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향月下香

월하향 月下香 2

황자비 왕이보 x 황자 샤오잔

· Fan fiction. 실제 인물들과 전혀 관계x

- 2 -

「 초여름 달빛 아래, 향기로이 당신이 피었지요 」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날은 여일하고 사근한 바람은 꽃잎을 안아 살랑이니, 바야흐로 묘영당의 후원에도 봄이 한창이었다. 춘풍이 저를 달래려는가. 마음이 소란함에도 몸은 나른하게 풀어져, 샤오잔의 긴 속눈썹이 그 곤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팔락거렸다.

아침 문후 차 들었던 내전에서는 샤오잔의 몰골을 목도한 황제가 고운 내 새끼 얼굴이 이게 다 무엇이냐며 요란을 떨었고, 제 혼례 소식을 들은 누이는 그런 부황께 저 대신 따박따박 말대답이었다. 이게 다 부황 덕 아니겠느냐, 이 고운 눈가에 그림자 진 것 좀 보시라, 우리 아쟌 마음고생이 오죽했으면 얼굴이 이리 반쪽이 되었겠느냐며. 정작 동궁에선 제 몰골이 이 모양인 것에 일언반구도 없던 누이가 황제 앞에서는 실로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한 번 날을 세우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이임을 알아, 정작 당사자인 샤오잔은 입 한 번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그저 멀거니, 곤한 낯으로 서 있었을 뿐. 얼마간의 설전이 더 오가다 결국 제겐 축객령이 떨어졌다. 아쟌, 너는 먼저 돌아가렴. 신시에 손님맞이도 해야 한다지 않아. 황제 또한 곤한 낯으로 무언의 동의를 하시기에 샤오잔은 결국 몸을 돌려 먼저 자릴 떴더랬다.

미련 없이 곧장 묘영당으로 걸음하니, 이리도 평화로운 봄이 한가득이라. 샤오잔은 작은 못 옆 벚나무에 자릴 잡아 곤한 몸을 기댔다. 수목의 무성한 잎들은 사시(巳時)의 햇빛을 가리기에 충분했고, 사근사근한 바람은 수마의 기세를 도와 곧장 부드럽게 온몸을 덮어왔으니. 구름 위에 둥실 뜬 듯 감각이 침잠해 풍경조차 서서히 점멸했다. 가늘게 팔락이던 속눈썹도 곧 힘을 잃고 수륜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샤오잔은 장막처럼 뒤덮는 수마에 도리 없이 빨려들었다. 꼬박 하루 반 만의 깊은 잠이었다.


“미루시지요.”

샤오잔이 물러간 후, 얼마간 침묵을 지키던 샤오린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뭇 단호하게 청했다. 지금은 긴 설득보다 짧은 촌철이 필요한 때였으니. 샤오린은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고, 작금의 상황에 돌려 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대꾸 없이 지켜보던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제아무리 오냐오냐 키웠기로서니, 황명에 이리 방종하게 날을 세울 것은 또 뭐란 말이냐. 황제의 입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지기 직전, 샤오린은 꿇었던 무릎 아래로 깊이 머릴 조아리며 부복하였다. 신 샤오린. 삼가 폐하께 주청 올리려 하오니, 부디 무엄함을 용서하소서.

그를 목도한 황제의 입이 사나운 언성을 토하지도 못한 채 다시 다물렸다. 지금 샤오린은 샤오잔의 누이가 아닌, 대운국의 황태녀로서 황제의 앞에 부복한 것이라. 제가 귀애하는 것을 알아 늘 미꾸라지처럼 제 심성을 다루던 아이가 이리 전면으로 나서니, 기실 황제의 노성은 곧장 길을 잃었다.

“물리시란 것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들이시려는 아이가 아쟌보다도 여섯 해나 아래라지요.”

그리고, 왕가의 차남이라고요. 태연히 읊는 샤오린의 면에 황제의 한쪽 눈썹이 휙 휘었다. 내 아쟌에게 자비를 들이겠다 하였지, 누굴 들이겠다 거론한 적 없거늘. 네 어찌 알고 있느냐 하니, 영명하신 폐하의 속을 제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냐며. 허나 저와 아쟌을 위해 결단하신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단 현답이 돌아온다.

