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내 절교를 받아라 - 4화
지금 내가 4학년이니까 이 일은 휴학을 할 때인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때 나는 모든 알바를 관둘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가 좋아했던 라이브 카페에서의 야간 공연 알바도 그만두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도 알바를 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던 내게 이건 정말 엄청난 선택이었다. 살기 위해 꾸역꾸역 몸부림치다가 덜컥 찾아온 슬럼프의 타이밍은 무척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당연한 것이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었다.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은 분명 돈이었는데, 이상하게 시간과 여유가 사라져있었다.
잠적하다시피 갑작스럽게 휴학을 하면서 반 년 동안 집으로 내려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사를 한 집이었다. 마침 집에 오빠가 없었기 때문에 적적했던 부모님이 좋아해 주었다. 죽은 듯이 집에만 쳐박혀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늘어지게 자거나, 집을 청소하거나, 동네를 산책하고, 하루 종일 커피를 마시며 영화를 봤다.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핸드폰도 꺼두고 컴퓨터도 하지 않았다. 지겹게 음악을 듣거나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게 하염없이 편했다.
그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나 갈까, 하고.
내가 너무 지쳐버린 까닭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더 우울의 나락으로 빠지기 전에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여행을 가야 해. 그래야 이 멍한 상태를 정리할 수 있어. 그렇게 마음을 먹고 보니 살면서 제대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유럽 배낭여행이나 하얀 백사장을 밟고 오기도 했는데 나는 그놈의 등록금과 학점 때문에 학교 캠퍼스가 유일한 휴양지처럼 살고 있었다. 이러다가 덜컥 졸업해버리고, 내 20대가 다 지나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먼 훗날,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을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들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여행. 그래 여행을 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백팩에 대충 짐을 챙겨 넣고 바로 집을 나섰다. 사실 챙길 것들이 많이 없었다. 옷 몇 벌과 세면도구, 그리고 기초화장품 정도였다. 좀 갑작스러웠긴 했지만 막상 현관문을 열고 동네의 골목을 벗어나니 조금 설레기도 했다. 진작에 나올걸. 하필 날씨도 좋았다. 어디로 갈지 정하진 않았지만, 모든 것이 묘하게 내 여행을 축복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원래 여행이란 즉흥적으로...
빠아아아앙! 빠앙 빠앙!!
......?
즉흥적인, 내 자아를 탐구하는 여행- 이어야 하는데, 갑자기 초록색 소형 외제차가 내 앞에 격하게 멈추더니 미친 듯이 클랙슨을 울려댔다.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넘어지듯 비틀거렸다. 미친놈인지 미친년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동네의 골목 어귀엔 나밖에 없었으므로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생각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화가 나서 성큼성큼 풍뎅이처럼 생긴 초록색 소형 외제차로 걸어갔다. 따질 것이었다. 푸른 하늘 푸른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서 뛰노는 아기염소 같은 내 기분을 잡치게 했을뿐더러, 깜짝 놀라게까지 한 이 미친놈 혹은 미친년의 얼굴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그 자동차의 운전석 쪽으로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린다. 그리고 거칠게 운전석에서 사람이 나온다.
어? 어? 사람이... 나오는데... 어....
"김아연이!"
"이게 찹쌀떡이면 얌전히 집에 눌러붙어 있을 것이지이!"
"진짜 뒤지고 싶어?! 내가, 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전화는 왜 꺼뒀어?"
"근데 너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무슨 속사포로 랩이라도 하듯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성난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이 동네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하루 종일 동네를 돌며 우리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정수현이었다. 두 눈이 퀭한, 게다가 조금 흥분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낭창하다 못해 뻔뻔하리만치 평정심을 유지하던 도도한 포커페이스의 정수현이 그런 얼굴로 나타나자, 나는 그만 당황스러움에,
"나... 여... 여행 가려고..."라고 실토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생애 첫 외박 여행을 정수현과 다녀오게 되었다.
1박 2일 지리산 국립공원 탐방, 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불행히도 그런 건전한 여행이 아니라 요상한 무인모텔 체험기였다.
내 절교를 받아라 4화
4. 엄마와 아빠의 스킨십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 上
내겐 이 여행에서 생긴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이 비밀의 시작은 그때 그 여행길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정수현 때문에 비롯되었다. 홀가분해지려고 떠났던 여행길의 첫걸음에서 정수현을 만난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왜 정수현은 내 말을 듣자마자,
"여행? 좋아 그럼 옆에 타."
라고 말했던가. 아니, 왜 나는 정수현의 옆자리에 그냥 올라타 버린 것인가. 원래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정처 없이 터덜터덜 걸으면서 낯선 풍경과 한가로운 경치를 즐기려던 여행이었는데. 왜, 도대체 왜, 도대체 왜애! 왜 그 타이밍에 정수현이 나타나, 그것도 제 딴에 아주 진지하게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나를 압박했던 걸까. 정말 내 인생에 정수현이 끼어드는 타이밍은 왜 그렇게 잔인해야 하는 거란 말인가.
"나는... 그...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려고 하는..."
"찹쌀떡."
"어?"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났어. 찹쌀떡을 마구마구 씹어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단 말이야."
".... 왜 화가 났는데?"
"뭐야?"
정수현은 내가 조수석에 타자마자 제 쪽에서 차 문을 잠궈버리고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정말 희번덕, 소리라도 날듯 눈동자 가득 흰자를 드리우고는 내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표정을 만들었다.
"내 옆에서 사라졌잖아!"
"... 그게 왜? 나 휴학해서 그래. 연락 안 줘서 그래? 그거라면 어차피..."
"야, 김찹쌀떡."
