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 바깥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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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를 찾아온 짐승

절간 스님 by 넵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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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신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미 존재해 있었다. 그 자체로 온전했던 것이다. 그것은 벌써 완연한 성체였고 세상의 지식은 차곡차곡 머리에 들어 차 있었다. 이를 신기하다고 여기기에는 그가 속한 이들에게 있어서 모름지기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이 사실을 넘겼다.

그것을 ‘태어났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그렇게 태어났다.

+ + +

조금 오래된 모양새이기는 했어도 흔히 미국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2층 가정집이었다. 시내보다는 외곽지역에 위치한지라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고 집주인이 관리를 열심히 한 것인지 잡초나 웃자란 나뭇가지도 보이지 않는다. 왁스 칠도 꼼꼼히 하여 반질거리는 나무 바닥에는 사람 하나가 누워있다. 어깨를 조금 못 넘기는 갈색의 단발, 반쯤 감길 듯한 눈꺼풀 사이에는 얼핏 회색 같기도 한 녹안이 보인다. 겨우겨우 숨을 뱉는지 호흡이 새되다 못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제법 곱상한 이목구비는 고통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으나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탓에 끽해야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인다. 바닥에는 점차 그 소년을 중심으로 붉은 웅덩이가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붙잡기라도 하려는 모양새로 부들거리는 손을 뻗지만 이내 정신을 잃은 것인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여기서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런 소년의 머리맡에서는 쭈그려 앉아 턱까지 괴고서는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짧게 잘라 이마가 훤히 보이는 검은 머리에 햇볕에 그을린 듯 갈색빛이 도는 피부, 얼핏 소년과 닮아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는 꺼져가는 촛불을 바라보는 감상으로 숨소리가 가늘어져 가는 이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10년 넘는 세월이면 제 주제에 제법 잘 키워내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는 분명 학교에 있었을 텐데 왜 오늘은 집에 있었을까. 뒤를 밟고 몰래 숨어든 사냥꾼이라 생각해서 한 번에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휘두른 것이었던 터라 최대한 피한다고 피했음에도 이렇게 배에 크게 상처를 내고 말았다. 살리려고 든다면 분명 살릴 수 있겠으나 아들이 깨어난 뒤 분명 그에게 많은 것을 물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낌새를 본다면 곧 사냥꾼들도 들이닥칠 테다. 그는 한참을 더 바닥에 쓰러진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붉은 웅덩이가 제 신발에 닿을 만큼이나 퍼지고 있다. 이대로 둔다면 사냥꾼들이 분명히 이 아이를 발견하겠지? 그리고 아직 숨은 쉬고 있으니 살리려고 노력도 할 게 분명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묻은 피를 옷에 스윽 슥 닦아냈다. 귀찮은 일은 싫었으니 이걸로 사냥꾼들 발목도 잡을 겸 아들도 맡길 겸. 겸사겸사 괜찮은 생각이었다. 살아난다면 사냥꾼들이 그에 대해 아들에게 설명도 해 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고 이대로 아들이 죽는다면….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인간은 쉽게 죽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리 특별한 사건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그의 발걸음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바삐 움직였다. 어쩌면 그는 그의 아들이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 + +

뉴욕의 어느 골목에서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샤갈 레드럼은 늑대였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한때는 무리에서 대장 노릇도 했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늑대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지금은 그저 이 시대의 주인이 된 인간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조용히 살아가기를 택했다. 그렇게 성실한 청년을 가장하여 살고 있었던 그였다.

오늘도 그는 이른 새벽부터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아직 초봄의 계절은 쌀쌀하여 코트를 여미고 주문받은 공예품을 스케치한 시안들을 곱게 파일 바인더에 담아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도시에서는 움직이는 이가 그밖에 없는 듯 고요했다. 큰길에 높게 솟은 건물이라던가, 도로변에 불법 주차된 자동차라던가. 그런 것들 모두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발걸음을 옮길수록 기묘한 위화감을 받았다. 오랫동안 쓸 일이 없어서 몸속 깊숙이 잠들어있던 늑대의 본능이라는 것이 스멀스멀 인간의 모습을 한 껍데기 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그런 종류의 불길한 감각. 그러나 그는 그 뜻 모를 부자연스러움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명확히 콕 집어낼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 땅에서 저처럼 이름과 모습을 숨기고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많았다. 지금 보이는 저 길거리 배너 광고에 걸려있는 유명한 모델도 인간이 아니었다. 이처럼 그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잘 숨기고 살아가느냐면 이웃집에 사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을 정도. 하지만 그것도 그들이 인간들에게 우호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놈들이 존재했다. 대체로 그런 놈들은 흔히 말하는 세간의 눈을 피해 온갖 사고를 치는 부류들이었다. 아니지. 그보다는 세상이 그들이 벌여놓은 일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덮어두기에 급급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런 종류의 존재가 이 거리에 나타난 것일까? 그렇다면 샤갈, 그가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을 놈들과는 마주치지 않는 편이 최선인데. 샤갈은 그의 가게에 향할수록 짙어지는 불길한 감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기까지 오게 되니 이제 알 수 있었다. 냄새였다. 그가 느낀 위화감의 정체는 어느 존재의 냄새였다.