황제가 낮게 침음했다. 그저 강짜를 부리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니.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심산으로 손을 휘 내젓자 부복했던 샤오린이 고갤 들어 제 시선을 마주해왔다. 흔들림 하나 없이 결연한 눈이 짙고 잔잔하여, 되려 황제의 심중에 뜨끈한 파문이 일었다.

“그 아이도 아쟌 못지않게 대쪽같은 성정이라 하니, 시간을 들여 둘이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일 줄로 압니다. 이대로 밀어붙였다간 혼례란 틀에 묶여, 기실 물과 기름처럼 떠돌 것이 자명하니. 이는 폐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아니질 않습니까.”

아이는 제법 단단하고 분명하게 승부수를 던져왔다. 왕가에만 호랑이가 있는 줄 알았더니, 이 황궁에도 제법 사나운 암호랑이가 있었구나. 샤오린이 제 어미의 외양을 쏙 빼닮아, 기질은 저를 고대로 빼다 박았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황제의 한쪽 입매가 삐뚜름하나,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때를 놓치면, 그땐 어찌할 것이냐.”

“때와 시간을 걱정하시는 것이라면 먼저 조서가 아닌, 폐하의 구중과 왕가의 입으로 정혼을 안팎에 흘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그리하면?”

“하룻밤 새 구중궁궐의 담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구설뿐이라 하였습니다. 소문은 분명 궁궐 담을 넘을 것이나, 정식 조서가 내려지지 않았으니. 명분 없는 그들이 근시일 내엔 상소치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 왕가, 그 눈빛 형형한 호랑이들이 황자의 뒷배가 될 것이라는데 누가 감히 함부로 입과 몸을 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샤오린의 시퍼런 서슬에 황제는 허를 찔린 듯 헛웃음이 샜다. 샤오잔이 태어나고 황후를 잃었을 무렵, 적자가 탄생하였으니 황태녀의 작위를 폐하고, 황녀로 강등하여 샤오잔을 태자로 앉히라는 상소가 빗발쳤던 때가 떠올랐다. 평소 무던하고 허허실실처럼 보이나 샤오린의 영민함은 늘 큰일 앞에 첨예하게 번뜩였으니. 소에 신경을 덜어내고 대의 큰 그림을 먼저 볼 줄 알아 흡사 승부사에 가까운 기민함을 보였더랬다. 실로 군왕의 기질이었음에 황제는 후계를 번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황제는 제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듯했다.

“아쟌을 먼저 돌려보낸 연유가 이것이었느냐.”

“…황공하옵게도, 그러합니다.”

“그래, 내 알았느니.”

황제가 몸을 일으켜 사위를 모두 물렸다.

“이제 기탄없이 말해보라. 내 경청할 것이다.”

되었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졌다. 노기라곤 한 점 없이 저를 내려보는 황제의 시선을 읽은 샤오린의 입가에, 황제와 꼭 닮은 미소가 번졌다.


때가 얼마나 지났을까. 봄바람과는 사뭇 다른 이질감이 깊이 침잠했던 의식을 두드렸다. 제 머리카락을 자근자근 건드리는 모양새라, 샤오잔은 점차 차오르는 의식 위에 느른한 미소를 덧띄웠다. 제 일이라면 없던 걱정도 다 끌어모아 염려하는 누이가 기어이 저를 살피러 온 모양이지. 의식이 맑아지며 무거웠던 눈꺼풀이 서서히 그 무게를 잃어, 그늘졌던 수륜에도 빛이 들었다.

누이…? 허나 희붐했던 사위가 또렷해 질수록 시야에 차는 것은 샤오린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눈이라. 샤오잔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런 샤오잔의 몸짓에 놀란 듯 낯선 이도 흠칫 손을 거뒀다. 둥근 듯하나 봉황처럼 길게 빠진 눈꼬리가 가늘게 치켜 올라갔다.

