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사랑의 해설

-주의: 특정 빛전 묘사가 있습니다.

애인이 느닷없이 턱을 붙잡았다. 에스티니앙은 늘 있던 일이라는 듯 순순히 고개를 숙여주었다. 얼굴을 한참 이쪽저쪽 돌리고, 기울여보던 아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색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갑자기 뭐냐?’ 묻자 ‘네 눈 색 정도는 알아둬야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스티니앙은 그쯤에서 애인이 뭘 하고 싶은지 대충 알아차렸다. 대장으로서 휘하 병사의 인상착의를 외우는 것이 의무였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알아들었다는 듯 흐음, 콧소리를 냈는데도 아실은 굳이 이유를 설명해줬다.

“혹시 실종되거나, 어디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걸로 찾아야 하니까.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려는데 눈 색도 모르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러곤 손을 뗐다. 밝은 데서 봐야겠다며 볕이 드는 창가로 의자를 끌고 왔다. 에스티니앙은 등을 떠미는 손길에 못 이겨 의자에 앉았다. 묘하게 집요한 태도를 보면 아실은 남의 얼굴 감상에 재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생소한 상황에 처한 에스티니앙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신전기사단 일반병사 시절에는 입대 시에 아예 인상착의를 서류로 정리했다. 담당 화가 앞에 앉으면 겨우 15분 만에 특징이 간략하게 기록된 초상화가 나왔더랬다. 에스티니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친밀하게 얼굴을 들여다 볼만 한 인간관계를 쌓은 적이 없었다. 최근까지는 기껏해야 스승이나 친구가 안색을 살피는 정도였다.

‘아직 멀었나?’ 묻자 한참 멀었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스티니앙은 손을 꿈지럭거리다가 아실의 등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애인은 상대의 무릎 위가 자기 자리라는 듯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에스티니앙이 혼잣말로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얼거리자 진지한 대꾸가 돌아왔다. ‘중요하지, 그럼.’ 너랑 아무 사이 아니었으면 자기가 이런 걸 신경이나 썼겠느냐는 말은 퍽 냉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난 네 하나뿐인 보호자니까.”

한참 마주보고 있던 청록색 눈이 드디어 떨어졌다. 이제야 색을 판별해낸 모양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얼굴 구석구석을 핥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애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네 눈이 어떤지 알아야 하지 않나, 싶었다. 서로에게 하나뿐인 보호자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눈 색은 단번에 결론이 났다. 문제는 이목구비의 묘사였다. 에스티니앙은 지금까지 봐 온 인상착의 기록용 초상화를 떠올리며 적절한 단어를 붙이려 애를 썼다. 낮이 흐르고 아실의 얼굴에 진 그림자가 약간 기울었을 무렵 그는 우리가 시간낭비를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굳이 서로의 얼굴을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네가 내 얼굴을 시체들 틈에서 찾을 때면 상황이 아주 나빠진 뒤겠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거고.

애인과 자신은 둘 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아실은 종종 난 네 보호자야, 하고 다짐하듯이 말했다. 너는 내 책임이라고. 그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간 대화들을 통해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골모어 대밀림에 무엇을 버리고 왔는지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지키려는 듯 구는 아실을 보노라면 정말 버리고 온 게 맞을까 싶었다. 그는 약하고 무른 것, 마땅히 보호가 필요한 것들을 이런 식으로 대했다. 정작 에스티니앙은 그 중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아실은 대체 무슨 마음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는 이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걸까? 의문을 곱씹던 에스티니앙은 귓전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무척 시끄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묵을 깬 건 이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아실의 말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이 본 자기 얼굴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얘기해 보라는 말에 아실은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들추며 입을 열었다. 정보 전달이 목적인 탓에 설명은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다만 줄줄 이어지는 묘사를 따라 눈썹과 눈꺼풀, 콧대와 뺨, 입술, 턱선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꼭 손가락 대신 입술이 얼굴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에스티니앙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신전기사단 시절의 초상화를 떠올려보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못 참겠다는 듯 기어이 이마에 내려앉은 입맞춤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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