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 順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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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언제나 똑같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날.

평소와 다름없던 시린 겨울바람이 어느새 한풀 꺾인 기세로 부드러운 봄바람을 불러와 뺨을 간지럽힌다든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뜬 달이 너무도 아름다워 걸음을 멈추게 된다든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 마음의 둑을 툭 터뜨려 다 드러내고 싶은 그런 날.

저택의 고즈넉한 정원에 앉아 향긋한 차를 사이에 두고 A와 담소를 나누던 S는 종종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리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었대도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보인 적 없는 진실한 미소가 절로 떠오르곤 했다. 작은 연못에 세워둔 소즈의 대나무 통에 물이 차고 떨어질 때마다 따악, 따악 듣기 좋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정원에 울려 퍼졌다. 봄바람을 한껏 머금었다가 천천히 내뱉는 S의 숨에서는 달큰한 꽃향기가 났다. 달을 등에 인 그녀가 A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자 그는 S의 따뜻하고 가느다란 허리를 안은 채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A씨.”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잠겨든 A는 두 눈을 감은 채 목을 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S는 그의 음성이 무척 좋았다. 혹자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침음 하는 걸 가지고 뭐가 좋은지 물을 수 있겠지만, S에게 그의 음성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제 앞에서 든든하게 막아줄 단단한 울타리 같이 느껴졌다. 제 유일한 안식처이자 평생 오로지 나의 편이 되어줄 사람. S에게 그런 사람이 바로 A였다.

“우리 결혼할까요?”

머리 위에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A의 입술에 그와 깍지를 껴 얽은 S의 손에 작게 힘이 들어갔다. A는 이 순간을 잊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 같은 것은 제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그 모든 다채로운 감정의 씨앗은 S라는 여자를 알게 된 이후로 척박하던 그의 마음에 싹을 틔웠다.

“네가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얼마든지.

설령 그곳이 지옥불일지라도 뛰어들겠다는 그의 말에 S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A씨를 그런 무서운 곳에 가게 할 리 없지 않으냐는 부드러운 음성에 A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려놓은 듯한 평화가 바로 이곳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순리

順理


세상의 모든 이치는 순리대로 흐르는 법이다. 달이 지면 해가 뜨듯이, 어딘가에서 사그라진 생명이 또 다른 곳에서 싹을 움 틔우듯이 A와 S의 결혼 역시 그들의 관계에 있어 정해진 순리와 같았다. 부푼 마음으로 받아들일 영원의 서약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과 같았다.

본디 차분하고 사적인 일을 떠벌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A와 S의 성정은 이런 중대사를 결정하고도 크게 들뜨는 법 없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이어갔다. 항상 함께하니 급할 게 없는 일이었다. 조직의 젊은 보스라는 입장 상 언제까지고 얘기하지 않을 셈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저 천천히 준비해 때가 되면 공표를 해야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다만, 과묵한 A라 할지라도 G를 비롯한 친지에게까지 말하지 않는 건 역시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모두 모인 식사 자리에서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S와 식을 올릴까 합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S가 이 집에 들어왔던 그날부터 이곳 모두는 그녀를 가족으로 생각했고 A의 하나뿐인 반려자의 재목이라 여겼다. S가 아니고서야 A의 곁에는 누구도 설 수 없었다. S를 유독 어여뻐한 G는 오래도록 기다려온 이야기에 내심 기쁜 눈치였다. 평소 점잖던 그가 식탁에서 연신 고개를 주억이고는 잘 생각했다며 몇 번을 되뇌자 S의 입가에 봄볕 같은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A가 식탁 아래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하게 퍼지는 그의 체온을 느끼던 S가 손바닥을 꼼지락거리며 빼내더니 손바닥을 휙 돌렸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맥박에 A가 속으로 얕은 숨을 삼켰다. 하마터면 이 손을 놓칠 뻔한 그날의 기억에 그의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도 행여 S를 아프게 할까 손에 들어가려는 힘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A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깊고 까만 S의 눈동자는 우주를 닮았다. 무수히 많은 별로 수 놓인 무한한 우주를. 사랑해. 입 모양으로 전하자, S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요. 귓가에 속삭이는 그 음성에 A는 마치 제 몸이 깊이 잠겨드는 듯했다.

조직원들에게는 결혼식 일자가 정해진 뒤에나 알릴 셈이었다. 본인만큼이나 S를 좋아하는 그들이 얼마나 난리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뒷좌석에 앉아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A의 모습을 룸미러로 흘끗 바라본 R가 “좋은 일 있으세요?”하고 물어도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A의 작은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순백색의 옷이나 화사한 꽃, 반짝이는 보석 따위가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S가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나?”하고 묻는 바람에 티가 안 날 수 없었다.

“결혼하십니까?”

L가 던진 발언에 R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제 보스를 살폈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아아. 그래.” 하며 마치 남의 일인 양 태연할 따름이었다.

“우왓! 드디어 결혼하시는 건가요! 역시 전통혼례로 하시나요? 크, 보스하고 형수님께서 전통복 입으신다면 진짜 멋있겠죠? 아! 그렇지만 하객 수가 많을 테니 조금 더 넓은….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 지은 호텔의 볼룸 홀이 좋다는 얘길 들었어요. 서양식도 좋겠네요. 아무래도 신부는 웨딩드레스라는 인식이 있으니까요.”

