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베로즈 #2

“드디어 나오셨군!”


에드거가 빈센트를 맞이했다. 빈센트는 얼굴 만면에 기분 좋은 표정을 걸고 있는 그가 신기했다. 어떻게 그는 가면을 쓰고도 자유자재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그의 가면에는 특별한 무언가라도 있는 모양이다. 제 등을 두드리는 에드거에게 핀잔을 주고는 제 부모, 실제로는 양부모인, 앞으로 가서 인사를 한다.

“죄송합니다. 긴장이 돼서 진정을 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럴만하지. 괜찮단다. 이제라도 나왔잖니? 네 아버지도 결혼식 때 긴장해서 손을 덜덜 떨었었다. 아직도 그 떨림이 선명하구나.”

“이런 여보. 언제적 일이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운데 낀 빈센트도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웃음을 끌어낸다. 그 꼴이 우스워 에드거는 비웃음을 삼킨다. 빈센트가 신랑의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뜰 때, 에드거도 함께 이동한다. ‘그럼 결혼식 한 번 잘 이끌어 가 보라고’, 라는 말을 한 뒤 그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든다. 빈센트는 티내지 못했으나 뱀 여러마리가 제 몸을 타고 기어 오르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독사같은 녀석. 아름답고 화려하며 유연한 그는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죽이기 충분한 독처럼 위험했다. 그는 유순하게 사람 손목을 감싸고 올라가 목덜미를 물어 제 미약으로 사람을 중독시킨다. 해독제는 없다. 그에게서 벗어나거나 영원히 중독되거나 둘 중 하나다. 불행하게도 빈센트는 후자다. 목줄을 잡고 있는 척, 그의 체스판 위가 아닌 맞은편에 앉아있는 척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에드거가 용인해주고 있기 때문이지 제 능력이 아님을 알고 있다. 빈센트는 치욕을 느낀다. 태생부터 다른 완벽한 존재를 질투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시기하나 명백한 권력관계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있는 자리에서 발버둥치는 것이 한계인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빈센트는 치욕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자신은 이제 결혼을 한다. 빈센트의 사업은 이제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손을 뻗을 것이다. 새로이 대국大國으로 부흥하려는 태동을 보이는 나라. 그 곳에서 빈센트는 자신의 사업을 펼칠 예정이었다. 그는 수완 좋은 사업가였기에 미국에서 한 몫을 잡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그가 이번에 새로 펼칠 사업은 프랑스의 고급 와인들을 미국으로 파는 일이었다. 지금 미국은 금주법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런 곳이니만큼 알코올만큼 좋은 수입원은 없을테지. 아무리 금주를 명한다한들 성찬식에 쓸 와인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놀랍게도 ‘성찬식’은 전보다 더 많이 열리게 될 것이다. 성스러운 물은 크리스탈 잔에 담겨 은쟁반을 타고 높으신 분께 닿기 위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겠지. 자신이 뿌린 신의 물방울이 그 땅을 적시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연을 맺어야 했다. 그렇기에 에드거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인맥과 입김이. 하지만 빈센트는 다짐한다. 이번이 그와의 마지막일 것이라고. 더 이상 그를 필요로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부의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이제 결혼식이 시작 될 차례다. 하객들은 들뜬 마음으로 정원에 마련된 결혼식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빈센트는 지정된 자리로 가서 식이 시작되기를 경건한 척 하며 기다린다. 신랑은 신부가 저택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솔직히 궁금했다. 자신이 결혼할 여자가 어떤 사람일지. 불행하게도 그는 그녀의 사진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제 아내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떻게 생겼든 그렇게 신경쓰지 않을테지만, 궁금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선물의 내용물, 그러니까 미국 부호의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선물의 모양새는 아직 모르니까 말이다.

