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실종 靑春失踪
2차 BL 커미션 / 빠른 마감 / 이니셜 치환
*익명님 커미션입니다. (10,000자)
헐렁한 도복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검은 띠를 꽉 조이자 익숙한 안정감에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H의 커다란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거목의 뿌리처럼 단단하게 내린 왼발을 한 발 길이로 넓혀 선 그가 두 손을 펴 스읍, 들이마시는 숨에 명치까지 끌어올렸다. 지그시 감고 있던 두 눈을 뜨며 후우, 내쉬는 숨에 두 손을 주먹 쥐어 단전 앞까지 끌어낸 H이 요 며칠 저를 괴롭히는 얼굴을 쫓아내듯 우레와 같은 기합을 내질렀다.
아, 젠장. 실패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빌어먹을 놈의 얼굴이 영 사라지지 않는다.
청춘실종
靑春失踪
H이 B사범을 따라 무작정 건너온 일본의 여름은 진창과 다름없었다. 습하고 눅눅해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거지 같은 나날이었다.
B사범이 준비해준 몸에 딱 맞는 일본식 교복은 H에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답답한 단추를 죄 풀어헤치고 낡아빠진 전차에 오르자 모두 슬금슬금 그의 곁에서 물러섰다. 가뜩이나 덩치도 문짝만 한 녀석이 인상까지 안 좋으니 옷깃조차도 스치고 싶지 않았을 테다.
전차의 문에 커다랗게 난 창문에 이마를 쿵 붙인 H은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려서 장난감 카메라 셔터를 찰칵찰칵 누르면 내장된 필름이 변검처럼 얼굴을 휙휙 바꿨던 것처럼 빠르고 정신없는 풍경이었다.
특출날 것 없는 학교는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두고 나타난 폭풍 같은 교환학생에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카락에 껄렁한 걸음으로 저보다 훨씬 왜소한 담임의 뒤를 따르는 그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몰린 인파에 복도가 꽉 막힐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귀찮게 하기는.’
H이 쯧 혀를 차자 심약한 담임이 심장을 부여잡고 용수철처럼 펄쩍 튀어 올랐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신임 교사는 가혹한 제 운명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H의 담임을 맡기로 정해졌을 때, 그는 제 반의 장이자 전교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학생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창백하게 질렸다. 이쯤 되니 골치 아플 것 같은 문제는 다 제게 떠넘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힘없는 신임 교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드르륵 열리는 미닫이문 소리에 학생들의 이목이 교실 앞문으로 쏠렸다. 교환학생이 온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교에 퍼진 터라 모두 눈을 빛내며 담임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이를 바라봤다. 문틀에 머리를 쿵 찧은 H이 “아. 씨발.”하고 작게 읊조리고는 이마를 문질렀다.
세상에. 저 문에 닿는다고?
몇몇 학생은 뒷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흘끗거렸다. 척 보기에도 H의 몸집에 맞먹는 덩치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은 그에게로. 그는 H처럼 저 문에 머리를 부딪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생이었다.
담임은 비질비질 새어나오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고는 칠판에 교환학생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H. 낯설고도 이국적인 이름이었다.
“친구들한테 인사할까?”
낯간지러운 일을 시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H은 자기소개에 익숙했다. 처음 만나는 상대 앞에서는 예를 갖출 것. 사범님의 가르침을 잊을 리 없었다. 허리를 곧게 편 H의 반듯한 자세에 그를 바라보는 검은 눈이 처음으로 흥미에 반짝였다.
“H. 태권도로 국대 준비 중이다.”
H의 한 마디에 교실이 술렁였다.
운동선수인가 봐.
어쩐지 덩치가……
그래도 카자마하고 비교하면 카자마가 더 크지?
아닌 것 같은데. 쟤가 더 커 보여.
쉿! 들리겠다.
“으음. H은 창가 가장 뒤쪽으로 앉을까? 키가 커서 뒷자리가 나을 것 같구나.”
담임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H은 지정된 자리로 걸어가면서도 눈으로는 제 반대편에 앉은 남자를 좇았다. 어수선하던 교실에서 유독 귀에 꽂히던 이름이 있었다.
K.