“누구냐.”

“그것이, 꽃잎… 이 붙어 있어서.”

저보다 서넛은 어릴까. 아이가 손가락에 들린 꽃잎을 제게 내밀며 채 영글지도 않은 입술을 드문드문 뗐다. 이것이, 옆머리에 붙어 있어… 그저 떼어드리려 한 것뿐, 입니다. 해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꽤나 공들여 피력하는 모양새라, 샤오잔은 경계를 세운 중에도 작게 실웃음이 샜다.

“내 알아들었으니 설명은 그쯤 하고.”

“…….”

“그래서, 넌 누구냐고 물었다.”

물렸던 몸을 추스리며 다시 한 번 묻자, 아이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고쳐 잡으며 단정히 읍하였다.

“신, 왕(王)가 이보라 합니다.”

어쩐지 낯선 와중에도 제법 익숙하다 하였더니 왕가의 호랑이 새끼가 아닌가. 멀리서 볼 적엔 안광이 그리 형형하다 싶더니 이리 가까이서 보니….

“이런 데서 주무시면 아니 됩니다.”

…어째 형형하다 못해 흉흉할 지경이구나.

읍을 거두며 저를 올려다보는 눈이 흡사 매를 닮았다. 길게 뻗은 눈꼬리와 살짝 위로 떠 있는 까만 자위가 신묘하게 어울려,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이채가 돌았다. 멀리서도 안광이 느껴지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저보다 서넛은 어려 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이목구비는 깊고 짙었다. 또한, 서늘했다. 말 한 번 나누지 않고 멀리 스쳐 갔음에도 그 면이 뇌리에 꽤나 선명히 남아 있을 만큼. 냉랭하긴 해도 요놈 참, 사내답게 잘도 생겼다.

정신이 온전히 다 돌아오자 비로소 헛웃음이 터졌다. 왕가 집안 이들은 전부 이리 무엄할 정도로 거침이 없는가 싶다. 지금도 절 보자마자 대뜸 형형한 눈으로 황자씩이나 되어 이런 데서 자고 있느냐 하질 않는가. 과연 어떤 의미로든 강렬한 인사였다. 그것이 기껍지는 않으나, 샤오잔은 왕가 사람들과 부러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내 그저, 몸이 곤하여 그랬다."

그래서 적당히 답하였을 뿐인데.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한 박자 느림직하게, 신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녔음에도 제법 의외의 반응이 돌아와 샤오잔의 기민한 통찰력이 꿈틀 머리를 들었다. 저 형형한 낯 아래 필시 무엇인가 더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섰다. 심지어 아무나 발 들일 수 없는 이곳에 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온 아이다. 그것이 음험한 계획이건 순수한 선의이건, 그냥 넘길 수 있을 리 없으니. 샤오잔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이 자리에서 확인해 볼 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려고 했다.

아니, 사람이 말이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있나. 몇 마디 건넸음에도 아이는 그저 단답이거나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라. 뭐라도 말을 해야 그 속을 읽어볼 것인데, 내내 저만 떠들고 있으니 도통 방법이 없다.

샤오잔은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듯 끙끙대며 제 미간을 짚었다. 아이가 큰 반응을 보인 것도 그때였다. 여전히 서늘한 시선이나, 분명 끙끙대는 절 살피는 듯 제 움직임을 따라 큰 반응을 보여왔다. 옳거니. 이번엔 확인차 뻐근한 척 어깨를 움직였더니, 아이의 시선이 단숨에 그 어깨로 내려앉았다. 심지어 걱정스러운 모양새였다. 다리가 아픈 듯 두드리면 몸을 움찔거리며 아픔 직한 다리로 시선을 내려 제 딴의 걱정을 쏟는 듯했다. 여전히 표정도, 말도 없었으나 시선은 제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열심히도 따라붙었다.