제가 더 신이 나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R의 옆에서 L가 이마를 짚었다. 시끄럽다는 L의 일갈에도 R는 이 좋은 일에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성화였다. 평소라면 반응조차 하지 않았을 A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모습을 보고서야 R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어졌다. 이토록 A를 웃게 하는 S의 존재가 고마우면서도 어서 두 사람이 정식 부부가 되어 조직을 굳건히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투지가 타올랐다. 제가 자나 깨나 조직 생각뿐이란 걸 아시긴 하실는지. R는 입맛을 쩝 다시고는 A보다 앞질러 가 사업차 방문한 기업의 문을 열어주었다. 전장으로 향하는 보스의 얼굴은 언제 부드러웠냐는 듯 다시금 카스가의 젊은 보스라는 냉철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였다.

*

길일을 잡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A의 일이 부쩍 늘었다. S에게 보다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주고 싶은 일념에 공격적으로 업무를 추진한 덕에 최근 카스가 가문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지기는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정작 가장 소중한 이와의 시간을 줄여야 했던 건 A로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2개월이나요?”

“음. 그쪽으로 넘어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 혼자 두게 되어 미안하군, S.”

뺨을 어루만지는 A의 손길이 퍽 부드러웠다. 해외로 2개월간 떠나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잠시 놀란 눈치였지만, 곧 짧게 고개를 저었다. A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그가 돌아올 이곳에서 그의 끝없는 애정에 둘러싸인 채 웃는 얼굴로 있는 것. 그로 인해 A가 행복할 수 있다면, S는 얼마든지 그의 ‘돌아올 곳’이 되어줄 수 있었다.

“괜찮아요. 나야말로 A씨를 혼자 보내서 미안한 걸요.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가 위험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내가 돌아왔을 때 반겨주면 좋겠군. 그거면 충분해.”

“알아요. A씨, 날 그만큼 사랑하니까.”

“떠나기 전에 밖에서 식사 하도록 하지. 좋은 가게를 찾아뒀어.”

“좋아요.”

생긋 웃는 얼굴에 A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 웃는 얼굴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즐거웠던 데이트를 마치고 A를 배웅한 S의 일상은 그저 조용하게 흘렀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한 번씩 흔들리는 고요한 호수처럼 느긋하고도 편안한 나날이었다. 향긋한 차로 하루를 시작해 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거나 R를 말동무로 산책길에 나서기도 하는 등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저 A가 곁에 없을 뿐인 일상은 어딘지 조금 지루하고 시계초침이 보다 더디게 흐를 뿐이었다.

A의 길었던 출장이 끝나갈 무렵, 하루하루 늦잠 자는 일이 많아지거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S의 모습에 R의 얼굴에도 근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붉은 태양이 아직 수평선 아래서 숨죽이고 있을 이른 아침에 기상하는 S의 생활에 맞춰 오전 6시면 별채까지 그녀를 마중하러 오는 R는 둥근 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눈을 뜨지 못하고 단잠에 빠져있는 S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최근 이런 일이 잦아졌다. 정오 무렵이면 점심을 마치고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좋아하던 그녀가 무려 좋아하는 차를 앞에 두고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S. S.”

S가 놀라지 않도록 작은 소리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살 흔들어 깨운 R가 마루에 앉아 제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베고 잘 것이 없으면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그녀는 낮잠을 잘 때면 언제나 A의 무릎을 찾았다. A가 없을 때면 아쉬운 대로 R의 무릎을 빌리곤 했는데, A는 그게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R를 꾸짖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S의 평안함이 우선이었다. 질투를 이긴 사랑에 R는 몰래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했다.

제 무릎을 베고 금세 수마에 빠져든 S의 얼굴을 걱정스레 내려다본 R는 품 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행여 그녀가 깰까 작은 소리를 냈다.

“예, 보스. R입니다.”

[S는?]

“지금 막 잠들었습니다.”

[…요즘 자주 피곤해하는군. 몸 상태가 좋지 않은가?]

“아픈 곳은 없어 보입니다만….”

[일단 끊도록 하지. S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하도록.]

“예, 보스.”

짧게 끝난 통화에 다시 자세를 갈무리하던 R는 가물가물하게 눈을 뜬 S와 시선이 맞고 말았다.

“일어났어? 더 자지 않고.”

“으응. 괜찮아. 방금 누구야?”

“보스셨어. 요즘 계속 통화를 못하네.”

R의 말에 S가 한숨을 폭 밀어냈다. 원체 휴대폰을 안 챙기니 종종 R를 통해 A와 전화하곤 했는데 최근 들어 A의 목소리 듣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다. 어긋난 시차에도 꼬박꼬박 짬을 내 전화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러웠지만, 어쩐지 자꾸만 쏟아지는 잠에 요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야?”

넌지시 묻는 R의 음성에 괜찮다며 몸을 일으키려던 S는 순간 위화감에 마루를 짚고 버텼다. 지구의 중력이 제 온몸을 잡아끄는 듯 무거워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휘청거리는 S를 재빨리 받아낸 R가 괜찮은지 묻는데도 S는 생각에 잠겨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무거운 몸에 S는 피곤할 만 한 일이 있던가 세어봤지만, 이렇다 할 근거가 잡히지 않았다.

‘가만있어봐.’

무겁다.

잠에 빠지려 돌아가지 않는 무거운 머리로 애써 기억을 되짚던 S가 별안간 쿵쿵 뛰는 심장에 살그머니 배에 손을 얹었다.

‘…생리를 왜 안 하지?’

S는 평소 주기가 일정하게 잘 맞는 체질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던 그녀는 칼같이 일정하던 생리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에 그간 자꾸만 잠에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빠, 나 잠깐 갈 데가 있어.”

