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야생 사과

-최애캐 과거 날조 글 2 (논커플링)

-펀데일 습격이 가을에 있었다는 추측을 전제로 함. 사실 가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해주시길 바랍니다.

에스티니앙은 열세 살 늦가을에야 사과의 단맛을 알게 됐다. 알베리크는 제철 과일을 찾아 먹을 정도로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제철 과일을 챙겨줄 만한 사람을 지인으로 두는 인복은 있었다. 과수원에서 일한다는 지인은 그가 작년에 웬 어린애를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과를 한 궤짝 보내주었다. 정작 에스티니앙은 알베리크가 과일 상자를 열기 전까지 심드렁하게 굴었다. 그가 아는 사과는 알이 작고 신맛이 강한 야생 사과뿐이었으니까.

점심으로 먹은 빵과 치즈가 다 꺼지면 소년은 열매를 따러 숲으로 뛰어갔다. 주머니를 적당히 채워서 돌아올 즈음에는 막 무리를 이탈하려는 양들과 마주치고는 했다. 야생 사과는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꾸중과 맞바꿀 만큼 맛있지도 않았고, 출출한 배를 채울 만큼 양이 많지도 않았다. 신나서 반길 만한 간식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난생처음 본 과수원 사과는 에스티니앙이 알던 것보다 훨씬 알이 크고 색이 진했다. 과일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소년은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이게 정말 사과예요? 알베리크도 산비탈에서 자라는 야생 사과의 맛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사과 한 알을 소매로 잘 닦아서 크게 한입 물었다. 과일을 우적우적 먹기 시작한 알베리크를 빤히 쳐다보다가, 에스티니앙은 스승을 흉내 내어 사과 한 알을 옷으로 닦았다. 요령이 없어서 알베리크처럼 사과에 윤을 내지는 못했다. 단단한 과육을 깨문 순간 소년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숲에서 따 먹었던 사과는 맛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사과 철이 되면 알베리크는 종종 과일을 얻어 왔다. 에스티니앙은 다 똑같은 줄 알았던 사과도 모양새나 맛에 따라 품종이 갈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자기가 알던 사과는 무슨 품종이냐고 묻자 알베리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품종이 없어. 굳이 구분하면 야생 사과라고들 하지. 에스티니앙은 스승의 집에서 몇 년 더 지내고 나서야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알베리크가 슬픈 얼굴을 보인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그 일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야전병원 침상에서 의식을 되찾은 에스티니앙이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먹었던 야생 사과였다. 다른 사과로는 안 됐다. 반드시 커르다스 동부고지의 산비탈에서 자라던 시고 작은 야생 사과여야 했다. 하필 그것에 입맛이 당긴 이유는 에스티니앙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니드호그의 사념에 동화되어 과거의 추억과 고통에 휩쓸린 탓일까?

에스티니앙은 성도를 떠나 동부고지로 갔다. 7재해가 커르다스를 덮칠 때 운 좋은 사과 몇 알이 눈 속에 파묻혔을지도 몰랐다. 열두 살 가을에 있었던 일은 대부분 흐릿해졌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숲을 바라보며 사과가 언제쯤 입에 댈 수 있을 정도로 무르익을지 궁금해했던 것을 아직 기억했다. 펀데일이 불탄 뒤 사과는 한 알도 빠짐없이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떨어진 사과 중 몇 개는 달아난 양이나 숲에 사는 야생동물이 먹었으리라. 먹히지 않은 열매는 또 몇 개쯤 썩고, 남은 몇 개는 살아서 가지를 뻗었겠지. 온 산비탈이 얼어붙기 전까지.

에스티니앙은 숲이 있던 자리를 금방 찾아냈다. 나무가 살아남았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나 직접 보니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정말로 다 죽었다. 사과나무가 15년간 얼마나 번성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나무가 죄다 얼어붙은 탓이었지만, 7재해 이전에 방문했더라도 사과나무를 구분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는 이파리 모양만으로 나무 이름을 알아내는 삶과 멀어진 지 오래였으니까.

에스티니앙은 큰 확신 없이 창의 자루 끝으로 나무 밑을 파 봤다. 작고 노르스름한 사과 두어 개가 꽝꽝 얼어붙은 채 눈에 파묻혀 있었다. 입에 넣자니 간에 기별도 안 갈 크기였다. 에스티니앙은 결국 손수건으로 사과를 싸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커르다스를 떠도는 동안에는 상하지 않을 테니까. 32년간 살아온 땅을 떠날 즈음에는 사과를 어떻게 할지 결론이 났겠거니 싶었다.

야생 사과를 주워 왔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사과가 썩으며 나온 물에 가방 안감이며, 안에 들어 있었던 물건들이 흠뻑 젖은 뒤였다. 에스티니앙은 손수건으로 만든 꾸러미를 꺼내 들고서 냇가가 나올 때까지 마저 걸었다. 물가에 쪼그려 앉아 가방을 한바탕 뒤집어 빨았다. 더러워진 물건도 대강 씻었다. 가방은 냄새가 배어 계속 쓰기는 힘들 것 같았다. 원래도 오래 쓸만한 물건은 아니었으므로 아깝지는 않았다.

이제는 썩은 사과를 처리할 차례였다. 꾸러미에서 달고 시큼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에스티니앙은 손수건 매듭을 망설임 없이 풀었다. 과육은 형체도 없이 녹아 뭉그러졌다. 그나마 남은 건 단단한 씨앗 정도였다.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마침 숲이었으니까. 에스티니앙은 양지바른 터를 찾아서 냇가를 따라 내려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방과 더러운 손수건을 움켜쥔 채였다. 괜찮은 곳을 발견한 뒤에는 창의 자루로 땅을 적당히 팠다. 씨앗을 떨구고 발로 흙을 덮었다. 물을 줘야 할 것 같아서 물통도 조금 기울여 주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근처 지형에 두드러진 점이 없었으므로 다시 찾아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방금 묻은 씨앗이 나무로 자란다면 모를까….

에스티니앙은 문득 확신이 들었다. 씨앗은 잘 자랄 것이다. 검은장막 숲 동부는 커르다스보다 기후가 따뜻하고 흙이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씨앗은 7재해의 냉해를 5년이나 버텼다. 그는 나뭇가지에 야생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광경을, 주머니와 가방을 사과로 가득 채워서 돌아가는 광경을 상상했다. 모든 게 예전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숲 어딘가에서는 자신이 알던 야생 사과가 다시 열리게 되리라. 사과나무가 자라날 자리를 마지막으로 돌아본 뒤, 에스티니앙은 냇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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