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향 月下香 1
황자비 왕이보 x 황자 샤오잔
월하향 月下香
-1-
황자의 비(妃)를 자비(子妃)로 들이라.
황제는 제 손으로 직접 대운국(大云國)의 어린 황자에게 홍사로 두른 칙서를 내렸다. 본디 강골을 타고나 백전불패의 명장이었던 황제도 나이 앞엔 패배할 수밖에 없었으니, 혹 마지막 유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 황제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낮고 단호하였다. 뜻밖의 칙서에 어린 황자의 얼굴 가득 깊은 당혹감이 서렸다. 쉬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황제는 한 차례 더 단호하게, 허나 애정이 그득한 목소리로 그를 종용하였다.
“황자, 어찌 대답이 없느냐.”
“…….”
“내 너에게 자비(子妃)를 들이라 하였다.”
일각 전, ‘소자, 부황을 뵈옵니다. 강녕하셨는지요.’ 또랑또랑 눈을 빛내던 황자는 어디로 갔는가. 일언반구 없이 칙서부터 내미는 황제 앞에, 황자는 단단히 얼이 나간 모양새였다. 그저 평소와 같이 문후를 여쭈러 왔을 뿐인데 거두절미하고 들이밀어지는 칙서에, 서릿발처럼 쏟아지는 황명에…. 대관절 이것이 다 무슨 일이냐 이 말이다. 혼례라니, 자비라니…!
자비는 고사하고 혼례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샤오잔은 난데없이 코를 걷어차인 기분이었다. 운국의 오랜 역사에 자비의 전례란 그저 고서에서나, 그것도 장서각 후미진 구석에서나 찾을 법한 일일진대. 허튼소릴 하실 줄 모르는 부황께서 심중에 어떤 말이 자리하셨기에 이 같은 칙서를 들이미신단 말인가. 혹 저를 시험대에 올리시려는가. 그렇다면 이는 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인가. 샤오잔은 정수리께를 벗어나려는 혼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들며 부복하였다. 망극하오나, 부황. 소자는….
“짐은 이제 늙었느니. 내 얼마나 더 너의 안위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으냐.”
한참을 부복하다, 늙었다는 황제의 말에 샤오잔의 작은 머리통이 번쩍 들렸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아직 강건하신걸요. 언제 얼이 빠졌었냐는 듯 당치 않다 고집스레 눈을 치뜨는데도, 황자를 바라보는 황제의 낯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부정(父情)이 뚝뚝 흘렀다. 저 작은 머리로 지금 얼마나 다분한 생각을 하고 있을꼬. 아이는 외고집이 상당하니 한 번 마음 정한 것엔 쇠뿔을 잘라먹고도 또 다른 쇠뿔을 찾아 나설 것이 번했다. 당최 저 쇠심줄 같은 성정을 어찌 달래주나 싶어, 황제는 골이 다 지끈거렸다. 그 성정 누굴 닮았는가 저만 모른다. 저만. 제 눈엔 이 쇠고집마저도 그저 어리로운 아이라. 황제는 한여름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려는 면을 짐짓 단호하게 추켜세웠다. 기실 제 명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이이니 이젠 단호한 낯으로 다정히 얼러볼 참이다.
“아쟌, 너는 이 운국의 하나뿐인 황자가 아니냐.”
“황태녀인 누이가 있질 않습니까.”
“이는 너를 위한 일이며, 또한 네 누이를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을.”
“…….”
“무엇보다 아쟌, 네게도 이제 너의 사람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다소 누그러진 말씨에 황자의 큰 눈이 데룩데룩 굴렀다. 지학과 약관 사이, 그 중반부에 이르러 아직 어린 태를 다 벗지는 못하였으나 조금은 자란 듯도 하여. 지켜보는 황제의 눈엔 단단하고도 무른 애정이 아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제 험상스러움은 어느 한 곳 닮지 않고 복사꽃처럼 곱던 제 어미를 고대로 빼닮았다. 그에 더해 점점 더 곱고 수려하게 자라주고 있으니. 내 아들이지만 참으로 누구 주기 아까울 만큼이로구나….
