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몽

4. '쇠파이프'

출정식은 시청 광장에서 치러졌다.

정식 군대의 제식을 본떠 탁현 대대로 이름 짓고 유비가 대대장을 맡았다. 거기서 250명씩 반으로 나누어 관우 중대와 장비 중대로 삼고, 그 아래로 각각 50명씩 5개 소대로 구성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제식 훈련도 겨우 했기 때문에 분대까지 만들기는 무리였다. 소대장들이 자기 소대원들을 다 기억하고 있기만 해도 용한 수준이었다.

외계인 침략 직전 열릴 예정이었던 체육대회의 유니폼을 각 소대에 나눠줄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요행이었다. 적어도 군복의 기능 중 활동성과 피아식별 기능은 건진 셈이었다.

그 결과 출정식이 시장기 체육대회 개회식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모인 사람들은 모두 진지했다.

“대대장 유비입니다.”

유비가 확성기를 쥐고 말했다. 마이크가 연결되지 않은 그냥 플라스틱 깔때기 확성기였다.

“외계인이 침략해와서 일어난 일들을 지금 다 늘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 이미 가족을 잃고 목숨을 잃은 분들도 계시고, 재산이나 직장을 잃은 분들도 계시죠. 무엇보다도, ‘이제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대열 맨 뒤에 선 간옹이 두 팔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잘 들린다는 걸 확인하고 유비가 현재의 목소리 크기를 유지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자원을 이용해 시간을 벌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시의원으로서 제 의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황건교가 거기에 훼방을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부드럽던 유비의 목소리에 열기가 깃들었다.

“유주는 친환경 발전시설이 잘 되어있고 농업 인구도 많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갖고 자구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황건교가 그 터전을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건 유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일어나 막지 않으면,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가 앞장섭시다!”

평범하고 무난한 내용이었다. 과장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의 목소리엔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기운이 고조되었다.

“우리는 외계인의 침략 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유비가 소리높여 부르짖었다.

“외계인이 신이고 침략은 하늘의 심판이라는 헛소리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이!!”

깃대를 잡은 장비가 소리지르며 소대 기를 높이 들었다.

“예에이이!!!!”

소대장들이 복창하자 대원들도 분위기를 탔다. 광장이 들썩였다.

함성 소리에 유비 자신의 마음도 떨렸다. 선거유세 때도 느껴보지 못한 흥분이 가슴을 채웠다.

정말로 이 오백 명을 이끌고 가서 황건교를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비 대대는 다음날 탁현시를 떠나 추정의 안내를 따라갔다.

더운 날의 행군이라 다들 양산과 모자를 쓰게 했다. 약수터에서 채운 물병과 아이스팩도 하나씩 지급했다.

“아이스팩은 못 얼렸으니 효과 없지 않습니까?”

“오늘을 위해 특별히 시청 냉장고에 얼렸습니다. 게다가 얼음이 다 녹은 뒤에도 재질 덕인지 조금은 시원하니까요.”

추정의 질문에 유비가 자신있게 답했다.

“물병도 물론 재사용하기 전에 열탕 소독했고요. 이전처럼 새 생수병을 사서 단체로 돌릴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요.”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 민간인을 이렇게 징집할 일도 없었겠지요.”

“예.”

대답하며 유비가 고개를 숙였다. 암울해져버린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간옹이 나섰다.

“도착하면 우린 어떤 일을 맡게 됩니까?”

“지사님도 민간인을 전방에 내몰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십니다.”

추정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었다.

“여러분은 보급을 비롯한 후방 지원에 동원될 겁니다. 아마 다른 지역에서 모인 지원병과 소대 단위로 섞여서 취사, 배급, 군용품 운반 등을 하게 되겠지요.”

“다른 지역 지원병과 섞는다고요?”

유비의 질문에 추정의 미소가 기묘해졌다.

