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몽

2. 불명예 제대자 관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추정은 자신의 신분증부터 내밀었다. 자신이 이제부터 풀어놓을 중대한 이야기를 할 자격이 되는 사람 맞다고 입증하는 태도였다.

“공무원들도 다른 경찰들도 도저히 일정을 뺄 수 없어 부득이 저 혼자입니다.”

유비가 테이블에 차려놓은 복숭아 주스를 한 잔 집어 마시는 사람은 추정 한 명뿐이었다. 먼 길을 역시 자전거로 달려오느라 지친 나머지 중대한 용건보다 주스가 급한 모양이었다.

“외계인을 신격화하는 황건교 무리가 각지에서 결집해 관공서를 습격하고 자기들의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교주 장각이 직접 대자보를 통해 신도들을 선동했고, 연방 정부에도 내통자가 있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소식에 시장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유비와 함께 모인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군대조차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중 정원지라는 자가 5천 명을 거느리고 유주로 진격해오는 중입니다. 수력 발전소와 태양광 발전소를 노리는 겁니다.”

“유주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는데요?”

얼굴이 납빛으로 굳은 탁현시 시장이 물었다.

“일단 군경만으로는 머릿수부터 밀립니다. 수적으로 압도하지 못한 채 막으려고 하면 백병전이 될 텐데, 그러면 이긴다 해도 많은 사람이 죽겠죠. 지사님의 생각은 일단 최대한 많은 사람을 모아, 5천 명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쫓아버리자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잘 될까요?”

유비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총탄이 외계인 상대하느라 다 떨어졌다고 해도 총알 하나, 수류탄 하나 안 남은 건 아니잖아요? 어째서 군인들이 민간인 출신 반군 상대로 힘을 못 쓴다는 거죠?”

추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주의 주지사도 황건교의 일원이었습니다. 그자가 기주의 군대와 경찰을 장각에게 통째로 넘겨줘 버렸고, 항명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지금 황건군의 무장은 여느 주 군대 못지않습니다.”

유비뿐 아니라 모두에게 소리없는 경악이 번져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민간 종교단체의 가면을 교묘히 이용해 시민들을 다각적으로 선동하고 있습니다. 병주에서는 황건교에 포섭된 시민들이 배급하는 군량에 비소를 타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의용군을 모집한다고? 지사님은 그 정도로 탁현 시민들을 믿으시는 겁니까?”

시장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탁현은 외계인 침공 후에도 질서가 잘 유지되었고 황건교도 퍼지지 않았으니까요.”

추정이 주스를 다시 한 모금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물론 전방에는 직업 군인들이 배치될 겁니다. 의용병은 후방 지원에 국한될 거고요. 그냥 머릿수만 채워주면 됩니다.”

“그들에게 급료는 지급되는 겁니까?”

시장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다.

“후방 지원도 바쁘고 힘든 일입니다. 적에게 보급부대를 먼저 노릴 재치가 있다면 더욱 위험하고요. 저도 복무해봐서 압니다.”

“탁현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다 모집중입니다. 황건교 놈들이 유주를 침범하고 나면 그 뒤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시장은 쓴 입맛을 다시면서도 더 반론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모집해야 합니까?”

“빠를수록 좋지요. 이번 주 내로 해주십시오. 급료라면 식량으로 지불될 것이고, 의용군이 공적을 세우면 전기 공급량을 늘려주겠다고 지사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주지사가 날인한 공문이 시청과 광장 게시판에 나붙었다.

황건교의 만행, 유주가 위험해졌다는 사실을 다소 자극적으로 편집한 벽신문 형태의 자료와 의용군에 지원할 경우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자세히 적은 모집공고였다.

벽보 앞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놀라고 겁먹거나 수군거리는 모습을 유비는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휴우......”

그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순간, 이번에야말로 회심의 일격이 등짝에 내리꽂혔다.

“켁!”

고꾸라질 뻔하고 겨우 중심을 잡은 유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장비.”

“아침 댓바람부터 웬 한숨이야, 복 달아나게!”

