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파판14/아젬하데,빛전에메]어떤 꿈

네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라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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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메인스토리 5.3스포 (*5.3당시에 쓴 글이라 설정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리버스로 소비하셔도 무관합니다. 아젬과 빛전 모두 성별이나 종족이 특정되지 않습니다


[아젬하데/빛전에메] 어떤 꿈

by. 솔방울새

(*하데스 토벌전 직전의 이야기)

"하데스, 또 여기서 자고 있었구나."

앞머리를 흩어놓는 바람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얼마 만인지 모를 부름에 반응해 감고 있던 눈을 뜨기도 전에 하데스는 이것이 꿈임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잃어버린 어느 날의 풍경에 놓였다 하여 실은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악몽이었기를, 그의 현실이 여기에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특별할 것 없이 평온했던 한때의 꿈을 만 이천 년 간 조금씩 다르게 꾸다 보면 그것의 헛됨을 되새길 생각조차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직접적으로 꿈에 나타난 건 꽤 오랜만이었다. 최근 있었던 일들 때문일까. 아니, 그런 건 이 순간 조금도 중요치 않다.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로 하데스는 그날의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기가 햇살이 가장 잘 드니까."

그럼 그 사람은 또다시 기억 속의 그때와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웠던 만큼 선명했다. 하데스는 제 기억력이 좋은 편임에 탄식과도 같은 감사를 느꼈다.

"뭐? 벌써 해가 다 졌는데, 얼마나 잠들어있었던 거야?"

"....아모로트의 하늘에 해가 떠 있을 때부터."

그 사람의 손이 서슴없이 하데스의 가면을 벗겨내었다. 아모로트의 모범 시민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실례되는 행동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하데스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볼 수' 있었고, 그 사람은 애초에 그런 걸 크게 신경 쓰는 성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데스는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맨 뺨에 닿아 온 손바닥에 슬며시 얼굴을 기대었다. 어디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지 모를 온기가 뺨과 가슴께에 번져 정말로 긴 잠을 자다 깬 것만 같은 착각이 들 것만 같았다. 

"자는 거 정말 좋아한다니까."

 그래. 그는 늘 잠을 즐겼고, 잠에 뒤따르는 꿈 역시도 좋아했다. 아무리 기분 좋은 꿈이라도 잠깐의 환영에 불과하다지만 그러한 사실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헛된 순간에 뿌리까지 흔들릴 리가 만무할뿐더러 만일 그랬다면 제 손으로 환영 도시 따위를 만들지도 않았다. 하데스는, 에메트셀크의 좌에 앉은 그는 그저 말없이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 색을 확인하고, 후드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제 앞에 서 있는 이의 모습을 새겼다.  손을 내민 채 이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있는 그는 여전히 풀밭에 앉아있는 하데스를 향해 해사하게도 웃고 있었다. 

"네가 안 보여서 찾고 있으려니 휘틀로다이우스가 여기로 가라고 알려줬어. 라하브레아가 물어봤을 땐 자기도 모른다고 하더니...휘틀로다이우스가 한 입으로 두말 하는 걸 엘리디부스가 듣긴 했는데, 우리 조정자가 의장에게 말하지는 않겠지?"

"우리의 조정자라면...굳이 입을 열어 그들의 신뢰 관계에 금을 내지는 않겠지."

다른 원형들과 함께 과거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쉬지 않고 활동한 끝에 라하브레아는 소망과 함께 닳아갔고, 엘리디부스는 변질되어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가능한 한 본질을 흐리지 않고 그들을 오롯이 기억할 수 있을 사람은 이제 자신뿐이라는 책임감이 심해의 무게처럼 숨통을 틀어막고 짓눌러 왔다. 직시하고 싶은 사실은 아니나 이 꿈마저도 제 기억과 바램에 왜곡되어 진실을 흐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어찌 이 찰나를 기꺼이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싶었다. 일그러진 콧잔등에 내려앉는 입맞춤과 호흡이 이리도 달큰한데.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여, 하데스. 표정도 안 좋고. 일이 많이 고된 거야? 아니면 최근 학술원에서 부탁받았다는 일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