저와 비슷한 덩치에 누가 뭘 하든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 녀석. 가방도 없이 자리에 털썩 앉은 H이 제 앞자리 학생의 의자를 툭툭 건드리자, 앞자리 학생은 담임과 비슷한 수준으로 놀라 몸을 떨었다.
“저 녀석 이름이 K야?”
제가 무슨 거슬리는 짓을 했나 벌벌 떨던 학생은 보기보다 가볍게 묻는 H의 음성에 두 눈을 끔벅였다.
“……어? 아아. KJ?”
“KJ?”
“반장이야. 학생회장이고.”
안경을 추켜올리며 설명을 덧붙이는 그의 말에 H이 짧게 숨을 뱉었다. 의외였다. 척 보기에도 샌님과는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교내 관직을 맡고 계실 줄이야. H의 입술이 호를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호전적이고 호승심 강한 산짐승 같은 그는 언제나 저와 비슷한 과의 녀석들을 찾아내 싸움을 거는 게 취미이자 특기였다. 카자마 진에게선 진한 동류의 향이 났다.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강한 동류의 향이.
눅눅하게 젖은 땅을 더욱 더럽힐 셈인지 장맛비가 쏟아졌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서 턱을 괸 채 진을 바라봤지만, 그는 단 한 순간조차 H에게 시선을 주는 법이 없었다. H은 느긋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실로 오랜만에 만난 동류의 그를 바라보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까만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기고 저와 달리 단정한 교복차림의 그는 매사에 진지한 듯 표정에 변화조차 없었다. 재미없는 놈이네. H이 시선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을 때, 그의 까만 눈이 딱 한 번 붉은 머리카락에 향했다.
*
소문의 교환학생은 고작 일주일 새에 내로라하는 싸움꾼들을 주먹으로 무릎 꿇리고 그 위에 군림했다. 싸울 맛도 안 나는 녀석들 상대로 뭐가 재미있겠느냐마는 H은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치 않는 싸움꾼 기질을 타고난 탓에 그 시시한 힘겨루기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끄윽……”
“지루하다, 지루해. 용기는 가상하다만.”
한숨을 푹 내쉰 H이 바르작 거리는 남자의 어깨에 발을 콱 박아넣자 찢어질 듯한 단말마와 함께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축 늘어진 몸뚱이들 위에서 으?X 뛰어내린 H은 그리 세지 않은 주먹에 스친 뺨을 문지르고는 비릿한 피를 퉤 뱉어냈다. 다른 나라 학교에서까지 사고 친 걸 알았다가는 사범님이 가만 계시지 않을 테니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때워야 했다.
아무렇게나 던져둔 교복 재킷을 집으려 손을 뻗은 H은 어느새 길어진 그림자에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저물어 가면서 운동장 가득 어스름한 빛이 내렸다. 한동안 내린 비에 땅이 마를 새 없이 질척질척한데도 그 오묘한 빛깔을 받은 운동장은 제법 운치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재킷에 묻은 먼지를 털털 털어 어깨에 걸친 H은 저 멀리서 교정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하나의 인영을 발견했다. 황혼의 시간에 뭉뚱그려진 그림자는 그의 정체를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H은 문득 언젠가 수업 시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해가 질 무렵에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를 구분할 수 없다지. 내가 키우는 개인지 날 물어 죽일 늑대인지 알 수 없다고 말이야. 뭐라더라, 그걸.
“……개와 늑대의 시간?”
순식간에 훅 떨어진 태양에 어둠 속에서 J의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다. 그는 눈앞에서 얼빠진 채 중얼거리는 H과 그 뒤로 쓰러져있는 남자들을 흘끗 바라보고는 작게 한숨을 밀어냈다.
“적어도 학교 밖에서 싸우지그래?”
“말도 할 줄 알았냐?”
“뭐?”
“하도 입 닫고 무게 잡고 있길래 무슨 컨셉인가 했지.”
이죽거리는 H의 말에 J이 쯧 혀를 차고는 그 곁을 지나려 하자 손목이 붙들렸다. 꽈악 잡아오는 힘이 무식하게 강했다.
“너, 세지?”
씩 웃는 H의 얼굴에 J이 질린다는 듯 그 손을 잡아 털어냈다. 제법 힘껏 쥐고 있었는데 어렵지 않게 빼내는 J의 힘에 H은 오히려 더 신 난 눈치였다. J이 잡아빼 낸 손목이 제법 얼얼했다.
