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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눈물의 흔적

나우플리온 드림 | 삐쭈 님 커미션 :)

rhindon by 댜

늦저녁 찾아온 손님은 S가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익사형은 신속하게 집행되었었지만, 소문의 속도는 그보다도 빨랐다. 마침 모르페우스의 연구실에 들렀던 S는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서 사정을 분별해 냈다. 온 섬을 들었다 놓은 화재 사건이 곧 막을 내릴 모양이었다. 그것도 퍽 극적인 형식으로.

그러나 S는 익사형을 구경하러 가지는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나우플리온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그가 직접 소년들의 등을 떠미는 건 아닐지언정 이 일이 누구의 책임인지는 분명했다—본 적 없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S는 사형 장면을 굳이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대신 S는 집으로 돌아가 문간 등잔에 기름을 채워 넣었다. 해가 지기 전부터 심지에 불을 밝히고 기다렸다.

그가 올 확률은 절반 남짓이리라 생각했었다. 오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런다면 적어도, 그가 그리 많이 괴로워하지는 않았다는 뜻일 테니.

이런 식의 기대는 늘 빗나가기 마련이었다.

익숙한 노크 소리에 열어준 문밖에는 두 손을 양 뒤로 모아 쥔 나우플리온이 서 있었다. 밝은 등잔 빛 아래 드러나 표정은 조금은 참담했고, 조금은 평온했다. 붉어진 눈가에 퍼석한 흰 자국을 매달고서 그가 불렀다.

“S.”

S는 담담히 말했다.

“일찍 왔네요.”

“그래.”

그 이상의 해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문간에 한 손을 짚은 채 S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주 당연한 말밖에 꺼내지 못할 때가 있었다. 망설인 끝에 S는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울었구나, 당신.”

나우플리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S의 손끝이 눈물 자국에 닿았다. 말라붙은 소금기가 손길이 스치기 무섭게 부서져 떨어졌다.

문득 가슴이 미어졌다.

강인함은 대가를 치른다. 나우플리온, 당신은 당신 심장을 파먹으며 냉엄한 가면을 붙들고 있어.

“S. 내가…… 이곳에서 평화로울 수 있을까.”

나지막한 물음에 S는 답하지 못했다.

그는, 나우플리온은 실은 무결하지 않다. 그가 거둔 목숨 가운데 검의 사제의 권위 없이 빼앗은 게 얼마나 많던가. 또 검의 사제가 지닌 권위는 과연 살인을 변명할 만큼 정당한가. 다만 핑계를 댄다면 그 역시 생명을 걸었노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전사로서는 자신의 목숨을, 검의 사제로서는 그 개인의 삶을.

그러니 그의 눈물은 죄책감이 아니다. 아마 후회도 아니리라. 을 집행하는 것으로 그는 무고한 두 사람의 복수를 대행했고, 아끼는 소년을 다시 한번 보호했다. 그는 그가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며 그의 의무는 마땅했다. 다만 그는…….

선택권이 주어졌더라면, 나우플리온은 어린 소년들이 잔혹해지지 않는 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들이 잔혹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을. 하나 그것은 나우플리온도, 검의 사제도 이뤄내지 못할 꿈이었다. 갑갑한 심정은 쌓이고 차오르다 마침내 조금은 스며 나가고 만다. 바람 한 자락에 말라 버릴 만큼, 딱 그만큼만.

S가 한참 주저하자 나우플리온은 시선을 떨구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고 가도 되겠어?”

비교적 쉬운 질문이었지만, 이번에도 S는 바로 승낙할 수는 없었다.

“다프넨은?”

다프넨은 홀로 두지 못할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나우플리온 없이 집을 지킨 적도 이미 몇 차례가 넘었다. 하지만 이런 날에는 스승이 함께 있어야 하지 않으려나, 그가 그토록 아끼는 소년은 아직 어른도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나우플리온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니, 혼자 있는 게 더 괜찮을 거야. 그 녀석 앞에서 내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명색이 스승인데.”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래요?”

