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추억의 단편선

[GL] 내 절교를 받아라 - 9화

봄쌀 by 봄쌀




봄에 잠깐 시작했던 꽃집 알바가 학교행사랑 맞물려 버렸다. 단기로 주말에만 하기로 했던 알바가 장기 알바가 되고 있었다. 예술대학 쪽 행사는 물론이고 입시설명회와 세미나가 터지면서 내가 일하는 꽃집은 엄청난 대목을 맞이하고 있었다. 작은 꽃집이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장사를 했던 터라 교직원이나 학생회 쪽에 단골을 많이 잡아두어서 꾸준히 바쁘긴 했다. 원래 행사가 많은 5월에만 잠깐 하기로 했던 아르바이트는 결국 계속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이번 대목까지만 도와달라는 주인아줌마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 나도 나이가 있어서 이번 여름 졸업식만 끝나면 가게 내어 놓을 거야." 




환갑을 훨씬 넘긴 주인아줌마의 절절한 말에 도저히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못 했다. 십여 년간 꾸려온 가게를 곧 그만둔다는 말에 차마 제가 지금 좀 바빠서, 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알바때문에 정수현이랑 같이 병원에 가주기로 했던 약속도 지킬 수가 없었다. 꽃집에 금방 알바가 구해질 거라면 또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점에 금방 알바가 구해지진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양심상 나는 이번 방학까지만 알바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름이었다. 정신없이 공부하고 정수현의 뒷바라지를 하며 알바를 하다 보니까 찾아온 여름. 거의 초여름으로 향하기 직전에 임신이라는 엄청난 소식을 가지고 쳐들어 온 정수현이 우리 집에 머문지도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지만 알바와 학교가 맞물리면서 사실 얼굴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침밥은 꼭꼭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정수현이 맨날천날 늦잠을 자는 통에 내가 보는 정수현의 모습은 맨날 그 지긋지긋한 '자'는 모습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방학을 맞아 열리는 학교의 외국어 센터 단기 토익강좌를 끊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면 정수현은 내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쳐 자고 있었고, 내가 아침을 차려놓고 학교에 갔다가 그대로 알바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열한 시. 정수현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잠들어 있었다. 맨날 잤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잠을 자기만 했다. 




"너 도대체 뭐하고 사는 거야?" 




하루는 정수현을 깨우며 소리쳤다. 도대체 얘는 잠귀신이 붙은 걸까. 게다가 아침의 잠옷 차림 그대로(심지어 머리모양도 그대로, 누워 자는 포즈도 그대로) 누워있는 모습에서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정수현아, 임신은 좋지만 너 제대로 살고 있긴 한 거야? 피곤해 죽겠는데 정수현은 내 피곤함을 두 배로 증가시키는 마법이라도 배운 건지 내가 아무리 깨워도 좀체 일어나질 못 했다. 




"나 피곤하단 마랴..." 




여섯 시간 집중강좌, 여덟 시간 알바를 뛰고 온 친구에게 정수현은 저렇게 말했다. 그래, 오지게 처자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구나. 울컥, 짜증이 날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임신을 하면 잠이 많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 함부로 정수현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힘들었다. 




그래... 태교, 태교를 해야지... 정수현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무슨 잘못이 있어. 아가야 아마 네 엄마는 네 몫까지 자나 봐.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정수현의 목에 끼워 넣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10개월...버틸 수 있을까? 물론 정수현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건 없지만, 그래도 좀 불안했다. 앞으로 더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질 텐데 나도 바빠질 게 뻔하고... 취업도 준비해야 하고, 알바도 끝내야 하고, 강의도 들어야 하고... 조금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냥 샤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수현의 곤히 잠든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 옷을 벗는데 멈칫, 테이블을 보니 아침에 차려놨던 밥이 그대로 있다. 그리고 보면 요즘 계속 아침밥이 그대로다. 




"야." 




역시나 한번 잠든 또라이는 깨어날 줄을 모른다. 




왜 밥을 안 먹은 거지. 원래 임신하면 식욕이 엄청 당기는 거 아냐? 맛이 없나... 




원래 정수현은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마음에 슬쩍 다시 정수현에게 발걸음을 돌리다가 이내 욕실로 향했다. 배가 아직 덜 고픈가 보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또라이 정수현이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 먹겠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면 머, 식욕이 당기는 시기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아마 내게 먹고 싶은 음식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으며 닦달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때 가서 사주면 될 것이었다. 물론 정수현에게 사주는 게 아니다. 정수현의 아기. 그 소중하고 천사 같을 아기에게 해주는 거지, 절대로, 절대로, 저렇게 잘 쳐자고 있는 정수현에게 사다 바치는 것이 아니다. 




옷을 갈아입으며 잠시 거울을 본다. 칙칙한 얼굴. 아 피곤하다. 어떻게 방학 때 더 힘이 드는 걸까. 퀭하게 다크서클이 진 눈가를 꾹꾹 누르다가 이내 머리를 묶었다. 선반에서 클렌징크림을 꺼내면서 생각했다. 누군가 화장을 1분 만에 말끔히 지워주는 굉장한 것을 발명한다면 대박 부자가 될 텐데... 




"정수현! 이거 다 썼어?" 




그런데, 바닥면을 말끔히 드러내고 텅 비어있는 클렌징크림. 아놔.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다. 정수현... 내가 사놓는 거 까진 안 바란다. 제발, 다 썼으면 다 썼다고 말이라도 미리 해주던지... 하는데 갑자기 느낌이 싸했다. 휙- 고개를 돌려 폼클렌징을 보니 딱 봐도 쪼그라든 튜브가, "전 더 이상 짤아봤자 암것도 안 나온다는."하는 포즈로 쓰레기통에 처박혀있다. 