그를 지나치려던 J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주먹이 날아드는 게 보였다. 팔을 들어 얼굴을 막자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묵직한 타격감이 팔목을 타고 어깨 전체에 울렸다.
이래도 안 덤벼?
씩 웃는 H의 눈빛에 J이 질린다는 듯 통증이 남은 팔을 살살 흔들었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군. 눈살을 찌푸린 그는 한숨을 토해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
“겁나나 보지?”
H의 말에 J의 몸이 우뚝 멎었다. 찰나에 입술을 달싹이던 진은 곧 머리를 털어내곤 귀찮은 파리를 쫓듯 H에게 손짓했다.
“좋을 대로 지껄여.”
어깨를 으쓱 털어낸 H은 막아서고 있던 몸을 옆으로 틀어 J의 앞길을 열어줬다. 교문을 빠져나가는 너른 등을 바라보며 H이 입맛을 쩝 다셨다. 늑대라고 생각했는데, 잘 길들여진 개인가.
H의 그런 의문은 머지않아 해소됐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고 털털한 H이 마음에 들었는지, 쉬는 시간이면 그의 주변이 제법 붐비기 시작했다. 정작 감투까지 쓴 J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이는 없었다. H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 것을 발견한 동급생이 손날로 입을 가린 채 슬그머니 몸을 숙여왔다.
“KJ하고 가까워져 봤자 좋을 거 없어.”
“……뭔 소리야?”
“쟤가 그 M 재벌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거든.”
“무슨 재벌?”
눈살을 찌푸린 H의 커다란 음성에 동급생이 황급히 “쉬잇! 쉿!”하고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슬쩍 J의 눈치를 살핀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답답한지 가슴을 쿵쿵 두드려댔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모르나 본데, 엄청난 기업이라고! 잘 못 찍혔다가는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질걸.”
“M 재벌인 것도 충격이지만, 사생아인 것도 좀……”
저희끼리 킥킥 웃어대는 동급생들의 태도에 H이 얼굴을 우그적 구겼다. 남의 뒷얘기나 하는 인간치고 제대로 된 인간을 본 적 없던 그는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책상을 발로 쾅 걷어차자 요란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고요해졌다.
“어쩌라고? 너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남의 뒷얘기나 지껄이는 게 낙이야? 인생 존나 재미없게들 사네.”
“아, 아니…… 우린……”
“됐으니까 꺼져. 쉬는 시간 방해하지 말고.”
“미, 미안.”
바퀴벌레처럼 후다닥 흩어지는 모습에 콧김을 흥 뿜은 H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딴 재미없는 얘기에 시간을 쏟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운동장이나 구경하는 게 생산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작은 소란에 창가의 붉은 머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던 J은 드물게도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겁이 없는 건지, 미친놈인 건지. J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방금까지 집중해 읽던 책의 활자가 제멋대로 움직여 독서를 방해했다.
J은 H이란 녀석을 겁대가리 상실한 싸움꾼 정도로 정의하기로 했다. 미친놈의 자리를 내주기엔 M 재벌의 K가 너무도 건재했으니까. 조용해진 교실 안에 존재하는 소리는 진이 책장을 넘길 때 나는 고작 100g의 종이 소리가 전부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H은 때때로 섞여오는 종이 소리에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걸 느꼈다. 신기한 일도 다 있었다. 교실의 끝과 끝에 앉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면서 저희는 꼭 곁에 붙어 앉아있는 것 같았다.
*
시시껄렁한 날이 구름처럼 흘렀다. H은 여전히 진에게 별것도 아닌 걸로 시비를 걸거나 누군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채 주먹을 휘둘렀다. 때때로 J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싸움이 붙으면 야생마의 갈기 같은 머리를 흩날리면서 신나게 날아다니던 H이 씩 웃는 얼굴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넌 안 덤비냐?”
쓰레기장처럼 변한 골목에서 홀로 고고하게 턱을 치켜든 J은 바닥에 주저앉은 H을 내려다봤다. 그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잔뜩 성난 근육과 험준한 산맥처럼 튀어 오른 혈관이 요동쳤다.