R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하는 S의 말에 서둘러 그녀를 태우고 시내로 달렸다. 아기자기한 여성용품이 즐비한 드럭스토어에서 R도 오랜만에 나온 김에 본분을 잊고 쇼핑을 즐기는 사이, S는 딱 정해둔 게 있는 사람처럼 한 섹션에서 움직이지 않고 매대를 노려봤다.

제조사만 다른 동일한 품목을 쓸어담은 그녀는 집에 돌아와 봉투를 와르르 쏟아냈다. 임신 테스트기. 언젠가 겪을 일이라 생각했건만 어쩐지 손이 떨렸다. 싫은 건 아니었다. 설렘을 동반한 두려움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럴 때 A씨가 곁에 있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다시금 그리워지는 얼굴에 씁쓸하게 웃은 S는 이내 고개를 털어내고 임신 테스트기를 꽉 쥐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곧 선명한 두 줄을 띄운 여러 개의 임신 테스트기를 앞에 두고 잠시 골몰했다.

“오빠. 나 내일 병원에 가야겠어.”

영문을 모른 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R는 내일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S의 말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튀어 오를 뻔했다.

“병원? 왜? 어디 아파? 지금 가자!”

“아냐. 오늘은 피곤해서 좀 쉬고 싶네.”

힘 없이 미소 짓는 S를 더 잡아끌 수도 없는 노릇이라 R는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 S가 산 물건을 확인하지 못했던 그는 설마 임신 테스트기의 문제일 줄 꿈에도 모른 채 T의 병원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물었지만, 그의 말에 S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꼭 조직과 관련 없는 작은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에 R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별채로 찾아온 R는 여전히 쏟아지는 잠에 힘들어하는 S를 깨웠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S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걱정이 들어 마음이 급한 참이었다. 작은 동네 병원은 죽어도 안 된다는 R의 고집에 결국 시내의 종합 병원을 찾은 두 사람은 대기번호를 뽑고도 한참 대화가 없었다. R는 불안함에 다리를 떨어댔고 S는 침착하게 자신의 번호가 호명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S님.”

내방 환자를 호명하는 간호사의 음성에 S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다녀올게.”

“…다녀오면 꼭 무슨 일인지 알려줘.”

기도하는 자세로 저를 바라보는 R의 모습에 S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S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R는 그녀가 들어서는 진료과목의 명패에 잠시 두 눈을 끔벅였다.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도 ‘부인과’라고 적힌 글씨가 다른 글씨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오는 S의 모습에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던 R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최근 결혼을 기대하며 기분이 좋아 보이던 보스의 모습이 떠오른 건 왜일까?

“…S.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맞아.”

“진짜….”

말이 나오지 않아 제 뺨을 스스로 찰싹 때린 R가 그녀의 배와 얼굴을 천천히 번갈아 바라봤다.

”진짜 임신이야?” 

“응.”

오묘하게 비틀어지던 R의 얼굴에 곧 웃음꽃이 폈다. 그는 마치 제 일인 양 상기된 얼굴로 S의 몸을 오버스럽게 부축하며 차까지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감히 S가 걷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까지 발로 뻥 걷어차는 R 덕에 S는 차에 오르기까지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스한테 전화할까? 으아, 얼마나 좋아하실까! 지금 출장 같은 거나 가 계실 때가 아니잖아!”

“아직 얘기하지 마. 오빠랑 나만의 비밀이야, 이건.”

“왜애!”

핸들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발을 구르던 R가 혹여 아기가 놀라면 어쩌냐면서 제 입술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아직 크지도 않았다면서 웃는 S의 말에 R가 “애가 들으면 어쩌려고!”하며 기함했다.

S는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 조금 더 빛나고 감격스러워 보였다.

“A씨 분명 하던 일도 멈추고 돌아올 게 뻔해. 그리고 곧 돌아올 테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목소리 듣고 싶다.”

사랑이 가득 담긴 S의 목소리가 마치 노랫말 같았다. 룸미러로 S를 힐끗 바라본 R가 덩달아 들뜬 음성으로 그녀를 부추겼다.

“해. 분명 기다리고 계실 거야.”

“응….”

살그머니 배에 손을 올린 S가 수줍게 웃었다. 어쩐지 배에 닿은 손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그녀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별채에 도착해 자리를 비켜준 R에게 손을 흔든 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의 가장 위에 저장되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분명 시차가 다를 텐데도 A는 S의 전화를 곧장 받아주었다.

[S.]

언제 들어도 제게 다정한 그 목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A의 목소리를 들으며 구석에 기대앉아 제 배를 어루만진 S가 “보고 싶어서요.”하고 읊조렸다. 작은 음성이었지만, A는 그녀의 숨소리조차 놓치지 않았다.

[나도 보고 싶다.]

“얼른 돌아오면 좋겠어요.”

평소 A에게 부담 주는 것을 싫어해 조르는 말을 잘 하지 않는 그녀였다. A는 드물게도 어리광을 부리는 S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그간 밀린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나갔다.

S는 그날부터 A가 귀국하는 날까지 통화를 쉬지 않았다. 종종 이야기의 주제는 아기와 관련된 것으로 넘어갔다. 아기가 생기면 이름은 뭐가 좋겠느냐는 질문에 A는 마치 제게 아기가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오랫동안 신중하게 고민하고 답을 들려주곤 했다.

“그럼 아기의 성별은요?”

[여자아이여도 남자아이여도 괜찮다. 그렇지만 역시 널 닮은 여자아이라면 더 귀엽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

A의 말에 후후 웃은 S는 어느새 출장의 끝을 알리는 달력을 바라봤다. 카페인이 없는 차를 종류별로 내오기 시작한 R의 따뜻한 배려와 아직 생긴 줄도 모르면서 아기와 관련한 이야기로 신중히 고민하는 A의 사랑을 느끼며 S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A씨의 어깨라면 좋을 텐데.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내일 집에 도착하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지금은 못하는 건가?]

