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여름 골짜기와 자수 비단

솜님이 주신 글감으로 씀

-주의: 특정 빛전 묘사가 있습니다.

1. 여름 골짜기

어둑한 병실에서 처음으로 에스티니앙의 맨얼굴을 봤을 때, 아실은 이런 생각을 했다. ‘코뼈가 멀쩡하네. 틀림없이 부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주먹을 휘두른다고 얌전히 맞아줄 사람도 아니었으나 얼굴을 보면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듯했다. ‘이 얼굴이 망가지는 게 아까워서 참은 사람도 있었겠지, 분명히.’ 일단 자신은 틀림없이 그랬을 터였다. 사내의 거침없는 말본새에서 비롯된 화가 좀체 풀리지 않는다면 정강이 정도는 걷어찼겠지만. 남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에는 다소 진지한 자리였으므로 첫인상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에스티니앙이 성격 나쁜 푸른 용기사에서 귀여운 애인이 되기까지, 사내의 얼굴에 대한 아실의 감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취향에 꼭 맞는 미남이었다.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건 물려받았는지, 이르게 세어버렸는지 모를 백발이다. 다듬지 않아서 무겁게 내려앉은 앞머리 아래로는 반듯한 이마가 있었다. 손끝으로 이마를 따라 내려가면 두드러진 눈썹 뼈에 손가락이 걸렸다. 우묵한 눈두덩에는 그늘이 드리워진 채였다. 그 탓에 청회색 눈은 얼핏 실제보다 더 어둡게 보였다. 하지만 에스티니앙이 어디든 걸터앉아서 자신을 올려다볼 때면, 아실은 흐린 겨울 하늘 같은 눈에 고인 뜻밖의 온기를 늘 발견할 수 있었다.

살집 없이 마른 뺨과 각지고 억센 턱에서 아실은 커르다스 산간의 깎아지른 절벽을 떠올리고는 했다. 고원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자랐고, 살을 에는 설원의 추위에 닳아버린 얼굴. 그런 사내여도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는 곧잘 미소를 짓고 장난을 쳤다. 웃느라 가늘어진 눈이나 농담을 건네며 휘어진 입술을 보노라면 커르다스의 여름 골짜기가 저런 느낌이겠거니 싶었다.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풍광이지만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커르다스와 비슷한 산골짜기는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너밖에 없겠지. 골짜기에 핀 여름꽃을 모조리 훑어서 품에 안겨주고 싶은 사람은. 애인의 얼굴에 동할 때마다 꽃을 꺾으러 나갈 수는 없었으므로, 아실은 꽃을 꺾으며 보냈을 시간만큼 에스티니앙에게 입을 맞췄다.

2. 자수 비단

에스티니앙 발리노는 남의 얼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마나 콧날이 좀 반듯하다고 해서 창을 더 잘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용을 더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가 지금까지 누군가의 외모에 대해 평가한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부대 이탈 뒷수습을 위해 아이메리크와 함께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 도중이었다. 보렐 자작가의 도련님은 용을 잡을 때와는 딴판으로 입성이 말끔해진 차였다. 에스티니앙은 그런 녀석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자 여럿 울렸겠는데.’ 아이메리크는 그 말을 들은 눈치였으나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다른 한 번은 구름길 전투 때였다. 빛의 전사와 통성명하면서 에스티니앙은 약간의 불신을 품었다. ‘예쁘장하게도 생겼군.’ 하지만 소문의 영웅과 악수를 나눈 순간 그는 자신의 오판을 깨달았다. 수천, 수만 번 시위를 어루만진 손이었다. 손바닥에는 깃을 물린 화살대의 흔적이 굳은살로 새겨져 있었다. 이런 손의 주인을 얕잡아보는 멍청이는 전장에 나서자마자 용에게 머리를 물어뜯길 터였다. 그 뒤로는 아실의 외모를 의식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에스티니앙도 아실과 연인이 되고부터는 가끔 그의 얼굴을 뜯어보고는 했다. 이유는 시시했다. 마침 심심하던 차에 아실이 가까이 있었고, 시선을 둘 정도로 흥미를 끄는 게 얼굴뿐이었던 데다가, 연인은 빤히 쳐다보는 걸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아실은 눈꼬리가 길게 빠졌고 속눈썹이 길었다. 시선의 방향을 따라 팔랑팔랑 움직이는 속눈썹을 보다 보면 에스티니앙은 명치께가 묘하게 울렁거렸다. 나비 날개 같은 것이 흉곽 안쪽을 간지럽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유 모를 뿌듯함이 가슴을 꽉 채우는 것 같기도 했다.

