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사림X세피엔] 나의 구원자

구원자 - 이하이

그날은 어느 날과는 다른 날이였다. 체감상으로만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랬던 것 같다.

웬일로 투약하는 약이 적었고, 햇살이 작은 창문 사이로 밝게 비쳤으며 몸 상태가 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연구원들이 바빠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 여유롭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나와 친구들을 가둬두던 철장이 부숴진 날이였다. 평생을 갇혀지낼 것만 같았는데, 사실은 아니였던 것이다. 당신은 단단한 철덩어리를 아무렇지 않게 부수고 내 손을 잡았다. 나를 이끌고 연구실, 복도, 문을 지나 바깥을 보여줬다. 난 그날 하늘이 그리도 푸른 것인지, 바람이 이리도 상쾌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내가 갇혀있던 감옥같던 방에서 연구원들이 기본적인 지식을 익히라며 던져줬던 책을 통해 봤던 하늘과 바람과 바다와 산이 어떤 것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사진이라도 보여달라 부탁했지만 그들은 바빴다. 그나마 마음씨가 고왔던 일부 연구원들이 알겠다며 사진을 뽑아줬으나 그마저도 방을 떠나 실험을 당하고 돌아올때면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아마 청소를 하는동안 가져다가 버린 것이겠지. 그것도 어릴적의 이야기다. 나는 흐릿해져버린 기억속 사진의 흔적을 간신히 붙잡으며 바깥을 상상했다.

태어나기를 연구실에서 태어난 나는 적어도 바깥에 있다가 들어온 친구들이 아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적어도 산과 들, 하늘과 바다의 모습은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제 흐릿하게 기억하는 것들을 말이다. 연구실에서는 색조차 희미했다. 사방이 하옜고 색을 가진 것은 나와 친구들의 눈과 머리카락 뿐이였다. 피린스의 붉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드래비트의 분홍색 머리칼과 노란 눈동자. 아마 친구들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더라면 난 색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피린스와는 다른 붉은 색이였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던 그 날, 복도에서 들린 굉음에 나는 발작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 틈새에 몸을 웅크려 숨었다. 몸이 가려져 누구도 보지 못하길 빌었다. 보통 복도에서 굉음이 들린 날은 괴수형 변이들이 구속구를 부수고 감옥을 탈출한 날이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와 친구들이 잠을 자는 방은 복도로 나있는 벽이 투명해서 바깥에서 자세하게 들여다볼때 안이 보이는 구조였다. 여러개의 쇠창살이 가장자리와 중간을 가로지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부가 가려지진 않았다. 우리의 방은 감시하기 딱 좋게 설계되어 있었다. 드래비트의 방은 다르다고 들었지만 그녀의 방도 감시하기 좋은 구조라는 것은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괴수형 변이들이 탈출해 운이 나쁘게 이쪽 복도를 지나가는 날이면 내게 달려드는 일이 잦았다. 벽이 투명하니까 내가 보일테고, 나를 먹이로 인식하고 공격하려 든 것이다. 물론 벽에 막혀 시도로 그쳤지만 공포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 일을 여러번 겪고나니 굉음이 들릴때마다 침대 옆 틈새로 숨는 버릇이 생겼다. 좋은 버릇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굉음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닳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러번 들려야할 굉음이 한번으로 그친 것과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 것이 그 이유였다. 변이들의 제압은 연구원들이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통 사역체들의 몫이다. 이것이 변이의 탈출이였다면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맞다. 그것을 깨닳은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벽 너머를 바라봤다. 붉은 눈의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보는 사람'

당신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소리에 내가 놀라 흠칫하자 주먹으로 내리치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 가만히 있더니 옆에있던 조작기를 내리쳤다. 한방에 박살난 조작기가 전기를 내뿜으며 깜빡였다. 천장에 달려있던 스피커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높은 음의 소리가 반복되니 귀가 아픈 듯 했다. 그래도 벽이 열리지 않자 당신은 등에 매고있던 칼을 꺼내들었다. 숨을 들이키는 듯 눈을 감더니 눈을 뜸과 동시에 칼로 창살과 벽을 내리쳤다.

까가가각 --!

벽이 파직파직거리며 칼에 저항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부숴졌다. 칼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나는 당황해서 벽에 등을 붙인채 서있었다. 몇 번 더 칼질이 이어지고 사람 하나는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생겼다.

"그쪽은 실험체인가?"

당신은 이제는 부숴져버린 애매하게 불투명한 벽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연구원들과 친구들, 내가 입고있는 흰색 옷이 아닌 색을 가진 옷을 입고있는 당신은 낯설었다.

"귀, 안들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당신은 귀를 가르키며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당신은 손에든 칼을 다시 등 뒤에 맸다. 칼때문에 겁먹은 것이라 생각한 듯 했다.

"...누구세요."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자세는 여전히 경계하듯 등을 벽에 붙인 채였다.

"딱히 누구도 아냐. 이름을 묻는건가? 그건 개인정보라 조금 곤란."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건가요."

"보다시피 벽을 뚫고."

이제 뚫려버린 벽 너머로 비상상황임을 알리는 사이렌과 전등이 미친듯이 울리고 있었다.

"나갈래?"

당신이 손을 내밀었다. 눈이 크게 떠졌다. 쥐고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싫으면 말고."

"나갈게요."

당신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당신이 손에 힘을 줘 나를 당겼다. 어느 연구원들과 달리 굳은살이 가득하고 생채기가 있는 투박한 손이였다. 거칠거칠한 피부가 깨끗한 내 피부와 맟닿았다. 당신이 당긴 탓에 끌려가다 침대에 무릎을 박고 엎어졌다.

"엇."

내가 휘청거리며 침대를 넘어서는 동안 벽 너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익숙한 흰 가운, 연구원들이였다.

"빨리가요."

내가 당신의 팔을 잡았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게 전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전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래야겠지."

내 바램이 통한 것인지 당신이 나를 잡고 벽을 넘었다. 붉은 빛으로 덮어진 복도를 달렸다. 뒤에서 연구원들의 외침이 들렸다. 잡으라는 소리일까? 그렇겠지. 몸이 떨렸다. 이대로 다시 잡혀가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였다. 내 손또한 떨리고 있었던 것인지 당신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어째서인지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달린건지 모를때쯤 박살나 구멍이 뚤린 벽이 나왔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머물던 층은 상당히 고층이였다. 구멍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구멍에서 저 아래에 땅이 있었다. 떨어지면 죽을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품에 안고 구멍에서 뛰어내렸다.

"아아악!!"

나도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진정하라는 듯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당신의 목을 끌어안았다. 죽을 것이라는 걱정과는 달리 땅에 무사히 착지했다.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무릎꿇은 나를 달래듯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나의 친구들.

피린스와 드래비트는 어떻게 된거지?

"제 친구들은 무사한가요?"

"친구들?"

"저 말고도 다른 실험체들이 있어요. 근처에 있었을텐데..."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당신이 말했다.

"분홍머리랑 빨간머리 말하는 거라면 이미 탈출했어. 내 친구들이 구했거든."

"정말인가요?"

"응."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당신은 내게 당신의 신발을 벗어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서진 벽의 파편들에 긁혀 피가 나고 있었다. 내가 한사코 거절하자 당신은 튼튼해서 괜찮다며 내게 손수 신발을 신켜줬다. 연구실 내에서는 늘 맨발이였는데. 무언가를 신고 걷는 감각이 낯설었다. 내가 신발을 신고 어색하게 걷자 당신이 웃었다. 그 미소가 하늘의 햇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처음보는 하늘과 맨땅, 그리고 당신의 미소. 그것들은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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