“네. 꼭 얼굴을 보고 하고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날아가고 싶군. 조금만 기다려 주겠나. 최대한 빨리 돌아갈 테니.]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쩜 고작 하룻밤이 이렇게 더디게 갈까? S는 쏟아지는 잠에도 오랜만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내일이면 보게 될 A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오빠, 말 안 한 거 확실하지?”

“그래. 병원에 갔던 것도 말 안 했어. 오늘 공항에 오는 것도 L씨한테만 말했고. 서프라이즈라고 말해놨으니까 L씨도 보스께는 말 안 했을 거야.”

“좋았어.”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쥔 S는 비행 정보가 어지럽게 띄워진 전광판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S가 막 공항에 들어섰을 무렵, 착륙한 비행기에서 내린 A는 두 달 전과 비교해 조금 날카로워진 인상이었다. 그는 S를 보고 싶은 마음과 시차로 인한 피로, 입국 심사장의 이슈로 게이트가 바뀌는 등 가혹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 가시처럼 예민한 상태였다. L의 안내를 받으며 걷던 A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 이름을 외치는 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보오스으!”

R의 목소리에 주변을 살피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R가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황당함에 슬그머니 헛웃음이 피어오르던 A는 곧 그의 곁에서 나란히 손을 흔드는 S의 모습에 그간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끼며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입가에 손을 대고 달싹이는 S의 입술에 A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를 아는 이가 봤더라면 분명 지금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라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미소였다.

보고 싶었어요.

S의 입술이 전하는 소리 없는 인사에 A 역시 저 역시 보고 싶었노라 입술을 움직여 답해주었다. 일정한 보폭으로 걷던 그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S에게 닿으려던 A의 표정이 자신을 스쳐 빠르게 달리는 남자를 보고는 순식간에 매섭게 변하고 말았다.

“윽…!”

뭐가 그렇게 급한지 달리던 남자와 퍽 부딪친 S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남자는 “아이, 씨.” 작게 욕을 지껄이고는 사과 한  마디 없이 게이트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R와 L가 놈을 쫓아 달렸지만, 이미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간 그를 잡을 수는 없었다.

“S!”

A는 당장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을 놓쳤지만, 지금은 그보다 넘어진 S의 걱정이 우선이었다. 그리 강하게 넘어진 건 아니었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S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S, 괜찮나? 다친 곳은?”

S를 안아 든 A의 옆에서 R가 불안한지 손톱을 닥닥 물어뜯었다. 욱신거리는 몸은 제쳐놓고 서둘러 배부터 감싼 S는 “흐으….” 앓는 소리를 내며 A의 품에 파고들었다.

“저, 저기, 보스…. S 배가 아픈 것 같은데, 그….  아으! 미치겠네. 어서 병원에 가보셔야겠어요.”

S와의 약속 탓에 차마 그녀의 상태를 전하지 못한 R가 불안에 떨며 병원에 가야 한다며 닦달했다. R가 말하기 전에 S를 안아 든 A는 당장 공항 밖으로 달렸고 그의 목에 팔을 두른 S가 작게 흐느꼈다. 평소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 그녀였는데, A의 정장을 꼬옥 움켜쥔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병원에 빨리 가줘요, A씨…. 빨리.”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으드득 이를 간 A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직접 운전하려는 보스의 모습에 기함하는 조직원들에게 지시할 새도 없이 먼저 병원으로 출발한 그는 옆에서 여전히 배를 움켜쥐고 있는 S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차게 식은 그녀의 손이 안쓰러워 그가 입안의 여린 살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조직과 연계된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온 A의 품에는 충격으로 잠시 의식을 잃은 S가 안겨있었다. 응급실의 인턴이 깜짝 놀란 눈으로 익숙한 얼굴을 살폈다. 이곳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부터 카스가 가문의 사람들을 소개받은 그는 당시 A의 첫인상에 관하여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남자’라고 회고했다. 그러니 지금 저토록 눈에 띄게 걱정스러운 눈길로 품 안의 S를 살피는 그는 조직원들에게는 익숙할지언정 병원의 인턴에게는 퍽 낯선 모습이었다.

이 병원의 관계자 치고 카스가 가문의 A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의 등장은 곧장 대표 원장의 귀에 들어갔다. 버선발로 뛰쳐 나온 원장은 그의 품에 안긴 S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하고는 서둘러 병원에 유일하게 세 개를 둔 VVIP 병실 중 한 군데로 안내했다.

A의 뒤를 이어 병원에 도착한 L와 R는 이미 S가 VVIP 전용 병실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사와 대면 중인 A는 연거푸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최대한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꽉 쥔 주먹이 잘게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S씨가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친 겁니까?”

“아아, 그래. 의식까지 잃을 정도면 분명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서둘러 검사해줬으면 하는군.”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CT 검사를 먼저 진행해보도록 하죠.”

볼펜을 찰칵찰칵 누른 나이 지긋한 의사가 고개를 주억이자, 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굴이 창백해진 R가 안 된다고 빽 소리쳤다. L가 놀란 눈길로 그를 말렸지만, 어쩐 일로 R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CT는 안 돼요! 차라리 다른…. 다른 방법 없습니까? S가 깨어나도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CT가 아니고서야 정밀검진이 어렵습니다만….”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의사의 모습에 R가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본인이 A 앞에서 S의 이름을 마구 부르짖는 것도 잊은 채 R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아, 미안해. S. 약속 꼭 지키고 싶었는데. 두 눈을 꽉 감은 R가 고개를 바닥으로 푹 떨궜다.