네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울음처럼, 혹은 욕지기처럼 치미는 말을 삼키며 하데스는 제 얼굴을 감싼 그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확 당겼다. 중심을 잃고 제 위로 넘어질 듯 휘청이던 그 사람은 곧 버티기를 포기하고 순순히 무너져주었다. 두 팔이 자신의 어깨와 목을 감싸 끌어안아 주는 것을 느끼며 하데스는 마주 매달리듯 허리를 끌어안고, 그 어깨에 이마를 대어 부볐다. 태양 아래 던져진 심해어처럼 바짝 마른 목이 화끈거려 입술을 몇 번이나 벙긋거리다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혀에 올렸다. 아젬, 아젬, 그리웠던 나의....

"□□..."

그리고 제 특별한 이를 다시금 눈에 담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 에메트셀크는 데인 것처럼 몸서리쳤다.

"네가,"

저를 안은 사람의 모습은 어느새 불완전한 세계의 영웅으로 변해 있었다. 분노 가득한 고함도, 경악 섞인 비명이나 괴로움 어린 신음조차도 차마 내지르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뭔데 여길 네가 나타나. 네놈이 뭔데."

소중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추억과 꿈이었다. 어찌 감히 저런 것이 난입해 들어온단 말인가. 끔찍하게도 다정하게 두 팔이 엉겨 붙어 와 에메트셀크는 진저리쳤다. 영웅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뜯듯이 떨쳐내며 땅바닥을 손으로 짚어 엉덩이로 뒷걸음질했다. 고민 없이 품 안에 손을 넣자 단단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곧장 그것을 꺼내어 방아쇠를 당기자 아모로트에서 있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고작 총에 맞은 것으로 피를 쏟으며 영웅은 그 명성이 무색하게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잖아도 불완전한 것이 허상으로 나타나더니 기가 막히도록 더욱 보잘것없었다. 현실의 영웅은 징그러울 만치 끈질기게 살아남아 버틸 것이 분명했다. 에메트셀크는 한숨을 내쉬고 제 다리 위에 늘어진 몸뚱이를 발로 밀어 치워냈다. 뺨에 튄 핏물을 훔쳐내고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자 제가 죽인 시신이 다시금 시야에 들어왔다. 영웅이 죽어 있던 그 자리에는 어느새 그 사람이 쓰러져 누워있었다.

"!!"

제 앞의 광경이 기억에 남아버릴 것만 같아 곧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곧이어 에메트셀크는 잠에서 깨어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태양을 잃고 심해 깊숙이 가라앉은 환영의 아모로트가 그를 반기는 것을 보며 어이없게도 안도감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잠깐의 위안마저 거하게 망쳐준 영웅 덕분에 웃기지도 않는 꿈이 되어버렸다. 뻐근한 눈가를 문지르며 무심코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자니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거품이 곁에서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네 짓이야?"

"...설마. 나는 거품에 불과한걸. 아니라고 해도 그런 심술궂은 짓은 하지 않아."

"......."

에메트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듯 침묵하던 휘틀로다이우스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의 오랜 친구. 알잖아? 네가 바라는 왜곡되지 않은 기억을 위해서는 똑바로 보아야 해."

꿰뚫어 보는 그의 시선이 선연해 에메트셀크는 과거 언젠가의 습관처럼 가면을 꺼내다 쓰고 싶어졌다.

"분명 그리워하고 있잖아. 그립기도 하고 새롭기도 한 그 사람. 너의 사념이 만들어낸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듯이. 넌 그에게서 그 사람을 보고 있어. 이 사실을 부정할 거라면 늘 그래왔듯 철저히 분리해서 판단하고, 그러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하나로써 받아들이는 게 어때?"

