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8)

012. 협박이라도 당하는 건가?

쥰은 볼을 부풀린 채 창밖을 내다봤다. 아이린은 그 옆에서 괜스레 꼼지락거리며 주의를 끌고 있었다.

"너 이름이 쥰이라며?"

"........"

"내 이름은 아이린이야. 아이린 오르테즈."

쥰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그녀의 통성명을 무시했지만 아이린은 끈질기게 계속 말을 걸었다. 겨우 할아버지를 찾아달라 부탁해놓고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화책 읽어줄까? 아님 케이크 먹을래?"

필요 없다는 듯이 쥰이 이불 속으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이대로 이레시아가 돌아올 때까지 숨어 있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아이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고집불통이네.

"너, 나랑 이야기 하기 싫어?"

숨겨진 머리가 이불 속에서 끄덕여졌다.

"왜?"

"........."

"이레님이 내 말 잘 듣고 있으랬잖아. 이레님 말 안 들을 거야?"

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이린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듣는 나쁜 아이라고 내가 이레님에게 말해도 좋아?"

이레시아가 그 말을 믿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린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갈등에 빠진 쥰이 잠시 작은 머리통을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게 그렇게 고민할 일인가?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이레님이 오실 때까지 같이 케이크를 먹고 책을 보고 있으면 되는 일인걸?"

아이린의 말이 맞았다. 그저 그러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결국 무언가 결심한 마냥 쥰은 어기적거리며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린은 생각보다 효과 좋은 협박을 알아낸 것이 기분 좋은지 입꼬리를 실룩였다.

"케이크는 뭐가 좋아? 초코? 딸기?"

"....... 쪼코."

쥰이 마지 못한 기색으로 우물쭈물 대답했다. 처음으로 돌아오는 반응에 아이린의 눈이 반짝였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주방 한쪽 진열대에 놓인 초코케이크를 떠올리고는 아이린이 쌩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이불 밖으로 나오게 하기까지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렸지만, 뭐든 좋았다. 또 다시 숨어버리기 전에 케이크를 가져와야 했다. 그리고 함께 가져올 동화책을 생각하던 아이린은 마침 복도에서 프리실라와 마주쳤다.

마침 잘 됐다!

"프리실라 언니!"

"아이린?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하고 있는 거니?"

손님의 방을 청소하고 나오던 프리실라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밤 10시가 훌쩍 넘긴 것이 잘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케이크! 언니, 초코케이크가 필요해! 그거랑 동화책도!"

그녀의 앞에서 아이린이 방방 뛰며 소리쳤다.

"동화책?"

프리실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의 동생을 내려다봤다.

"지금 시간이 몇 신 줄은 아니? 어린 아이는 잘 시간이야."

"지금은 안돼! 동화책 읽어주기로 했단 말이야!"

"동화책이라니? 누구에게?"

"오늘 새로 특실에 들어오신 마법사 언니한테 부탁했어!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주는 대신에 내가 저 방에 꼬맹이한테 동화책 읽어주기로!"

"뭐...?!"

아이린의 말에 프리실라가 사색이 돼서 소리쳤다. 특실 손님이라면...

프리실라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어 들고 있던 청소 도구를 떨어트렸다.

"아이린!!"

버럭 소리에 아이린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기쁜 마음에 벌렁거리던 기분이 순식간에 뒤집혀 내동댕이 쳐졌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 분은... 그 분께 뭘 부탁했다고?!"

커다란 두 눈엔 달콤한 초코케이크 대신에 창백해진 얼굴로 잔뜩 화가 난 프리실라가 담겼다.

어?

놀라 주춤거리는 아이린의 어깨가 붙잡혔다.

"뭘 부탁했냐고 물었잖아, 아이린!"

귀족. 그냥 귀족도 아닌 고위 귀족이었다. 그리고 프리실라와 아이린은 평범한 하층민. 원래라면 같은 곳에 머무는 것 조차 용납할 수 없는 신분 차이였다. 그런데 그런 분께 부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 하, 할아버... 지 찾아달라고..."

더듬거리는 말에 프리실라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속에서 새까만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 할아버지는 경비원들이 찾아줄 거라고 언니가 말했잖아."

"프리실라 언니는... 할아버지 걱정도 안돼?"

"............"

왜 그렇게 화를 내냐는 듯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린을 보고 프리실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치 심장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쓰디쓴 것을 억지로 삼킨 것 마냥 목구멍이 따가워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 아이린. 그래도 그 분께 그런 부탁을 하면 안돼."