“…S, 임신했어요. CT는, 절대…. 안 돼요.”

그의 말에 A와 L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S가 임산부라는 말에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보겠다며 의사가 물러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R가 복도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R, 그게 무슨 소리지?”

A는 침착하고 담담한 투로 물었지만, 그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본 L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 없이 이토록 당황한 보스의 모습은 L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으으…. 이거 사실 S하고, 아니 S씨가 꼭 비밀로 해달라고 약속한 거예요, 보스. 부쩍 잠이 는 게 이상하다고 검사를 받았는데 임신이라고 했어요. 보스가 일을 버리고 돌아올까 봐 꾹 참고 기다린 거예요. 공항까지 마중 나가서 직접 얘기하고 싶다고…. 그랬는데….”

울먹인 R는 제 등을 토닥이는 L의 팔을 꽉 붙잡았다. R의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센 힘에 L의 정장이 그들의 심정처럼 구겨졌다.

“L씨, 보스…. S 괜찮겠죠? 아기는…. 아기는 문제없겠죠?”

기어이 눈물을 쏟아내는 제 부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A는 이렇다 할 말 한마디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방 안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S가 어서 눈을 떠주길 바랄 뿐이었다.

*

모두의 걱정 덕이었는지 이상 소견 없이 눈을 뜬 S는 초기이니 조심하라는 의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나가자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A가 그녀의 침대 옆에 섰다. 제 뺨을 어루만지는 A의 눈이 걱정과 슬픔에 물든 걸 보고 S는 살짝 웃어 보였다. 본인은 괜찮다는 무언의 위로에 A의 가슴을 짓누르던 한숨이 안개처럼 깔렸다. 한숨이 떠나가고 텅 빈 가슴에 S를 가득 끌어안자 그리웠던 그녀의 향기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S.”

A를 끌어안고 눈을 지그시 감은 S는 쓰게 미소 지었다. 병원에서 눈을 뜬 시점에 이미 다 들켰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 입으로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던 마음에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S는 가만히 몸을 떨어뜨리고 A의 큰 손을 끌어 제 배 위에 올려두었다. 아직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A는 어쩐지 딱 제 손이 닿은 부분만큼 온기가 더하다고 느꼈다.

“여기, 당신의 아이가 있대요.”

“…그런가.”

“네. A씨와 나의 아기래요.”

조심스러운 손길로 S의 배를 쓰다듬던 A가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추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보고 싶었다, S.”

A가 S의 손을 꼭 잡고 그 위에 입술을 내렸다. 손등에 닿는 입술이 타는 듯 뜨거웠다. 언제나 매사 크게 동요하지 않는 A라지만, S만큼은 그의 아주 미세한 감정의 변화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는 몹시 떨고 있었다.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에 그는 피하는 법 없이 온몸으로 그 모든 감정을 받아들였다.

숨을 크게 삼킨 그의 까만 눈동자 가득 S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언제나 변치 않을 그 마음을 그대로 빚어놓은 듯 영원할 제 사랑 그 자체의 모습으로.

“나와 결혼해주지 않겠나.”

초기라 조심해야 한다던 의사의 말도 잊은 채 S가 A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오히려 제가 더 당황해 S의 몸을 조심스레 받아 안은 A 역시 감출 수 없는 행복을 감추기 어려웠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A의 말에 S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져 그의 어깨를 적셨다. 이미 차고 넘치게 행복하다는 S에게 그는 그녀의 세상을 온통 행복으로 물들여주겠노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보다 멋진 프로포즈를 해주고 싶었다. 답지 않게 몇 번이고 연습도 했다. 그러나 준비한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고요한 병실 안에서 나눈 둘만의 언약은 이미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게 무엇이든 본질은 오로지 하나였으니.

*

부쩍 S와 함께 있으려는 보스의 모습에도 조직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희도 형수님을 이토록 좋아하는데 하물며 보스는 두 달이나 그런 형수님과 떨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보고 싶으셨겠느냐며 오히려 이해하는 태도였다.

실로 오랜만에 함께 보내는 티타임에 달콤한 향이 퍼졌다. 따뜻한 차에 어울리는 케이크를 구워봤다는 D의 말에 S가 눈을 반짝였다.

“형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우롱차를 섞어서 크림을 만들어 봤습니다. 자신작이에요.”

“안 된다.”

“예에?”

S보다도 먼저 케이크를 도로 물리는 A의 모습에 D가 잔뜩 실망해 말꼬리를 늘였다.

‘자신작인데…. 형수님도 좋아하시는 건데….’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불만을 어물어물 삼킨 D를 향해 A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근거를 들었다.

“임산부에게 카페인은 좋지 않다는군.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줬으면 한다.”

“아, 그렇죠. 아무래도 임산부한테 카페인은 위험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D가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임산부?”

“그래.”

“예?”

“문제라도 있나.”

“…에에??”

어안이 벙벙해 S를 돌아보자 후후 웃은 S가 “임신했어요.”하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D를 비롯해 그곳에 있던 조직원 모두 순간 내려앉은 정적을 깨고 저택이 떠나가라 환호했다.

우아아! 형수님이 임신하셨다아!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두 제 일인 양 기뻐하는 모습에 A도 그만 짧게 웃음 지었다. 결국 조직의 모두에게 소문이 돌자, 그날 이후로 선물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임산부에 좋다는 것은 물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위한 장난감이며 성별을 막론한 옷과 신발 같은 것이 저택에 그득하게 쌓여갔다.