갑자기 치받는 뜨끈한 내면에 황제는 아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제 옆구리를 꾹 눌러야만 했다. 때마침 마른기침이 발작처럼 쏟아져 그 앞에 꿇어있던 어린 황자의 안색이 단박에 납빛으로 가라앉았다. 괜찮다는 듯 황제는 애써 느적느적 손사래를 쳤다. 하늘이 내린 왕이었으나 흐르는 시간은 누구 하나 편애하는 법이 없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닌가.
받아야 할 이가 받지 않아, 갈 곳 잃은 칙서를 바투 고쳐잡는 황제의 면은 이미 다짐이 무색하게 헐렁했다. 곱고 단정한 낯으로 용상 아래 꿇어앉아 당돌하리만치 꼬박 말대답하는 황자를, 이젠 숫제 흐뭇한 면으로 내려보기까지 하는 중이다. 참으로 많이 자랐다. 아비의 명에 제 주장을 더할 줄도 알고. 들어보면 하나같이 짐의 가르침에 엇나감 없는 말들이니, 뉘 아들이 이리 명석하단 말이냐. 황후, 보고 있소? 우리의 아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다오…. 이런 박 터지는 생각이나 하면서.
다른 이었다면 경을 칠 일이었겠지만 이런 면 또한 사별한 황후를 닮아, 황제는 제 아이들에 유독 물렀다. 무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물러 터졌다. 제 어미를 똑 닮은 외양으로 기질은 저를 빼다 박은 첫째 샤오린과, 내외 모두 황후를 쏙 빼닮은 둘째 샤오잔. 건국 이래 절대 권력에 가장 가깝다는 소릴 듣는 황제였으나 이 두 남매 앞에선 그저 팔불출 아비일 뿐이었으니. 기실 황제는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줄 것처럼 무르게 굴었다.
‘아비를 대신해 오직 네 곁에서 오래도록 너를 지켜줄, 너의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린 네가 든든히 딛고 지탱할 기반도 필요할 것이고. 내 너의 장성을 곁에서 끝까지 지켜볼 순 없겠으나, 네 부빌 단단한 언덕 하나쯤은 만들어주고 가련다. 그래야 저승에서 마주할 네 어미에게 내 면이 서질 않겠니. 그러니 불가하다 거절만 말고 한 번 더 생각해 주련? 아쟌, 아쟌 내 말 듣고 있느냐?’
기다렸다는 듯 줄줄 말을 쏟아내는 것이, 이젠 흡사 애원하는 모양새였다. 황제의 입에서 태어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제 어미까지 튀어나오자 고집스레 눈을 치뜨고 말대답을 하던 황자의 입도 어물어물 닫혔다. 샤오잔은 고집이 세다 뿐,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요령 한 가닥 없이 하루 세 번의 문후 여쭙기를 마다하지 않는 황자였다. 연로한 부황께서 저가 보고 싶어 병이라도 나시면 어쩌나, 하는 것이 기실 그 이유였다. 덕분에 번번이 애먼 등이 터지는 것은 황태녀 샤오린이었으니. 아침잠이 많아 늘 아침이 힘든 제 누이의 침소 앞에 일각이나 이르게 찾아가 아랫것들도 물려두고 몸소 ‘누이―, 부황께 문후드리러 갈 시각이 다 됐소. 일어나시오! 누이―. 누이이…!’ 깨워대는 통에, 샤오린은 매일 아침 베갯잇을 물어뜯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눈을 떠야 했더랬다. 너는 어찌 이리 잠이 없니, 툴툴거릴라치면 ‘누이가 너무 잠이 많아 그럽니다. 애먼 저녁에 괜한 서책 보지 말고 일찍 주무시오.’ 하며 의젓하게 굴어, 부러 불퉁하게 말 건넨 사람 복장만 더 터지게 하였다. 덕분에 이른 아침마다 사랑해 마지않는 두 남매의 문후를 받는 황제의 광대가 매일 화사하게 솟아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렇다면 부황께선 봉단령(捧單令)을 내려 초간택을 하려 하심입니까.”
