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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more, with feeling

어두운 충동 × 카를라크 | 탁 님 커미션 :3

rhindon by 댜

 

“우리가 해냈어, 솔져. 이제 도시는 괜찮을 거야.”

붉은 석양이 아득히 지고 있었다. 나루터 끝에서 카를라크는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급히 달려온 동료들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던 중 비로소 카를라크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를 보았다.

“너도 그렇고.”

불길이 솟구치기 전에도 그는 이미 사태를 짐작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야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간절히 열망해 왔던 순간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어찌 모르겠어? 손끝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번지는 이 따가운 희열을?

화염 속에서 카를라크가 주저앉았다. 그는 허겁지겁 카를라크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카를라크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일일이 셀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카를라크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더니 씩 웃었다.

“심장이 마침내 망가졌나 봐. 딱 맞게 버텼지. 어때? 나…… 어땠어?”

넌 어느 모로 보나 장관이었어.”

“너도야, 내 친구. 내 동료. 널 지극히 아껴.”

어깨에 손이 얹혔지만, 그보다는 가슴을 쿡 찌르는 그 말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불꽃이 솟자 카를라크는 손을 떼며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조심해. 뜨거워.”

그랬다. 카를라크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열기는 어느새 주변의 공기를 덥히고, 그에게까지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것을 감각하고 싶었다.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뇌리에 똑똑히 새겨넣고 싶었다.

“난 포기하지 않았어. 최선을 다했지.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이건 내가 이겨낼 수 없는 단 하나지, 안 그래? 난 살고 싶었어. 내 도시에서, 내 친구들과 함께. 하지만 삶이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거야. 그리고 난…….”

으윽, 카를라크는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제 화염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카를라크의 곁에 남아 있었다. 오히려 다가가야만 했다. 석양에 비친 카를라크의 모습에 아무리 눈이 부시더라도…….

“눈 똑바로 떠.”

뜨거운, 지나치게 뜨거운 손끝이 그의 눈가에 닿았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젠장, 일평생 그렇게 많은 사람을 찢어발겼으면서 이건 왜 몰랐을까? 가장 나약한 근육이 바로 그의 눈 둘레에 있었는데. 생리적인—정말로 생리적일 뿐인, 그래야만 할—반응으로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똑똑히 봐.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 내가 그랬지.”

카를라크가 웃고 있었다. 아득히 흰 웃음이었다.

“좋아, 솔져. 약속했잖아. 누구도 잊지 못할 노래로 남겨 주겠다고……. 난 준비됐어.”

덜덜 떨리는 숨.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손. 그는 이를 악물고 열기를 견뎠다. 여기까지 와 놓고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잖아?

“안녕, 태양아. 안녕, 바다야. 잘 있어……. 난…… 난……. 물러서, 난 이제…….”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불길이 작열했다. 얼굴을 덮치는 화염을 앞두고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지켜봐 주기로 했으니까, 노래로 남기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끝의 끝에서야 마침내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면, 그건 오직 그의 작업을 위해 한쪽 시력이나마 보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불이 핥고 지나간 자리대로 살갗이 화끈거렸다.

그대로 엎어진 그는 일어서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폭발이 잦아들고 게일과 자헤이라가 달려들어 그를 끌어냈을 때, 그의 얼굴은 화상과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하늘을 보았다. 노을빛 붉은 수평선과 하염없이, 속절없이 흩날리는 흰 먼지를.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이럴까.

 

 

바알의 신전에서 야영지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고, 지난했다. 도착하자마자 침낭에 드러눕거나 아예 땅바닥을 구르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머릿속이 누가 손을 뻗어 헤집어 놓은 듯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바알의 의지에 맞섰다.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스스로 저지른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말을 지어내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역시나 광인은 자신의 광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인 모양이었다. 이유를 들라면 못 들 것은 없었다. 이 모든 사건을 아우르는 간명하면서도 통쾌한 해명이 불가능하단 게…… 문제였다.

모든 발상에는 중심이 있다. 적어도 그 중심에 손가락을 짚기는 어렵지 않았다. 카를라크의 존재는 어딜 가나 불꽃처럼 두드러졌으니까. 자, 그럼 단어를 문장으로 만들 차례.

 

나는 내 타오르는 전사를 위해 아비를 거역했네.

 

멋진 도입부다. 웬만한 발라드에 비견될 만해. 나무줄기인 듯 뻣뻣하던 두 다리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 폴짝 뛰듯 걸었다가, 들리지 않는 박자에 맞춰 기우뚱기우뚱 걸어 나갔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못돼먹은 놈, 배신이라니

그러고도 얼굴 들고 살 줄 알았나?

노래 하나에

삶을 팔았지

이 정도면 어딜 보나 남는 장사야

 

아냐, 이건 좀 경박하고.