비릿한 피비린내 사이로 찰나에 얽힌 시선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매섭고 사나웠다. H은 구태여 잰 체 가면을 쓰는 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살다 가면 될 것을, 쟤는 꼭 어렵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어딘가에 가두는 것만 같았다. 아마 그 복잡하다는 가정사 탓이겠거니 넘겨짚은 H이 으쌰 몸을 일으켰다. 머리 아프게 생각해봐야 좋을 게 있나? H은 투지가 넘실대는 저 눈빛이 퍽 마음에 들지만, 싫다는 녀석을 붙잡고 주먹을 맞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대답은 않고 자리를 뜨는 제 뒤를 바싹 따라붙은 H의 그림자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짙은 눈썹이 사납게 주름 잡히자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왜 따라와?”
“미친놈. 나도 이쪽이거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낄낄 웃은 H이 J의 엉덩이를 발로 퍽 걷어찼다. 이쯤 되니 천하의 KJ도 참아주기 힘들었는지 손바닥이 붉은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퍽 소리에 휘청인 H은 이제 배를 잡고 웃었다. 센 줄은 알았는데 손이 장난 아니게 맵다. 별것도 아닌 일에 웃음을 터뜨리는 H을 보고 J은 쓴 입맛에 혀를 찼다. 미친놈과 엮이는 건 그만하고 싶은데 어째 제게 꼬이는 인간은 하나같이 맛이 좀 가 있거나 피에 환장한 인종이었다.
J을 따라 걷던 H은 그의 걸음이 멈춘 곳에서 짧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학교에 퍼진 KJ의 소문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적어도 H은 그 소문이 말도 안 되는 악성 루머라고 생각했다. 천하의 M 재벌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모르겠다마는 적어도 총수의 아들이란 녀석이 이토록 허름한 맨션에 살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H.”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H이 처음으로 불린 제 이름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런 말은 머리에 총알이 날아와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J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꽤 듣기 좋았다.
“……넌 그만 돌아가.”
내용은 영 아니었지만.
H은 한 마디 해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주변을 살폈다. 다 쓰러져가는 맨션이 몰려있는 판자촌에 영 어울리지 않는 검은 세단이 눈에 띄었다. 방금까지 진에 관한 흥미로 반짝이던 H의 눈이 식었다. 어느샌가 저희를 둘러싼 장정의 수를 헤아린 H이 운동화를 지익 끌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이것들 다 뭐냐?”
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은 J이 목 끝까지 채우고 있던 단추를 툭툭 풀어냈다.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은 J의 눈이 장정에게 끌려가는 어머니의 등을 좇았다. 장정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녀석들을 다 처리하고 어머니를 데려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생각하는 J의 뒤에서 그의 얼굴 옆으로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낸 주먹이 빠르게 내질러졌다. 어느새 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장정이 그 커다란 주먹에 맞아 바닥에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자빠졌다.
“거봐. 싸울 줄 아네.”
J의 빈틈 없는 자세에 씩 웃은 H이 지축을 뒤흔드는 기합과 함께 바닥을 박차고 장정의 틈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뒤로 덤벼드는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바닥에 메다꽂은 J의 시야에 화려하게 춤추는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누구의 주먹이고 누구의 발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때리고 터지고 비명과 피가 난무하는 좁아터진 골목에서 J은 웃고 있었다. 제 주먹에 쓰러지는 이들을 밟고 일어선 J은 제 안에서 종종 존재감을 드러내는 MK의 피가 역겨웠다. 이래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폭발하는 자유를 갈망하게 될까 봐.
“J!”
웅웅 울리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어머니의 음성에 J이 움찔 몸을 떨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머리를 핸들에 쾅쾅 처박고 있는 H이 문을 열어준 덕에 도망쳐 나올 수 있던 N이 제 아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터지고 까져 타인의 피와 제 피가 한데 섞여 붉어진 손으로 제 어머니의 등 언저리를 배회하던 J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은 남자의 머리를 축구공 차듯 퍽 걷어찬 H이 J의 이마를 철썩 때렸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존나 불쌍한 새끼.”
“뭐?”
“모르면 됐다.”
미련 없이 휙 뒤도는 H의 옷자락을 붙잡은 N이 “J의 친구니?”하고 작은 음성으로 물어왔다. 친구라는 단어에 두 사람의 얼굴이 우그적 구겨졌다. 절대 아니라고 소리를 빽 지르는 H의 앞에서 N이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둘이 닮았네.”