“이미 보였어.”

한 손을 든 나우플리온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놓았다.

“그러잖아도 들킨 것 같거든. 매정하던 놈이 손을 다 잡더라고. 위로받았나 봐, 나. 하지만 그 이상은 얻어서도, 바라서도 안 되니까.”

이해했다. 그들이야말로 어느샌가 정말 어른이 되어 버린 까닭에.

혼자 사는 집에 침대는 하나뿐이었기에 나우플리온은 자연스럽게 집 한구석의 장의자를 차지했다. S가 여분의 담요를 찾는 새 나우플리온은 의자에 구겨 누워 몇 마디 쓸데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더니, 담요를 꺼낸 S가 돌아보았을 때쯤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하루의 피로가 꽤 쌓였었던 모양이었다.

발소리를 죽여 나우플리온의 곁에 이른 S는 조용히 담요를 덮어주다가 멈칫했다. 감긴 눈언저리에는 눈물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S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울었구나, 당신.

가만가만 마른 눈물을 털어낸 S는 나우플리온의 뺨에 한 손을 얹은 채 침묵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나우플리온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S가 본 적 없는 바는 아니었다.

대륙에 나간 첫해, 렘므를 떠돌던 중 그들은 운 나쁘게도 용병 몇과 잘못 엮였다. ‘이실더 산’을 잡겠다며 죽자 살자 쫓아오던 자들이 사냥감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그자들을 가볍게 처리했다. 지켜보는 쪽에서는 적들이 나뭇가지를 든 다섯 살배기 어린애들로 여겨질 만큼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였다.

그래서였을까, S는 섬에서 자란 나우플리온이 살인에 익숙할 리 없음을 간과했다.

인적 없는 숲길 옆으로 구덩이를 판 다음 시체를 겹겹이 쌓은 위로 흙을 덮을 때까지, 나우플리온은 제법 태연해 보였다. 보는 눈이 있어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때 그는 이미 검의 사제였으니 자신이 S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무덤을 완성하고, 피에 젖은 검을 집어 들었을 때 나우플리온은 순간 휘청거렸다.

이유가 명백하지는 않았다. 칼날에 언뜻 일련의 글자가 드러난 듯도 했다. S가 다가가야 할지, 모르는 척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나우플리온은 소맷부리로 검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흰 옷소매가 진득한 피로 얼룩지는 것쯤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나우플리온.’

S는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무래도 걱정이 앞섰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나우플리온에게 몇 발짝 다가선 S는 나우플리온의 팔에 한 손을 얹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흠칫 놀란 시선이 S를 내려다보았다.

그때도 나우플리온은 울고 있었더랬다. 소리 없이, 표정 없이. 차오른 눈물이 딱 한 방울 뺨 위로 넘칠 그 정도로만.

그 이후로 S는 단 한 번도 나우플리온이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몇 번 더 사람을 죽여야만 끝나는 사건에 휘말렸을 때도, 치료제를 찾는 일이 점점 가망을 잃어갈 때도, 나우플리온은 어찌 보면 태평하고 어찌 보면 무신경한 자세를 견지했다. 처음의 눈물을 보지 못했더라면 S는 나우플리온을 아예 울 줄 모르는 사람으로 여겼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울 줄 안다.

검의 사제, 달여왕의 복수자. 이 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인 나우플리온은 동시에 누구에게도 애도 받지 못할 소년들로 인해 아무도 모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의 책임이 아니되 그가 책임져야 할 잔인함에 고통받는 사람이다. 젊을 적 이름 모를 먼 땅의 사람들을 죽이고 괴로워했듯이.

이제 달의 섬 어느 외딴집에서 S는 고개를 숙여 나우플리온의 눈꼬리에 입을 맞춘다. 생각한다. 당신의 이 슬픔 또한, 오래전 예비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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