 

그게 내 장미가 아니란 걸 알아요

꺾었다간 아버지가 경을 칠 것도

하지만 뭐 어쩌라고? 수정 붓고 금실 매어

미운 녀석 무덤에서 춤을 춰야지

 

—같은, 개구쟁이 시골 소녀의 노래가 대충 어울릴지도 몰랐다. 오린은 미운 녀석이라고만 치부하기엔 꽤 위험한 상대였었지만. 카를라크의 취향도 사실 어려운 서사시보다는 꼬맹이들이나 부를 장난스러운 민요나, 주제라곤 애인 가랑이 아니면 짬밥뿐인 군가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야식 먹을 때쯤 불러주면 좋아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잠깐. 그러자면 가사가 곤란한걸.

이런 얘길 대체 어딜 가서 할 수 있겠냔 말이다. 내가 알고 보니까 바알의 자손인데, 너무너무 보고 싶은 죽음이 있어서 아버지와는 냅다 의절을 해 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걱정되더라, 심장 하나 터지는 걸 놓치지 않겠답시고 이래도 되는 걸까? 후회하긴 좀 늦었긴 한데, 그리고 어쨌거나 난 전설 중의 전설로 남을 노래를 짓긴 해야겠는데…….

“미친놈.”

희극적인 독백을 혼잣말 한마디로 끝맺어 놓고서 그는 후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당장은 공책을 펴 끄적일 시간도, 공중을 떠다니는 영감에 헛손질할 기력도 없었다.

“뭐야, 누가 미친놈이야?”

“카를라크?”

상상 속 ‘소녀’의 역할에 조금만 더 심취했었더라면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도 남았을 터였다. 불쑥 다가온 카를라크는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더 캐묻지는 않으며 그저 씩 웃었다. 송곳니가 드러났다. 환하기는 했지만 피로를 감추지는 못하는 미소였다.

“아까는 얼른 쉬어야겠다면서, 솔져. 영원 같은 하루였잖아! 피곤하지도 않아?”

“그렇지.”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알아.”

엘더브레인인지 네더브레인인지, 그것만 쳐부수면 모든 게 끝이었다. 기생체에서 완전히 해방될 날도 머지않았다. 그럼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그와 음악만이 남겠지. 이후의 일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가 쫓을 다음 목표는 지금 그의 눈앞에서 웃고 있었으니.

때마침 지축이 뒤흔들렸다. 그는 카를라크에게 마주 웃어준 다음, 카를라크 곁을 지나쳐 침낭을 펼쳐둔 곳으로 향했다.

“그래, 쉬자. 내일이 결전의 날이니까.”

 

 

공교롭게도 그는 한 번에 원하던 두 가지를 모두 이루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발더스 게이트에 머물렀다. 재건을 돕는다거나 동료들 곁에 함께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대신 그는 엿새쯤 매일같이 엘프의 노래 주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시끌벅적한 소음 한복판에서 텅 빈 백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종이 위로 잉크 방울이 떨어지면 흠칫 정신을 차렸다가, 더러워진 페이지를 뜯어낸 다음 새 종이 위에 펜을 올리고는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화려한 시상이건 교묘한 악상이건 좋았다. 단 한마디, 단 한 소절이라도 좋으니 쓸 것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어쨌거나 시간은 많았고, 최상의 영감은 이미 얻었다. 일주일째 되던 날 화상 치료를 끝낸 그는 엉망이 된 도시에서 용케 작업실로 쓸 만한 방을 빌렸다.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거리라 그런지 방음도 괜찮고, 빛도 꽤 잘 드는 곳이었다.

전투 이래 가장 기분이 좋아진 그는 짐도 풀기 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대로 공책을 펼쳤다. 오선을 그린 다음 거침없이 음표를 채워 넣었다. 아주 오랫동안 알고 있던 낯익은 음악을 이제야 되새겨 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 읽어본 악보는 황당했다.

“이게 아니야…….”

당연히 그런 기분이 들밖에. 이건 어렸을 적 물리도록 연습한 동요의 가락이었으니까.

그 뒤로도 그는 번번이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몇 줄을 쓰든, 옛 기록을 얼마나 뒤져보든,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을 칭송하고 시인들은 갖은 찬가를 지어내는데 오직 그만이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곡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도대체 왜?

그는 고블린 마을의 드워프 구이로도 노래를 지을 수 있었다. 알피라의 류트를 두고도, 하다못해 다람쥐 사체를 주제 삼아서도! 분명히 단언하건대 그는 페이룬 최고의 바드는 아닐지언정 죽음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전문가였다. 그가 다루지 못할 죽음이 있음을 어떻게 인정하겠나?