장비는 평소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씩씩해보였다.

선거운동에 함께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외계인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고기를 내놓겠다고 했을 때도 장비는 이렇게 씩씩했다.

유비는 약간 멍해 보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비. 전에 어렸을 때는 군에 입대하는 것도 꿈이었다고 했지?”

“그랬지. 규율 같은 거 엄격하게 지키고 살 자신 없어서 포기했지만.”

장비가 유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내가 이제와서 전쟁 무섭다고 뒤로 뺄까봐?”

“아니.”

유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무서워? 지금도?”

“흠.....”

장비가 뒷목을 긁다가 내뱉었다.

“무섭다고 주사 안 맞고 밤에 화장실 안 가나? 무서워도 참고 해야 하니까 다 하는 거지.”

“응. 나도 무서워.”

유비가 작게 끄덕거렸다.

“그런데 탁현에서 의용병 모집하면 내가 이끌고 싶어. 여기 파출소장이나 소방서장은 남은 사람들 지켜야 하고, 시장은 의욕 없고, 동료 의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젊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해.”

유비는 시의원인 데다 발로 뛰는 타입이라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다. 벽보를 읽으러 모여든 사람들이 유비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 중 누구든 저기 저 젊은이가 유비 맞다고 알아보는 순간 질문 공세에 노출될 것이 뻔하므로 유비는 장비를 끌고 그 자리를 떴다.

“낮술이나 하자. 이런 얘기 술이라도 들어가야 하지.”

두 사람은 장비의 정육점처럼 이 시대에도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는 가게 중 하나에 들어갔다.

전등 대신 초가 가게 구석에 두셋 놓여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 외엔 가게 안에 비치는 햇빛이 조명의 전부였다.

맥주 두 피처와 팝콘 한 접시를 주문했다. 팝콘은 침공 전엔 기본 서비스 안주였지만 지금은 비싼 안주가 되었다.

결재할 때도 카드는 내밀지 않았다. 은행도 전산망 마비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기존 통화는 사실상 카드에 기록된 읽을 수 없는 숫자가 되어버렸다.

유주에선 급한 대로 화폐 대용 상품권을 풀고 배급제를 병행해 혼란을 예방했다. 기존의 지폐와 동전도 익숙한 대로 쓰는 사람도 아직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미봉책이었다. 조폐청과 연방 은행이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보릿자루를 짊어지고 술집에 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유주에 옥수수 농장이 있어서 먹을 수 있는 거지. 맥주도 그렇고.”

유비가 피처를 들이켰다.

“거기에 수력발전소도. 외계인들은 화석 연료와 원자력만 훔쳐갔지 물의 위치에너지까지 훔쳐가진 않았어.”

“그래. 덕분에 유주엔 농업용수와 전기가 공급되고, 농사도 그럭저럭 지을 수 있고, 장세평 아저씨도 나한테 팔 돼지를 키울 수 있고.”

장비도 맞은편에서 죽 들이켰다. 한 번에 피처 반이 줄었다.

“그걸 사이비 놈들이 다 망치게 놔둘 수야 있나.”

“엄마 설득할 일이 좀 아득하긴 해.”

유비가 웅얼거리자 장비는 피식 웃었다.

“무슨, 재작년 복숭아 풀 때 언니네 엄마가 도리어 앞장섰잖아. 뭘 새삼?”

“과수원 과일 좀 기부하는 거랑 딸 전쟁 내보내는 거랑 같아?”

“내기할까? 엄마 이번에도 설득할 필요도 없이 얼른 나가 싸우라고 등 떠미신다.”

맥주가 줄어드는 동안 유비도 장비도 의용군에 지원할 마음만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뚜렷하게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알코올보다는 감상에 더 취해 주거니받거니가 이어졌다.

“문제는 말이지, 너도 나도 군대는 쥐뿔도 모른다는 거야.”

유비가 마지막 하나 남은 팝콘에 손을 댈까 말까 망설이며 중얼거렸다.

