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양치기 들개

개와 소년

-주의: 확장팩 3.3 최후의 포효 (용시전쟁 완결편) 클리어 이후 열람 권장

에스티니앙은 새까맣게 불탄 마을을 발견하고 뛰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가망 없는 바람을 되뇌었고, 가족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는 그대로 웅크려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잿가루가 코와 입으로 들이닥친 탓에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아무리 콜록거려도 목을 콱 메운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개가 겨드랑이 밑으로 주둥이를 들이민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개는 눈물 콧물 범벅인 에스티니앙의 얼굴을 마구 핥아서 침 범벅으로 만들어놨다. 그 순간 소년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한 채 얼굴을 핥는 개가 몹시 싫어졌다. 이웃집 개가 낳은 새끼 중에서 녀석을 손수 골라 온 아버지가, 개의 밥그릇을 깎고 잠자리 깔개를 뜬 어머니가, 막냇동생이라며 개를 애지중지하던 아미냥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데…. 손을 뻗어 개를 밀어내려던 순간에야 알았다. 녀석은 자신만큼 떨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한껏 말린 꼬리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알베리크는 잿더미 사이에서 생존자들을 발견했다. 하나는 어린 소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살쯤 먹은 얼룩무늬 개였다. 나란히 재를 뒤집어쓴 탓에 소년의 흰 머리카락도, 개의 흰 터럭도 회색빛이 돌았다. 서로에게 기댄 모습이 꼭 한배에서 난 새끼들 같았다. 알베리크는 어린아이를 폐허에 남겨두고 올 만큼 냉정한 사람은 못 되었다. 개는 덤처럼 따라왔다.

에스티니앙에게 지난 사정을 캐물어 본 뒤, 알베리크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소년에게는 말 그대로 개밖에 남지 않았다. 말을 곧잘 알아듣고 눈치가 빠른 걸 보면 개는 괜찮은 목양견이었다. 하지만 자리를 이탈한 주인을 따라 양을 내팽개칠 만큼은 어렸다. 양 떼가 남아있었다면 에스티니앙은 적어도 빈털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흩어진 지 오래였다. 운이 좋다면 초지를 떠돌 것이고, 나쁘다면 용의 먹이가 될 터였다. 어느 쪽이건 다시 찾을 길은 없었다.

알베리크는 직위를 내려놓더라도 어린아이 한 명쯤은 건사할 수 있었다. 개는 아니었다. 양치기로 키워진 탓에 녀석은 운동량이 대단했다. 성안에 자리 잡은 비좁은 주택에서는 몸이 근지러운 개가 치는 사고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알베리크는 목양견이 필요한 목장을 수소문했다. 에스티니앙을 어떻게 설득할까, 싶어 조금 긴장했으나 소년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리크는 안도한 나머지 대화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회유책을 대중없이 읊었다. 원한다면 개를 보낸 목장에 가끔 데려가 주겠다는 말을 듣고서, 에스티니앙은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죠?’

개는 서부고지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에게로 갔다. 알베리크의 옛 동료의 지인의 이웃쯤 되는 사람들이었다. 전직 푸른 용기사와 혼자 남은 소년은 좋은 첫인상을 주기 위해 최대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었다. 노력이 빛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부부가 에스티니앙의 사연을 듣자마자 언제든 와도 좋다고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가족에게 일어난 참변을 구구절절 얘기한 건 본인인데도, 알베리크는 좀 찜찜했다. 저 애를 너무 불쌍한 처지로 만들어버린 게 아닐까?

어른들이 대화를 나눌 동안 에스티니앙은 개와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른 채. 오랜만에 풀밭을 밟고, 개와 함께 달리기를 겨루고, 양을 구경했다. 소년은 개의 귀 뒤를 긁으며 자신이 파악한 양들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어떤 녀석이 고집이 센지, 어떤 녀석이 대장이고 또 어떤 녀석이 따돌림을 당하는지. 개는 알아듣지 못하는 충고가 지루한 듯 바닥을 굴렀다. 에스티니앙은 개의 목을 끌어안아 똑바로 앉혔다.