옳거니, 이제 다 되었다.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되물어오는 황자의 낯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어, 황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입매를 애써 여몄다. 굳이 번잡하게 그럴 것 없다. 내 이미 선점해둔 가문의 사주단자를 받기로 하였으니. 이미 단자를 받기로 하였다는 말에 황자의 작은 머리통이 다시 한번 번쩍 들렸다. 이것은 또 어인 말씀인가. 간택도 없이 다짜고짜 단자부터 들이미시겠다니. 황제께선 대체 어디까지 일을 벌이시고 제겐 이제야 하명하시느냔 말이다. 샤오잔은 또 한 번 코를 걷어차인 듯 면이 다 얼얼해져 왔다.
“부황….”
“왜 그러느냐 황자.”
피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것이었나 싶다. 정녕 몰라 물으시는가 싶어 황망히 바라보자 왜 그러느냐 되묻는 황제의 낯이 지극히 평온하여, 샤오잔은 눈에 핏발이 다 설 지경이었다. 대관절 혼례와 자비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날벼락이었건만, 이젠 간택도 없이 단자를 받기로 하였노라 하시는 황제에게 처음으로 원망스러운 심사마저 드는 참이다. 대체 어느 가문을 들이시기에 제겐 일언반구도 없이 일을 치르신단 말인가. 낙망하는 제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황제는 여상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 너에게 해가 되는 가문을 짝으로 이어주겠느냐. 걱정 놓아라.”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황.”
“안다 알아. 갑자기 혼례라니, 너도 꽤나 당황하였겠지.”
그러니까요. 그걸 아시는 분께서 이리 일을 벌이시니 제가 더 환장할 노릇이다, 이 말입니다…. 샤오잔은 목젖까지 울컥 치솟은 말을 피를 삼키는 심정으로 찍어 눌렀다. 정신 차리자. 무릎 위로 단정히 올려둔 손아귀에 우악스레 힘을 주니 유모가 애써 단장해준 바짓단이 죄 구겨졌다. 허나 지금 망가진 옷매무새가 대수랴. 자칫 삐끗하면 코앞이 바로 절벽인 것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하였다. 신중하게 대처하자, 침착하게….
“사주단자는 왕(王)가, 대장군 왕호의 차남에게서 들여올 것이다.”
어린 황자의 침착과 인내는 딱 거기까지였다.
‘명일 신시(申時), 이 일로 왕가 부자가 들기로 하였으니 황자는 그리 알라.’
샤오잔은 제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탁자에 얼굴을 처박았다. 자리옷을 봐주러 온 유모도, 차를 들여오던 궁인도 죄 물렸다.
대체 이를 어쩐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더니. 정말로 호랑이에게, 그것도 아주 대호에게 물려가게 생겼다. (*대장군 왕호의 이름은 진실로 범 호(虎)자를 쓴다) 어쩐지, 요즘 대장군께서 입궐하실 적마다 웬 호랑이 새끼 한 마리를 꼬리처럼 달고 오시더라니. 그 새끼 호랑이의 낯짝이 어떠했더라. 스치듯 보았음에도 그 눈빛이 대호를 닮아 꽤나 형형했던 것을 기억해 낸 샤오잔은 급기야 제 작은 머리통으로 탁자를 콩콩 들이받기 시작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근래 저를 보는 큰 호랑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었다. 어째 저를 꿀 발라 잡아먹을 듯한 모양새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샤오잔은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망했다. 이번 생은 아주 대차게 망하였다. 대관절 혼례에 자비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하물며 상대가 그 왕(王)가라니.
왕가가 어떤 집안이던가. 대대로 대장군의 자릴 역임했으며 가문의 사람마다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어 신이 내린 무가(武家)라 일컬어지는 집안이 아닌가. 전장에서도 황제의 사방을 지키며 뚫지 못하는 적진이 없으니, 야차처럼 창검을 휘둘러 적을 도륙 내고 오로지 적의 피만으로 갑옷을 적신다 하였다. 오죽하면 참전한 전장에서 왕가의 문양이 보이거든 일단 갑옷부터 내던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 쇠붙이는 도망가는 것에 무게만 더해 오히려 명줄을 재촉하니, 무조건 내던지고 살길부터 찾으라지.