“추 경위님 말대로 정말 후방지원만 하게 될지도 확실치가 않은데, 지휘체계는 어떻게 잡아야 할지 자칫 적과 싸우게 되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고. 의용군 지원하는 사람들 중에 군인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퇴역 재향 군인 대부분이 외계인 침략 때 다시 동원되었으니까요.”

“맞아. 바로 그게 문제......”

맞장구치다 말고 유비는 고개를 들어 방금 장비 대신 답한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거, 거인이다!’

세 살 어린 장비와 붙어다니면서 유비는 항상 자기가 작은 게 아니고 장비가 큰 거라고 강조하곤 했다.

실제로 유비도 172cm이니 작은 키가 아닌 게 맞았다. 그저 장비가 180이 넘는 데다 어깨도 떡 벌어지고 근육질이라 그 곁에 서면 누구라도 작고 가냘프게 보일 뿐이었다.

그 장비도 이 사람보단 작았다. 전에 TV에서 본 농구선수가 생각날 정도였다.

한여름인데도 긴 소매 바람막이를 걸쳐서 근육은 안 보이지만 빼빼 마른 인상은 아니었다. 어깨가 넓고 팔이 적당히 굵었다.

그런 장대한 기골에, 등 뒤로는 검고 긴 생머리가 나부꼈다. 유비는 지금 현실의 인물을 보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없어졌다.

“갑자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유비의 반응을 오해한 상대가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관우라고 하는데 하동 해량 땅에서 입대해 복무하다가 제대해서 유주에 이사와 살고 있었습니다.”

“군인이셨어요?”

유비가 반색했다.

“그럼 이번 의용군 모집에도 응하실 건가요?”

“불명예 제대자도 받아준다면요.”

관우는 대수롭지 않은 사실을 말하듯 어깨를 으쓱 했다. 장비가 그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총동원령에도 해당도 못 되고 하동 사람이 유주까지 와서 사는 건가요? 대체 뭔 짓을 해서?”

“항명이요.”

장비는 더욱 무시무시하게 관우를 노려보았으나 유비는 옆의 빈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더 끌어왔다.

“자세한 얘기 좀 해주세요. 그러니까 이번엔 지원할 거란 말이죠? 아, 난 유비라고 해요. 누상구에서 당선된 시의원이고요. 군대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을 찾고 있어요.”

관우는 장비의 부릅뜬 눈과 유비의 생글생글 웃는 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유비가 상품권을 한 장 더 꺼내자 손을 내젓고 자기 지갑에서 상품권을 꺼냈다.

“맥주 한 잔 마실 돈은 있습니다.”

관우는 종업원이 가져온 맥주 피처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군대도 군대 나름입니다. 제가 있던 하동의 군대는 빈말로도 기강이 선 곳이라고 할 수 없었죠. 상관이 군납업자에게 리베이트를 받는 걸 고발했다가 제가 항명죄를 쓰고 영창에 간 겁니다.”

“저런.”

유비의 표정을 보고 관우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만 기울였다.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 말만 가지고?”

“음.....어차피 지금 하동에 연락해 관우 씨의 경력을 조회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술술 할 정도면 스스로 떳떳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관우가 다시 유비를 빤히 쳐다보다가 장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 사기 당한 적 없어요?”

“없어요. 내 덕이죠.”

장비가 어깨를 펴고 팔짱을 꼈다.

“나는 떳떳치 못한 사람이 그걸 감추려고 도리어 당당한 척 떠벌리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는 걸 알거든요.”

“수고가 많으시군요.”

관우가 장비를 똑바로 마주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장비도 마주 미소지었다.

“두 사람.”

유비가 난처하게 웃으며 관우와 장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옛날 영화에서처럼 잠시 둘만 바깥바람 쐬러 다녀오는 건 아니겠지?”

“의용군도 군대인데 믿을 만한 사람 넣어야지.”

장비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관우도 따라 일어났다.

나란히 서자 역시 관우가 더 컸다. 그러나 장비는 기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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