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샘플

일반 소설 샘플 2

2차 GL 6000자 오마카세 (2021년 작업)

집안, 별 볼 일 없음.

실력, 특출나지는 않음.

제과제빵과에 재학하다 2학년에 자퇴 후 음대 진학.

바이올린은 어릴 때부터 했지만, 지속적인 교육은 받지 못함.

서류로 보는 사람은 얄팍한 종이 한 장이었다. 실력이 특출나지 않다고 되어있지만, 지원 프로그램 대상으로 선정될 정도면 웬만한 실력은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면 달라질 서술이었겠지. 그런데도 문서에 써진 사람의 실력은 가능성을 배제한 저 한 줄로 끝나있다. 은파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들춰보던 서류를 덮어 옆에 대충 던져놓았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더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회장의 말에 혹해서 약속을 잡아버렸다. 적당히 해서 적당히 치워야지. 생각은 그렇게 해도 성격상 그리 둘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창해의 지원 프로그램에서 저는 포기했던 음악을 시작하고, 꿈을 바라볼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기악과에 진학하여 저처럼 어쩔 수 없이 음악을 포기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들을 위해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꿈, 미래. 자신은 일찌감치 포기한 것들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지. 자기는 그래, 돈이라도 있지만 이 사람은 그 돈도 없었다.

억지로 떠맡은 회사 일이었어도,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올라 제 이름을 톡톡히 알렸다. 그렇지만 성취감은 없었다. 그냥 빨리 끝내고 회장의 얼굴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싶을 뿐이었다.

약속 시각 정시가 되자마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은파는 숨을 몰아쉬며 제 앞에 앉은 사람보다 옆에 기대놓은 바이올린 케이스에 먼저 눈이 갔다. 상대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아. 연습실에 다녀오느라……” 하며 뒷말을 붙였다.

“그래요. 연나랑 씨? 만나서 반가워요. 창해 이사 이은파입니다.”

“네, 네? 아, 안녕하세요. 연나랑, 입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자마자 건네지는 말에 당황해서 바보 같은 대답을 한 것 같아 나랑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든지 말든지 은파는 한결같이 무심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무관심해 보였지만 찬찬히 나랑을 뜯어보고 있었다.

창해의 이사면서 악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서보는 것을 상상해보는 클래식 콘서트홀, ‘마루’의 사장. 젊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자기보다 어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은파는 처진 눈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사업은 인상이 좋은 사람이 해야 한다더니 그에 들어맞는 얼굴이었다. 나랑은 멍하니 은파의 얼굴을 구경하다 왜 그렇게 보고 있느냐는 시선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에 다니다 자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당시에 어떻게든 대학은 나오고 취직해야겠다 싶어서 들어간 대학인데. 하고 싶은 건 따로 있고, 적성에도 안 맞아서 버티다 그만뒀죠. ……그, 그때 마침 창해의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운이 좋아서… 덕분에 음대에 다니게 됐네요….”

나랑은 뒷말을 붙이고 후회했다. 너무 아부하는 것 같잖아. 사실만 말한 거긴 하지만. 실제로도 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바이올린은 팔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파는 나랑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냉수가 든 컵을 들이켰다.

“연나랑 씨. 면접 보러 온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운이 좋았다는 건, 저희 쪽에서 사람을 대충 뽑았다는 겁니까?”

본래 은파의 성격을 생각하면, 얌전히 집안의 사람들 뜻대로 기업에 몸담아 기관을 굴리고 있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억지로 만든 기적을 계속 유지하려니 온몸에 좀이 쑤시는 것이었다.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고. 아랫사람들에 분풀이 하고…… 근데 그 사람들은 전부 회장이 감시하라고 심어둔 거니까 괜찮지 않나.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이 답답한지 은파는 넥타이를 끌렀다. 자신의 행동과 표정, 입에서 나오는 말 한 음절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랑의 기분은 전혀 모른 채.

“그, 그게… 아니. 아뇨!! 잘, 잘 뽑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창해의 지원 프로그램이 있단 걸 알게 된 게 운이 좋았다고요!!!”