샤오잔은 무력(武力)이라면 딱 질색인 인사였다. 사람이라면 응당 인의예지를 갖추어 군자의 도리를 섬기며 삶이 옳고, 그리 살다 보면 타인과 크게 부딪힐 일이 없을 것이었다. 설령 일이 생겼다 해도 무력보다는 말로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 말이다. 게다가 샤오잔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차후 일 수습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지척에서 수두룩하게 봐 온 터였다. 이를테면 현 운국의 황태녀라던가, 제 누이라던가, 샤오린이라던가, 또 샤오린이라던가….
늘 사고는 제 누이가 치고, 윗전에 필요한 뒷수습은 제 몫이었던지라. 그 잔악무도함을 어려서부터 몸으로 체득해버린 샤오잔은 무력의 ‘무’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하여 작금의 이 사태는 샤오잔에게 퍽 위중하고도 벅찬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오늘 밤 편히 잠들기는 글러 먹었다. 아이는 그저 제 작은 머리통만 퍽퍽 쥐어뜯다 결국 포단 위에 엎어지듯 누워 사지를 뻗었다. 금세 팔다리로 탈력감이 내려앉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부질없게도 내일 신시의 해가 떠오르지 않기를 희원하는 것뿐이라서. 무력(無力)한 밤이었다.
해가 내렸으니 아이들도 지금쯤 보료 위에 몸을 뉘었을까. 황제는 부싯돌을 들어 황후가 생전 가장 아끼던 나비 촉대에 불을 붙였다. 곧 불빛이 고운 결로 사위에 번졌다. 황제의 긴 숨도 함께 침잠했다. 침전의 촉대를 밝히는 것은 살아생전 임께서 저를 위해 늘 고집스레 직접 하시던 일이라. 황제는 이 일만큼은 절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처음엔 아랫것들이 기함을 했더랬다. 어찌 고매한 황제의 손으로 허드렛일을 하시냐며. 내 반려가 나를 위해 했던 일을 어찌 허드렛일이라 칭하는가 크게 성을 내고 나서야 그 일은 온전히 황제의 몫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이제 황제의 하루 일 중 가장 평온하고 안온한 순간이 되었다.
란 황후. 황자의 어미이자, 황제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인. 대운국 제일의 절색(絕色)으로 당찼으나 굽혀야 할 때와 단단해야 할 때를 알았고, 심성 또한 외양만큼이나 어질고 고왔다. 또한 문(文)과 예(藝), 병법까지 두루 능통하여 무신(武神)이라 일컬어지는 황제의 곁을 책사로서 보좌하였는데, 실로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략가였음에 무신의 등엔 날개가 달렸더랬다. 황제는 그런 황후를 몹시 총애하여 내도록 곁에 두고 아꼈으며, 그 흔한 측비 하나 들이지 않음으로 유일무이하게 은애하였다.
황후의 내조로 문무(文武)가 완전해진 황제의 치세 아래, 실로 태평성대의 나날이 이어졌었다. 본디 병약했던 여인이 천행으로 무사히 첫아이인 황태녀, 샤오린까지 품에 안으며 그 평화는 천년만년 이어질 것만 같았더랬다. 허나 가인박명이라. 샤오린을 얻은 지 여덟 해, 황후는 황자 샤오잔을 낳으며 지독한 난산 끝에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으니. 절절히 은애했던 정인을 잃은 황제는 오래도록 슬퍼하였고, 오래도록 무너졌다. 허나 남겨진 사람은 비단 자신뿐이 아니었기에. 어미를 잃은 어린 황태녀와 갓 난 황자를 돌아본 황제는 그제야 간신히 심신을 추슬러 다시 용상에 올랐더랬다. 사랑이 전부였던 황제답게 제자리를 찾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빈 황후전에 그녀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위패 또한 직접 새겼다. 그리고 후일, 작금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이에게도 황후전을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황제에게 유일한 황후는 오직 란, 그녀 하나뿐임을 천명하였다.
