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베로즈 #1

소재주의 : 불륜

  프랑스 남부의 청명한 하늘 아래, 널따란 마당을 가진 저택에 손님들이 북적인다. 저택 바깥에 주차된 자동차들은 주인의 부를 자랑이라도 하듯 흠 하나 없이 매끈한 본넷을 빛내며 질서정연하게 주차 되어있다. 정문으로 흰색 루와얄 한 대가 들어온다. 사람들이 차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문 너머를 힐끗거리고 있다. 차에서 내리는 남자는 금발에 금안을 하고 있는, 딱 봐도 차와 어울리는 사람이다. 갖춰 입은 맞춤정장은 남자의 멋진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고 정돈된 금발은 남부의 햇살 덕분에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뒤 옷을 한 번 정돈한 그는 차 키를 운전수에게 맡기고 파티가 벌어질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곧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이 남자의 절친한 친구인 빈센트 호버와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 집안인 위버 가문의 아가씨. 정략 결혼을 이어 준 사람이 바로 이 남자, 에드거 먼튼이다. 영국 귀족 가문의 외동아들인 에드거는 찬란한 외모와 매너로 사교계의 꽃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사업확장을 원하는 제 친구를 위해 발품을 판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했고, 정중하며, 귀족적인 애티튜드를 가지고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었으니 그가 보인 수고는 가장 친한 친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빈센트 호버가 받을만한 호의였다. 정원 안으로 들어가자 잘 깎인 나무와 잔디에서 푸릇한 냄새가 풍겨온다. 파티의 주인공일 신랑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의 부모가 대신 나와 호탕한 웃음소리로 정원을 채우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이 에드거를 보자 두 팔 벌려 반긴다.

“에드거!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네.”

“간만에 뵙습니다, 무슈, 마담 호버. 잘 지내셨나요?”

“그럼, 자네 덕분에 안 좋았을 상황도 좋아졌지.”

두 사람은 마치 친아들을 대하듯 에드거를 맞았다.

“빈센트는 어디있죠?”

“결혼이라 긴장했는지 아직 방에 있네.”

“흠,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두 분을 좀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두 사람은 이미 그를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에드거는 본래라면 신랑이 해야할 손님 맞이를 거들었다. 빈센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에드거도 알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빈센트를 소개시켜 준 사람이 에드거였기에, 그가 이 자리에서 가족 역할을 하는 것에 두 사람의 우정이 정말 돈독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정도 손님들을 맞다가 에드거는 빈센트를 찾으러 가 보겠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찬란함과는 달리 저택 안은 고요했다. 분명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빛이 들지 않는 복도에는 침묵과 정적이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에드거는 익숙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카펫이 부드럽게 그의 발소리를 지운다. 2층으로 올라온 에드거는 몸을 돌려 빈센트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끝에 창문이 있어서 아래층보단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무거운 공기는 똑같았다. 방문 앞에서 두어번 노크했다.

“나일세.”

안에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적막이다. 에드거는 인내심있게 대답을 기다리다가 한 번 더 노크한다.

“들어가도 되겠나?”

“꺼져.”

그 말의 뜻을 알지 모르는 것인지, 에드거는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마냥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느새 바깥은 구름이 드리웠는가, 채광이 잘 드는 방이었음에도 방의 주인은 어둠을 끌어모은 양 그림자처럼 서 있다.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표정을 한 빈센트가 불쾌한 목소리로 에드거에게 말을 건다.

“자네는 꺼지라는 말의 뜻을 모르나?”

“고상한 사람이라 그런 저급한 말 따위는 모르네.”

“고상하긴 누가. 가식적이고 오만하기 그지 없는 네녀석에게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말로 반긴 것일세. 꺼져. 다시한번말하지만.”

“그대의 부모가 자네를 찾고 있어. 신랑이 안 나와서야 되겠는가. 아니면 뭐, 새신랑이라 떨려서? 하, 답지않군!”

“입 닥치게. 사람 불쾌하게 하는 재주는 정말 감탄스러워. 사람들이 자네의 진면모를 모르는 채 경배하는 것도 역겹지. 자네의 오만함을 모두가 알게 되어 네 추락을 볼 수 만 있다면 참 좋겠는데 말일세.”

“하지만 자네는 나를 알게 되었음에도 나를 사랑했지. 나를 탐하고, 나를 안았네. 안 그래?”

“말은 똑바로 해야하지 않겠나? 분명히 하지만, 난 너의 것들을 사랑했지 널 사랑한 게 아니야.”