S가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주변의 모두가 득달같이 달려와 발아래를 살피고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는 바람에 S는 오히려 걷질 못하겠다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 초기가 지나고 나면 으레 찾아오는 관례와 같은 입덧의 시작과 함께 저택에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카페인이 들어있지 않은 것 중에서도 유일하게 루이보스 차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음식도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입덧이 시작되고 말았다.

“우읍.”

가뜩이나 냄새에 예민한 S였기에 음식 냄새는 물론이거니와 어느 날은 조직원의 향수 냄새에도 헛구역질을 하는 바람에 그 조직원은 그날 임무를 핑계로 쫓겨나듯 등 떠밀려 나오게 되는 일도 있었다.

“S, 괜찮나?”

“으읏. 속이 너무 안 좋아요….”

안절부절 못하는 A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병원에서도 해결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니 차라리 그녀 대신 아파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자의 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 앞에 무력해진 A도 덩달아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조직은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S가 빈혈과 위염으로 쓰러지는 일이 부지기수인데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에 조직 전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몸에 좋다는 것은 물론이요, 진미를 갖다 바쳐도 고개를 흔드는 S의 야윈 모습에 A는 제 심장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런 A를 위해 힘겹게 몇 입 먹어도 도로 게워내고 마니 S로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D가 최근 서점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요리책 섹션에서 웬 검은 정장의 덩치 큰 남자가 오가니 동네의 주부들은 수상쩍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경계했지만, 곧 그의 손에 들린 [임산부를 위한 태교 음식] 따위의 책을 보고는 푸근한 인상으로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양 손 가득 장 봐온 물건을 들고 온 D는 보스가 저를 위해 만들어준 부엌에서 냉장고를 꽉 채우고도 남을 재L를 정성스레 손질했다.

흰 쌀과 고작 한 줌에 몇 만 엔이나 하는 값비싼 유기농 재L를 곱게 빻아 무미.무취의 새하얀 떡 같은 음식을 하나하나 정성껏 빚어낸 D는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힘겹게 누워있는 S와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A를 찾았다.

“형수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D씨….”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떡을 머뭇머뭇 한 입 베어 문 S의 얼굴이 새하얀 달빛을 맞고 개화하는 달맞이꽃처럼 서서히 피어났다. 오물오물 씹어 한 입 삼키자 그제야 주린 배가 성화였다. D가 가져온 떡 한 판을 모두 비우고 나자 A는 서둘러 가능한 한 이 떡의 공급이 끊이지 않게 하라 일렀고 D 휘하에 카스가 가문 떡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똑같은 레시피로 만들어도 D가 만든 게 아니라면 귀신같이 몸에서 받지 않는 S의 입맛 덕에 금세 문을 닫고 D가 그녀의 전담 요리사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건가.”

“D씨 떡이 너무 맛있어서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A씨도 한 입 먹어봐요.”

제 앞으로 불쑥 들이밀어 지는 떡을 한 입 받아먹은 A는 아무리 씹어도 별맛이 나지 않는 떡에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임신이란 힘든 것이군.“

그의 한탄에 S가 A씨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될 줄 몰랐다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저택에 울려 퍼진 S의 웃음소리에 조직원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입맛이 돌기 시작한 S는 그때부터 입덧도 줄어들어 이것저것 먹고 싶은 음식이 늘어갔다. 조직원 모두 밤이고 낮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기꺼이 가져다주었다.

평소에는 그리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도 도대체 임신이란 뭐길래 이렇게 많고 다양한 음식이 먹고 싶은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폭 내쉬는 S의 머리를 끌어안은 A는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라며 입맞춤을 아끼지 않았다.

쪽쪽 닿는 입술에 S의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그의 입술에 쪽 입 맞추자 A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사랑스러움에 그녀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임신이란 역시 어려운 것 같다. 사랑하는 여자를 한껏 끌어안기도 어렵다니.

“형수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이게 아주 명물이라는데 겨우 구해온 거거든요.”

“이것도요!”

S는 눈앞에 한가득 차려진 음식을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 입맛이 돌아온 건 다행이지만, 평소 먹던 양을 훌쩍 넘어서까지 먹게 되니 속이 안 좋아져 다시 힘겨워하는 날이 늘어난 탓에 A는 S가 선을 넘기지 않도록 유심히 관찰 중이었다.

어느 지역의 명물이라는 음식은 마침 S의 입맛에 너무도 잘 맞았다. 감칠맛과 달짝지근한 맛의 조화가 훌륭해 자꾸만 들어가려는 것을 A가 슬그머니 손을 잡아끌어 제지했다.

“오늘은 이쯤 먹도록 하지, S. 어제도 크게 아팠는데 또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내일은 더 먹어도 좋으니까, 응?”

“그치만….”

다정한 A의 말투에도 S의 눈은 식탁 위의 음식에 향했다. A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제 몸이 계속해서 저 음식을 달라 성화였다.

갑자기 복받치는 설움에 S의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먹고 싶은데에….”

답지 않게 울먹이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S의 모습에 음식을 들고 왔던 조직원들은 물론이거니와 A마저 처음 겪는 상황에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S, 내가 말린 건 그만 먹게 하려는 게… 맞긴 하군. 아니, 그렇지만 아픈 모습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던 A는 저를 처음으로 흘겨보는 S의 뚱한 표정에 결국 큰 손으로 눈가를 턱 덮었다.

“…아냐. 먹도록 해. 내가 미안하군.”