그런 제 정인이 몸이 바스러지고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켰던 아이가 바로 샤오잔이었으니,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으랴. 심지어 샤오잔은 문(文)의 능함이 병법으로까지 이어졌던 황후의 명석한 기질까지 점점 발로하는지라. 샤오 황가의 늦둥이 황자임을 차지하고서라도 황제가 샤오잔을 특별히 아끼며 총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병약한 몸까지도 그대로 내리 닮아 황제의 비상한 걱정엔 날이 갈수록 살이 붙어, 그 덩치가 불고 또 불었다.
오늘의 일이 저를, 그리고 제 누이를 지키기 위함임을 아이는 얼마나 헤아렸을지. 영민하다 한들 아이는 아직 아이일 뿐이라 혹 마음만 상한 것은 아닐까. 속이 온통 소란하여 절로 한숨이 샜다. 황자와 함께 오손도손 드시라 어선방서 심혈을 기울여 올린 당과가 난 자리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이 당과, 우리 황자가 매우 좋아하는 것인데….’
정작 황자의 손 한 번 타지 못한 당과는 눈치 없이 달았다. 이리 단데도 입안에 남는 것은 어째 씁씁한 맛뿐이라. 채 반도 먹지 못한 당과를 내려놓는 황제의 안색이 어두웠다. 서안 위엔 황자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칙서도 그대로였다. 고집스러운 아이가 제 의중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라, 승지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직접 정성스레 써넣었건만. 고르고 고른 백추지에 옥새를 찍고, 가라국에서 들여와 색이 가장 곱다는 홍사까지 둘렀더랬다. 그리 애썼음에도 아이는 결국 어느 것 하나 챙기지 못한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속을 버석버석 태운들 제 마음이 얼마나 닿았는가 알 길이 없으니, 황제의 미간은 몇 시진 째 벅벅 구겨져 있던 참이다. 어수선한 미간을 성마르게 훑어본들 답답함이 가시지 않아, 결국 태감을 불러 당과를 물리고 술상을 들이라 일렀다. 그대로인 당과를 보면 어선방에서 퍽 섭섭타 하겠구나.
바람을 들이려 창을 여니 바깥은 어느새 달빛조차 없는 밤이 거멓게 내려앉았다. 제 마음을 닮았는가, 어둔 삭월의 밤이로다. 촉대 위의 초만 하릴없이 흔들리며 줄어갔다.
“황후, 내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내 오늘따라 황후가 더 그립구려. 시간은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 하였는데, 그 또한 내게만 부질없나 보오. 이리함이 맞는지, 더 좋은 방책은 없었는지. 임께서 첨언해 주었다면 틀림없이 그 방도가 최선이었을 것을.
초를 등지고 앉은 황제의 어깨가 더없이 가라앉았다. 심상마저 침잠하려 할 즈음, 때를 맞춘 듯 술상을 들여오기에 퍽 달가워 냉큼 몸을 돌려 마중하였더니 면역 없는 아랫것들만 화들짝 놀랐다. 쯧. 예서 일한 지가 몇 해들인데 여태 저래서야. 그 면을 살피던 태감이 황제가 금잔에 홀로 자작하게 술을 따르자 그제야 허릴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황궁에서 가장 존귀한 이들에게도 이 밤은 유독 지리하게 공평했다. 시간을 술로 달래는 연로한 아비도, 머리통을 쥐어뜯는 어린 아들에게도. 쉬이 잠들지 못하되 편애 없이 흘러, 적요하게 깊어갔다.
그토록 희원하였건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묘시(卯時)의 해는 떠올랐으니. 흐르듯 지난 밤은 희붐하게 머릴 밀어 올리는 해에 얌전히도 자릴 내어주었다.