최악은 페이지를 뜯고 뜯다 못해 꽤 두툼했던 공책의 뒤표지를 맞닥뜨린 날이었다. 표지 안쪽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삐걱 일어섰다. 그리고 잡화점에 들러 공책 한 묶음과 잉크병 한 상자, 여분의 깃펜 보따리를 사 돌아왔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맙소사. 한 번 더 동행이나 할까 싶어 와 봤더니, 위대한 영웅께서 폐인이 다 되셨군.”

문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퍼뜩 펜을 멈췄다. 돌아본 곳에서는 자헤이라가 그 냉정한 낯짝에 드물게도 연민을 띄운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긴 문을 따는 데 썼을 가느다란 쇠막대가 두 손가락 사이에 달랑거렸다.

“꺼져.”

그는 으르렁대듯 말했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좀 더 차분히 덧붙였다.

“작업 중이잖아.”

“네더브레인과 함께 버르장머리도 수몰해 버린 모양이지? 카를라크 녀석, 새파랗게 어렸을진 몰라도 대단한 전사였어. 그 애가 네 이 꼴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 같나?”

“내가 기껏 죽어줬는데 넌 곡 하나 못 짓는 거야? 솔져.”

그는 카를라크의 말투를 흉내 냈다. 자헤이라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건 너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가?”

“……내 생각을 탐지한 거야?”

작업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촛불과 기름을 다 써 버린 지도 좀 되었지만, 잉크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굳이 상점까지 다녀올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으니까. 그 어스름 속에서 자헤이라는 표범 같은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널 위해서 하는 충고다. 이만 정신 차려.”

“헛소리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자헤이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항의였다. 제대로 저항할 의지도, 재주도 없던 그는 얼떨결에 멀끔히 씻겨진 다음 말안장에 얹혔다. 자헤이라가 가는 대로 이끌리다 보니 어느새 낯익은 얼굴들 틈바구니였다. 그래 살아는 있었냐며 안도하는 옛 동료들에 끼여 그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누가 편지를 보냈었는데. 내가 버렸었지…….

파티는 끔찍했지만, 적어도 좋은 술은 넘쳤다. 에스멜타르 적포도주 한 병을 낚아챈 그는 되는 대로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이름도 모를 신인지 뭔지가 연주하는 음악 따위 듣기 싫었다. 동료들의 주제넘는 걱정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듣고 싶은 음성,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여기 없었다. 시신도 남기지 않고 불타 사라져 버렸다.

시냇물을 건넜는지, 불구덩이를 짓밟았는지 모르게 걷던 그의 앞에 난데없이 길쭉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떴다. 이건 낯익은 얼굴이랄 수는 없고. 낯익은—

“해골바가지?”

“위더스요.”

“어어, 위더스.”

자신이 망가져도 끔찍하게 망가졌다는 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멀쩡한 상태에 대한 욕구도 마찬가지로 없는데 그런 데 신경 써 봐야 뭣 하겠어. 그가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만 있자, 위더스는 갖고 있지도 않은 뇌로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다시 말했다.

“아직도 슬퍼하는군. 누구보다 담대했던 그는 이제 이곳에 없다오. 용감한 카를라크 생각을 많이 하셨소?”

그는 칼에 찔린 듯 움찔했다.

“다시 데려올 수는 없어?”

“오지 않을 것이오.”

“카를라크가 사라지니 세상이 온통 잿빛이야.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입안에 쇠 맛이 감돌았다. 언제 혀를 깨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위더스가 겉치레일 게 뻔한 말을 하는 동안 그는 영 넋을 놓았다가, 말을 멈춘 위더스가 그를 묵묵히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리고서야 느리게 중얼거렸다.

“이젠 내가 노래할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의 영혼은 방랑계의 신들조차 눈을 가려야 할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소이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변화하고, 하나가 되는 법.”

역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힘들어져 자제력을 잃었던 모양이지…….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물드는 시야에 불쑥, 뼈뿐인 손이 나타났다. 위더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는 다시금 그와 함께하게 될 것이오.”

 

 

그는 불타는 노틸로이드 한복판에서 눈을 떴다.

왜 하필 여기인지, 이 시간인지 고민해볼 여유는 없었다. 그는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힌 채 움직였다. 살점 덩어리 문을 여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리고 레이젤을 마주치고, 괴물들을 처리하고, 섀도하트인지 하는 여자를 구하고…….

온 세상이 혼돈이었다. 조종실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머리가 어지러워 차라리 떼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조종간 앞에 다다랐다.

다시 암전.