나랑은 은파가 그럼 홍보팀이 홍보를 안 했냐고 할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은파는 뭐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려온 이유도 몰랐다. 창해의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했으나, 정확히는 창해 소유의 예술기관에서 지원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유주는 은파였다. 제 돈줄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자길 만나자고 했다.

“사실 뭐든 상관 없어요. 오늘 제가 연나랑 씨를 찾아온 이유는 마루에서 연주해주길 바라서예요.”

창해 소유 문화예술기관, ‘마루’. 은파는 이 이름이 지어졌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앞으로도 마음에 들 생각도 없었다. 처음 이름이 써진 종이를 받아들었을 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어차피 곧 다 털어낼 것인데 뭔 상관이겠나 싶어 받아들였다. 유명한 점집에 가서 떼온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촌스럽지 않나. 건물 이름이 아니라 강아지 이름을 받아온 것이 아닐까. 창해가 바다니까 이번 것은 하늘이어야 균형이 맞는다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듣는 것도 머지않아 끝난다. 이번 일을 하면, 이번 일만 하면.

괜히 화가 끓어올랐다. 점점 험악해지는 얼굴을 보고 나랑이 불안해하자 은파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이름부터 별로인 곳을 세계 최고로 끌어올린 것은 은파의 특출난 사업 수완 덕분이었다.

“제, 제가요?”

“네.”

“저는… 그렇게 큰 무대에 서본 적이 없는걸요……?”

그리고 그곳은 이름에 맞게 음악의 정점에 선 사람들만 서는 무대가 아니던가. 아무리 창해와 연줄이 있다고 해도 보잘것없는 실력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 메인홀 말고 가장 작은 곳에서 할 거예요. 100석 정도 되겠네요.”

아니, 수용인원이 문제가 아닌데. 나랑의 생각을 읽은 듯, 은파가 말을 이었다.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식의 무대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클래식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창해에 어떻게든 연줄을 붙여보려 억지로 앉아있는 거라…….”

“그럼, 대충 하라는 건가요?”

“대충할만한 실력이 있긴 한가요? 그냥 오늘처럼 열심히 연습 하시고, 무대 올라서, 박수 받고 내려오면 끝입니다. ……그럼 끝이에요.”

맞는 말이지만 나랑은 어딘가 분했다.

사장은 저런 말을 하면서 왜 씁쓸한 표정을 짓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이 마루에 발을 올리는 것이 그리도 싫었던 걸까.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는 사람엔 나랑만 있는 게 아니었고, 나랑은 제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운 좋게’ 수혜자가 된 것이라고 여겼다. 굳이 자신을 택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받아서 그런 걸까, 제 앞에 있는 무표정의 사람이 제 연주를 듣고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스토리를 좋아하죠. 그래서 지원 프로그램을 만든 거고……”

“…….”

달라진 나랑의 태도에 은파가 말을 멈췄다.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늘어놓았나. 나랑의 눈치를 보는 자신에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이런 적 없었는데. 상대는 기업의 총수도 아니고, 제 기업에서 하는 자선사업의 수혜자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조심스러워지는 것인진 모르겠다.

“저는 사장님 같은 재벌 사업가가 아니라서 그런 거 얘기해주셔도 모르거든요.”

“……네?”

“지금 제 실력은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지원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전 적성에도 안 맞는 제빵사가 되었겠죠.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감사하고 있어요.”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낼 만도 했는데 나랑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은파는 나랑과 같은 사람이 부러웠다. 정확히는, 부러웠었다.

부모님도, 부모님의 부모님도, 친척들도. 전부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은파도 그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악기를 접했으나 영 소질이 없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엔 흥미가 없었을 뿐더러 싫은 건 금방 던져버리는 성격도 한몫했다. 어릴 때 멋모르고 부쉈던 악기들은 열 손가락을 꼬박 넘었다. 하나하나 전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장인이 만든 것들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다.

은파는 다른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기관을 세울 수 있었다. 원래도 집안에 휘둘릴 성격은 아니었으나, 이젠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를 위해 이번 일을 무사히 마치고, 믿을 만한 사람한테 인수인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리고 뭐 하지…….