잘 들어야지. 넌 이제부터 여기서 살게 될 거니까. 좋겠지? 새로 돌볼 양들도 있고. 가끔 보러 올 테니까, 잘 지내야 해….

두 사람은 목장에서 하루를 묵었다. 드넓은 서부고지를 가로지르려면 아침 일찍 길을 나서야 했다. 소년이 발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가 뒤쫓아왔다. 목장주가 미리 목줄을 매어두었던 탓에 멀리까지 따라오지는 못했다. 길게 우짖는 소리가 일행을 배웅했다. 목장이 아주 조그맣게 보일 즈음 에스티니앙은 선언했다. 용을 죽일 거예요. 알베리크는 조금 후회했다. 품을 더 들이더라도 소년과 개를 함께 맡아줄 곳을 찾아야 했을까?

알베리크는 가끔 목장에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다. 에스티니앙이 혼자 서부고지를 여행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고 실력을 쌓을 때까지. 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개는 매번 꼬리를 낮추며 경계했다. 낯선 이에게서 풍기는 익숙한 체취를 맡으며 의아하게 낑낑거렸다. 결국에는 살가운 옛 친구로 돌아왔지만.

개는 잘 지냈다. 불을 무서워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짖는 소리가 탁해지기는 했어도. 너무 어릴 때 연기를 마신 탓일 거라고 목장주는 말했다. 그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녀석은 양을 모는 솜씨가 무척 좋았다. 근방의 목양견들과 비교해도 유독 영리했다. 가끔은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목동보다도 나았다. 네가 다녀갈 때마다 시무룩해지는 걸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 글쎄, 나는 개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걸 이 녀석을 키우면서 알았지 뭐니….

혼자 목장을 방문하면서부터 에스티니앙은 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알베리크는 따로 부부에게 연락해 개의 안부를 묻고는 했다. 펀데일의 또 다른 생존자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개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알베리크는 내심 바랐다. 그처럼 살아갈 날이 제자에게도 온다면 좋을 거라고.

처음으로 용을 잡고서 에스티니앙은 오랜만에 개를 떠올렸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목장에 통 방문하지 못했다. 알베리크가 가끔 전해주는 소식으로나 얘기를 들었다. 성도로 돌아와서는 무척 바빴다. 곧장 복귀하지 않은 것을 징계해야 한다는 주장과, 겨우 두 명으로 용을 죽인 공로는 치하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목장으로 연락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함께 용을 잡은 궁병 도련님, 아이메리크가 귀찮은 일에 나서준 덕분이었다.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근신 처분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그동안 개를 보러 갈 준비를 했다. 군견 담당 병사들에게 뭘 가져가야 좋을까, 물었더니 입을 모아 보양식 얘기를 꺼냈다. 아무리 양이나 치는 개라지만 열 살이 넘었다는 건 상당히 운이 좋은 일이었다. 언제든 노환으로 눈을 감아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고. 징계건 포상이건 월봉만 삭감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에스티니앙은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개를 챙기면서 목장주 부부에게는 맨손인 것도 염치가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날짜가 잡히면 적당히 고기나 몇 근 싸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고깃국을 끓여서 개를 먹이고, 겸사겸사 사람들도 먹고…. 푸줏간에 소 잡는 날이 언제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답장이 왔다. 얼마 전에 개를 묻어주었다는.

에스티니앙은 그대로 성도를 뛰쳐나갔다. 징계니, 포상이니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복수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환희는 드넓은 서부고지를 미친 듯이 가로지르며 증발한 지 오래였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손님에게 목장주 부부는 겁을 먹었다. 흉흉한 기색을 띤 청년은 기사보다는 도살자에 가까워 보였다. ‘개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마디가 그것이어서 부부는 졸도를 면했다.