“유주는 그래도 황건교가 퍼지지 않은 편이고 치안도 꽤 유지되는 중이지만 주민들의 사보타주가 전혀 없을 거라고 손 놓아버리는 건 믿음이 아니라 방심이지요. 정규군은 감독자 몇 명만 빼고 전부 전투에 나설 예정이라 지원병 사이의 상호 감시가 꼭 필요합니다.”

장비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불평하지는 못했다. 유비가 얼른 말을 돌렸다.

“전투는 어떤 식으로 벌어질까요? 듣자니 군대의 총이나 전차도 모조리 쓸모없어졌다던데요. 외계인과 싸우느라 다 써버렸거나, 남은 것도 기름이 없어 움직이지를 않는다고요.”

“음......”

추정이 곤란한 듯 뜸을 들였다.

“원래라면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어차피 주 경계까지 가면 알게 되겠지요. 중화기가 고철 신세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유주의 군부대에 저장되어 있던 연료도 전부 털렸으니까요. 대신, 이놈의 외계인들이 워낙 신속하고 압도적으로 연료만 쓸어가는 바람에 총알과 탄약은 비교적 많이 남았답니다. 일반적인 소총과 기관총은 쓸 수 있는 거지요. 이런 경우에 대비해 관리도 엄중하게 해왔다니 믿어도 될 겁니다.”

그리고 툭 내뱉듯 덧붙였다.

“황건교 역시 정규군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했다 하니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만.”

“예.”

유비는 역시 후방 배치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혼자서야 용감히 싸우고 싶으면 그러면 되지만, 인솔하는 오백 명은 자원한 병사들이기 전에 탁현 시의 시민들이었다. 침략 후 유비가 그토록 지키려고 동분서주해온.

주 경계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녹지와 야산, 땅값이 싸서 방치된 황무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규군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비롯한 주요 거점에 자리잡았다. 인근 주민들은 이미 시내로 피신시켰다.

도착해보니 추정이 말한 취사나 보급품 운반 등은 이미 다른 지역 지원군들이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5천 명의 황건교 군이 접근해온다는 첩보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유비 대대는 일단 정규군 주둔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들을 정찰하게 되었다. 늦게 도착한 대신 인원수가 많은 덕에 맡은 역할이었다.

“소대 단위로 이동하고, 민간인을 발견하면 신원 확인을 거쳐 후방으로 이송합니다. 무기를 소지했거나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무기를 압수하고 수갑을 채우되, 일단 제압했으면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폭력을 더 써서는 안 됩니다.”

유비가 각 소대에 수갑과 함께 신호탄을 나누어주었다. 충전된 배터리가 있는 무전기는 정규군 쓰기에도 모자랐다.

“혹시 황건교 놈들이 목격되면 이것으로 신호하고요. 교전할 생각보다는 적의 규모만 파악해서 되돌아와 알려줄 생각을 하세요.”

이들의 무장은 삼단봉과 경찰용 곤봉으로 결정되었다. 그 이상의 무기는 훈련받지 않은 사람에겐 도리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관우 언니는 원래 군인이었는데 그래도 권총 정도는 받을 수 없습니까?”

장비의 질문에 추정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혁대를 가리켰다. 빈 권총집이 실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난 이거면 됐습니다.”

관우가 손을 내저어 보이고 긴 봉을 들어올렸다. 전통무예 도장에서 가르치는 봉술용 합성섬유 봉이었다.

“흠, 몇 단인가요?”

“9단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관우는 평소대로 과묵하고 차분해서 일견 겸손해 보였지만 내심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서 봉을 들어 재빠르게 휘둘러 보였다. 유비와 장비, 추정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스치지 않았다.

“음......”

장비는 킥복싱용 파워리스트를 낀 자신의 주먹과 등산화 신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에 유비가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은 순찰부터 돌고, 실력은 다음에 겨뤄 봐.”

“맨날 그렇게 말하면서 말리잖아. 그 다음이라는 거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장비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도 ‘전투’를 앞두고 긴장해 있었다.

“그럼 각자 위치로.”