미래는 깜깜할 뿐이었다. 세계 여행이나 갈까, 역시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악기에 서툰 어린 자신이 있었다.

얼마나 갈궜으면 아직도 그 일이 생각나는 거야. 악기를 부숴도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 결핍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던 거고. 스스로도 재능이 아쉬웠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말 그대로 쥐뿔도 없는 주제였다. 상대는 제 창창한 미래를 위한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사람인데도, 연나랑은 이은파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은파는 몸에 힘을 풀고 의자에 기댔다. 우위는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듯한 태도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할 텐데. 일부러 물어보는 것은 은파 나름대로 상대를 돋구려는 것이었다.

“대충할 생각 없어요. 제 미래를 위해서라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아……”

나랑은 심호흡을 두어번 했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은 은파를 향하고 있었지만, 몸은 떨고 있었다. 무리하면서도 대드는 모습이 퍽 흥미로웠다. 지금껏 만난 사람들은 전부 제게 잘 보이려 되지도 않는 아부를 떠느라 제 생각은 제대로 펴지도 못했는데.

“사장님 눈엔 제가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최선의 결과를 낼게요. 원하시는 것처럼.”

“……연나랑 씨는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꾸밈없는 사실이었다. 나랑은 그마저도 꼬아 들었지만.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은파는 뒷말을 덧붙였다.

“멋있단 뜻이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삭막하기만 하던 마음속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말이 좀 까칠하게 나간 것 같긴 하지만, 보여주기 무대라고 해도 일단 마루에 오르는 아티스트니까. 저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요.”

“예? 그럼……”

“연나랑 씨, 따로 레슨 받을 시간 있나요? 없어도 만들어주세요. 연습실 같은 다른 것들은 전부 제가 부담할 테니까 시간만 내주시면 돼요. 저도 같이 있을 거예요.”

흥미가 생겼다. 대충 하고 끝내도 됐는데, 그러기엔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나랑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은파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레슨? 그것도 창해그룹에서 직접 마련해주는 개인 레슨? 받고 싶어도 못 받는다는 그거? 마루 대표도 함께?

나랑은 잠시 아까 제 태도를 떠올리고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유순하게 굴 걸 그랬나. 만약 그랬다면 은파는 절대로 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저야 뭐, 정말. 너무 좋죠. ……좋아요.”

“그럼, 됐어요. 나머지 전달할 사항 있으면 제 쪽에서 먼저 연락 하겠습니다. 음식 곧 나올 테니까 드시고 가세요. 여기 맛있거든요.”

“네……”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자길 바라보는 나랑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은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그리고……”

은파가 어딘가 수줍게 망설이는 것 같은 건 나랑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나랑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서류 보니까 연나랑 씨가 연상이길래. 이제 자주 보게 될 거잖아요. 은파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에…… 아뇨. 그건 좀……”

“헐?”

은파는 체면도 뭣도 잊고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얼굴은 토끼같이 생겨서, 아까부터 자신을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왜, 왜요!”

은파는 나랑의 앞자리에 도로 앉았다. 나랑은 순식간에 바뀐 은파의 모습이 낯설었다. 아까까진 엄청난 사업가였는데 지금은 철없는 어린애 같았다.

조금 귀여울지도. 놀리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서 나랑은 최대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장님인데…… 그렇게 불렀다가 저 잘못되면 어떡하려고요.”

“누, 누가 잘못되게 한데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이 일만 끝나면-”

“끝나면……?”

“아, 아무튼. 나랑 언니라고 부를 거예요. 창해 이사이자 마루 사장으로서, 연나랑 씨의 후원자로서 말하는 거예요. 당분간은 계속 볼 텐데 호칭부터 딱딱하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나랑 언니도 저 은파라고 불러주세요. 아무튼 편한 걸로……”

최대한 언짢고 확고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한계였다. 은파의 고개가 숙어져 거의 테이블에 닿을 것 같았다. 나랑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말은 좀 그러니까, 은파 씨라고 부를게요… 일단은.”

은파는 여지를 남겨주는 말에 은파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드는 것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라고, 나랑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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