오호라, 이 호랑이 새끼 좀 보게. 서늘한 시선으로 해 주는 걱정이 나쁘지 않아, 샤오잔은 모르는 척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진득하게 시선으로만 절 좇던 아이가 절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 엉덩이를 급히 털어냈다. 저를 두고 가려는 줄 안 모양이었다. 부러 자리에 서서 흩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유를 부리자, 이젠 어쩔 줄 모르고 서서 우물쭈물 제 머리통 아무 곳이나 더듬어 정돈하는 시늉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제법 장난기가 동하여 부러 입을 다문 채 멀뚱히 바라보았다. 자, 이것은 어쩔 테냐. 아이는 저도 엉겁결에 시선을 맞추었다가 금세 허둥지둥 고갤 내려 손가락만 꼼질댔다. 지켜보던 샤오잔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걸렸다. 아이의 시선은 그저 내내, 순수하고 올곧게 제게 따라붙었다. 저 무감한 낯이 음험한 속을 감추려 부러 만들어 낸 것은 아닌 모양이니, 이 또한 왕가의 자제답다 해야 할까. 그저 행동함이 익숙하고, 말로 대함이 미숙한 것이로구나.

기껍지 못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말랑해졌다. 말로 대함이 서툴렀을 뿐, 꽤 긴 시간을 잡아먹었음에도 나름의 순수한 성의를 보이는 아이가 썩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가 잠든 사이 혹 불편할까, 주변을 살펴 주기도 하질 않았는가. 이래저래 마음이 동하여, 샤오잔은 이제 저도 행동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볼 참이다.

여전히 아래로 시선을 빗긴 아이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뒷짐을 진 채로 허리를 숙여 얼굴을 내미니, 삽시간에 두 시선이 맞닿았다. 훌쩍 다가선 탓에 마주한 두 얼굴의 간격은 고작해야 1척 남짓이었으니. 미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왕이보의 긴 눈매가 휘둥그레 올라갔다. 마치 화등잔 같았다. 가깝고도 먼, 그 간극을 사이에 둔 채 샤오잔이 곧장 눈을 접어 말갛게 웃었다. 

“얘야. 말이란 이렇게, 눈을 마주보고 나누는 거란다. 알겠니?”

꽃향기를 닮은 체향이 훅 끼쳤다. 일순간 사위가 멈춘 듯, 왕이보는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마주한 얼굴이 너무 가까웠고, 웃는 얼굴이 참으로 고왔다. 초승달처럼 휜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밤을 닮아 미려하게 반짝였다. 밤하늘도, 달도, 성신들도. 저 위에서 반짝여야 할 것들이 모조리 샤오잔의 눈에 박혀있는 듯하여, 그 눈을 지척에서 마주한 왕이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진동했다. 찰나가 영겁같이도 길었다. 마주한 얼굴 사이로 사근사근하고 보드라운 바람이 불어와, 그제야 한숨처럼 숨이 흘렀다.

“그보다, 예까진 어찌 온 것이야.”

“…….”

“이미 나를 알고 이리 온 것을 보면, 필시 누군가 일러준 모양인데.

…….”

“…정말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했어?”

“…….”

“아까는 황자가 이런 데서 잔다며 잘도 타박하더니.”

“…아, 그…, 저는.”

딸꾹.

말에 이어 눈 깜빡이는 법도 잊은 듯 화등잔 같은 눈을 파르르 떨더니, 이젠 숫제 대답을 딸꾹질로 한다. 기어이 참았던 웃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마주 선 왕이보의 얼굴이 터질 듯 귀까지 달아올랐다. 그게, 그러니까 저는, 딸꾹! 그 모양새에 샤오잔은 허리까지 접어가며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웃었는가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왕이보는 무언가 얘길 꺼내려다 또 말문이 막혔는지 억울한 듯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딸꾹! 한 번에 양옆으로 볼이 불퉁하게 솟아 올랐고, 딸―꾹! 또다시 튀어나온 딸꾹질에 날카로운 눈꼬리가 한없이 아래로 어그러졌다. 볼록 솟아오른 양 볼이 얼핏 보아도 만두처럼 말랑말랑해서. 그것이 또 귀여워 샤오잔은 아낌없이 웃었다. 제 누이가 이런 면면들로 절 그리 귀애하는 모양이니, 이런 것이 아우라면 저도 하나쯤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한참을 웃느라 눈꼬리에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렸을 무렵, 다른 의미로 울 것 같은 표정의 왕이보를 발견하고서야 샤오잔은 웃는 것을 멈췄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이러다 정말 애 하나 울릴 성 싶어서. 아, 미안. 이제 안 웃을테니 얘야, 그 표정 좀 풀려무나. 응? 정말이야. 더 안 웃을게. 약속해. 샤오잔은 거듭 약속하며 왕이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곤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한바탕 웃고 나니 갑작스레 허기가 몰렸다. 조반도 거르고 오수(午睡)를 청한 탓이려니.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가늠하니 이제 오시(午時)쯤 되었을까. 이쯤이면 슬슬 위 태감이 저를 찾아 후원으로 올 때가 되었는데….

