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ia ‧ fulfilled
나우플리온 드림 | 삐쭈 님 커미션 :D
프로아울리아
섬의 혼례는 겨울에 치르는 것이 전통이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백금빛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은 나우플리온은 조심스레 은으로 된 가위를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S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몽글몽글하게 솟아올랐다. 늦은 오후의 하늘은 희끄무레했지만, 눈이 내릴 날씨는 아니었다. 서늘한 바람만이 제단 앞에 선 네 사람을 휘감고 돌았다. 한 쌍의 약혼자와 두 증인을.
그에게도, S에게도 부모가 없었으므로 그 역할을 대행하는 것은 데스포이나와 모르페우스였다. 어찌 보면 이 자리에만 세 사람 반의 사제들이 서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의식 자체는 누구나 치를 수 있는 것이었다. 순례자들이 달의 섬에 도착해 ‘혼례의 제단’을 세운 이래 줄곧 그래 왔을 터였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제단은 혼례 전날의 연인들과 혼례의 증인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나우플리온이 제단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때는 자신이 증인으로서 이곳에 서게 되지 않을까, 백일몽 같은 상상을 떠올려 본 적도 있었지만……. 그때 그는 자신의 생이 제자가 결혼하는 것을 볼 만큼 길게 이어지지는 않으리라 알고 있었으므로 그건 말 그대로 헛된 꿈이었었다.
이 자리에 그의 제자는 없다. 그 아이를 두고 자신이 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자리에서는 데스포이나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는 괴물의 심장이 붙여준 목숨을 곧 쪼개어 넘기려 했다. 신성한 맹세와 인간의 의식으로.
서걱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나우플리온은 쥔 머리카락을 제단 위, 이미 올려진 머리카락에 겹쳐 놓았다. 희다시피 한 금빛과 갈색이 뒤섞였다.
머리카락 양옆으로는 부러진 목검 자루와 말린 약초 다발이 찬 바람을 맞고 있었다. 유년기의 끝을 알리는 봉헌물들이었다. 섬사람들이 대개 그러듯 어린 나이에 식을 치렀다면 좀 더 그럴듯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도, S도 쓸모없어진 것들을 오래 간직하는 성품은 아니었다. 더 유의미한 것이 남아 있었다 해도 S는 그걸 달여왕의 제단에 바치지는 않았을 테니,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나우플리온은 말 없이 S의 손을 잡았다.
“이로써 옛 삶에 작별을 고하며 새로운 결합을 맞이하니.”
모르페우스가 먼저 의식의 말을 읊자 입가에 미소를 띤 데스포이나가 다음 마디를 받았다.
“여왕이시여, 청하건대 굽어살피소서.”
가모스
혼례 당일은 의외로 그리 분주하지 않았다. 공회당에서 치르는 예식은 전날 봉헌 의례와 같이 늦은 오후로 예정되어 있었고, 덕분에 S는 모르페우스와 함께 이른 점심을 든 후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태평한 척 중얼중얼 잔소리를 늘어놓던 모르페우스는 성장을 도우러 온 여인들이 도착하고서야 집을 비워 주었다.
어쩐지 아직도, 곧 결혼한다는 실감은 잘 나지 않았다.
대륙의 몇몇 왕국과는 달리 섬의 혼례복은 크게 화려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S는 흰 치마에 꽃문양 도금된 허리띠를 둘렀다. 곧잘 부스스해지는 머리카락은 향유를 발라 땋고 곱게 틀어 올렸다. 누군가 가져온 분함을 열어 이마와 입술에 투명한 연고 같은 것을 문질러 주었다. 엷은 라벤더 향이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말없이 손길만 놀리던 사람들은 얼마 안 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과 S는 사적인 질문을 나눌 만큼 친분이 깊지는 않았기에 화제는 날씨라든지, 마을의 아이들 정도로 한정되었다. 이상하게 S는 이런 한담이 별로 싫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야 적응했는지도 몰랐다. 이십여 년 넘는 세월이 흘러서야 이곳을 받아들일 마음이 들었는지도.
