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커미션: 240921 LT님
일단 "멸망" 하시오 글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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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 “서로를 향한 신뢰” 옵션, 공백 포함 7,598자.
〈황금나침반〉 시리즈 기반 자작 캐릭터로, 세계관 내의 고유명사와 설정이 일부 활용되었습니다. 원작과 무관한 일종의 2차 창작입니다.
신청자의 동의를 받고 전문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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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몸을 꿈지럭거렸다. 길쭉한 덩치를 깔끔히 구겨 넣기에는 엄폐물 삼은 책상 아래가 너무 좁았다. 다른 곳에 숨는 편이 나을까?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보려던 그는 번개같이 머리를 도로 집어넣어야 했다. 코끝을 스친 건 한기였는데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형태 없는 불길함 같은 것이 코앞의 허공을 쓸며 지나갔다.
데미안 던, 방년 25세.
그는 지금 텅 빈 런던에서 스펙터 무리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다.
데미안은 초짜가 아니었다. 준비도 없이 유령도시 한중간에 칠렐레팔렐레 기어들어 오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 최소한 평소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스펙터들이 나타난 지도 벌써 7년이었다. 살아남는 요령이라는 건 아무튼 오래 살아남다 보면 싫어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래, 하지만 인정하기는 해야 했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조심성이 부족했다는 걸. 근데 그게 내 탓이냐? 입 밖으로 뱉어 봤자 들을 건 배고픈 스펙터 무리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는 지금 일종의 충동적인 가출 상태였다.
짧은 순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데미안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박살 난 유리창이었다. 그는 파편에 찔리는 줄도 모르고 창틀을 타 넘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스펙터들은 외곽까지 잘 나오지 않는다든가, 애초에 유리를 깨고 들어올 필요도 없다든가. 그런 사실이 떠오르는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데미안은 낯선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지하에는 문이 두꺼운 창고가 있었다. 비상시에는 그 창고에 숨기로 약속했었다.
복도에는 흙만 남은 화분이나 쓰레기통, 캐비닛 따위가 엎어져 굴러다녔다. 데미안은 그 난장판을 짓밟고 내달리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낯선 남자가 멍한 눈으로 쓰러져 있었다. 걷어차이다시피 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창고 앞에도 한 명 더 보였다. 철문의 손잡이를 꼭 잡고 주저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문 자체가 우그러져 있었다. 몸을 살짝 건드리자 힘없이 쓰러졌다. 데미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손잡이를 당겼다. 찰칵. 열리지 않았다.
데미안은 손잡이를 다시 당겼다. 찰칵. 열리지 않았다. 더 힘주어 당겼다. 철컥.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아예 부술 것처럼 당겼다. 캉, 캉. 문이 다 흔들리도록 온몸으로 당겼다. 캉, 캉, 쾅, 쾅, 쾅, 콰드득. 마침내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창고는 비어 있었다.
테리. 데미안은 이름을 불렀다. 누나? 달릴 때보다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셴, 키아나! 여전히 낯선 발음도 소리 내어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데미안은 귀까지 울리는 심장박동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아닐 거야.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괜찮을 거야. 다른 곳으로 피한 거겠지. 그건 직감보다는 차라리 기원에 가까웠다. 어쨌든 데미안은 대답을 기다렸다. 영원처럼 기다렸다. 그리고,
“… 형.”
응답이 있었다.
데미안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달렸다. 복도 끝에 몸만 큰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테런스가 서 있었다. 야, 테리! 있으면 대답을… 말은 다 끝맺지 못했다.
“도와줘.”
의식을 잃은 셀리나가 그 등에 업혀 있었다.
두통과 함께 눈을 떴을 때, 셀리나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남정네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악!”
사실 질렀다. 이불도 집어 던졌다.
“아, 좀!”
“누나!”
이불에 습격당한 데미안이 휘적대는 사이 테런스가 셀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셀리나는 얼떨떨한 채로 토닥여 주다가 딱 세 번 만에 밀어냈다. 누나아… 테런스는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정신을 잃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어느새 이불을 치운 데미안이 다시 셀리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냐고 쏘아 주기도 전에 데미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셀리나.
“짐 챙겨. 이사 가라.”