“…?”

갑작스레 옷에 무게가 느껴졌다. 하늘 보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내리니, 그만 놀리겠다 거리를 둔 것이 무색하게 왕이보가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시선은 그새 다시 바닥으로 처박았으나 손은 제 옷자락 끝을 꼭 쥔 채였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얼굴을 마주했다. 곧 터질 듯이 도로 붉어진 얼굴이었다. 눈을 마주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그래도 애쓰는구나 싶어 그만 이쯤 해두라 할 참에, 왕이보가 어물어물 입술을 움직였다.

“타박한 것… 아니, 었습니다.”

“응?”

“…그저 몸이 상하실까, 염려되어.”

“…아…?”

정말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와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설마 그것이 마음에 걸렸는가. 이 새끼 호랑이가 생긴 것과 다르게 썩 귀엽게 굴어,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 서늘하다 못해 형형한 대장군과 똑 닮게 생겨선, 알맹이는 영 다른 모양이라. 아까 제가 한 말이 그리 마음에 걸렸는지 왕이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느리지만, 또박또박. 타박이 아니라 염려한 것이라 정정했다. 그것도 제가 타일러 준 것처럼 눈을 꼭 마주한 채로. 하하, 알았다. 내 알았느니.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으면서도 제가 한 말을 잊지 않는 것이 자못 기특하여. 그게 그리 마음에 걸렸느냐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더니 곧 작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리고….”

“왜, 뭐가 또 더 남았어?”

“얘…가 아니고, 왕, 이보입니다.”

“…아. 얘…라고.”

“예. 이름을 불러주세요.”

얘, 말고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쭈그러든 공처럼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머리 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듯했다. 제 머리를 쓰다듬던 샤오잔의 손이 멈췄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왕이보는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혹 제가 꼬투리를 잡아 기분이 상하셨을까. 무엄하다 경을 치시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저는 이름이 있었다. 전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 불러주시길 바랐을 뿐인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고, 들자마자 헙, 숨을 삼켰다. 시야 가득, 온통 샤오잔이었다. 오시의 찬연한 햇살을 업은 채 그보다 더 해사하게 웃는 샤오잔의 얼굴이 가득해, 왕이보는 다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말, 잘 하네.”

“…예, 전하.”

“입이 간지러워 어찌 참았어.”

“…예, 전하.”

숫기 없는 아이가 사뭇 비장하게 또박또박 제 이름 석 자 피력하는 것이, 멀쩡한 제 이름 놔두고 '얘야' 부른 것이 그리도 서운했던 모양이라. 거 참, 자기주장 한 번 어지간히 뚜렷하구나. 그렇게 제 할 말 다 하고 나니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왕이보는 연신 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중이었다. 

“내 슬슬 배가 주린데. 오찬(午餐)은 든 게야?”

“…예. 안 먹었습니다.”

그래그래. 네 어째 앞뒤 말이 안 맞는다만 아무려면 어떠냐. 네 여기 온 지 한참이거늘, 먹었을 리가 없지. 내 괜한 것을 물었다. 샤오잔은 새끼 호랑이의 말랑한 모양새에 도리 없이 함빡 웃으며, 다시 아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손도 못 대게 할 것 같이 생겨선 얌전히 제 손에 머릴 맡기는 것도 꽤 기꺼웠다. 때마침 입구 어귀부터 저를 찾아 종종걸음을 달리는 위 태감이 보여,

“그럼 같이 오찬이나 들자꾸나.”

