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설 샘플 1
2차 GL 5000자 오마카세 (2021년 작업)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찍어 내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하나의 가림막도 없이 푸른 하늘에선 양광이 쏟아져 내렸다. 밖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득하게 보였다.
카페 안엔 소수의 사람만이 있었다. 에어컨 소리와 유리잔의 얼음이 녹아내리며 부딪히는 소리, 책장을 팔락거리는 소리와 연필 소리,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어우러졌고, 이따금 신경질적으로 벡스페이스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자연스레 몰려오는 졸음을 깨주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제 연인이 내고 있다는 것도 츠구미는 알았다. 손님도 없으니 한 곳만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된다.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내온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밑바닥을 드러내었다. 보는 사람에게 시원함을 불어 넣어주는 청록색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잠시 자판에서 손을 떼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일어나서 물기가 가득한 컵을 가지고 츠구미가 있는 곳으로 왔다.
“똑같은 거로 부탁해요.”
“사요 씨…… 벌써 석 잔째예요…….”
“하지만…….”
사요는 눈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 아래에 내려온 그림자는 그녀가 며칠이나 밤을 새웠는지 알려줬다. 츠구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요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먼저 전화든 문자든 했는데, 이번 일주일간은 통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츠구미는 사요를 방해할까 봐 답장하지 않아도 될 문자만 보냈었다. 그러다 주말이 되고, 오픈 시간에 맞춰 사요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찌는 날이었다. 보통은 집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요가 집 앞 카페를 놔두고서, 더위를 뚫고 저가 있는 카페를 찾아왔다. 그런 세심한 행동에서 느껴지는 상냥함을, 츠구미는 사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그간의 고생을 말해주듯 푸석해져 있었다. 그 후로 고작 몇 시간 흘렀을 뿐인데, 사요는 그때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몇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빈 속에 총 샷 네 개가 들어간 커피를 들이켰다. 츠구미가 가져다준 케이크도 한 귀퉁이만 파여있었을 뿐 거의 손대지 않았다. 츠구미가 사요 뒤의 테이블을 치우며 사요와 씨름하고 있는 모니터를 훔쳐보니, 흰 화면이었다.
“……사요 씨. 밖에 나가지 않을래요?”
“네? 밖에…… 더운데요……”
“일기예보 보니까, 곧 흐려질 거래요. 사요 씨 지금까지 열심히 하셨으니까, 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츠구미의 말에 사요는 살포시 웃었다.
“하자와 씨가 그렇게 말하니, 신선하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제가 사요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
“아…….”
애정표현은 여전히 서툴다. 사요는 여전히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츠구미는 이런 말 하는 것에 조심스러웠다. 홍조를 띄운 채로 시선을 피하는 사요를 보다 츠구미는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떠올리고 같이 얼굴을 붉혔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사요 덕분이라는 말은 삼킨 채.
“알겠어요. 그럼 그전까지 커피 한 잔만 더……”
“절대 안 돼요.”
“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모습이 귀여웠다. 처음 봤을 땐 그저 차갑기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정하고, 유한 부분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요에게 고백받은 곳도 이 카페였다.
사요가 졸업하기 전, 눈 오는 날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겐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나 다름없었으나, 마감 시간의 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없던 낭만도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마침 밤이었고,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궂은 날씨 때문에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눈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히터를 틀어 놓았지만, 사람이 없어 조금 쌀쌀했다. 감기에 들까 걱정됐지만 좋았다. 오늘은 왠지 낭만이 있는 밤이니까.
츠구미는 가끔은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즐겼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조차도 열심히 한다고 하겠다.
서늘한 공간에 이따금 불어오는 히터 바람은 온기와 함께 졸음까지 가져다주었다. 턱을 괴고 잠시 졸고 있을 때였다, 문에 붙어있는 수수한 디자인의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츠구미는 화들짝 깨며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에, 사요 씨!?”
“하자와 씨……”
사요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신발 뒤축은 구겨져 있었고, 아무렇게나 접힌 바짓단은 축축했다. 걸친 회색 카디건의 어깨도 젖어있었고, 앞머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먼지 한 올 붙어있지 않은 평소의 단정함과는 정반대였다. 츠구미는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앞치마가 테이블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사요에게 달려갔다.
“사요 씨? 무슨 일이에요! 우, 우선 이쪽으로……”
츠구미는 사요의 우산을 받아 우산꽂이에 대충 꽂아 넣고 사요의 어깨를 감싸 제가 앉아있던 자리로 데려갔다.
사요는 말없이 츠구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한 채.
츠구는 서둘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순백의 유리잔에 내려 사요 앞에 내려놓았다.
무언가 말하지 못할 일이라도 있으신 걸까, 문득 떠오른 의지할만한 사람을 찾아 눈발을 헤치고 엉망이 되어가며 달려온 걸까.
