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first base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
“이걸 다 먹을 수 있기나 한가?”
“에헤이, 모르는 말씀!”
유쾌하게 대꾸한 J는 테이블 위에 과자를 와르르 쏟아놓았다. 그리 좁지 않은 테이블이 과자 봉지로 반 넘게 차자 암굴왕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남은 자리에 자신이 들고 있던 봉투까지 내려놓으니 테이블은 정말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멀뚱멀뚱 바라보는 사이 J는 잽싼 손놀림으로 테이블을 정리했다.
“내가 안 먹으면 남편이 다 먹어줄 거잖아. 안 그래용?”
“흠, 남길 수는 없지.”
어쨌거나 암굴왕은 수감자 출신이었다…….
매콤달콤한 양념 냄새를 솔솔 풍기는 닭강정 박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소스를 듬뿍 끼얹은 핫도그가, 다시 그 옆에는 홈X볼 한 상자가 놓여 있었고. 겉보기에는 하나같이 군침이 돌았다. 그 밖에도 J가 집히는 대로 산 과자와 커다란 콜라병까지 더해지니 먹고 마실 것이라면 여기서 밤을 새워도 좋을 만큼 충분했다.
웬만해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양이었지만 그는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 몸이었고, 그건 반대로 말하자면 뭘 얼마나 먹건 신체에 영향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J가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식도락에 어울려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실 그는, 자신이 다양한 음식을 접하며 이런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게 J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고.
비슷한 통찰은 경험에 관해서도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어느 흐린 봄날, 암굴왕 에드몽 단테스는 J 곁에 꼭 붙은 채 기아 챔피언스 필드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었다. 그를 이곳으로 이끈 주범은 일회용 컵에 콜라를 꼴꼴 따르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양. 우리 여보는 야구 규칙은 아나 몰라?”
암굴왕은 대답 없이 시원하게 웃기만 했다.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십 분 남짓. 중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토끼 눈이 된 J는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뜻밖의 열정적인 모습에 암굴왕은 부인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잠시 성실한 학생으로 변해야만 했다.
중요한 건 ‘호랑이’들이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J의 말에 따르자면. 그것만으로는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던 암굴왕은 경기가 시작하고도 몇 분이 지나서야 깨달음을 얻었다. 한쪽 팀의 유니폼이 왠지 낯이 익다 싶더라니, 오늘따라 J의 옷차림이 평소와 달랐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던 듯했다.
그는 마운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J를 힐끗 바라보고는, 콜라 컵 뒤로 흐뭇한 미소를 감추었다.
큼직하게 알파벳이 쓰인 티셔츠는 유난히 활발한 분위기였다. 품이 헐렁해서 그런지, 운동복다운 디자인 때문인지, J가 입고 있자 엄연한 성인 여성이 얼핏 소년처럼 풋풋해 보일 정도였다. J는 거기에 높이 올려묶은 머리카락 위로 빨간 볼캡까지 야무지게 쓰고 있었다. 선명한 붉은색과 대비된 귓바퀴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았다. 그런 모습으로 규칙을 이야기해 주었으니 사실 암굴왕의 귀에는 반도 들어오지 않았을 수밖에.
하지만 경기는 이겨야 하는 법이었고, 그에 대해서도 암굴왕에게는 나름의 대책이 있었다.
J가 좋아하고 있다면 호랑이들이 이기는 중일 테고, 화를 낸다면 반대겠지. 간단한 해답을 지닌 암굴왕은 경기에 열중하는 J를 마음 편히 지켜볼 수 있었다. 테이블에는 먹을거리가 잔뜩인데 손댈 생각도 않고, 득점 한 번에 벌떡 일어나 뛸 듯이 기뻐하는 부인을. 왠지 모르게 연애 초기가 생각나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를 만큼 열성적으로 환호성을 지르던 J는 주위 관객들이 대부분 착석하고 나서야 저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암굴왕을 돌아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암굴왕은 마주 미소를 지으며 플라스틱 포크를 내밀었다. 포크 끝에서는 닭강정 한 조각이 꿰뚫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힘쓰다가는 탈진하겠군.”
“좋아서 그러징.”
새끼 새처럼 냉큼 닭강정을 받아먹은 J가 혀끝으로 입술에 묻은 양념을 핥았다. 암굴왕은 습관적으로 제 입을 가져다 대려다, 간신히 주변을 의식하고는 손만 올렸다. 양념을 문질러 닦아주자 J가 헤헤대더니 조그맣게 물었다.
“우리 이기고 있는 건 알죠?”
이번에 2점째! 상대 팀은 빵점! 점수를 다 합치면……. 손가락까지 세웠다 접어 가며 이야기하는 품이 제법 신이 나 보였다. 암굴왕은 주저 없이 대꾸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부인께서 이리 열과 성을 다하시는데.”
본인은 몰랐지만, 진다면 저 아래 선수들에게 친히 책임을 묻겠다는 식의 어조였다. J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초승달 모양으로 곱게 접혔다.
“암굴쿤도 선수 하면 잘할 텐뎅.”
“크하하하하! 두말하면 잔소리다! 부인의 명예를 드높일 기회가 없어 아쉽군!”
J가 이번에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시커먼 남정네들보다야 역시 J 쪽에 더 구경하는 보람이 있었다. 이후에도 암굴왕의 눈길은 선수들보다는 J에게 자주, 오래 머물렀다. 까짓 공놀이—J가 엿듣는다면 발칵 성을 낼 평가일지도 몰랐다—에 이렇게나 마음 쓰는 J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하고.
인생에 행운이 얼마나 쌓이고 쌓여야 이런 이를 감히 부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윽고 스타디움 조명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새삼스레 까만 밤하늘과 대낮처럼 휘영청 밝은 구장 안을 둘러보던 암굴왕은 옆구리를 쿡 찔리고는 J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의 끝나간당.”
한 손에 과자 부스러기를 탈탈 모은 J가 말했다. 고개를 꺾으며 부스러기를 입 안에 털어 넣자 흰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오르내렸다. 그에 맞춰 암굴왕도 심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피곤하진 않나?”
“으응, 다 이겼으니까 뭐.”
역전의 가능성은 없을 만큼 점수가 벌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암굴왕은 씩 웃었다. 한 경기를 다 보고 나자 그도 이 스포츠가 돌아가는 방식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 참이었다.
J는 헤헤 상큼하게 웃더니, 돌연 표정이 어두워졌다. 암굴왕이 살피기도 전에 J는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혹시 재미없었어용?”
그 말에선 규칙도 모르는 경기를 몇 시간씩 보게 한 데 대한 미안함이 약간, 병아리 눈물만큼 약간 실려 있었다. 암굴왕은 주변을 살핀 다음 J의 어깨를 옆으로 감싸 안으며 당겼다. 그리고 빨간 모자 위에 한 번, 동그란 귓바퀴 위에 한 번 빠르게 입을 맞추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대로.
뽀뽀 두 번으로 대충 넘어갈 생각은 물론 아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경기, 낯선 음식. 접해 본 적 없으나 그의 부인의 것인 문화. 그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디는 것이 재미있지 않을 리 없었다. J의 귓가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그는 웃으며 속삭였다.
“아주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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