적당한 높이의 콧날을 타고 내려오면 마름모꼴로 도톰한 코끝이 보였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움찔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언젠가 에스티니앙은 충동에 굴복해 샐룩거리는 코를 깨물어 본 적이 있었다. 아실은 놀랐고, 가볍게 성을 냈고, 복수하겠다며 똑같이 코를 물었다. 얼마쯤 심술을 받아주던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들어 애인의 입술을 찾았다. 가느다란 입술은 제 것과 잘 맞물렸다. 조금만 공을 들여도 금방 발그스름하게 부어올랐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웃음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실제로 아실은 의식해서 웃은 적이 그다지 없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탓에 그런 착각이 드는 거였다. 입가를 가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애인은 제법 낯선 사람 같았다. 그럴 때면 에스티니앙은 괜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실은 언제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았으니까.

라자한 시장 거리를 산책하면서 에스티니앙은 종종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가판에 내놓은 물건들에서 연인의 이목구비를 손쉽게 발견하곤 했다. 풍경에 매달린 판금 호접은 산들바람에도 파르르 떠는 모양이 꼭 아실의 속눈썹 같았다. 조명 아래에서 다채롭게 빛나는 색유리 장식품을 보고 있으면 여명과 노을, 별빛과 등잔불 아래에서 제각기 다르게 반짝이는 청록색 눈이 떠올랐다.

색채와 패턴이 화려한 자수 비단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공통점을 꼭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아실과 가장 닮은 것을 고르라면 에스티니앙은 자수 비단을 선택할 터였다. 손에서 쉽게 흘러내리고, 아름답고, 생필품과는 거리가 먼 물건. 그러나 조금만 거칠게 잡아당겨도 찢어지는 비단과는 달리 아실은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좋았다.

3. 어느 오후, 에테라이트 광장에서

링크펄 연락을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아실의 조급한 목소리였다. 에스티니앙은 너 지금 어디냐, 빨리 대답하지 못하겠냐 추궁하는 기세에 밀려 얼떨결에 자신의 소재지를 이실직고했다.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나,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아실이 찾아올 속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오려고?’ 물었더니 연인은 당연한 소릴 한다는 반응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엇갈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아실은 늦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뒤 통신을 뚝 끊었다.

에스티니앙은 통신이 끊긴 뒤에도 얼마간 링크펄을 손에 쥐고 있었다. 몇 주 만에 들은 목소리였다. 의뢰를 따로 받은 건 딱 한 번이었는데, 그 뒤로 일정이 자꾸 틀어지는 바람에 계속 만나질 못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아실의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얼굴이나 좀 봐 둘 걸 그랬지…. 일정상 먼저 떠나야 했던 아실은 출발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한참이나 에스티니앙을 올려다봤다. 눈에 새기듯이 들여다보는 시선이 에스티니앙은 조금 부담스러웠더랬다. 지금은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신도 똑같이 아실을 들여다볼 거라고 벼르는 중이었지만.

약속 장소는 근처 도시의 에테라이트 광장이었다. 의뢰금을 정산받아야 했기 때문에 에스티니앙은 의뢰인과 함께 도시까지 왔다. 그 탓에 약속 시간에는 조금 늦었다. 막 지맥을 타고 도착한 여행자들과 도시 교통의 중심지를 경유하는 행인들, 그런 이들에게 호객하는 장사꾼으로 광장은 무척 붐볐다. 그런데도 에스티니앙은 단번에 아실을 찾아냈다. 거기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아실이었을 뿐이다.

이내 에스티니앙 쪽을 돌아본 걸 보면 아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애인은 웃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왔다. 에스티니앙은 내심 기겁했다. 그는 아직 투구도 갑옷도 벗지 않은 채였다. 의뢰금을 받자마자 아실을 찾으러 왔으니까. 사고 방지를 위해 에스티니앙은 팔을 쭉 뻗어 아실을 멈춰 세웠다. 투구에 막혀 먹먹한 귀로 불만스럽게 바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티니앙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연인을 껴안았다. 머쓱한 침묵이 선명하게 귀를 찔렀다. 이 녀석도 어지간히 애가 달았구나 싶어 에스티니앙은 웃음이 났다.

투구 잠금쇠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면갑이 철커덕 올라갔다. 부신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자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자수 비단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아실의 뺨을 무심코 만지려다가, 에스티니앙은 건틀릿만이라도 벗어두고 왔다면 좋았을 걸 싶었다. 장갑 끝이 뾰족해서 잘못하다간 생채기가 날 것 같았다. 결국에는 욕망이 이겼다. 그는 애인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은 뺨 위로 미끄러질 뿐이었다. 상처는 나지 않았다.

투구를 덮은 면갑을 젖힌 순간 아실은 산그늘에 뒤덮인 골짜기를 발견했다. 그는 익숙한 산마루와 깎아지른 절벽이 여름을 맞아 싱그럽게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구경만 하기에는 아까운 풍경이었다. 아실은 까치발을 하며 기꺼이 자신의 여름 골짜기로 뛰어들었다. 골짜기 깊숙이 흐르는 샘은 달고 시원했다. 갈증을 해소하기 충분할 만큼.

연인은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 비단의 자수가 올올이 해지고 골짜기의 여름꽃이 시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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