이렇게 정신을 잃어 가다가는 신기록이라도 세울 듯했다. 스물네 시간 내 얼마나 자주 기절할 수 있는지라던가……. 뒤이어 그가 인지한 것은 낯익은 해변이었다. 벌떡 일어선 그는 휘휘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너무 급히 몸을 일으킨 탓으로 곧장 다시 쓰러질 뻔했다. 핑 도는 시야에 휘청거리다 이마를 짚자, 얼굴이 온통 무언가에 젖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땀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마 피는 아니겠지?

다음 순간 손바닥에 거칠한 감각이 느껴졌다.

목덜미가 오싹했다. 그는 노틸로이드에서는 화상을 입지 않았다. 설령 저도 모르는 새 불길에 데였다 한들, 이렇게 빨리 상처가 아물고 흉이 질 수는 없었다.

더듬더듬 얼굴을 매만진 끝에 흉터의 가장자리를 얼추 가늠한 그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익숙했다. 흉터의 존재도, 그 위치라든지 감촉도, 심지어는 이렇게 손을 들어 흉터를 매만지는 동작까지도.

행여나 하는 의구심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그게 반 남짓 믿음으로 바뀐 것은 섀도하트와 마주친 뒤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어떤 문제가 숨어 있건, 일리시드 기생체보다 우선순위에서 앞서지는 못했다. 동시에 그는 이상한 허전함을 느꼈다. 머리에 든 게 올챙이뿐이라니. 십 년 만에 돌아간 고향 술집에서 소꿉친구 둘을 만나기로 했는데, 둘 중 한 명만 나타난 데다 다른 하나는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랄까.

이건 그치고도 기이하게 구체적인 비유였다. 운 좋게도,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내는 데는 사기꾼 지망생 백발 엘프가 딱이었다. 바위에 박힌 손모가지라면 멋진 덤이었고.

통행료 징수소 문을 무턱대고 열어젖힌 다음에야 불현듯 그는 떠올렸다. 여기, 전에 와본 적 있었다.

동료들이 당황스레 소리치는 것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그는 무작정 검을 빼 들었다. 팔라딘 흉내를 내는 놈들을 베어 넘기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단지 나직한 잡음일 뿐이던 기억이 순간순간 소리를 키우더니 숫제 관현악단의 합주로 변했다. 그는 시체를 뒤져볼 생각도 않고 도로 징수소를 뛰쳐나갔다.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해졌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곳이 있었다.

외나무다리 건너, 카를라크를 처음 마주했던 바위 절벽.

주문에라도 걸린 듯 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오래전 올라왔던 길을 이제는 반대로 거슬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카를라크를 보면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길은 너무 짧았다.

뿔 하나뿐인 티플링을 휘감으며 지옥의 불길이 타올랐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다시 보기 위해서라면 제 심장을 값으로 치르더라도 좋았을 광경이었다. 그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머뭇거리다가,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물에 처박힐 뻔했다.

누군가 외쳤다, 조심해.

그 한마디에 불길이 잦아들었다.

“뭐야, 너잖아.”

카를라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어질 대사를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었다. 오래전 이날, 야영지의 모닥불 빛에 기대 한 자 한 자 적어 넣었던 말들이었다.

“노틸로이드에서 봤지. 제발 내가 그 티르의 팔라딘 자식들보다 널 먼저 만난 거라고 해 줘.”

“내가 그 티르의 팔라딘 자식들보다 널 먼저 만났어.”

그 한마디를 태연하게 뱉는 데는 혼신의 힘이 들었다. 카를라크는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씨발, 농담도 잘하네!”

이건 어쩌면 신이 내린 기회가 아닐까. 저 만신전의 오만한 군주들도 알았을 테지, 그 부둣가에서 결말을 맞기에는 카를라크의 영혼이 너무나 고결하다는 걸! 이번에야말로 그는 이 곡을 다시 써낼 자신이 있었다. 가장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아니, 완벽이란 단어를 재정의할 형태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뭣부터 들을래?”

“난 좋은 소식을 사랑하지.”

그는 당장에라도 노래가 되어 터져나가려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나쁜 소식은 이거야. 우린 정말로 그 티르의 팔라딘 놈들을 먼저 만났거든. 잠깐, 진정해! 이제 좋은 소식을 말해 줄게. 그 자식들, 지금은 박살이 났다고. 자리엘의 하수인들은 이제 다신 널 못 건드려.”

일찍이 그가 카를라크의 말문을 막히게 했던 적이 있던가? 어안이 벙벙해져 그를 바라보는 카를라크에게 다가가며, 한때 바알의 따님이었으며 발더스 게이트의 구원을 불러왔던 자는 당당하게 양팔을 벌렸다. 자신이 또 한 번 전설을 자아낼 수 있으리란 데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으며.

“난 타브야.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내 타오르는 전사여.

※ 대사 일부는 게임 내 스크립트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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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라는 캥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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