불청객의 방문이다.

샤갈은 그것을 깨닫고서 한참을 가게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마주치지 않는다는 최선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기에 차선책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잠금장치가 박살 난 문을 바라보며 떠나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빈손으로 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결국 각오를 다진 샤갈이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ㄷ….

와장창─!

샤갈이 가게로 들어오려고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 문에 부딪혀서 화려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나버리는 것이 있었다. 파편이 튀어 뺨에 긁혔다. 유리 조각이었다. 바닥에 조각나 흩어진 것은 그가 만든 공예품이다. 그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들면 불이 꺼진 작업실에 사람이 하나 보였다. 남자는 의자를 꺼내 앉아서는 놓아둔 유리로 만든 물건들을 손에 들고서 이리저리 살펴보는 행세를 했다. 검정 일색의 복장에 다리까지 꼬고 앉아서는 꼭 물건을 품평하는 모양새다.

햇볕에 그을린 모양새인 갈색의 피부와 이마를 훤히 드러내는 짧은 검은 머리. 빛이 닿으면 붉은색으로 반사된다고 착각이 드는 회색 눈. 샤갈, 자신 보다 수천 년은 더 살아온 존재가 그곳에 있다.

“그러게 빨리 들어오지를 그랬니, kid.”

“왜, 당신이….”

흘러나오는 음성은 명백히 자신을 낮잡아보고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샤갈은 그에 대해 쉬이 불평을 표할 깜냥이 되지 않았기에 반사적으로 왜 이곳에 있냐고 되물으려던 것을 멈추고서 차분히 말을 골랐다. 저것이 왜 지금 자신을 찾아왔는지 전혀 짐작되는 구석이 없는 탓이다. 샤갈이 적절하게 입을 열 인사말을 찾는 동안 그것은 자신이 요목조목 살펴보던 공예품을 골대에 농구공을 넣듯 가볍게 던져버렸다. 그 바람에 바닥에 진열되어 있던 다른 것들과 부딪혀서 유릿가루를 흩날리며 합주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 깨져나간다. 저것이 다 얼마인가. 샤갈은 그것을 계산할 여유가 없다. 그저 저자가 이곳에서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입은 손해를 생각하며 바스라진 조각들을 주워 담겠지.

“요 몇 년 안 보이시더니, 오랜만이네요.”

“왜? 못 보니까 속이 시원하디? 날 보고 놀란 눈치구나.”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그냥 오랜만에 봐서 놀란 거죠.”

“Oh, Doggie doggie doggy. 거짓말이라고 해도 입에 침이나 바르는 정성을 보이지 그래?”

운율이 느껴질 정도로 경쾌한 음성에 방심할 틈도 없이 유리로 만든 찻주전자가 샤갈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피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피했겠지만, 샤갈은 여기서 이걸 피해 봐야 저자의 기분만 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 둔탁한 소리를 뒤이어 유리가 조각날 때 들려오는 굉음이 지나가면 파편 탓인지 혹은 그냥 부딪힌 탓인지 이마에 난 상처에서 샤갈, 그의 머리색 보다 짙은 붉은색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그것은 온화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못 피해?”

꽤나 만족스러운 목소리다. 종잡을 수 없는 새끼. 샤갈을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눌러 담으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 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웃음이 걸린 얼굴로 다가오는 그것은 성큼성큼 다가와 샤갈의 머리카락에 묻은 유리 조각을 털었다. ‘어휴, 칠칠맞지 못하기는.’ 따위의 소리나 하면서. 누구 탓인데, 이게 다. 샤갈은 눈을 한 번 꾸욱 감았다 뜨면서 소매로 피가 흐르는 이마의 상처를 지긋이 눌려 닦았다.