“…예, 전하. ……예?”

“너도 배고플 것이 아니냐.”

그저 밥이나 먹자 하였을 뿐인데. 왕이보는 도로 고장이 났다. 제가, 황자 전하와. 오찬을요?

“왜, 싫어?”

왕이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양옆으로 세차게 도리질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은 아니라는데 정말 고장이라도 났는지 몸은 영 움직일 기미가 없어서. 왕이보의 기색을 찬찬히 살피던 샤오잔의 입에서 결국 헛웃음이 샜다. 아니 얘가, 눈을 왜 이렇게 떠. 날카롭던 눈매가 순해 빠진 모양새로 멍청히 풀려 있어, 결국 샤오잔은 왕이보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왕이보.”

“…….”

“이보야.”

“…예. 전하.”

“가자꾸나. 응?”

이보야, 하고 불렀다. 황자께서. 황족의 넘치는 아량에, 군신으로서 두어 번의 사양은 예의이자 미덕이었다. 허나 왕이보에게 지금 그런 미덕 따위 가능할 리 없었으니. 황자께서 제 이름을 불러 주시지 않았는가. 그저 황자께서 원하여 이끄시는 대로 따라나서는 것이 지금의 왕이보에겐 예의이고 미덕이었다. 

곧 황자를 모시러 온 위 태감이 당도하여, 세 사람의 인영이 화원을 가로질렀다. 수목 사이로 오시의 햇빛이 정채롭게 빛났다.


어쩌다 일이 이리되었는가. 분명 왕이보와 식사나 하려던 것뿐인데, 어째 식탁 의자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찼다. 대여섯 가지가 전부였어야 할 찬(饌)들도 점차 가짓수가 늘어 식탁보 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으니, 갑자기 바뀐 황가의 오찬 일정에 어선방 아궁이에도 불이 난 모양새였다. 각 전각에서 식사 준비와 기미를 맡아보던 궁인들이 묘영당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위 태감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준비에 혼을 빼고 있었으니.

묘영당의 주인, 샤오잔의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어쩌다 식사 한 끼 하는 것이 이리도 번잡해졌단 말이냐. 처참하리만치 구겨진 얼굴로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중얼거리니 샤오린이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닦으며 그러게나 말이다. 여상히도 대꾸해 왔다. 그 작태에 샤오잔은 속이 다 뜨끈해졌다. 그래. 제 누이야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사이니 그렇다손 치겠으나 제 누이보다 더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저 안광 시퍼런 호랑이는 대체 무슨 일인가 이 말이다.

“대장군.”

“예. 전하.”

“우리 신시에 영견(迎見)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왕호는 예, 그랬지요. 하며 뒤에 선 그림자(*호위무사)에게 제집 안방 마냥 검을 맡기기나 하고 앉았다. 한쪽 미간을 찌푸리며 비뚜름하게 보았더니 아, 전하께서 식사하실 곳에 흉흉한 날붙이를 둘 순 없지 않습니까. 하며 웃는다. 눈치가 없는 것인가, 낯짝이 두꺼운 것인가. 검을 맡기곤 손을 휘 저어 그림자를 내보냈다가, 수 초 만에 다시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다들 바빠 보이니, 네가 대신 손 닦을 수건 좀 가져오너라.’란다. 샤오잔은 진정 안쓰러운 눈으로 왕호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신경 좀 썼다고, 예민하기 짝이 없는 몸은 그새 두통이 도졌다. 머릿골이 둥둥 죄어오기 시작해 미간을 짚으니, 옆에 앉아있던 왕이보가 식탁 아래로 슬며시 제 옷자락을 잡아 왔다. 돌아보니 그 서늘한 눈에 걱정이 한가득이라. 그래도 아까 면 좀 익히고 살폈다고 저 싸한 안광이 어째 줄줄 읽히는 것이다. 기분이 묘해져 나 걱정해 주는 거야? 하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와, 구겨졌던 샤오잔의 안면에 퍽 즐거운 기색이 끼쳤다.