제 처소인 묘영당(卯嬰堂)을 나서 동궁(東宮)으로 향하는 샤오잔의 눈자위가 토끼처럼 새빨갛다. 밤새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샤오잔의 입에선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충혈된 눈은 모래가 구르는 듯 까끌하고 거멓게 그늘진 눈가는 웅웅 울려, 당장 관을 짜다 드러누워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몰골이었다. 이쯤 되면 곤한 몸에 게으름을 붙여볼 만도 하건만, 샤오잔에겐 아침이 힘든 제 누이를 깨워 함께 문후드리러 가야 하는 매일매일의 사명이 있었으니. 제가 아니면 아랫것들의 절규 정도는 가볍게 묵살하고 오전 내내 침전에 파묻혀 있을 누이를 번히 알았다.
그건 아니 될 말이지. 암. 퀭한 얼굴을 하고서도 기어이 제시간에 맞추어 동궁전 문턱을 넘는 샤오잔을 총 태감이 반갑게 맞이했다. 신 총 태감, 황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밤새 강녕…. 숙였던 머리를 들며 황자의 낯을 마주한 동궁전 태감의 눈이 삽시간에 휘둥그레졌다. 아니, 전하! 혹 예체 미령하시옵니까?! 어찌 안색이 이리…! 전하…? 퀭한 몰골로 괜찮다 해봐야 신빙성이 있을 리 만무해, 샤오잔은 대충 웃는 낯으로 그를 물리곤 지체 없이 누이의 침전 쪽을 향했다. 그런 샤오잔의 걸음을 걱정스레 시선으로 뒤쫓던 동궁전 태감이 황자를 따르려는 묘영당 태감을 급한 손으로 붙들었다.
“이보시게. 대체 황자 전하 안색이 어찌 저리…. 아니, 자네…! 자네 낯짝은 왜 또 이 모양인가?!”
붙드는 손길 따라 종이 인형처럼 팔락대는 묘영당 위 태감의 꼬락서니 또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주무시라 몸 누인 포단 위에서 밤새 머릴 쥐어뜯으며 뒹군 제 윗전 덕에 덩달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꼴이 단정할 턱이 없었다. 묻지… 묻지 마시구려…. 비실대는 낯짝이 저승에서 갓 부임한 차사라 해도 믿을 만큼이라. 동궁전 태감은 그저 비척비척 황자의 뒤를 따르는 묘영당 그이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 외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침부터 되는 일 하나 없는 것이, 어째 정말 딱 죽을 맛이로구나.’
침전을 지척에 두고 머릿골이 죄어와 잠시 걸음을 멈추었더니, 정신줄 놓고 뒤따르던 태감이 대뜸 몸통으로 저를 들이받기나 하고 앉았다. 아이고, 아이고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소인 망극하옵니다. 소인이 감히 전하를…. 아이고…! 예정된 신시의 조우가 그리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통렬하게 스쳐, 샤오잔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런 윗전의 미간 골을 따라 묘영당 태감의 간담도 사정없이 쪼그라들었다. 밤새 잠을 설친 저 때문에 이이도 제정신이 아니겠거니. 지금은 더 늦기 전에 아직도 몽중을 헤맬 제 누이를 깨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되었으니 속히 가서 소셋물이나 떠오거라. 흰 영견도 잊지 말고. 그 때였다. 응당 자고 있어야 할 샤오린의 목소리가 별안간 우렁차게 귓전을 때렸다.
“아쟈―안―!!”
“…누이?”
꽃살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튀어나온 샤오린의 기세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태감이 소스라치게 놀라 도로 팔락팔락 주저앉았다. 내 요절하게 된다면 그 연유 중 8할은 분명 이 두 황자님들 덕분일 것이야…. 죄 쪼그라들어 겨우 한 줌 남은 간담을 쓸어내리는 태감의 몰골이 한층 더 처참해졌고, 돌아보던 샤오잔은 그만 몸짓을 잊었다.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있는 샤오린을 본 것이 언제 적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여, 샤오잔은 숫제 귀신이라도 본 듯한 낯이 되어 있었다. 오늘 해가 다른 쪽에서 떴었는가, 이 무슨 기이한 일인지. 진실로 몸짓을 잊은 듯 그저 멀거니 서 헤벌어진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샤오린은 깔깔 호탕히도 웃어댔다. 늘 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샤오잔의 창황한 작태란 기실 제 스스로 일찍 일어나는 것만큼 보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평소보다 몇 곱절은 더 귀여워진 제 아우를 마주한 샤오린의 낯엔 소담한 미소가 함빡이었다.