아 정수현! 다 썼으면 사 오라고 문자라도 하던지! 




문을 열고 화장대로 가서 이것저것 뒤졌다. 분명 휴대용 클렌저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과거의 내가 부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었길 간절히 기원하며... 




그런데... 




나오는 건 죄다 샴푸, 린스, 아쿠아 크림, 비비크림 샘플밖에 없었다. 




".....아씨!" 




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정수현... 너 클렌징크림 다 썼으면 나한테 말..." 




그러나 끄떡도 안 하는 정수현 님은 입까지 벌리고 자고 있다. 




꾸우욱- 얄밉고 야속한 마음에 나는 정말 본능적으로 정수현의 볼을 잡고 쭈욱 늘리며 꼬집어버렸다. 이런 고통은 아기가 느끼지 않겠지? 쭈우욱- 늘어나는 하얀 볼.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며 내 손목을 탁 쳐내는 정수현이 부스스 눈을 뜬다. 




"아우으으...찹쌀떡...이 미쳤나..." 


"야! 클렌징크림이랑 폼클렌징이랑 다 쓰면 썼다고 말이라도 해주던지!" 


"알았어. 다 썼어." 




그러나 정수현이 휙- 옆으로 다시 돌아누우며 또 짖는다. 




툭.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 나는 침대 밑에 있는 내 베개를 집어 정수현의 등에 퍽 던졌다. "아우의..."하는 신음이 들리지만 깨지 않는 또라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미운 걸까. 더 이상 화를 내봤자 성격만 나빠질 거 같아서 그냥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했다. 





10개월, 



10개월만 지나 봐... 



너랑 절교야. 



진짜, 이 지긋지긋한 고리를 끊겠다고, 내가. 




"핸드배애액에..." 


"어?" 


"내가 사와써어- 내 핸드배액. 폼쿠뤤쥥..." 




낑낑거리는 말로 중얼거리며 공중에서 홱홱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던 정수현은 다시 쿨쿨 잤다. 뭐야, 사 왔으면 사 왔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으이구, 이 또라이야, 하고 말해주고 싶은 걸 참고 그나마 정수현이 최소한의 양심을 탑재한 것에 감사하며 정수현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웬일이래. 엄마가 된다니까 뒤늦게 철이라도 드는 걸까. 




과연 봉지 안에 든 폼클렌징이 있었다. 오늘따라 폼클렌징이라는 존재가 왜 이렇게 반가운가, 싶어서 스윽 봉지를 드는데, 그 밑으로 ㅇㅇ약국, 이라고 적힌 하얀 봉지가 하나 더 있었다. 




....어? 




약국? 




슬쩍 정수현을 바라보았다. 




뭐야... 어디 아팠던 거야? 




"야, 너 어디 아파?"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으우으...몰라...나 잠 좀 자자, 찹쌀떡..."하며 내가 끼워주었던 베개 밑으로 손을 넣던 정수현은 그대로 베개를 반으로 접어 제 귀를 막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너 이거 처방전 받고 산거 맞아?" 




아니 임산부가 아무 약이나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괜히 걱정이 되어서 하얀 약국 봉지를 꺼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침대 쪽에서 




퍽! 




"아, 안돼!!!" 




갑자기 소리를 꺄악,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킨 정수현이 내게 베개를 던졌다. 






내 절교를 받아라 9화 


9. 내 절교를 받아라 上





예상치도 못한 공격에 눈을 찌푸리고 발 밑에 떨어진 베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잠을 자겠다고 찡찡거리며 짜증을 냈던 정수현의 동그란 눈을 바라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잠을 자지 않는 정수현인가 싶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수현은 지난 6년 동안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이 빨간 건 둘째치고 눈이 커다래져서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정수현. 




방금 전까지 잠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한 얼굴이었다. 다만 표정은 꼭 어딘가에 몹시 놀란 사람처럼 당황에 물들어 있었지만. 




".... 너... 왜 그래...?" 




툭, 




"꺅!" 


"어?" 




베개가 날아와서 반사적으로 웅크렸던 몸을 펴며 정수현에게 다가서는데 내가 쥐고 있던 정수현의 핸드백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동시에 정수현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고, 내 발끝에 살짝 닿는 푹신푹신한 자극. 




약국 봉지가 떨어지면서 그 속의 내용물이 보였다. 




"....." 




그리고... 




모든 것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심지어 정수현이 내게 달려오려다가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장면도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보였다. 




......이게 



... 뭐야. 





발끝에 톡, 닿으며 떨어진 패드. 




내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자 정수현은 내게 달려오다가 이내 몸을 멈추고는 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내 발끝에 있는 그 물건을 쳐다보았다. 




"......" 


"......" 


"이거..." 


"찹쌀떡. 내 말을 좀 들어봐." 


"......" 


"차, 찹쌀떡!" 




슬금슬금 정수현이 마른침을 꼴깍거리며 다가왔다. 그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정수현은 내 눈치를 보면서 내 곁으로 오더니, 이내 슬쩍 내 팔을을 두 손을 잡고 쓸어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을 그 두 손으로 꽈악 움켜쥐고 나를 쳐다보았다. 




"...... 너....이게 뭐야..." 


"찹쌀떡, 들어봐.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정수현!" 


"꺅!" 





밤 열두 시, 내 자취방, 그리고 정수현. 



이 외에 있었던 것은 분노와 배신감과, 




그리고- 




평소에 정수현이 쓰던, 






생리대. 










임산부에겐 필요없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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