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사림X배사빈] 불안해?
불안해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꼈고, 바람은 잘 불지도 않았다. 우중충하기 그지없는 날씨였다. 나는 활짝 열려있던 커튼을 닫았다. 그래도 남은 틈새로 달빛이 스며들어왔지만 그정도는 뭐...
"..."
병실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나를 제외한 이들은 바빴다. 장현이 가장 바빴고 그 다음으로 한요, 레인... 나도 처음에는 일을 하겠다 나섰지만 쫒겨났다. 나는 가만히 있는게 도움이 된다나 뭐라나. 그렇다고 집에 박혀있기엔 할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거리를 방황했다. 이제는 단속당해 사라졌지만 익숙했던 투기장도 가보고, 공원도, 다리도. 하지만 발걸음은 돌고돌아 배사빈의 병실에 닿았다.
병실에서도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간호사들이 종종 찾아와 사빈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지켜보고, 창백한 얼굴과 몸을 닦아주고, 이따끔 손을 잡고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쾌차하게 해주기를 비는 것. 그게 전부였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봐야 아무도 없어서 숙식도 이곳에서 치뤘다. 간호사들도 제제하지 않았다. 사실 배사빈의 보호자가 나로 되어있기도 했으니. 어쨌거나 서류상으로는 혈육이였으니까.
환자가 아닌데 침대를 쓸 순 없으니 옆에 놓인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어차피 1인실이라 침대가 하나뿐이기도 했지만. 간호사들이 간이침대를 가져다줄까 물어봤으나 거절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해 모든 병원은 붐비고 있었고 그것은 이 병원도 예외는 아니였다. 나보다는 다른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쓰는게 더 맞다. 나는 그대신 얻은 담요와 작은 베개만으로도 충분했다.
양 손으로 잠에든 사빈이의 오른손을 약하게 쥐었다. 기계로 대체된 왼팔과 왼다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원래도 없던 근육이 빠질대로 빠져 말라갔다. 원래도 그렇게 살집이 있는 체형은 아니였지만 더 심해졌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을 세게 준다면 마치 부서질 것처럼 연약했다. 최대한 힘을 뺀 손짓으로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거칠거칠한 나의 손이 매끈한 사빈이의 손등과 마찰했다.
배사빈이 의식을 차린지는 꽤 되었으나 상태가 말이 아니였다. 매일 재활운동을 한다지만 하루아침에 멀쩡해질 몸 상태가 아니였다. 멀쩡하지 않게된 몸 상태는 이전에 사용하던 기계부품들의 무게조차 지탱할 수 없었다. 나노트에게서 가장 가벼운 부품들을 받아 바꿔 끼웠지만, 그것들을 어색하게 느낀 사람은 배사빈 본인 뿐만이 아니였다. 원래 사용하던 것들은 케이스에 넣어 병실 한구석에 두었다. 언젠가 다시 사용할 날을 고대하며 고이 보관했다.
고요한 방에서 초침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은 12시. 이만 잠에들 시간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를 하고 돌아왔다. 스트레칭을 해서 뻑뻑한 몸을 풀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던 쿠션들을 치우고 누웠다. 담요도 덮고 눈을 감자 잠에드는 것은 금방이였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입가에서 무언가 생소한 감각이 느껴져 잠에서 깼다. 슬며시 눈을 떴지만 아직 어둠에 적응하기 전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두어번 깜빡이자 그제서야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 아직 꿈인가 싶어 계속 눈을 깜빡이다가 배사빈과 눈이 마주쳤다. 배위에 묵직한 느낌이 드는걸로 보아 배사빈이 내 배위에 앉아있는 듯 했다. 분명 자고있지 않았나? 그리고 대체 왜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꿈인가 싶어 팔로 내 옆구리를 꼬집었지만 아프기만 할 뿐 변화는 없었다.
내 입술이 버석한 배사빈의 입술과 맞닿아있었다. 내가 잠결에 느낀 생소한 감각이 이것이였나보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배사빈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난 당황한채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야, 배사빈 너 뭐하냐..?"
내가 입을 열자 배사빈이 맞닿은 입술을 땠다. 숙이고 있던 허리를 들어 내 얼굴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멀쩡하게 깨어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그랬지."
"들어줘. 이게 내 소원이야."
"뭐,"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려 하자마자 배사빈이 고개를 꺽었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내 입안에. 나는 당황한 나머지 굳어버렸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배사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의식이 없던동안 안그래도 길었던 머리카락은 더욱 자라 허리춤까지 닿을 정도가 되어있었다. 작게 열린 커튼의 틈새로 달빛이 새어들어와 배사빈을 비췄다. 배사빈의 남색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눈을 감는 동안에도 그의 혀는 가만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입안을 침범한 혀가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배사빈이 고개를 더 꺽어 혀를 더 깊숙히 집어넣었다. 숨이 맞닿고 혀가 섞이고 호흡이 섞이고 타액이 섞였다.
누군가 내게 키스가 처음이라 이리 당황한것이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배사빈과 이런 짓을 벌일거라곤 상상해본적이 없더서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할머니가 보시면 뒷목 잡으실 행동이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꿈이라고 믿고싶지만 아니라는 것을 이미 확인한 후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자 배사빈이 눈을 떴다. 애초에 감지도 않았던 내 눈과 배사빈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투명한 회색 눈동자에 내 붉은 눈동자가 비쳤다. 무채색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약간 인상을 쓴 배사빈이 내 뺨을 제 왼손으로 어루만졌다.
차가운 철제의 감각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 이건 현실이다. 꿈이 아니야. 이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듯 배사빈이 혀를 움직였다.
이게 맞는 행동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가족같이 자란 사이에 입맞춤이라니, 상상조차 해본적 없다.
양 손으로 사빈이를 밀어내려 그의 옆구리를 잡았다. 흘러내린 그의 머리칼이 내 손을 간지럽혔다. 최대한 살살, 배사빈이 밀려날 정도로만 힘을 줘서 밀어내려 했지만 배사빈이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손에 줘야할 힘의 양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더 힘을 줬다간 다칠지도 모른다. 어느정도가 마지노선이지? 모르겠다. 나는 그러한 이유로 밀어내기를 멈췄다.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배사빈이 자세와 행동은 유지한 채로 내 어깨와 팔을 붙잡았다. 팔을 잡은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이 붙잡힌 팔을 통해 느껴졌다. 이 이상으로 세게 잡는 것은 빈약해진 근력의 한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진심으로 밀어낼까 두려워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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