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몽

3. 자매결연

“잠깐, 잠깐.”

유비도 따라 일어났다.

“세상엔 힘 세고 싸움 잘해도 악당인 사람 많아. 관우 씨가 너보다 세면 좋은 사람인 거야?”

“그건 아니지만, 이 키로 얼마나 잘 싸우는지 궁금하지 않아? 난 궁금하거든.”

“나도 궁금해. 그러니까 더 안 돼.”

유비가 아직도 접시 위에 남아있던 팝콘 한 알을 집어 장비의 입 안에 밀어넣었다.

“싸우다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황건교 놈들과 싸울 힘도 부족해서 이러는 거잖아.”

장비는 일단 팝콘을 씹었다. 관우는 그 모양을 보고 있다가 어깨에서 힘을 빼고 말을 건넸다.

“정 내가 수상하면 보급품이나 돈에 손 못 대게 하고 최전방에 내보내 버리면 되겠지. 댁들을 해쳐서 내가 무슨 득이 있겠어?”

“그럼, 없지.”

유비가 말 잘했다는 듯 맞장구쳤다.

“날 죽여봐야 유주는 고사하고 이 탁현도 점령 못할걸? 황건교의 끄나풀이라면 여기 있는 건 너무 수지가 안 맞아.”

관우는 유비의 신용등급을 걱정하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유비는 눈치 못 챈 듯 거의 다 마신 맥주 피처를 들어올렸다.

“그럼 이걸로 의용군 1호 모집 성공! 무려 퇴역 군인입니다!”

장비도 똑같이 피처를 들었다. 관우는 자기도 해도 되는 건가, 아니 해야 되는 건가 눈치를 보며 들었다. 유비가 거기에 자기 피처를 부딪쳤다.

“그럼 자세한 얘기는 우리 집에서 계속 하자. 사람들도 더 모으고.”

시장의 예상을 깨고 의용군은 단번에 5백 명이 모였다.

그리고 유비와 장비는 시청 도서관에서 군사 관련 서적을 찾아다가 관우에게 속성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지금 완벽하게 다 배우겠다는 생각까진 할 필요 없어.”

개론 위주로 간략하게 가르치면서 관우가 강조했다.

“단 며칠 만에 민간인이 완벽한 군 지휘관이 되는 건 처음부터 무리야. 적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5백 명을 안전하게 데리고 다니며 통솔하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해.”

‘그것도 적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아득한 목표인데.’

유비는 기가 질리지 않은 척 책에 고개를 박았다.

그래도 관우가 정말 잡아야 할 인재라는 게 보면 볼수록 느껴졌다.

이렇게 가르칠 때 하는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군사학 서적 고르는 안목도 있어보이고, 두꺼운 전공 서적을 몇 권이나 한 손으로 들고 다니면서 무거운 기색도 없었다.

장비도 지금은 공연한 시비를 그만두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팔씨름에서 진 뒤부터 이러는 것이 유비에겐 조금 신경쓰였지만, 장비는 원래 상대가 세다고 해서 쉽게 기가 죽거나 비굴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관우가 장비를 얕잡아보는 기색도 없었다.

“이제 제식 훈련 요령은 배울 만큼 배운 것 같으니까.”

셋이 둘러앉은 식탁 테이블에서 관우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모인 사람들 상대로 유비가 훈련 교관을 맡는 게 좋겠어. 어차피 유비가 통솔할 사람들이니, 훈련 때부터 네 목소리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게 하는 게 좋아.”

“내가 해야 한단 말이지.”

유비가 어깨를 움츠렸다가 억지로 폈다. 통솔하고 싶다고 먼저 말한 사람이 유비 자신이었다.

“그래도 너희 둘도 같이 해. 5백 명을 나 혼자 통솔하진 않을 거잖아. 부대장도 있어야지. 특히 나나 장비가 만에 하나 실수하면 네가 나서 줘야지.”

“물론.”

관우가 끄덕였다. 장비도 쉽게 수긍했다.

“의원님.”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간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비가 현관으로 달려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쓴 젊은 남성이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 유비의 보좌관 간옹이었다.

“장세평 사장님과 소쌍 사장님이 기부금을 내셨습니다. 출전 비용이 덕분에 해결됐어요.”

“아.”

유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세평 아저씨라면 내줄 줄 알았어.”

장비가 씩 웃고는 관우를 돌아보았다.

“목장주하고 가축 도매상 하는 사람들이야. 전부터 신세 많이 졌어.”

“그랬군.”

관우는 놀란 기색이었다.

“탁현엔 정말 너희 편인 사람 많구나.”

“명색 스물다섯에 처음 나간 선거에서 바로 당선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어?”

장비가 새삼 으쓱거렸다.

“제 용건 아직 안 끝났어요.”

간옹이 안경을 밀어올렸다.

“어머님께서 부르십니다. 세 사람 다.”

그 말에 유비가 찔끔 했다.

“셋 다?”