에스티니앙의 기세에 압도당한 나머지, 남편 쪽이 결국 등불을 켜고 길을 안내했다. 개를 묻은 곳은 녀석이 평소에 손님을 배웅하러 뛰어오르고는 했던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무덤은 기억에 남은 녀석의 덩치보다도 작아서 에스티니앙의 그림자에 쉽게 파묻혔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용을 죽인 보복으로 개가 죽은 것 같았다. 나는 진작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한낱 개의 죽음에 고개 숙인 모습을 보고서야 목장주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듯했다. 가는 길에는 말없이 안내만 했던 사람이 목장으로 돌아가면서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개가 떠난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녀석은 평소처럼 지냈다. 나이를 먹을수록 숨쉬기를 힘겨워해서 양을 모는 일은 관둔 지 오래였다. 그래도 기운이 도는 날이면 양들 뒤꽁무니를 쫓아 초지로 나서곤 했다. 배가 고프면 어슬렁거리며 돌아와서 밥그릇을 비우고 다시 목장을 뛰쳐나갔는데, 그날은 오후 내내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몸을 말고 엎드려 있었다. 밥을 먹이려고 등을 쓸었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지 오래였다.

개의 죽음은 평화로웠다. 용과도, 인간과도 관계없이. 싸움과 비극은 제 몫이 아니라는 양. 마치 잿더미 속에서 눈물을 핥아주었을 때처럼. 하지만 에스티니앙은 녀석이 숨쉬기를 힘겨워했다는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것만은 개의 일생에 용과 인간이 남긴 잘못이었다.

목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성도로 복귀했을 때는 아이메리크라면 몰라도 에스티니앙에게는 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져 있었다. 그깟 감봉, 하고 싶으면 하라지. 그는 코웃음을 치고 훈련장에 틀어박혔다.

이후 몇 년 동안 에스티니앙은 신전기사단 군견 축사 쪽으로는 발걸음 하지 않았다. 작전 수행 중 어쩌다 군견들을 보게 될 때면 괜히 옛날에 키웠던 그 녀석이 생각났다. 생긴 것도 다른데 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비상식량으로 지급되는 육포를 한 조각씩 던져주다가 훈련사들과 상관에게 돌아가며 혼났다. 푸른 용기사가 되었을 때는 이제 간식 좀 던져주는 것으로는 잔소리 들을 일이 없겠지 싶었다. 직급이 올라서 좋은 건 그런 것뿐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악몽의 끄트머리에는 흩날리는 재와 한껏 말린 꼬리, 숨이 막힌 듯 캑캑거리며 짖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전쟁을 끝내리라는 결심을 단단히 굳혔다. 피를 피로 씻는 한이 있더라도.


소르 카이 방문을 끝낸 에스티니앙은 마지막으로 개의 무덤을 찾았다. 7재해의 영향으로 영원한 한파가 들이닥친 뒤 목장은 폐쇄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아직 초지가 있을 때 종종 찾아왔을 텐데. 10년 전에 딱 한 번 보았던 무덤을 지금 와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덤은 여전히 작았고 이제는 얼어붙어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무덤 앞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개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자신이 녀석을 그저 ‘개’라고만 부른 지 오래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사과부터 해야 했다. 미안하다, 네 이름을 잊어버려서. 그런 뒤에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들려주었다. 복수를 끝냈고, 원수를 이해했고, 앞으로는 인간과 용을 위해 싸우고자 한다고. ‘네가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에스티니앙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로 녀석이 살아있었더라면, 알아듣지 못할 말이 지루하다는 듯 바닥에 구르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계속 얘기했다. 개는 이 땅에 머무르는 동안 그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을 모두 봐왔다. 그러니 녀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일어난 좋은 일들에 대해서도 알 권리가 있었다. 잃은 채로 영영 살아갈 것만 같았는데, 지키고 싶은 것들이 모르는 사이에 계속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입이 마를 즈음에야 에스티니앙은 일어났다. 이 정도면 들을 만큼 들었으리라. 어쩌면 듣다 말고 일곱 천국 어딘가에 있을 양들을 쫓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잘 지내라, 가끔 보러 올 테니. 인사를 남기고 언덕을 내려가는 그의 등 뒤로, 오랜 친구를 배웅하듯 바람이 길게 우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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