에드거는 웃었다.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이 지나자 아까의 선량하던 표정은 어디가고 빈센트의 말대로 오만한 낯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허락같은건 받지 않는다. 빈센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술 가까이에 입맞춤을 남기고 테이블 위에 있는 위스키를 크리스탈 잔에 부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거만한 자세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는 빈센트에게 웃으며 말한다.

“나의 것들! 나의 재능, 재력, 권위, 권력, 인맥, 인정과 지위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들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 맞아! 자네는 나의 허울을 사랑하네. 그래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겠지. 그러나 나는? 자네를 사랑한다네! 여전히말일세. 이 순수한 사랑을 알지 못하겠나? 너는 나의 모든 것을 드러냈음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이용했지. 세상에 이렇게 영악하고 치밀할수가! 자네가 원하는 만큼 나를 더 이용하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역겨운 새끼.”

“칭찬 고맙네.”

빈센트가 자리를 옮겼다. 에드거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마찬가지로 다리를 꼬고 삐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 맞닿은 시선이 각자를 꿰뚫을 듯했지만 그 중 어느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에드거의 시선이 빈센트의 모습을 눈에 담듯 훑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게 정리된 새신랑의 외관은 설렘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짙은 눈썹에 옅게 자리잡은 다크서클이 퇴폐적이었고 파리한 피부색이 그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음침한 남자. 에드거의 머릿속에 그런 말이 떠올랐다. 정말 잘 어울리는 단어라 순간 웃음이 샜다. 그게 불쾌했는지 빈센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가 웃기지 에드거?”

“자네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주선한 건 자네아닌가.”

“사랑하는 남자의 결혼을 주선한 남자. 이거 대서특필감 아닌가? 재미있군.”

“내가 신문사에 넘기면 어떻게 될 지 기대되지 않나?”

“하지만 자네는 그러지 못하지. 나를, 아니, 나의 것들을 사랑하니까. 그것들을 이용해야 하니까.”

빈센트가 비웃음을 흘린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는 에드거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사랑했다. 태어나기를 귀족으로 태어난 피부터 그가 만들어 온 두꺼운 고급 포장지를 사랑했다. 탐이 났고, 원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뺏을 수는 없었기에, 빈센트는 에드거를 갖기로 결정했다. 에드거가 자신을 향해 걸어왔을 때,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지. 그의 검은 속에는 군림하고자하는 지배욕과 자신과는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비뚤어진 호기심이 가득했기에, 바닥에서 올라온 빈센트라는 존재는 에드거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달콤한 꿀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빈센트는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허물어진 벽, 그 틈새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뼛속을 훑고 지나가던 선명한 감각. 배를 곪아 위장이 제어할 수 없게 떨리던 그 고통.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번듯한 외모와 영특한 머리 뿐이었다. 부잣집에서 잡일을 하던 아버지가 그를 부른 그날은 마침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의 자리가 빈 날이었다. 어린나이였음에도 큰 키를 가지고 있던 빈센트는 한 눈에 안주인의 눈에 들었다. 아들이 없던 안주인은 충분한 금액을 지불하고 자신을 양아들로 들이고 싶어했다. 가족은 빈센트를 팔았다. 그게 그에게 좋을 것이며 자신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빈센트는 그 결정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팔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원망하고 저주했으리라. 그렇게 신데렐라가 된 빈센트의 이야기는 사교계에서 굉장한 흥미를 끌었다. 그리고 그가 사교계에 데뷔를 한 그날, 에드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갑의 청년은 자신을 소개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빈센트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자신을 다음 계단으로 끌어올려 줄 두 번째 기회가 왔다는 것을.

“이만 일어나지. 함께 나가지 않겠나 빈센트? 주인공이 너무 오래 자리 비우는 것도 예의가 아닐세.”

“에스코트라도 하겠다는 듯 구는 게 마음에 안 드는군.”

“아, 너무 고고하게 구셔서 에스코트를 바라시는 줄 알았습니다, 마담.”

에드거는 빈센트를 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던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버릇처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먼저 나가며 결혼식에 늦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재수없는 자식,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담는 빈센트. 단숨에 들이키고는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에드거가 다시 자신의 부모에게 다가가 가식이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순간 그가 고개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미소짓고 있지만 그 웃음은 다정하지 않았다. 어서 내려오게, 내가 만든 자네를 위한 파티에.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빈센트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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