“예. 같이 오늘 저녁 먹자고 하시면서, 뭔가 단단히 작정하신 것 같던데요.”

이미 4시가 넘었으니 지금 가야 했다. 유비는 긴장한 얼굴로 관우와 장비를 돌아보았다.

“엄, 전쟁 나가겠다고 했을 때 분명 잘 다녀오라고 허락해주셨으니 이제와서 맘 바꾸신 건 아니겠지?”

“설마.”

장비는 평소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뻘쭘하게 선 관우를 돌아보며 하하 웃었다.

“걱정 마. 전에 관우 이야기 했는데 좋아하셨거든. 이참에 만나보시려는 거겠지.”

“그래.”

관우는 여전히 어색해진 태도로 새삼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유비와 장비와 있을 때는 그도 어느새 꽤 풀어져 있어서, 초라하거나 이상한 차림까지는 아니어도 남의 어머니를 갑자기 만나기에 적당한 차림도 아니었다.

“괜찮을 거야.”

장비가 관우의 셔츠 주름을 펴주고 세 개까지 풀어져 있던 단추를 하나 남기고 다 잠갔다.

“유비네 엄마 좋은 분이야. 격식 너무 안 따지고. 이 계절에 에어컨도 못 트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예의바른 차림이라고.”

유비도 입고 있던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 차림 그대로 자전거 헬멧과 보호대를 챙겼다. 장비도 비슷한 차림에 머리만 고쳐 묶는 걸 보고 관우도 조금 긴장을 풀었다.

“어서 와라.”

유비의 어머니는 스리피스 정장 차림으로 딸과 친구들을 맞이했다. 고풍스런 귀걸이와 목걸이, 커프스까지 촛불 빛에 반짝였다.

집안은 갓 청소한 듯 깔끔하고 향도 좋았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엄마?”

유비마저도 현관에서 도로 나가고 싶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뒤에서 관우는 아예 숨어버리고 싶은 표정이 되었지만 그의 덩치로는 무리였다.

“간옹 씨가 중요한 일로 부른다는 말을 안 해줬니?”

어머니는 세 명의 몰골을 한 차례 훑어보고 방을 가리켰다. 유비는 한 손에 관우 한 손에 장비를 잡고 자기 방 안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사기는 내가 당한 거 같은데?”

관우가 노려보자 유비는 옷장부터 열었다. 꼭 그 안으로 숨으려는 것처럼.

“평소엔 안 이래. 진짜야.”

단추 달린 블라우스와 치마를 꺼내며 유비가 변명했다.

“기장이 안 맞아서 핏은 안 살겠지만 이거라도 입어. 장비는 전에 벗어두고 간 거 있어.”

그래봤자 면바지에 티셔츠였다. 그래도 긴바지인 점을 높이 사서 장비는 그 바지를 입고 셔츠는 유비 것을 빌린 다음 역시 빌린 정장 재킷을 그 위에 걸쳤다.

관우는 유비의 치마를 입었으나 블라우스는 역시 너무 작았다. 할 수 없이 윗도리는 입고 온 것을 그냥 입고 그 위에 역시 빌린 재킷을 입었다. 단추를 안 잠그니 품이 작은 티가 덜 났다.

“엄마 생신도, 아빠 기일도, 내 생일도 아냐.”

한 숨 돌리고 유비가 중얼거렸다.

“즉 내가 뭔가 중요한 날을 잊었다는 뜻은 아니야. 장비 생일도 아니고. 아, 관우 네 생일은 언제야?”

“오늘은 아니야.”

거울을 노려보며 재킷을 잡아당기던 관우가 유비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게다가 그걸 너네 어머니는 어떻게 아시겠어?”

“아, 모르시겠지.”

오래된 화장대 서랍을 열다 말고 유비가 관우에게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미안해. 그런데 평소엔 진짜 안 이러시거든. 내가 의용군 이끌고 출전한다고 했을 때도 ‘응, 그러니?’ 하고서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갔다고.”

“그게 며칠 전 일인데?”

“그저께 저녁.”

선거 포스터용 사진 찍을 때 꼈던 진주 귀걸이를 끼우며 유비가 대답했다. 그리고 관우에게 녹색 캐츠아이 귀걸이를 내밀었다. 관우는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나 귀 안 뚫었어. 그보다 그저께 저녁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술이라도 한 잔 사 드렸어? 밥은 같이 먹었고?”

유비가 조용해졌다.

“음, 난 그래도 오늘 아침에 돼지고기 등심 한 세트 보내드렸는데.”

장비가 변명거리를 찾아내었다.

“그걸 언니가 시켜서 보냈다고 할까?”

“됐어. 이미 늦었어.”

식탁엔 오늘을 위해 충전해둔 인덕션과 불판, 그리고 돼지고기 등심과 복숭아가 차려져 있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그 앞에 말썽부리고 혼나러 온 아이들처럼 얌전히 앉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시대가 이러니 전쟁에 나가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한다만, 어머니와 저녁식사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하고 가야지.”