말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가는 사이 어깨 위로 월백색 케이프가 덮이고, 머리에는 화관이 씌워졌다. 금제 테두리에 생화를 엮고, 사프란으로 물들인 면사를 늘어뜨린 관은 오직 혼롓날 신부만이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면사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S는 묘한 감상에 젖었다. 무게를 알 수 없을 만큼 얇은 면사가 드리워지니 시야가 온통 금빛이었다.
손목에 잘랑거리는 팔찌를 채우고, 땋은 머리 사이사이로 남은 꽃을 고정했다. 발에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단화가 신겨졌다. 일어서자마자 S는 다리가 저려 비틀거렸다. 팔꿈치를 잡아 지탱해준 여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해, 네레이데.”
“……고마워. 이피.”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S의 어깨 너머로 다른 사람들과 시선을 맞췄다. S가 이름을 기억했다는 데 놀란 모양이었다. 스콜리 시절 이피는 물론 다른 또래 아이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적이 꽤 있었던 S는 면사 아래로 뺨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마친 S가 공회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짧은 해가 공회당 지붕에 걸려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구운 고기 냄새가 슬슬 풍겼다. 가혹한 계절이었으나 혼례 연회만은 어느 정도 예외였다. 양을 잡고 오래 아껴둔 술 부대를 여는 날이었다. 하지만 연회가 시작되기 전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었다.
어느 틈에 나타난 모르페우스가 S를 공회당 뜰로 이끌었다. 뜰을 가득 메운 채 웅성거리던 하객들은 신부의 등장에 하나둘 조용해졌다. 하지만 S가 관심을 둘 바는 아니었다.
종이와 리본으로 만든 화환이 내걸린 나뭇가지 아래, 섭정을 대행하는 리리오페와 검 ‘우레의 룬’을 찬 나우플리온이 서 있었다. 당연하게도 S의 시선은 나우플리온에게 이끌렸다. 금테가 둘린 흰 튜닉에 녹색 로브를 걸친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섬에 중요한 예식이 있을 때마다 보아 왔으니까. 하지만 이날, 몇 단 땋아 묶은 장발은 금제 장식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머리 위에는 S가 쓴 것과 비슷한 화관이 얹혔다. 왼쪽 관자놀이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줌은 눈에 띄게 짧고 끝이 들쑥날쑥했다. 전날 S가 잘라냈던 곳이었다.
면사에 가로막혀 S의 눈길을 보지 못했을 텐데도, 나우플리온은 S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시원하게 접히는 눈매가 준수했다. 곧이어 나우플리온은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여 불렀다.
S.
모르페우스를 남겨두고 뜰을 가로지른 S는 나우플리온의 곁에 섰다. 어리긴 어렸어도 벌써 몇 번 혼례를 집전해 본 리리오페는 두 사람을 앞두고도 당당하게, 또 너그럽게 웃어 보였다. 옛일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가 오히려 좀 아이 같았지만, 감히 그 점을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 짓궂은 나우플리온마저 혼롓날 험한 농담을 할 엄두는 못 냈는걸. 대신 리리오페가 엄숙하게 축복을 내리는 동안 둘은 소맷자락을 사이에 두고 손등을 맞댔다. 리리오페가 말을 마칠 때쯤 S의 손가락은 이미 나우플리온과 단단히 얽힌 뒤였다.
“이제 두 사람은 달여왕의 눈 아래 신성한 혼약을 맺었음을 선포하노라. 나우플리온, 네레이데, 두 사람의 앞날에 축복 있을지라.”
마지막 음절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우플리온이 손을 들었다. 노란 면사가 걷히고, 비로소 S는 나우플리온과 눈을 마주쳤다.
“네레이데.”
조금 전과는 달리 섬사람의 이름을 부른 나우플리온은 손마디로 가만히 S의 턱을 받쳐 올렸다. S는 옅게 웃었다. 지금이구나, 하는 자각이 마음속에 이슬처럼 맺혔다. 당신과 결혼하는구나.
이곳에 당신과 마주 서기 위해 아주 오랜 길을 돌아서 왔다. 노을빛 속에서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 순간을 위해. 단둘이 대륙에 발을 디디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셀 수도 없는 날과 밤이 흘렀고 슬픔과 행복이 뒤섞여 지나갔다. 죽음의 목전에서 기적처럼 발길 돌린 사람, 나의 항해자.