보답하고 싶다며 물러서지 않는 N의 고집에 H은 기어이 J의 집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좁은 목조 건물은 오래된 나무 냄새로 쿰쿰했다. 그리 크지 않은 식탁은 J과 H이 마주앉으니 꽉 들어차서 N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제 어머니의 웃음소리에 J의 긴장이 풀어졌다.
됐다면서 한사코 거절할 땐 언제고 식량을 거덜 낼 요량으로 맛있게 먹어치운 H이 배를 두드리며 나서자, 드물게도 J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교복을 벗은 J은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해 보이던 모습과 달리 제법 또래의 얼굴을 했다. 괜히 또 그 모습을 똑바로 보기가 민망한 H은 제 발아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고맙다.”
“뭐가?”
“그런 게 있어. 다음번에 한 번 붙어볼까?”
부드럽게 웃는 J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제 머리카락만큼이나 화라락 달아오른 얼굴을 어둠 속에 감춘 H이 “왜 웃고 지랄이야!”하고 버럭 화를 내는데도 J은 어깨를 으쓱 털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에 H이 어두워진 거리를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도장에 도착해 벌러덩 드러누운 제 제자의 붉은 얼굴에 B사범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갛고 숨이 차느냐 묻는 사범님의 물음에 H이 제 두꺼운 팔로 얼굴을 감췄다.
“뛰어서 그래요. 뛰어서.”
“여름에 뛰면 열사병 걸린다, 인석아.”
“……저 벌써 걸린 것 같아요, 사범님.”
쉰 소리 말고 가서 씻으라는 일갈에 H이 휙 모로 드러누웠다. 이래도 저래도 사라지지 않는 빌어먹을 놈의 얼굴에 홧홧한 숨이 터져 나왔다. 씨발, 씨발. 존나 짜증나.
“으아아악!”
커다란 몸을 허우적거리는 제 제자의 모습에 B사범이 서둘러 약을 찾으러 몸을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가 어디 아픈 게 분명해 보였다.
H은 제 마음을 인식하기 무섭게 찾아와준 방학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얼굴을 또 어찌 보나 걱정이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학교에서의 J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H을 무시해줬다. 좀 열받긴 하지만, 친근하게 지내는 것보다야 나았다.
여름의 습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실로 오랜만에 오토바이를 끌고 나온 H은 텅 빈 도로를 마음껏 달렸다. 일정한 간격을 띄고 도로 위에 별처럼 빛나는 가로등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기다란 주황색의 선처럼 길어졌다. 그 주황색의 길을 따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속도를 높이던 H이 도착한 곳은 한산한 공원이었다. 누구도 없을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갈 셈이었던 그는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놀라 하마터면 턱이 빠질 뻔했다.
풀벌레 우는 공원의 낡은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아있는 이는 틀림없는 KJ이었다. 깜박깜박 점멸하는 가로등 아래서 홀로 맥주를 마시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J의 뒤로 다가가 불시에 빼앗아 든 맥주 캔은 벌써 다 마셨는지 텅 비어있었다.
“웬 궁상이야? 애새끼가 술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넌 가끔 바른 소릴 하더라.”
“가끄음?”
피식 웃은 H이 벤치를 훌쩍 넘어 J의 옆에 앉았다. 한 손으로 우그적 구긴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자 알루미늄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카랑카랑하게 텅 빈 공원에 울렸다.
“난 네가 싫다.”
넌지시 넘어오는 J의 음성에 H은 뜨끔한 심장을 달래며 대수롭지 않게 “그러냐?” 대꾸했다. 나도 너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J은 한참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을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달싹이자, H은 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널 보고 있으면 겨우 억누른 승부욕이 제멋대로 날뛰는 기분이거든.”
“너한테 그런 대단한 감정이 있었다고? 처음 알았네.”
J이 작게 웃었다. 아니, 사실은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가 웃은 건지 귓가에 날벌레가 날아든 건지 모를 정도였다. H은 그래도 그가 웃었노라 믿고 싶었다.
고요하던 들판에 튄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갔다. 모든 걸 살라버릴 듯 몸집을 불려 가는 화마에 그대로 뛰어들고 싶었다. 까맣게 빛나는 J의 눈을 바라보던 H이 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J은 그의 거친 위로를 굳이 물리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안 어울리게 개새끼처럼 묶여살지 말고.”