안쓰럽고도, 사랑스러웠다. 사요가 그렇게 달려온 사람이 자신이라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린 그저 아는 사이일 뿐이니까.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도 가슴 안쪽은 찢어지고 문드러졌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사요는 츠구미가 내온 커피잔 표면을 양손으로 잡고 엄지로 쓸었다.
“커피…… 싫어하세요?”
츠구미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조용해서 이대로라면 사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갈까 봐 빠르게 머리를 굴려 낸 말이었는데. 안 마신다고 타박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사요와 얘기하고 싶었고, 이렇게라도 사요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왜? 모르겠다. 날씨 때문일까, 조금은 감정적으로 굴고 싶었다.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저 어깨에 손을 뻗어볼까, 망설이면서도 다가간다.
“좋아합니다.”
무엇을? 츠구는 자신이 한 질문도 잊고 갑자기 더워졌다. 자기만 있던 공간에 사람이 더 들어와 그런지. 커피머신에서 나는 열기 때문인지, 히터가 이제야 제대로 돌기 시작한 건지. 근무 시작 때부터 두르고 있던 앞치마가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불편해졌다.
아. 정신없이 내리느라 그냥 아메리카노로 드렸는데, 다행이에요.
머리에선 이미 문장이 만들어졌지만, 뱉기가 싫었다.
사요는 여전히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머리로 가려진 청록색의 처연한 눈은, 유독 불타고 있었다.
“……저도, 좋아해요.”
사요는 츠구미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안았다.
이건 커피 얘기였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이대로 좋았다.
“아까보단 많이 시원해졌네요.”
“그러게요.”
츠구미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자 하늘에 서서히 구름이 끼었다. 소파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상태로 다 읽고 올려둔 책 귀퉁이가 녹은 얼음이 든 유리잔 때문에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지루하게 밖만 응시하던 손님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가게 안은 그날처럼 츠구미와 사요. 둘만 남았다.
“오늘은 일찍 마감할까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에요! 늦게 마감해서 좋은 날도 있었으니, 빨리 마감하면 또 다른 좋은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요?”
어릴 때부터 해오던 일이다. 능숙하게 마감을 마친 츠구미는 제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요의 손을 끌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문에 걸린 팻말을 뒤집는 것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둘은 무작정 그늘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가자고는 했으나 사요의 기분을 환기해줄 만한 어떠한 묘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둘 다 알고 있었다. 츠구미의 존재 자체가 사요에게 있어서 좋았으니까. 츠구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적당히 그늘진 벤치에 앉았다. 서로 닿는 온기가 더 더울 텐데도, 벤치 끝에 드는 햇빛을 피한다는 핑계로 붙어 앉았다. 두 손은 여전히 마주 잡은 채로. 대화는 오가지 않아도 손을 통해 오가는 온기가 좋았다.
더운 날이었다. 덕분에 이 시간대면 항상 붐비던 공원엔 사람 하나 없었다. 사요는 고개를 돌려 츠구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좋아졌다. 카페에서 모니터를 노려볼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 온갖 불신과 혐오가 쌓일 정도였는데. 저 여름 하늘처럼 맑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일주일간 붙잡고 있던 레포트의 마무리를 순조롭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요의 시선에 츠구미도 고개를 들어 사요를 바라보았다. 한겨울의 냉랭함 같다고만 생각했던 사람의 녹아내린 초라한 고백이 생각났다.
“……사요 씨.”
츠구미는 무더위 속에 걷느라 젖은 사요의 목덜미를 잡아 키스했다. 닿은 몸 때문인지, 그 때문에 간지러워진 가슴 때문인지, 여름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더웠음에도 싫지 않았다.
사요와의 키스는 상냥하고, 다정했다. 절대로 츠구미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그 배려심을 사랑하나, 오늘은 이대로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츠구미는 뒤로 물러나는 사요에게 몸을 붙이며 다시 혀를 밀어 넣었다. 사요는 잠시 당황하는 듯싶다가 츠구미를 끌어안으며 그에 응했다. 충분할 정도로.
“하아……”
서로의 숨소리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깊게 숨을 나누었다.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앞머리는 이마에 아무렇게나 붙어있었고, 옷도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것 역시, 좋았다.
사요의 제안으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카페로 돌아왔다. 빨리 녹는 바람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다.
사요는 테이블 위의 꺼진 노트북을 보고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는 개운했고, 이대로라면 레포트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요는 노트북을 덮고 츠구미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하자와 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사요는 츠구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다 끌어안았다. 츠구미는 사요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겨울도 이 자리에서였다.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감정은 생생했다. 한여름인데도 창밖에 눈이 궂게 내리고 있다는 착각까지 일었다.
낭만은 눈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온 것이었음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사랑해요, 사요 씨.”
낭만이 깃들어있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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