"내가 그걸 받아들인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나 알고 하는 소린가?"

"알고말고. 그리고 네게 이런 말을 해 줄 사람이 나 뿐인 것도 알고 있어."

그의 손끝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시선으로 끝을 따라가니 미약하기 짝이 없는 혼의 영웅이 그곳에 있었다. 한계까지 차오른 빛을 품은 채 영웅은 이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찾아왔다. 그 걸음마다 한 세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어쩔 수 없이 느꼈다. 에메트셀크가 만 이천년의 시간 동안 제 걸음에 매달아 끌고 온 세계였다.

"어떤 결말을 내든, 나는 네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라."

그 말만을 남긴 채 휘틀로다이우스는 모습을 감추었다. 에메트셀크는 깊게 눈을 감았다.

"당신, 괜찮은 거 맞아?! 몸 상태가 이상한 거라면 솔직히 말해 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는 알리제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오히려 현기증이 더해졌다. 잠에서 막 깨어난 참이었던 영웅은 더 흔들면 토할 것 같다고 말하고서야 간신히 그녀를 말릴 수 있었다. 알리제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입술을 짓씹고 있었지만, 린이 다가와 살펴본 뒤 빛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라고 재차 확인해 주자 겨우 마음을 놓은 듯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을 발로 툭 찼다. 그녀를 돌아보고 옅게 미소지은 린이 다시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어왔다.

"빛은 괜찮지만...안색이 아주 나빠 보여요. 나쁜 꿈이라도 꾸신 건가요?"

"무리할까 봐 잠시 쉬라고 눈을 붙이라 한 건데...그렇게 비명까지 지르며 깨어날 줄은 몰랐어요. 괜히 억지로 재웠던 걸까요?"

야슈톨라도 다소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말하자 영웅은 당황해 곧장 고개를 저었다. 저를 위해주고 있는 그들에게 죄책감까지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야. 이상한 꿈을 꾸긴 했지만 한숨 자고 나니까 몸은 확실히 가벼워졌는걸?"

어깨를 으쓱이며 산크레드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다들 네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바로 말해달라고. 물론 나도 그렇고."

"동감입니다만, 산크레드는 본인의 일이었을 때에도 이렇게 사려 깊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

위리앙제의 말에 영웅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산크레드는 반박할 의지를 잃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들을 보며 작게 고개를 젓던 알피노가 슬그머니 다가와 영웅에게 손수건을 건네왔다. 어리둥절하게 그것을 받아 들고서야 영웅은 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음을 깨달았다. 이러니 새벽의 동료들이 걱정할 만도 했다.

"어떤 꿈을 꾸었길래 그러나?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혼자 고민을 안고 있는 거라면 언제든 편할 때 우리에게 털어놓아 주었으면 하네."

"그냥......어떤 사람이."

내 품에 안겨 있는 꿈이었는데. 라는 뒷말을 목 아래로 눌러 삼켰다. 꿈에서 본 모습이 여전히 선연했다. 깊은 그리움으로 점철된 목소리로 모르는 이름을 부르면서. 매달리듯이 나를 끌어안고 품에 기대며 너무나도 처연하게. 그의 하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아 바스락거리며 알 수 없는 애틋함을 자아냈다. 그 순간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았고.....곧장 차가운 총구가 미간에 닿았다. 굴그 화산에서 수정공을 쏘았던 총임을 간신히 알아보자마자 방아쇠가 당겨졌다. 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격통보다도,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와 매몰되는 기분에 괴로워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영웅은 말을 고르다 실없이 뱉었다.

"어떤 사람이 우는 꿈인 것 같았어. 기억은 잘 안 나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움직이자. 나 자는 동안 아모로트 탐색은 얼마나 진행됐어? 담담한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물으며 영웅은 자신의 무기를 챙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든 계속해서 나아가 에메트셀크를 마주해야만 했다. 그에게도 구해야 할 사람이, 지켜내야 할 세계가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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