재밌는 거 알려줄까.
개구진 얼굴로 씩 웃은 H이 그에게 헬멧을 턱하니 던졌다. 커다란 덩치 둘이 타기에 비좁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H은 어색하게 의자 뒤를 잡는 J의 손을 끌어다 “좆같아도 참아. 죽기 싫으면.”하고는 제 허리에 둘렀다.
오토바이 페달을 무자비하게 콱콱 밟을 때마다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지러지는 여름밤의 풍경에 다른 듯 닮은 두 남자가 악을 쓰며 도로를 달렸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미친놈들처럼 밤거리를 누볐다. 거리낄 게 없는 이들처럼 텅 빈 도로를 호령했다. 이러다 죽어도 좋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자 꽉 막혀있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열정에 불을 댕기자 기다렸단 듯 활활 타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그 불구덩이에 삼켜져 그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
여름이 완전히 끝나가기 전, 그리 길지 않던 방학에 끝이 찾아왔다. 창가 가장 뒷자리의 H은 제 반대편 뒷문 쪽 자리를 바라봤다. 학생의 귀김이 되셔야 할 학생회장께서 개학 첫날부터 땡땡이라니, 세상 참 좋아졌다 생각한 H은 큭큭 소리를 죽여 웃었다.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와 오토바이에 오른 그는 언젠가 찾아갔었던 낡은 맨션으로 향했다. 헐어빠진 문을 텅텅 두드리자, 부드러운 인상의 N이 웃는 얼굴로 제 아들의 친구를 맞이했다.
“H이구나. 어쩐 일이니? 오늘 학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녀 이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안을 슥 둘러본 H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녀에게 “잠깐 바람 쐬려고요.”하고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둘러댔다.
J과 어울려줘서 고맙다는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웃은 H은 그가 있을만한 곳을 머릿속에 추렸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살가운 대화를 나눌만한 관계가 아니란 걸 깨닫고는 세게 혀를 찼다. 그 정도로 가까운 관계도 아닌 주제에 그를 찾아다니는 제 꼴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떻게 해도 그 얼굴이 떠나질 않으니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오토바이에 올라 골몰하던 H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핸들을 틀었다. 여전히 오가는 사람 적은 이름 모를 공원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그가 달리는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낡은 자판기 옆 벤치에 그날과 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J을 보고 훌쩍 넘어온 H은 이리저리 구르고 터진 그의 얼굴에 표정을 와그작 구겼다.
“너 이게 다 뭐냐?”
심각한 H의 표정에 J이 큭큭 어깨를 작게 떨며 웃었다. 입꼬리를 당길 때마다 찢어진 입술이 아팠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M 재벌에 찾아갔어.”
“……이거 진짜 또라이새끼네. 네가 거길 왜 가?”
“누가 개새끼처럼 묶여 살지 말라던 말이 생각나서. 개새끼 취급하지 말라고 찾아갔거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얻어맞고서야 다신 어머니와 저를 찾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아플지언정 자유로웠다.
“미련한 새끼. 네가 이렇게 줘터져서 오면 난 언제쯤 너랑 붙냐?”
“글쎄. 언젠가는”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J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빗물을 기분 좋게 받아낸 그의 위로 H의 재킷이 툭 떨어졌다. 덥다는 그의 말에 J은 씩 웃고 말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학교로 돌아온 두 사람을 보고 담임은 기절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버텨냈다. 피투성이에 쫄딱 젖은 둘은 언제 붙어왔느냐는 듯 다시 말 한마디 없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라느니 다시 한 번 괴소문이 나돌았지만, 제멋대로 떠드는 그 말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에 운동장의 풋풋한 흙냄새가 섞였다. 한창때의 남자애들로 그득한 열기를 품은 교실 안을 맴돌던 여름의 냄새는 털털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에 창밖으로 날아갔다. 청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내리쬐는 뙤약볕과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이토록 흐리고 눅눅한 잿빛이 저희의 청춘이라 한다면 우리의 청춘은 실종된 것과 다름없으리라. 그렇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에 억지로 색을 덧칠해 청춘이라 이름 붙이고 그걸 숭배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녀석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그 가짜 청춘에 놀아나 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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