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설 샘플 3
1차 GL 1000자 오마카세
세상은 언제 붕괴 직전에 이르렀었냐는 듯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야속한 평화는 너를 포함한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너의 데이터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너를 기억하는 것에만 많은 힘이 들었다. 온 신경을 기울여도 안개처럼 흩어지려는 네 모습을 모으기 위해 나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그 덕일까. 원체 잘 잠들지 못했던 내 꿈에 언젠가부터 네가 나오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우리는 가본 적도 없는 드넓은 평원에 단둘만 존재했다. 붕괴의 조짐도, 오류도, 게임 속에서 주어진 사명도 없이. 우리는 평범했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진짜 평화라고 느꼈다.
이건 네가 나에게 남긴 선물일까? 고문처럼 느껴지기만 했던 취침시간을 이제는 달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맑기만 한 정신을 흩뜨리고, 한기가 드는 고요한 방에 홀로 누워 눈을 감았다.
네가 보인다. 꿈은 반복할수록 명확해졌다. 처음엔 맑은 하늘, 평원, 따사로운 햇살 정도만 느껴지던 배경은 이제 평원에 가득 핀 꽃과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새, 하늘에 가끔 떠가는 구름의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다름 아닌 너였다.
처음엔 희뿌옇게만 보여서 인식만 겨우 가능했던 너는 선명해지는 배경과 함께 뚜렷해졌다. 하늘거리는 옷, 내가 잡아당기기도 했던 복슬거리는 귀, 벌꿀이 한 방울 떨어져 고인 것 같은 자색 눈,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몸짓. 머릿속에 희미하게 돌아다니던 너의 단편이 뇌리에 박혔다. 너구나. 정말로, 너였구나.
그러나 달아 보였던 꿈은 야속했다. 차라리 너인 것을 인식하지 못했더라면, 닿지 못해서 감질나지는 않았을 텐데. 항상 앞서서 넘어질 듯 걸어가는 네 손을 잡으려 할 때마다 깨어났다.
어떻게 하면 닿을 수 있을까?
그 궁리를 하느라 NPC로서의 일은 잠자리에 수월하게 들기 위한, 몸을 좀 더 피곤한 상태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의무적으로 수행하는 업무를 끝마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애초에 이 꿈이란 건 무엇일까. 이것도 데이터에 지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이제 네 데이터는……. 사실 나도 오류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의식은 가라앉다 못해 마음 기저에 존재하는 감정의 수면을 향해 추락한다. 고작 물웅덩이에 지나지 않아 보였던 것은 충돌과 함께 그 깊이를 실감하게 된다. 내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너라는 존재. 그를 실감하며 나는 평소보다 빠르게, 깊게 잠들었다.
꿈엔 역시나 네가 나왔다. 따듯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 맑은 하늘, 사방에 핀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 그리고 너, 베로니카. 귀를 팔락거리며 뛰어가는 네 머리칼은 햇빛을 받아 눈부셨다.
넘어질까 천천히 가라고 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서 신이 난 네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빨리 올라오라며 나를 재촉하는 탓에, 꿈인데도 역시 네 무릎이 까질 것이 걱정되어서, 나는 깨어날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저 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쉽지만, 오늘도 즐거웠어. 기다리라며 너를 불러세우고 성큼성큼 발을 옮겨 네 가느란 손목을 쥐려 했다. 눈을 감고, 순순히 깨어나길 기다린다.
“……?”
몸에 실리는 무게는 틀림없는 네 것이었다. 햇살 아래서 같이 따듯해진 네 체향이 훅 끼친다. 반복되던 꿈의 연장선에 놀라서 눈을 뜨려다, 다시는 이 꿈을 꾸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확신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너를 마주 끌어안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보고 싶었어요. 이 체온을, 향기를 느끼고 싶었어요. 다시는 당신이란 존재를 떠올리지 못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중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며 몸을 떨었다.
“……고마워요.”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이곳에 불고 있는 부드러운 바람 같기도, 유유히 날아가는 작은 새의 날갯짓 같기도 했다. 가까웠으나, 멀었다. 나는 어쩐지 이것이 꿈이 아니라, 정말로 네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이라고 느껴졌다. 입술을 꽉 물며 너를 놓칠세라 꽉 끌어안았다. 주먹 사이로 네 옷이 구겨졌다. 너는 내 귓가에 작게 웃었다. 곧바로 부서질 듯이.
햇빛이 강해지는 듯하더니, 모든 공간의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흰색의 공간에서, 너만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제야 눈을 뜨고 네 모습을 보았다.
“사랑해요.”
지금이 아니면 전하지 못할 말. 나는 멀지 않은 이별을 직감하고 모든 감정을 갈무리해 빠르게 내뱉었다. 넌 내 말을 듣고 눈을 접어 웃었다. 울음을 겨우 참고 있는 듯한 얼굴. 내 표정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사랑해요…….”
그 말을 끝으로 너는 내 품에서 멀어졌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커튼 사이로 보이는 여명은 새벽임을 알게 했다. 맑은 날씨에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네 웃음소리로 가득한 따스했던 꿈과는 달리 현실은 어둡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네가 없었다.
몇 번이고 꿨던 꿈인데, 깨어나서 눈 한번 깜빡이자마자 희미해져 간다.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져 간다.
그런데도 여전히 귀에 맴도는 네 말이 있었다.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는 너를 생각한다. 비가 오려는지 열어둔 창문으로는 습기를 머금은 풀 냄새가 났다. 찬 공기 속에선 기억이 휘발되어 나온 탄내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날이 완전히 밝으면 나는 여느 때처럼 나가서 플레이어를 마주하고, 주어진 업무를 수행해야겠지. 다만 지금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너를 그리고, 기억하고,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나만은 온전하게 너를 기억할게. 꿈에서 겨우 참았던 눈물이 왈칵 나왔다. 쌀쌀한 날씨와는 다르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뜨거웠다. 네가 나에게 남겨준 온기일까. 그를 바탕으로 네 미소와 우수에 찬 눈빛을 떠올리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담아서. 차라리 내가 대신 삭제되었다면, 혹은 삭제되어야 했던 것이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더라면, 하는 이기적인 가정도 해보면서. 나는 감정의 웅덩이를 착실히 비워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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