“내 상몽(祥夢)을 꾸었단다. 몸이 가뿐하여 일찍 눈이 떠졌지 뭐니.”
“대체 어떤 꿈이기에 잠귀신이 들러붙은 우리 누이를 이리 벌떡 일으켰소?”
“궁금해?”
“응, 궁금해. 내 몹시 궁금하오.”
동그마한 머리통을 연신 주억거리며 눈을 반짝이는 것이 어찌나 귀엽고 어찌 이리도 곰살맞은가. 샤오린은 말을 하다 말고 그만 녹아내릴 낯을 하며 샤오잔의 볼을 죽죽 잡아당겼다. 오구오구. 우리 아쟌 귀엽기도 하지! 샤오잔은 항시 바르고 고운 태가 몸에 배어, 궁 어디에서나 늘 나이답잖게 아정하단 소릴 들었다. 허나 제 앞에선 늘 이리 무해한 낯으로 무장 한 겹 없이 말랑하게 구니, 어찌 녹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말이다. 샤오린은 솟는 광대만큼이나 폐부가 벅차고 아릿하여 숨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쯤 되니 아무래도 팔불출은 집안 내력이 틀림없지 싶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귀애(貴愛)할 수밖에. 가뜩이나 저보다 여덟 해나 늦게 세상 빛을 본 아우라, 샤오린은 앞으로도 내내 제 아우에게 세상 모든 귀애를 다 쏟아부을 예정이었다.
“누이이…. 이것 놓고, 이것 좀 놓고오―!”
“얼른 꿈이나 말해보오. 내 정말 듣고 싶어 그래. 응?”
꿈을 사면 좀 나을까. 아침부터 곤할 대로 곤한 몸에, 신시의 교전까지 앞둔 샤오잔은 제 누이의 꿈이라도 살 요량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구명줄이 생기지 않겠는가. 꿈 이야기 대신 제 볼을 쥔 샤오린의 수악에 힘이 빠질 기미가 없어, 한참을 잡힌 채로 질질 끌려오고 보니 어느새 황제의 침궁이 지척이다. 그제야 놓인 볼이 사방으로 얼얼해 샤오잔의 얼굴이 한껏 불퉁해졌다. 꿈 이야기를 해 달랬더니 예 오는 동안 제 볼이나 죄 못살게 구는, 제 고운 누이가 퍽 밉살스러워서.
한편 남매의 문후가 평소보다 늦어지자 이미 환복까지 마친 황제는 안절부절 애꿎은 아랫것들만 죄 들볶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그 불똥을 고대로 맞고 있는 태감의 얼굴이 흡사 우거지를 뒤집어 쓴 듯했다. 평소에도 황제의 유난한 남매 사랑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실로 더 유난이시라. 어전에서 황제만 모시길 십수 년. 좀처럼 제 손 아닌 다른 이 손에 황제의 보필을 맡기는 법이 없던 어전 태감은 결국 제 손아랫 태감에게 뒷 일을 맡긴 채 비장한 얼굴로 내전을 박차고 나섰다. 조금만 참으시오. 내 곧 마마님들 모시고 올 터이니…!