“나우플리온.”
그리고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숙여 S와 입을 맞추었다.
연회는 해가 저물고도 한참을 이어졌다. 악기를 가져온 사람들이 내내 경쾌한 춤곡을 연주하는 동안 섬사람들은 오랜만의 경사를 떠들썩하게 즐겼다. 추운 밤도 별다른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주인공 두 사람이 앉은 단상 위로는 축하 선물이 하나둘 쌓이고, 화롯불은 힘차게 타닥거리며 공회당 안을 밝혔다. S마저 주변에 휩쓸려 나우플리온과 한 곡 춤을 추었을 정도였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취한 것처럼 기분 좋게 어질어질했다.
뜻밖의 인사도 하나 있었다. 나우플리온이 젊은이들 몇 명에게 둘러싸인 사이 누군가 S의 팔을 건드렸다. 소란스러운 연회 가운데 홀로만의 고요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이솔렛? 왔구나…….”
크지 않은 목소리는 소음 속에 반쯤 묻혀 버렸다. 사르륵 웃은 이솔렛은 한 손바닥을 입가에 대더니,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결혼 축하해요.”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한순간 S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리리오페를 찾아 고개를 돌렸던 S가 다시 이솔렛이 있던 자리를 보았을 때, 이솔렛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하지만 왠지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도, 근거도 모를 막연한 믿음이었다.
사람들을 떨치고 온 나우플리온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서야, S는 자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깨달았다.
마침내 혼례 행렬이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데스포이나의 눈치를 받은 나우플리온은 S를 일으켜 다시 문으로 향했다. 기쁨에 겨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천천히 가자는 말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S는 못 이기는 척 나우플리온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우플리온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공회당 밖, 나우플리온의 집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열을 맞춰 일렁거리는 불빛 사이사이로 꽃잎 바구니를 든 하객들이 늘어섰다. 피리와 나팔, 작은북 소리가 점점 높게 차올랐다.
나우플리온은 S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검은 밤, 주홍빛 횃불, 흰 미소. S는 나우플리온의 손바닥 위로 제 손을 얹었다.
“갈까?”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가자.”
에파울리아
청명한 겨울 아침이었다. 먼저 깨어난 나우플리온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에 몇 번 눈을 껌벅이다가, 곁에서 뒤척이는 몸짓에 슬쩍 웃어 버렸다. 잠결에 찡그려진 얼굴이 평소보다 유독 부드러워 보인 탓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시트 위로 흐트러진 백금빛 머리카락을 피해 일어나 앉았다. 혼례 다음날은 가족과 친지들이 찾아와 다시 한번 축하를 건네는 날이었지만, 둘에게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모르페우스도, 데스포이나도, 이미 둘에게 할 말은 모두 다 건넸다.
그러니 이 아침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S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넘긴 나우플리온은 허리를 숙여 S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잔 것은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침대에 이불 도둑을 들인 듯했다. 두꺼운 이불을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채 웅크린 S는 여전히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뱉고 있었다. 꼬리를 말고 잠든 고양이 같아 사랑스럽기도 하고, 조금 괘씸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돋은 나우플리온은 S의 귓가를 어루만지던 손끝을 세웠다. 귓바퀴를 살살 간질거리자 S가 작게 칭얼거렸다.
“S.”
작게 불러 봤자 S는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좀 더 대담하게 S의 귓불을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잔머리가 손에 잡히는 감촉이 좋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일부가 나머지보다 눈에 띄게 짤막한 것도. 나우플리온은 웃음을 참으며 S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눈 좀 떠 봐. 언제까지 잘 거야?”
“조금만 더……. 나우플리온?”
눈꺼풀이 느릿느릿 접혀 올라갔다. 아침 빛을 받아 수선화 빛깔로 변한 눈동자가 나우플리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은 생을 함께할 단 하나뿐인 반려. 문득 가슴을 채우며 밀려드는 충족감에 나우플리온은 씩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 S. 오늘 날이 아주 좋은걸.”
앞으로 늘 그러겠듯이.
※ 결혼 예식은 고대 그리스 전통 혼례와 달의 섬 파트(실버 스컬, 정화 의식)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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