해준 것은 거주 방식에 따른 의도였지만, 그런 설화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지금 당장 그가 말한 것이 진실일지 거짓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에 관한 판단도 제법 즐겁지 않냐며 코를 맞댄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가설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것은 더욱 재미있는 일이지. 그리고 네가 그 탐구에 빠져든 모습을 보는 것은 나의 즐거움일 테고.”

“매번 숙제를 내주네요, 당신.”

“말하지 않았나. 나는 내가 이끄는 학자들의 탐구심을 즐거움의 일부로 여겼다고. 자, 그러면 이제 잠들도록 할까. 이야기도 끝났고, 내일 일정도 있지 않느냐.”

몸을 끌어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에게 안겨 침대에 누우니, 늘 그렇듯 햇살 향기를 머금은 침구가 반겨주었다.

태양 없는 도시에 내려앉은 빛을 위해 거짓된 태양의 온기를 창조한 이와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창염의 밤이 깊어갔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