테리 데리고. 셀리나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테런스를 보았다. 테런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다시 데미안. 파란 눈동자에 고집이 철철 흘렀다. 삼 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셀리나는 한 번 더 소리를 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이사 안건은 일단 보류되었다.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도 이제 안전하지 않다니까?”
“어디는 안전하니, 그럼?”
“적어도 코앞에 런던 있는 동네보다는 낫지!”
“형…”
“그러면 너도 가야지, 아니, 네가 가야지! 왜 우리만 가야 하는데?”
“그거야 당연히,”
“그래, 당연히 아직 챙길 애들도 있고 써먹을 물자도 많아서 그렇겠지. 그리고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겠지. 내 말 틀렸니?”
“아니, 맞아. 근데 그게 뭐 잘못됐냐?”
“잘못됐지, 성인만 잡아먹는 유령 소굴에 성인이 혼자 들락날락하겠다는데. 아, 혹시 너도 저것들이 못 보는 체질이었는데 내가 몰랐니?”
“누나…”
“그래서 누나는 괜찮다 이거야? 오늘 일이 스펙터 때문이었어? 세상에 위험한 게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아?”
“안 괜찮지, 안 괜찮은데, 그러는 너는…”
“안 괜찮다고 인정했네? 됐네. 이사 가라.”
“너 지금까지 대체 뭘 들은 거니!?”
대강 이런 말싸움이 끝없이 돌고 돌았다. 위험하니까 이사 가라, 그럼 너는 왜 남냐, 아직 할 일이 있다, 너는 안전하냐, 아닌 거 아니까 이사 가라… 그러다 갑자기 테런스에게 불똥이 튀었다. 테리! 테런스! 넌 어쩔 거야? 그러면 테런스는 곤란한 듯 시선을 돌리다가,
“난… 나도, 누나랑 같아. 아직은 못 떠나.”
그렇게 대답했다. 들었지? 결론 났어! 나긴 뭐가 나? 위험하다고! 그리고 다시 반복. 분노의 무한동력기관 같던 언쟁은 데미안이 홧김에 내지른 말로 끝이 났다.
“누구 하나 죽는 꼴 봐야 말 들어줄 거냐고, 그럼!”
말실수라는 건 명백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사과하지 않았다. 셀리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고, 테런스의 눈동자만 불안하게 오갔다. 먼저 몸을 돌린 건 데미안이었다. 저녁거리라도 찾겠다며 나갔다. 최소 사흘 치는 되는 식량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어떤 방해도 없이, 데미안은 어둑해진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가출하듯 뛰어나온 결과가 이 꼴이었다. 모든 게 완전히 엉망이었다. 불쑥 나타난 스펙터에 무심코 악! 소리를 질렀다가 온 동네 유령을 다 끌어모으고, 기껏 찾은 핑곗거리─통조림은 어디 떨궜는지 없어지고, 그새 해가 져서 길을 잃고, 쫓기다 발견한 건물에 슬라이딩해서 처박혔더니 자리가 너무 좁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한심한 작태였다.
꿈질거리기를 포기한 데미안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가책과 답답함이 숨에 뒤섞여서 흩어졌다. 머릿속에서 억울한 자아가 중얼거렸다. 나도 잘한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보게 해 놓고, 아무렇지 않기를 기대하는 거냐고. 잘한 건 아니지만… ‘하지만’을 몇 번이나 되뇐 뒤에야 데미안은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셀리나는 테런스가 잘 달랬을 테니, 다시 대화해 보면 될 것 같았다. 어느새 부자연스러운 한기는 가시고 밤공기만이 적당히 쌀쌀했다. 가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데미안은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공허를 마주했다.
데미안이 나간 아지트는 한동안 고요했다. 셀리나는 말없이 누워만 있었고 테런스는 셀리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꼬리를 불만스럽게 휘두르던 셴이 어느 순간 톡 내뱉었다. 짜증 나, 걔. 가차 없는 촌평에 풉, 테런스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곧 셀리나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웃고 싶으면 웃지 그러니.”
“아냐… 미안.”
“됐다, 얘.”