남다른 우애를 과시하며 가까워지는 황자 남매를, 중문까지 나와서야 조우한 어전 태감의 낯이 불을 켠 듯 밝아졌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신 지가 벌써 한참입니다! 외치니, 속 편한 샤오린은 곯아 터진 태감 속도 모르고 반갑다며 멀찍이서 손이나 휘휘 흔들고 앉았다. 예까지 마중을 나온 것을 보니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제 웬만한 일엔 끄떡도 않는 어전 태감조차 어지간히 똥줄이 탄 모양새라. 눈치 빠른 샤오잔의 낯엔 자못 미안한 기색이 흘렀다. 금방 고해 올리겠다 읍한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날듯이 사라지고, 샤오린은 흠결 없는 샤오잔의 옷매무새를 부러 다시 매만져주기 시작했다. 금세 도로 불퉁해진 얼굴도 손가락으로 살살 달랬다. 그러자 되려 볼을 더 부풀리며 퉁얼대는 것이 꼭 제 꿈을 들어야만 성이 풀리겠단 얼굴이라. 샤오린은 웃으며 그제야 제 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호랑이 꿈이었어 아쟌. 토끼처럼 양 볼을 부풀리던 샤오잔의 눈썹이 기묘하게 휙 휜 것은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저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다면 샤오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호랑이, 어젯밤 이후 세상에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호랑이가 맞으렷다. 호랑…이? 호―오랑이―? 누이, 지금 호랑이라 했소? 믿고 싶지 않아 재차 물은 것인데 그 심란한 속내 알 리 없는 샤오린은 아주 잔뜩 신이 났다. 응, 호랑이! 아주 큰 호랑이였어! 널 찾으러 묘영당 후원엘 갔는데 글쎄 거기에 어마마마께서 생전 그리 아끼셨다던….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 꽃이 지천으로 가득 피어 있질 않겠니. 사위에 향기가 진동하기에 홀린 듯이 들어갔는데, 세상에! 그 꽃 무더기 옆에 딱 봐도 영물(靈物)처럼 생긴 호랑이가 앉아있지 뭐야. 눈빛도 푸르름 한 것이 어찌나 신령 같던지…. 와중에 그새 명을 받잡고 돌아온 어전 태감까지 황태녀 전하, 황자 전하 어서 듭시지요―! 기쁘게 외쳐대, 샤오잔은 미간이 다 빙빙 돌 지경이었다.
“누이…. 그 꿈…. 상몽이 확실하오?”
“아무렴! 영물, 그것도 네 묘영당에 영물이 들었는데 상몽이지!”
상몽은 무슨 놈의 상몽이고, 영물은 무슨 놈의 영물이란 말이냐. 저에게 지금 호랑이란 악몽보다 더한 흉몽이요, 도올(檮杌)보다 더 극악무도한 요괴인 것을. 심지어 그 호랑이란 물건이 제 묘영당에 들었다질 않는가. 뒷머리가 선뜩하여 오한이 스쳤다. 샤오잔은 제가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샤오린의 들뜬 목소리가 내내 적확한 발음으로 호랑이를 조잘대, 그마저도 금세 체념해야 했다. 내전에 드는 와중에도 그저 호랑이란 단어만 귓가에 웅웅 떠돌아, 샤오잔은 차라리 혀를 깨물고픈 심정이 되고 말았다.
*to be continue
안녕하세요. 람입니다:)
이 글의 제목, 월하향月下香은 ‘달빛 아래 퍼지는 향기’ 란 뜻으로 달빛의 향기꽃, 혹은 튜베로즈라고도 불립니다. 아마 튜베로즈란 이름이 더 익숙하실 거예요. 수수하게 향을 흘리다 밤이 되면 진한 향기를 낸다고 알려진 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꽃말도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위험한 쾌락, 사랑, 관계’. 개화시기도 8-10월로, 이 글의 모티프를 따 온 두 사람의 생일과 맞물립니다. 한 줄기에 꼭 두 송이가 대생하여 자라는, 면면이 둘과 꼭 닮은 꽃이라 한 번쯤은 이 제목으로 둘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요. 그 요망한 욕심을 못 이기고 일을 치는 바람에 이 글이 탄생하게 되었다- 뭐 이런 지리멸렬한 Tmi입니다. 껄껄.. 아마 꽃말만큼 치명적인 글도 아닐 것이고 속도도 유유하겠지만 부디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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