“제가 할 수 있어요.”

“꼭 케첩을 찍은 토마토 같구나.”

그것은 샤갈의 머리를 털어주던 손을 내리며 그의 뺨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꼭 아이를 어르듯이.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서도 샤갈보다 약간 아래로 향해야 시선이 닿을 그것인데도 샤갈은 되려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기사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을. 소매로 배어 나오는 피를 설핏 보다가 그는 눈앞의 상대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요즘 한가해져서 말이야, 재미있는 것 좀 소개해 봐. 너는 다른 것들이랑도 잘 지내니까 뭐 좀 재밌을 법한 것도 많이 알 거 아니야?”

요 몇 년 조용하다 했더니, 결국 그때 하던 소꿉놀이도 이제 질렸나 보다. 샤갈은 그리 짐작하고 데리고 다니던 아이는 어떻게 했느냐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저것이 요구하는 대로 심심풀이할 일을 던져줘야 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심심하다는 이유로 애꿎은 인간들 몇이 또 유명을 달리할지 모를 일이었으니. 전쟁터라도 구경하는 건 어때요? 그렇게 물어도 돌아오는 것은 이미 중동까지 다녀와서 그 틈에 끼어 실컷 놀다가 오는 길이라는 대답이었고.

샤갈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가볍게 구둣발로 샤갈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은 샤갈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그것은 그 가슴께를 발로 지그시 밟으며 뒤로 민다. 결국 바닥에 누운 모양새가 된 샤갈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바라보던 그는 느릿하게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쪽 눈도 마저 못 쓰게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예쁘게 굴어야지.”

마치 경고하듯 5~6cm 정도 되어 보이는 구두 뒤축에 체중을 실어 가볍게 꾹, 꾹 두어 번 눌린다.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들면 저것으로 눈이라도 찌르겠다는 소리일까? 이마에 생긴 상처에서 더는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누르던 손을 떼어낸 뒤 슬쩍 항복하듯 손을 들어 보이며 눈앞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을 올려다보았다. 배를 보이는 것은 명백한 패배의 선언. 꼭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라 누구에게 이것을 떠넘기면 좋을지 머리를 굴릴 뿐이다. 그러고 보니 뉴욕에 그게 생겼었지.

“호텔에 가 보세요.”

“호텔?”

“이런 쪽으로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셨겠지만, 우리 같은 이들을 고객으로 삼는 호텔이 있어요.”

언제쯤이었나, 산업혁명이라고 하던가. 그즈음부터 인간들의 수도 늘어나고 그들의 죽음을 쉬이 묻어두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니까 옛날과 다른 것이다, 옛날과. 그러다 보니 차라리 수습 불가능한 사고를 칠 바에야 마음껏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명목으로 ‘호텔’이란 것을 세웠다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 상황을 보자면 제법 현명한 판단 아닌가.

“주소를 써 드릴 테니, 정 무료하다 싶으면 가 보세요.”

괜한 인간들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에 가까웠으나, 그 뜻을 눈앞의 이 존재는 알까?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채더라도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비켜달라는 듯 제 가슴을 밟고 있는 구두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자 그는 별 불만 없이 발을 치워줬다. 샤갈이 종이와 펜을 찾기 위해 작업실을 가로질러 책상 서랍을 뒤적이는 동안에도 그것이 제법 얌전히 있는 것을 보면 호텔이라는 미끼가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인 것이리라. 다행인가? 거기라면 다른 존재들도 있을 테니 저것이 마구 날뛰지는 않겠지. 다행스럽게도 책상 서랍에는 굴러다니는 볼펜과 작업물의 디자인을 스케치하느라 남아있던 종이가 있었다. 샤갈은 악령을 쫓아내는 주문처럼 정성스럽게 펜으로 주소를 써넣는다. 그리고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곱게 접어서 저가 뭘 적는지 보려는 듯 뒤에서 기웃대고 있던 검은 짐승에게 내밀어 보였다.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Mr….”

“‘샤뮤에드 벤야민 스프라우트’. 이 모습은 ‘샤뮤에드’라고 부른단다.”

툭, 하고. 곱게 두 번이 접힌 쪽지는 마침내 샤뮤에드의 손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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