그런 셀리나가 평소처럼 침착해 보여서 테런스는 조금 안심했다. 누나가 곁에 있다. 단호하고 가끔 뼈아픈 말을 하지만 늘 현명한 누나가 무사하다. 새삼 되새긴 테런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이사 말이야.”
“…”
“형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잖아.”
7년은 길었다. 처음에는 잉글랜드에조차 발을 들일 생각을 못 하던 사람들은 조금씩 런던 근처를 기웃대기 시작했다. 스펙터가 도심에만 머무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돌아오는 이유는 제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착각을 했다. 런던 밖은 안전하다고.
낮의 침입자들도 같은 착각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다. 목적은 이제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은 운 나쁘게도 스펙터를 마주쳐 도망치다가 이 아지트를 발견한 것 같았다.
정신없이 달리던 그들은 우연히 현관 밖으로 나오던 셀리나를 마주쳤다. 겁에 질린 동물 특유의, 한계까지 벼려진 그들의 생존 본능이 외쳤다. 다른 미끼를 던져 주면 우린 살아남는다.
그들은 셀리나를 끌어내고 침입했다. 당연히 셀리나는 막아섰지만, 뒤엉켜 실랑이하는 사이 누군가의 발에 셴이 걷어차이고 말았다. 별 이유가 없으면 셴은 고양이 모습을 했고, 그때도 그랬다. 자신이 걷어차인 듯한 충격, 그리고 데몬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은 영영 알 수 없을 어떤 불쾌감과 함께 셀리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새 현관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뒤늦게 깨달아도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었다. 부탁이나 협상 대신 침입을 선택한 결과였다. 그들은 결국 창문을 깼다. 그곳이 잠깐의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기대하면서.
그들이 끝까지 알지 못했던 것은 ‘미끼’가 전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펙터는 셀리나도, 유리나 벽 따위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지나쳐 그들을 쫓아 들어갔다.
지하에 있던 테런스는 키아나의 경고를 들었다. 누가 들어왔어. 그는 곧바로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낯선 발소리가 테런스를 지나쳐 더 아래로 도망쳤다. 유령이 유유히 뒤를 따랐다. 안 돼, 밑엔 길이 없단 말이야.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경고하려는 테런스를, 키아나가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겨 말렸다. 작은 데몬은 가만히 고개를 젓고 속삭였다. 1층.
테런스는 소음을 내지 않게 조심하며 달려 올라갔다.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외면하고 달렸다. 현관 밖에 정신을 잃은 셀리나가 있었다. 스펙터가 셀리나를 노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테런스는 순간 숨이 막혔다. 그를 다잡은 것은 이번에도 키아나였다. 저쪽. 그제야 테런스는 셀리나의 뺨을 조심스럽게 핥는 까만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셀리나와 데몬들을 데리고 1층 가장 구석진 곳에 숨었다. 지하의 상황이 신경 쓰였지만 스펙터가 근처에 남아 있을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셀리나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좁고 불편한 캐비닛 안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테런스는 깜빡 정신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을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테런스는 온 힘을 다해 대답하며 캐비닛에서 기어 나갔다. 한달음에 달려오던 데미안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제야 그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눈을 하고 데미안이 멀거니 서 있었다.
그 순간 테런스는 절망이라는 말을 다시 이해했다.
그 눈을 떠올리며 테런스는 셀리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직 여기서 찾아야 할 게 있어. 형의 그런 눈은 보고 싶지 않아. 충돌하는 두 가지 마음을 두고도 셀리나라면 명쾌한 답을 내려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처럼 굴지 말고 하나만 고르라고 꾸짖을 것 같기도 했다. 현명하고 냉정한 금색 눈이 테런스는 오늘따라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그런 테런스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일식이 일어나듯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알아.”
“어?”
“나라고 모르겠니, 그 과보호 바보가 왜 그러는지.”
자기가 진짜 장남이라도 되는 줄 알아. 가벼운 불평까지 듣고서야 테런스는 셀리나가 웃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 그럼 어떡할 건데? 엄청나게 얼빠진 목소리가 나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 테런스가 물었다. 떠날 거야?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만은 없잖니. 그 정도는 알고 있어.”
“… 형을 두고?”
셀리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테런스를 쳐다보았다. 눈을 똑바로 보려고 애쓰며 테런스는 괜한 불안감을 삼켰다.