이미 그때 그 골목길에서 도와준 것만으로도 빚을 진 것인데, 이 이상 빚을 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실종 사건에 아이린이 개입하는 건 더더욱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지?"

"?!"

끅끅거리는 울음 사이로 난데없이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프리실라와 아이린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방금 막 귀가한 모양인지, 이레시아는 답답한 너울 모자를 벗으며 다가왔다. 함께 나갔던 사내는 어디를 가고 혼자... 프리실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제 동생이 무례를..."

"무례?"

그러자 별안간 아이린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마법사 언니!"

잠시 잠깐 잊고 있던 호칭에, 너울 모자를 들고 있던 손이 작게 움찔거렸다.

"맞네. 무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 그 잔소리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동화, 책... 끅! 약속, 했잖아요... 동화책 이, 읽어주면 흐흡! 우리 할아버지 찾아 주기로요."

아이린이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소리 내서 울지 않는 것이, 그녀가 우는 소리를 싫어한다는 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 이레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해."

"마님!"

프리실라가 아까보다 더 사색이 돼서 소리쳤다. 이레시아가 어서 가라는 듯 눈짓하자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포르르 제 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프리실라는 황망한 얼굴로 입술을 달달 떨었다.

"... 마님, 제 동생은 너무 어려요. 귀족들에게 지켜야 될 기본 적인 예의도 아직 배우지 않았는걸요. 도련님의 놀이 친구로는 적합하지 않아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쥰의 부모는 내가 아니야."

지금은 잠시 이레시아의 성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저 임시로 붙여준 것 뿐이고. 애시당초 귀족가 태생의 아이도 아니니 진짜 도련님인 것도 아니였다.

"난 그저 후원자일 뿐이고, 그 아이가 제멋대로 날 쫓아다니고 있는 거지."

그런것 치고는 한 없이 팔불출 같이 굴기는 하지만.

귀족가의 예의 같은 거 몰라도 상관 없었다. 귀족가의 예의범절을 배워야 한다면 쥰이나 아이린 둘 다 수준이 비등비등할 따름이었다. 이레시아에게 필요한 건 쥰과 비슷한 또래인 아이린이 가진 친화성과 사회성이었다.

"하, 하지만..."

"조부가 실종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녀가 하얗게 질린 프리실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 왜 말하지 않았지?"

심증을 알아내려는 듯 붉은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들었다. 프리실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만 깨물며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두려움에 바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어깨에 눈길이 닿았다.

이레시아는 그런 프리실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협박이라도 당하는 건가?"

"... !!"

지척에서 당황한 얼굴의 프리실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레시아는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가까이 했던 몸을 일으켰다.

"아이린이라고 했던가? 그 꼬마가 내건 조건이 나쁘지 않아서 수락했을 뿐이야. 내가 자리를 비울 동안 놀이 친구가 필요했던 거니까."

"............"

"반대로 너와 네 동생은 조부를 찾아줄 이가 필요한 것 아니었나? 다른 때도 아니고 실종사건으로 이렇게 도시가 소란스러운 데, 두 달도 전에 사라진 노인의 행방 따위를 찾으러 누가 광산으로 들어가겠어."

그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자살 행위를 의뢰받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였다.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했다. 그게 플라티나에서 이단과 같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플라티나는 괴이라면 눈이 돌아가 사냥하는 집단인 것을.

"노동 없는 대가는 없어. 네 동생은 그저 내가 여기 머무는 잠시 잠깐 그걸 배울 뿐이지."

마치 자신이 괴이들에 대한 정보를 팔아 살아남는 것처럼 말이다.

"네 동생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건 약속하지."

이 정도면 상황 설명이 됐을까? 그녀가 여전히 얼어 붙어 있는 프리실라를 지나쳐갔다. 그러나 들릴 듯 말듯 한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다시 붙잡았다.

"........ 하지만 마님께서 굳이 저희 일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이 이상 마님께 빚을 질 수는 없어요."

붉은 눈이 피곤한 기색을 띄었다. 빚이라니, 뭔가 정말 제대로 착각 하고 있는 모양인데...

"할 일이 없어서도, 오지랖이 넓어서도 아니야."

본래라면 신경 조차 쓰지 않았겠지. 하지만 의뢰와 관련된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나는 처음부터 광산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조사하기 위해 온 거니까."

프리실라의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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