식탁에 켜져 있는 촛불마저도 전등 대신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낭만을 재현한 연출처럼 보였다. 전깃불이 가정집의 밤을 정복한 후로도 몇 세기 동안이나 생일 케이크를 장식하는 것은 작고 깜박이는 촛불이었듯이.

“너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저녁식사이니 형광등까지 켤까도 했다만, 네가 무엇을 지키러 가는지 생각하니 차마 전기를 낭비할 수가 없더구나.”

“예.”

유비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수력발전소가 황건교 같은 놈들 손에 넘어가 버리면 네가 내 눈앞에 있은들 무슨 소용이겠니? 아니, 네가 살아서 내 앞에 몇 년이나 있을 수 있겠니?”

불판에서 연기가 솟자 어머니가 고기를 얹어놓았다.

“그러니 오늘 배불리 먹고 나가서 꼭 이겨라. 친구들하고 너 따라 자원한 사람들 잘 챙기고.”

“예.”

쫄아 있는 유비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길이 관우와 장비에게 옮아갔다.

“이쪽은 관우라고 이번에 지원한 의용병인데, 퇴역 군인이라 배울 게 많아요.”

유비가 오는 동안 속으로 연습해봤던 대로 소개했다.

“좋은 사람이고, 아까는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해서 집에서 같이 공부하던 차림 그대로 온 거예요. 예의도 상식도 다 있어요.”

“그렇겠지. 그게 없는 건 너니까.”

말로 딸을 죽여놓고 어머니가 관우를 바라보았다.

“저런 아이라 고생이 많겠어요. 어쩌다 친해진 거예요?”

“의용군 모집에 응하려다가 술집에서 만났습니다.”

관우가 상관 앞에서처럼 몸을 쭉 펴고 빳빳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 다 재미있는 친구들이더군요.”

“우리 유비가 좀 그런 면이 있죠. 엄마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정말 누구나 얘를 쉽게 좋아해요.”

어머니가 미소지었다.

“대학 때도 공부는 안 하고 환경운동이니 시민단체니 해서 처음엔 걱정했는데, 떡 하니 의원 배지를 달고 오고.”

부드럽게 말하면서 손으로는 집게를 들어 고기를 뒤집기 시작하자 장비가 얼른 손을 뻗었다.

“제가 할게요.”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

가볍게 거절하고 어머니가 관우의 접시에 다 익은 고기를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큰 걱정은 안 해요. 유비라면 뭘 하든 크게 해낼 애라고 믿으니까. 그러니 관우 씨도 얘가 가끔 별나게 굴더라도 믿고 같이 일해줘요. 분명 모든 일이 잘 될 테니까.”

“예.”

관우가 고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입을 여는 순간엔 내심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만난 지 이제 며칠 되지도 않은 어벙한 초보 시의원을 두고 대뜸 저런 말에 진심으로 동의해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말을 입 밖에 완전히 내고 나니 꽤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은 기분이 되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아주 생초보 의원은 아니었다. 유비는 외계인 침략 직전에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니 짧은 경력이 다 침략 후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탁현 누상구는 유주 내에서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곳 중 하나였다.

‘혹시 나 정말로 대단한 사람을 만난 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장비가 부지런히 고기를 집어오며 물었다.

“관우도 아예 언니랑 의자매 맺고 언니동생 하면 어때? 나처럼.”

“어, 언니?”

“응. 그렇게.”

놀라서 되물은 말에 장비가 방긋 웃었다.

“그럼 이제 동생이 둘이네.”

유비도 장비처럼 웃었다.

말려들었다. 그런데도 왠지 싫지가 않았다.

유비의 어머니 역시 기대하는 눈빛으로 관우를 보고 있었다.

“음.....”

역시 이런 분위기는 어색했다. 갓 임관된 소위 주제에 사단장에게 개긴 후로 자신을 고르곤 보듯 피하던 동료 군인들이 생각났다.

그들 상당수는 처음에만 해도 기골이 장대한 관우에게 동경과 선망의 눈빛을 보낸 동기들이었다. 사단장의 리베이트 때문에 불량품을 지급받은 피해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엔 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교활한 사람은 아냐. 비겁한 사람도 아니고.’

유비와 장비가 그 사단장이나 동료들 같은 사람들이었다면 외계인의 침략 같은 대위기 앞에서 누상구는 참혹하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관우는 술병을 들어 어머니의 잔에 따라드리고 유비의 잔에도 따랐다.

“그럼, 유비 언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에이, 언니한테 그렇게 딱딱한 게 어디 있어.”

유비가 잔을 들고 보챘다.

“이미 말 놓고 있었잖아. 다시 해, 다시.”

“그럼.....유비 언니, 앞으로 잘 부탁해.”

“여전히 딱딱하지만 이것으로 시작이니 넘어가고.”

유비가 관우와 잔을 부딪쳤다. 어머니와 장비도 같이 부딪쳤다.

“그럼 새로운 가족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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