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빗속의 후식

-주의: 특정 빛전 묘사 있음 / 아므라 열매는 이름과 아이콘 이외의 정보가 없어서, 애플 망고로 상정하고 씀

비가 쏟아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은 물바다가 됐다. 에테라이트 주변으로 뚫린 천장 탓이었다. 급히 지붕을 찾은 사람들은 바닥에 고인 물에 미끄러질 뻔했다. 비 오는 라자한에서는 흔한 광경이었다. 풍경이 쓸쓸하게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날이 어두운 탓인지, 건물을 뒤덮은 색채가 비에 젖어 한층 짙어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시의 활기는 사람들을 따라 지붕 아래로 피신했다. 밝게 타오르는 색유리 조명 아래, 발샨 시장은 동서를 막론하고 무척이나 붐볐다. 뜻밖의 인파에 가장 신난 건 잡화상 주인들이었다. 그들은 우산과 양산, 비옷 등을 잘 보이는 자리에 내놓고 호객을 시작했다. 날씨 특수를 누리는 건 실내 점포에 입점한 가게뿐만이 아니었다. 식당과 간식 노점, 청과상도 비를 긋는 행인을 상대로 소소하게 수입을 올렸다. 사람들은 자릿값을 내는 셈 치고 지갑을 열었다. 아실과 에스티니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당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보니 날이 우중충해져 있었지만. 아실은 아직 우기가 아니니 괜찮으리라 여겼고, 에스티니앙은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며 후식으로 뭘 먹을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심상찮게 쏟아진 빗줄기에 아실은 가장 먼저 보인 차양 아래로 정신없이 뛰어들었고, 에스티니앙은 덩달아 뒤를 쫓아왔다. 곧바로 피했는데도 머리카락이며 옷이 제법 젖은 뒤였다.

물을 짜내며 돌아본 가판대에는 과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아실은 이참에 후식을 해결하자고 했다. ‘기다리다 보면 그치겠지.’ 금방 날이 갤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에스티니앙은 잠자코 동의했다. 애인은 비 맞는 걸 싫어했다.

아실은 청과상 주인과 잡담을 나누며 과일을 골랐다. 당장 먹을 수 있을 만큼 후숙한 것으로만 주머니를 채웠다. 값을 치른 과일을 받아 간 쪽은 에스티니앙이었다. 아실은 이미 잘 익은 아므라 열매를 한 알 꺼내 주머니칼로 손질하고 있었다. 과일은 칼이 스치기만 해도 깔끔하게 갈라졌다. 과즙이 팔목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아실은 늘 과일을 바구니, 혹은 주머니째 가져가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껍질을 깎고 과육을 잘라 차례대로 입에 물려줬다. 르베유르 쌍둥이부터 야슈톨라 룰까지 예외는 없었다. 에스티니앙도 라자한에 올 때마다 종종 신세를 졌다. 그가 이제껏 먹어본 과일이라고는 산비탈에서 나는 야생 사과와 덤불에 맺히는 베리 종류뿐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아실 본인은 과일을 즐기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이 식사 도중 별빛전사단에 급하게 호출당했던 일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몰랐을 것이다. 평소 둘은 두둑하게 채운 과일 주머니를 한 식경도 안 돼서 거덜 내곤 했으니까.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에스티니앙이 과일은 왜 안 먹었냐, 묻자 아실은 껍질 벗기는 게 번거로웠다고 대답했다. 과일을 손질하는 애인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손에 뭔가 묻히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실은 껍질을 벗긴 아므라 열매를 내밀었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살짝 숙여 열매를 베어 물었다. 말캉말캉한 과육이 즙을 울컥 내뿜으며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군. 잘 익었는데.’ 청과상 주인은 바구니를 내주며 씨앗은 여기 버리라고 말했다. 둘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계속 과일을 나눠 먹었다.

몇 개째인지 모를 아므라 열매 씨앗을 버린 직후였다. 아실은 문득 눈썹을 찡그리며 손을 가볍게 털었다. 에스티니앙은 손에 묻은 과즙 때문이겠거니 싶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아실의 팔을 잡았다. 팔목을 흥건하게 적신 과즙을 입술로 훑었다.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는 손바닥을 춥춥 빨아들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이거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나?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흘끗 곁눈질했다. 뺨이 발그레했다. 그는 애인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계속 손을 핥았다. 손가락을 지그시 깨물고, 손톱을 이로 갉작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에스티니앙은 갑자기 머쓱해졌고, 동시에 이대로 놓아주기는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는 느릿느릿 입술을 떼었다. 손이 천천히 움츠러드는 걸 보고 있으려니 그제야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작 아실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손을 까딱거렸다. 과일을 건네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에스티니앙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열매를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즙 많은 과육을 입안에서 굴리는 동안 야릇한 심상이 떠오른 건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머니에 남은 건 숙성이 더 필요한 열매뿐이었다. 그런데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내심 조급해졌다. 눈치를 보다가 ‘그냥 가지.’ 하고 입을 연 순간, 아실도 ‘그냥 갈래?’라고 물었다. 아실은 끈적거리는 손과 팔을 빗물에 씻었다. 에스티니앙은 그 손을 잡아끌며 차양을 벗어났다.

아실은 지붕과 처마, 온갖 가림막 아래를 재주 좋게 건너다녔다. 옷이 젖어서 좋을 건 없었기에 에스티니앙도 순순히 애인을 따라갔다. 그러나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조바심이 났다. 힘껏 달리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할 터였다. ‘뛰어갈까?’ 에스티니앙은 물었고, 거의 동시에 아실이 말했다. ‘슬슬 뛰자.’ 둘은 오늘따라 마음이 잘 통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손을 잡은 채.

투숙객들이 빗물에 흠뻑 젖어 돌아왔을 때부터 여관 주인은 장작을 땠지만, 뜨거운 목욕물을 부탁받은 것은 식은 물을 두 번이나 다시 데우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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