헤헤 웃으며 다시 음식에 집중하는 S를 못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보스의 모습에 조직원들은 조용히 눈알을 굴리며 저희끼리 무언으로 속닥였다.

기분이 한껏 좋아져 잠시 다녀온 산책에 홑몸이 아닌 S는 저택에 돌아와 A의 품에서 금세 색색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다. 혹여 그녀가 달빛에 눈이 부실까 손을 들어 그늘을 만들어준 A는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깊이 붙였다. 이토록 다정한 밤이 또 있을까.

S의 곁에서 비로소 편히 잠들 수 있는 A도 몰려오는 수마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

“S, 이건…?”

별채 한 면에 자리 잡은 유리장을 본 A가 유리장에 차곡차곡 물건을 정리해 넣는 S의 모습에 고개를 모로 꺾었다. 어차피 모든 공간이 오히려 S의 취향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그였기에 뭐가 들어오든 크게 궁금해하거나 물어보지 않았지만, 커다란 유리장 안에 채워지는 물건에 설레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이 많이 늘어서요. 이렇게 정리해두면 나중에 이 아이가 보고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조직원은 물론 가족들로부터 전달받은 아기 용품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S는 무척 기뻐 보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 신발을 보여주며 활짝 웃은 S가 “너무 귀엽죠?”하고 물어왔다. 선물마다 누가 줬는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이야기해주는 S의 음성이 듣기 좋았다.

“이건 N하고 M이 보내줬어요. 후훗. 본인들처럼 쌍둥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면서 똑같은 옷 두 벌을 보내줬어요. 너무 귀여워.”

꿀벌 모양의 아기 옷 두 벌을 들고 웃는 S의 옆에 자리 잡은 A는 “귀엽군.” 하며 그 옷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역시 무의식중에 언젠가 제 손바닥만 한 옷을 입고 이 별채에 누워 있을 아기의 모습을 그렸다.

“아, 마침 란이에요.”

편히 통화하라며 짧게 키스한 뒤 방을 떠나는 A의 뒷모습에 살며시 웃던 S는 “S!”하고 씩씩하게 들려오는 반가운 음성에 유리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꿀벌 옷 두 벌을 차곡차곡 개어 넣어놓았다.

“M, 오랜만이야.”

[우리가 보낸 옷 받았어?]

“그럼. 너무 귀엽더라. 후훗. 정말 쌍둥이면 어쩌지?”

[우리가 부모님한테 쌍둥이 육아 방법이라도 전수받아서 보내줄게. 아하하!]

“말만으로도 든든해, 고마워. 아주머니랑 아저씨는 잘 지내시지? 인사 드리러 한 번 가야 하는데.”

[됐네요. 임산부는 잘 쉬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그런 생각 하지도 마. 앗! 나오!]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실로 오랜만에 듣는 N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S, 잘 지내?]

“N.”

[네가 임신이라니. 먼저 어른이 되어버리는구나.]

“그런가? 여자친구하고는 잘 지내지?”

[물론이지. 오히려 나보다 널 더 보고 싶어 한다니까?]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어. 너무 귀여워서 깜짝 놀랐어.”

[그렇지? 우리가 이래 봬도 센스는 좋으니까. 하하! 조카 태어나면 보러 가야겠네.]

귀로 들리는 친구들의 음성과 뱃속의 아이, 그 아이를 위한 무수히 많은 선물로 모든 감각이 제게 A와의 새로운 생명이 깃들었음을 다시 한 번 알리고 있었다.

다시 별채로 돌아오고 있던 A가 여전히 전화기를 든 채 배를 어루만지는 S의 뒷모습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세상이 더욱 넓어진다. 인생은 지난 죄의 과오를 씻는 형벌이라는 말이 있다. 구원을 바라며 태어난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완전한 구원의 증명이 또 있을까? 그녀는 바라건대 이 행복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존재한다면 이 아이에게는 온전한 행복이 깃들 수 있기를.

어느새 뒤로 다가온 A의 인기척에 아쉬운 기색 없이 통화를 종L한 S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맞닿은 심장이 꼭 맞게 두 개의 고동으로 발맞춰 뛰었다. 행복이 눈에 보이는 순간이 존재한다면, 바로 지금일 게 분명했다.

*

“뭐?”

시가 끝을 자르던 우메타의 젊은 보스가 험악한 인상을 구겼다. 그는 스미하라와의 결탁이 흐지부지되면서 조직의 세력이 위축되는 뼈아픈 일을 겪은 이후로 예민해진 신경을 시가로 달래는 게 취미가 되었다.

“그 여자가 임신을 했다고?”

“예. 최근 병원에 들락거리는 걸 봤답니다.”

“하하. 이것들이….”

씩 웃으며 시가에 불을 붙이던 그가 “빌어먹을!”하고 소리치며 크리스털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벽에 퍽, 부딪친 재떨이가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이슬처럼 흩어졌다.

제 세력이 줄어드는 것과 반대로 후계자까지 생긴다면 더욱 기세가 등등해질 A의 모습에 그는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카스가 세력권 일대에 애들 풀어놔. 구석구석 빈틈없이. 여자를 잡는 걸 목표로 한다.”

“예, 보스. 잡아서 데려올까요?”

“죽이든 살리든 일단 내 앞으로 끌고 와.”

“예.”

고개를 짧게 숙인 남자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우메타가 깊은숨으로 시가를 빨아들였다. 후욱 뱉는 숨에 뿌연 연기가 해무처럼 번졌다. 열을 품은 눈빛이 광기로 번득였다.