“우리 막내,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네.”
“대답해 줘.”
“그 바보가 혼자 남는 건 싫어, 그런데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애가 상처받는 것도 싫어. 그럼 답은 하나 아니니?”
셀리나는 눈이 테런스의 뒤쪽으로 향했다. 키아나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에 오토바이 키를 물고 있었다. 데미안의 키였다. 일어나, 테리. 셀리나가 쐐기를 박았다.
“갈 거면 그 바보도 같이 챙겨서 가야지.”
운전은 네가 해. 셀리나는 그 말만 남기고 휙 나가 버렸다. 아직 얼떨떨한 테런스를 향해 키아나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럴 거였으면서, 바보들.
데미안은 거리를 달렸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혹시 꼬맹이들이 봤나, 뭐라도 쥐여 주고 조용히 하라고 해야지… 위기가 너무 코앞이니까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만 났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하게 몰려다니는지, 따라붙은 유령은 어째 수가 점점 느는 것 같았다. 다리가 저렸다. 데미안은 안 그래도 뻐근한 폐로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 짜증 나! 텅 빈 도시에 메아리가 울렸고, 그리고,
“형!”
“데미안! 데미안 던!”
응답이 있었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달렸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아도, 폐가 터질 것 같아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튀어나온 오토바이에 성대하게 치일 뻔했다.
“악!”
“으악!”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왜 거기서 튀어나와!”
“됐으니까 빨리 타! 온다!”
핸들을 잡은 테런스가 소리쳤고, 그 뒤에 꼭 붙은 셀리나가 데미안을 끌어당겼다. 그가 올라타자마자 오토바이가 급출발했다. 몸이 뒤로 홱 젖혀지는 것과 동시에 데미안이 소리를 쳤다. 헬멧은!? 있겠니!? 비명 같은 셀리나의 외침을 엔진 소리처럼 남기며 오토바이는 텅 빈 런던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스펙터 무리가 보이지 않게 되고도 셋은 계속 달렸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나란히 저승길 가기 좋은 꼴이었지만 어차피 과적이든 과속이든 단속할 사람도 없었다. 맞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과로한 엔진이 울었다. 웬일로 날이 맑은지 머리 위에서 별이 반짝였다.
데미안은 길을 이끄는 테런스의 등을 보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손목을 꼭 쥔 셀리나의 손도 보았다. 뭐라도 말할까, 고민하는 사이 테런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형, 괜찮아?
할 말이 없었다. 발목은 쑤셨고 손바닥은 따끔거렸고 심장은 너무 빨리 뛰는 데다가 오토바이 하나에 셋이 탄 이 상황이 불안했다. 대답이 없자 테런스가 흘끗 뒤를 보았다. 데미안이 기겁을 했다. 야, 앞에 봐 앞에! 안전운전! 이렇게 타 놓고 그게 되겠니? 그냥 조용히 좀 해 주면 안 될까!? 셋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지쳐 입을 닫았다.
불쑥, 데미안은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왜 왔어?
“뭐?”
“왜 왔냐고!!”
“그러는 넌!!”
“어?”
“너는 왜 우리만 보내려고 했어!”
선명한 금색 눈동자가 어느새 데미안을 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다물었다.
“… 똑같은 거야.”
셀리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데미안이라면 이미 알아차렸을 테니까. 친절하게 알려줄 마음은 없지만. 셀리나는 입 모양만으로 덧붙였다. 하여튼 건방져. 그러자 얼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뭐라고? 인내심이 다한 셀리나는 더 예쁘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대신 소리를 쳤다.
“너 멍청이라고!!”
“뭐라고 했냐!?”
“이런 건 잘 알아듣네!!”
“아, 웃기지 마! 운전하고 있다고!!”
앞에 앉은 테런스의 등이 웃는 듯 떨리는 것이 전해졌다. 셀리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뒤에서 데미안이 뭐라고 소리를 치든 무시했다.
한참 뒤에, 셀리나는 등에 와 닿는 무게감을 느꼈다. 데미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 미안. 고마워. 자존심이 잔뜩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이제야 마음이 놓인 것 같기도 한 동생의 목소리를, 셀리나는 바람을 핑계 삼아 못 들은 척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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