잠시 뒤 저택의 문이 열렸다. 처음 보이는 것은 새하얀 드레스와 면사포. 얇지만 여러겹이 겹쳐진 면사포 때문에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에 붙는 웨딩드레스는 잘록한 허리를 또렷하게 보여줬고 드레스 밑자락에 살짝씩 보이는 발걸음은 단아한 것이 품위있는 여자임을 암시했다. 양손에 꼭 쥔 부케는 하얀 제라늄과 흰 장미로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그녀가 점점 다가온다. 빈센트는 볼을 붉히지 않았지만 호기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했다. 선물 포장지를 벗겨보고 싶은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제법 괜찮은 선물이기를 바라며 그녀의 면사포를 걷었다. 가슴골이 먼저 보이고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가 보이더니 갸름한 턱을 지나 붉은 입술, 그리고 감은 눈, 마지막으로 웨이브치는 머리와 면사포가 덮고 있던 헤어 장식이 나타났다. 감은 눈을 뜨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이 자신을 마주보았다. 장식된 진주들보다 더 진주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다.

빈센트는 나지막히 그녀에게 말한다. 아름다우시군요, 부인. 하지만 제 아내는 반응이 없다. 그저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눈을 하고서 몸을 틀어 다음 차례나 기다렸다. 빈센트도 그녀처럼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에드거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오만한 미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기를 바라네, 하고 말하는 듯 바라보는 그가 눈에 남는다. 빈센트는 그녀가 제법 멋진 결혼 선물임은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모르는 척 하는 하객들의 축하를 받는다. 하지만 고양이 같은 눈을 한 자신의 아내 된 사람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 축하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남들에게 보일 가식따위는 없다는 듯. 웨딩로드를 걷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찬 바람 불지 않음에도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마치 시신의 손을 잡는 것 같은 냉랭함에 빈센트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자신은 인형과 결혼하는가? 나쁠 것은 없지만, 아니, 자아를 가진 인간보다는 제 말만 듣는 인형이 더 낫지만, 이런 존재는 영 낯설다. 축복의 꽃잎이 내리는 웨딩로드를 걸으며 생각한다. 웅웅대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마치 공중을 부유하며 갈 곳 없어 떠도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피로연이 되어서야 빈센트는 아내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방문해주셔서도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 축복을 비네 엘리스. 엘리스 위버.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아 결혼한 인물이 위버 가의 딸은 맞는 모양이다. 바뀌지 않는 냉랭한 표정이 익숙하지 않은 손님들은 목소리 낮춰 그녀에 대해 속삭이고 있다. 위버 가는 외동딸 뿐이라죠, 애교도 없는 여자가 과연 남편을 만족시킬수나 있을까요, 요즘 미국 아가씨들은 방탕하기 그지없다는데 저 여자는 점잖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빈센트는 모르겠지만 엘리스의 귀에는 들리는 그런 말들. 그 목소리는 에드거의 귀에도 들린다. 에드거의 테이블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 표정을 녹이며 순식간에 다정다감한 벗의 낯이 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네. 이리 성사된 것을 보니 소개한 사람이 되어 마음이 흡족하군.”

“고맙네 에드거.”

하지만 엘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빤히 바라보다 고개 살짝 숙여 인사했을 뿐. 빈센트가 의문스러운 눈빛을 던졌지만 엘리스의 눈은 에드거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는 에드거는 아무 동요도 없이,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웃을 뿐이고.

“내가 알아야할 게 있나?”

“아니, 아무것도.”

각각 다른 의미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속을 썩인다. 빈센트는 두 사람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었지만,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다음 테이블로 이동하여 인사를 이어갈 수밖에.

사람들이 술에 젖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잔은 비워지지 않는다. 잔에 계속 입을 가져다 대지만 마시지는 않고 입술만 적시는 걸 발견한 엘리스가 처음으로 말을 건다.

“마시지 않으시네요.”

그녀의 말이 놀라웠다. 제법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인형인 줄 알았더니 자아가 있는 모양이다.

“저들처럼 추태를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인.”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왜 마시지 않으십니까.”

빈센트 역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마시는 척이라도 하는 자신과 달리 잔에는 손도 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단순히 술을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까 한 모금 마시던 태가 자연스러웠다.

“의무를 잊을까봐요.”

“의무?”

“적어도 결혼 첫날이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빈센트는 어렴풋하게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모르는 결심을 혼자서 하고 온 모양이다. 결혼 후에는 의무를 다하지 않겠다는 소리인지 묻고 싶었지만 쇼윈도 부부인 이상 그게 뭐가 중요한가. 보여지는 자리인 지금, 의무를 다해준다면 고마울 뿐이니 빈센트는 존중의 의미로 잔을 살짝 들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