식탁의 한 켠, 이를 어느 하나 빠짐없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샤오린이었다. 얘들 좀 보게. 제 아우야 워낙 봄날 꽃처럼 어여쁘지 않은 구석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저 왕가놈은 정말 놀라울 정도라. 묘영당에 든 그 순간부터 제 아우에게 시선 한 번을 안 뗀다. 저 말랑한 공기를 보고 있자니 샤오린은 어째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중이었다. 아침잠을 쫓아가매 머리며 몸이며, 바쁘게 굴린 보람이 있구나. 왕호야 워낙 트인 인사니 어렵잖게 우호 동맹을 맺었다지만, 황제를 설득하는 것엔 큰 난관이 따랐으니. 하지만 기승 전 없이 어찌 좋은 결을 바랄까. 제 아우의 결을 위해 샤오린은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물었더랬다. 그저 결부터 들이미시려는 황제를 설득하느라 아침 내내 진을 다 뺀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에 가슴이 다 빠듯할 지경이다.

일찌감치 제 아비 뒤를 졸졸 따라온 호랑이 새끼를 묘영당으로 보낸 것도 도박이긴 하였다. 예민하고 기민한 촉을 가진 샤오잔이 부디 탈 없이 저 어린 호랑이의 선의를 알아채기만을 바라고 보낸 것이었으니. 원래 예로부터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하다 하여, 혹 제 아우의 심기를 거스를까 그 형형한 눈매 좀 풀고 가거라 할 참이었는데. 묘영당 후원에 샤오잔이 있다 일러주자마자 낯빛이 발그레해지며 긴 눈매가 절로 허물어지는 것이, 대체 언제부터 저랬는가 아주 기가 막혔다. 그런 제 아들을 보는 왕호의 면도 황제의 그 팔불출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그 꼴을 지켜보던 샤오린은 잇새로 혀를 쯧 찼더랬다. 대체 뭘 걱정했는가 싶다. 이쪽은 아예 처음부터 제가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을.

뭐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제 아우의 꽃길을 위해 도박판 위에 아낌없이 패를 던졌으니. 샤오린은 그 결과가 궁금하여 몸이 닳을 지경이었다. 참지 못하고 묘영당으로 길을 잡던 차에 저와 똑같은 얼굴로 이곳을 향하는 왕호를 마주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저 살랑이는 공기를 보건대 첫 단추가 영 잘못 꿰어진 것만은 아닌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월하선인이 이 맛에 붉은 실을 묶고 다니는 모양이지. 샤오린은 제 고생 따윈 잊고 기껍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은 샤오린과 같은 낯으로 둘을 지켜보던 왕호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고 번잡스러웠던 황가의 식사 준비도 얼추 끝나갔다. 꽁지에 불이 붙어 달려온 다른 전각의 궁인 몇을 추려 기미와 수발을 맡기기로 하고, 마지막 찬까지 살펴 들여보낸 위 태감의 낯에 그제야 안도의 빛이 서렸다. 묘영당의 태감으로 부임한 지 여러 해. 이젠 웬만한 돌발상황에도 꽤 이력이 붙었다 싶어 저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 식사 후에 올릴 숭늉만 돌보면 되겠거니. 한껏 올라간 광대를 추스르며 몸을 돌리던 위 태감의 낯이, 순식간에 당황과 절망으로 허옇게 질렸다. 그것은 곁을 지키던 궁인들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들의 시선 끝에, 그들의 낯과 별다를 것 없는 어전 태감이 이제 막 묘영당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곧이어 태감의 낭랑한 목소리가 묘영당을 뒤흔들었다.

“화앙—제 폐하— 납시오—오!!!”

묘영당 내전에서 누군가 땡그랑!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와, 위 태감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저 어선방 아궁이에 불이 줄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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