유비가 자기 소대로 향했다. 사령탑 노릇을 하기엔 전술 지식도 무전기도 부족하니 대대장이랍시고 후방에 앉아있어 봐야 공밥 먹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유비도 소대 하나를 맡아 같이 나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며 소대원들을 인솔했다. 유비 소대가 맡은 곳은 톨게이트 왼쪽의 농지였다.

주위가 탁 트여있어서, 한참을 갔는데도 이들이 출발한 톨게이트와 거기 주둔한 정규군 부대가 보였다. 황건군이 진군해오면 그들 역시 잘 보일 게 분명했다.

유비는 지도에서 눈을 떼고 부대에 있는 전차를 바라보았다.

아까 추정에게 들은 말대로라면 저 전차는 선 자리에서 사격하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허장성세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자기 소대의 유니폼은 소위 국방색이라고 불리는 칙칙한 암록색이었다. 멀리서 색깔만 놓고 보면 군인들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었다.

‘황건군이 우리 역시 정규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러면 이쪽의 병력은 더욱 커 보일 것이고, 황건군은 이쪽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나눌 것이다. 유비 소대가 정규군 진지 근처를 정찰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었다.

유비는 자신이 쥔 활대를 내려다보았다. 취미로 하던 궁도용 활로, 관우와는 달리 대학 들어가서야 찔끔찔끔 하던 것이었다. 가만히 있는 과녁도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을 맞출 자신은 아예 없었다.

그래도 촉까지 날카롭게 갈아서 갖고 나왔다. 없는 것보다는 낫기를 바라며.

추정이 말한 수상한 조짐은 얼른 보이지 않았다. 유비 소대는 한동안 일없이 걷기만 했다.

‘하기야 황건군의 첩자도 이런 개활지는 피하겠지.’

그렇게 약간 마음이 풀어진 순간 도로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들 침착합시다!”

유비가 소대원들에게 외쳤다.

“내가 신호하면 다들 엎드려요! 돌격하면 따라오고!”

적이 혹시나 중무장을 하고 오면 학살당하지 않도록 엎드리고, 해볼 만하면 돌격하고......까지 생각했을 때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전차가 오고 있었다.

겉에 누런 칠이 된 것만 빼면 유주의 전차와 같은 기종으로 보였다. 저쪽도 한 대뿐인 전차가, 어디서 기름이 났는지 잘만 굴러오고 있었다.

유비의 기가 질린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전차 위에 누런 띠 두른 험상궂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의 손에 장대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겉보기엔 그냥 쇠파이프 비슷하지만 유비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엎드려!”

그렇게 소리치면서 유비의 손은 활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전차 위의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지금 저 자를 죽여야 했다.

유비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기 직전 그자가 쇠파이프로 톨게이트의 전차를 겨누었다.

만화 같은 굉음도, 눈부신 레이저빔도 없었다. 그저 누런 빛이 약간 반짝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유주군의 전차에서 연기가 솟았다. 이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뒤흔들리더니 뒤이어 폭발했다.

그리고 유비의 화살은 쇠파이프 든 남자를 맞추지 못하고 발 앞에 떨어졌다.

‘실수했다.’

명백한 실수였다. 외계인의 병기를 들고 나타난 놈을 어설프게 도발해서, 그놈이 저 무기로 탁현의 멋모르는 민간인들을 공격할 이유만 만들어 버렸다.

“계속 엎드려 있어!”

이 실수를 만회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비는 소대를 뒤에 남겨둔 채 황건군 전차를 향해 혼자 돌격했다. 적어도 혼자 죽고 끝내야 했다.

그 황건군 놈은 유비를 무시하고 톨게이트의 정규군을 향해 계속해서 그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군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소총으로 사격하는 이들도 있었고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주군의 공격은 황건군 전차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총탄이 거기까지 날지 못해서가 아니라, 역시 외계인이 쓰던 에너지 방패로 막히고 있었다.

공포감에 물들면서도 유비의 다리는 풀리지 않았다. 대신 다시 화살을 집어 활을 당겼다. 이번엔 전차 위에서 잘난 체 하는 놈이 아닌 그 옆에 선 놈들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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