우메타 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S를 혼자 두지 않는 카스가 조직의 철통 보안에 그녀를 납치하려는 계획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저택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 고작 집 앞에 잠시 산책을 나설 때도 빈틈없는 경계에 도무지 틈이 나질 않은 탓이었다.

“젠장. 엄청 싸고도는군.”

“유명하잖아. 그나저나 계속 이러면 우리가 보스한테 깨질 텐데….”

그들이 반쯤 포기하고 있던 시점에 기회가 찾아왔다. 일이 많아 늦어 진다는 A를 위해 사무실로 향하던 S 주변의 조직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편하게 식사하러 가는 자리였기에 그리 많은 조직원을 대동하지 않은 탓이었다.

S와 즐겁게 대화하며 걷던 R는 눈앞에 가득 들어차는 검은 그림자에 슬그머니 그녀를 제 뒤로 돌려 숨겼다.

“뭐야?”

“그 여자를 넘겨.”

“무슨 개소리를….”

R가 그리 멀지 않은 사무실을 힐끗 바라보고는 쯧 혀를 찼다. 평소라면 S를 사무실로 먼저 도망가게 했을 테지만, 홑몸이 아닌 그녀가 그곳까지 달리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S를 뒤로 숨기고 둥그렇게 대형을 짜 감춘 카스가의 조직원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쳐 S를 벽에 바짝 붙였다. 전면으로 붙기엔 머릿수 차이가 극심했다.

‘작정을 하고 나왔군.’

R는 말단 조직원 한 명에게 턱짓으로 신호했고 그는 우메타의 조직원들이 “으랴앗!” 거친 기합과 달려듦과 동시에 사무실로 달렸다.

놈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턱과 배를 무자비하게 가격했지만, 카스가의 조직원들은 이를 악물고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버텼다. 뻐억, 뼈가 돌아가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S는 두 귀를 감고 이 모든 상황에 동요하지 않으려 침착했다. A와 함께 지내게 된 이후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지만, 홑몸이 아닌 지금은 이런 사건에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했다.

“크윽…! S, 조금만 버텨! 곧 보스가 오실, 으윽!”

“오빠!”

멱살을 잡힌 채 저 멀리 던져진 R의 모습에 S가 참았던 비명을 질렀다. 흐트러진 대형 사이로 손을 불쑥 집어넣은 장정들이 S의 몸을 잡아끌어 냈다.

“이거, 놔! 아악!”

“가만히 못 있어!”

심하게 발버둥치는 S에게 짜증이 날 대로 난 남자가 S의 손톱에 긁히며 그녀를 저 멀리 밀쳐버렸다. 단말마와 함께 나뒹구는 S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황급히 배를 감싼 덕에 배는 부딪치지 않았지만, 심하게 쓸린 다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지만, 이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몸은 배에도 통증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배를 끌어안고 엎드린 S의 모습에 눈이 돌아간 카스가의 조직원들은 일제히 우메타와 전면전을 선포하고 한데 뒤섞여 살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르며 주먹을 주고받았다.

“S!”

“…A씨?”

숨을 헐떡이는 말단 조직원이 데려온 A의 뒤에서 L의 지시로 다른 조직원들이 일제히 우메타를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다. 한걸음에 달려온 A가 쓰러져있는 S를 안아 들자 그녀는 극심하던 긴장이 풀어져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보스! 형수님 모시고 어서 병원으로 가주십S! 여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아아. 부탁한다.”

이를 으드득 갈며 일어선 A가 L를 돌아봤다.

“L.”

“예.”

분노 어린 눈빛에 L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우메타 놈들, 살아서는 못 돌아가겠군.

“S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려주도록 해.”

*

얼마나 잠들었을까. 포근한 느낌에 천천히 눈을 뜬 S는 익숙한 천장에 이곳이 병원임을 깨달았다. 욱신거리는 몸을 천천히 살피자 이곳저곳 타박상과 찰과상으로 푸르고 붉은 멍이 들어있었다. 처치는 완L됐는지 희미한 약품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들….’

VVIP 병실에 마련된 널찍한 소파에 언제 왔는지 E와 R가 서로에게 기댄 채 선잠을 청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째깍째깍 작은 소음을 내는 시계를 확인하니 이미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A씨는 어디 있지?’

느릿하게 병실을 둘러보던 S가 철컥 열리는 문소리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들어오고 있던 A는 눈을 뜬 S의 모습에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S, 괜찮나.”

“괜찮아요.”

“…미안하군. 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다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책하는 A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띤 S가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에 내내 심란하던 A의 마음이 비교적 잔잔하게 진정됐다.

“미안하다는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녀의 차분한 음성이 새벽의 병실 안을 부드러운 비단처럼 휘감았다. 언젠가의 약속에 A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떠 눈앞의 S를 담았다.

“사랑해.”

생긋 웃은 S가 그제야 만족한 듯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옆을 톡톡 두드리자 함께 이불 속으로 들어간 A가 자연스럽게 제 팔에 그녀의 머리를 뉘었다.

“졸려요. 재워줄래요?”

그녀의 말에 A의 손이 제 품 안의 S를 안아 아주 부드럽고도 다정한 손길로 토닥였다. 소파 위의 E와 R는 한쪽 눈만 떠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씩 웃으며 다시금 자는 체 눈을 감았다.

째깍째깍. 여전히 일정한 초침소리를 내는 시계와 시원한 바람 냄새를 몰고 온 A의 체취, 병원의 약품 냄새가 묘한 조화를 이뤄 S의 모든 감각에 내려앉았다. 두근거리는 건 비단 심장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손을 얹고 있는 배에서도 낯선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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