헐. 정수현은 화가 나면 오히려 목소리가 차분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그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새삼 골 때리던 고등학교 시절의 그 쌩양아치 개수현이 생각나 본능적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이래야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정말 오랜만에 듣는 정수현의 중저음 목소리는 나를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내가 경고했지? 나 모르게 사라지지 말라고."
여기서 말하는 경고란, 휴학하기 전 술집에서 꽐라가 된 채 싸움에 말려 만신창이가 된 정수현에게 연락을 받고 뒷수습을 했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작 싸움을 일으킨 당사자는 떡이 되어 내게 업혀있는데 단지 이 미친년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술값을 물어내고 치료비 합의에 가게 주인에게 대신 사과까지 했었다.
물론 돈은 정수현이 나중에 주었지만, 알바와 학교에 치여사는 내가 철딱서니 없는 친구의 뒤처리까지 해줘야 하나 싶기도 하고, 여전히 나이를 거꾸로 쳐먹는 정수현에게 열받아서 정수현의 연락을 일주일 동안 씹었다가 흥신소에 개털렸을 때(흥신소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다. 처음 그 이상한 사람들은 내게 심부름센터 직원이라고 했다), 나는 저 경고를 들었다. 컨버스 뒤축에서 GPS 수신기를 발견하고 소름이 돋아 정수현에게 이게 무슨 스토커 짓이냐며 따졌을 때 정수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게 항상 내가 닿는 곳에 있어."
나는 이때 정수현이 진심으로 또라이라는 걸 300번째 실감하고 그냥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정수현은 미쳤어. 올해가 가기 전엔 꼭 절교를 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절교를 하자, 또 그렇게 다짐을 하게 된 수백 가지 일화 중에 하나였다.
"여행 어디로 갈 거야?"
"... 진짜 같이 가려고?"
"응."
"싫어. 나 혼자 갈 거야."
"김찹쌀떡!"
쾅.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차창문 두드리기 스킬을 보여주는 정수현이었다. 마치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라는 대사를 하는 어떤 드라마의 여배우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때 그 상황이 좀 웃겼다. 정말 간신히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일단, 정수현이 폼을 잡고 있어도 진짜 미친 듯이 나를 찾아 헤맸다는 증거가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제 자신을 꾸미는데 엄청난 신경을 쓰던 수현은 학교를 빠져도 잠자는 시간을 빠지진 않았다. "내 피부는 소중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정수현의 피부는 지나치게 퍼석퍼석해 보였고 다크서클에 퀭한 눈이 아이라인이 번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런 몰골로 똥폼을 잡고 있으니... 쯧...
"지, 지리산이나 갈까..."
"지리산이 뭐야?"
"뭐긴 뭐야, 산 이름이지. 여기서 한... 두 시간?"
"좋아. 일단 거기 가서 마저 혼내 줄 거야."
"뭐래..."
혼내주기는 개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나를 찾아 헤맨 정수현 2종 보통 운전자께선, 졸음운전으로 도로의 차선을 오른쪽 왼쪽 춤을 추며 넘나들다가 결국 휴게소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입을 벌린 채 미친 듯이 잠을 쳐자는 정수현을 겨우 달래 지리산엔 못 가고 어디 이상한 야산 근처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그것도 11시 30분. 정수현이 휴게소에서 내리 세 시간 반을 쳐 자버린 게 원인이었다.(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나는 정말 진지하게 생명보험을 들어놓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마치, '이렇게 운전하다간 골로 갑니다'라는 장면을 몸소 보여주는 정수현 때문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채 운전을 하는 사람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수십 번도 넘게 정수현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쳤다. 결국 뒤에서 우리를 추월해가며 욕을 퍼붓는 다른 운전자들 때문에 일단 지리산이고 나발이고 멈추기로 했다.
그러나,
".... 여기 어디야..."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으면 몰라. 수현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보로 아주 위풍당당하게 이리저리 차를 몰더니 결국 들어본 적도 없는 지명을 가진 동네에 들어서버린 것이다. 온통 산과 밭만 보이는 횅한 동네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어, 기름없다아."
"헐."
정수현은 퀭한 눈으로 계기판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재킷을 뒤적거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 그 직감적으로 불안함을 던져주는 그 대책 없는 웃음에 나는 뭔가 상황이 요상하게 꼬여가는 걸 느껴야 했다.
"나 지갑도 없다. 헤헤..."
"...... 주유소도 없어."
"응, 사람도 없네."
"어, 불빛도 하-나도 없어..."
"음..."
정수현에 의하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지갑이고 나발이고 차에 몸을 실어 바로 나를 잡으러 왔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 기집애가 평소에도 지갑을 밥 먹듯이 잃어버리거나, 뭔가를 깜빡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 수중엔 현금으론 딱 4만 원이 있었고, 나머지는 체크카드였는데, 이 동네는 ATM기는 물론이요, 편의점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좀 불안해졌다.
"일단 좀 더 저쪽으로 달려 봐. 뭐라도 나오겠지."
"응. 근데 풍뎅이 힘이 없는 게 느껴져."
여기서 풍뎅이란 언제든지 정수현의 운전에 의해 사멸해버릴지도 모르는 정수현의 승용차를 말한다.
".... 그러게 진작 기름 좀 넣고 오지 그랬어."
"찹쌀떡. 너는 할 말이 없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뭐야?! 너 지금 화내는 거야? 화내지 마! 아직까지 화를 내는 건 나야! 나!"
"야, 너 말은 똑바로..."
꼬르륵...!
아.
동시에 차 안을 가득 울리는 소리에 정수현도 나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배가 고프고, 피곤하고, 기름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내 첫 여행을 망쳐버린 정수현이 원망스럽고, 그런데 정수현도 뭔가 조금 불쌍하고,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차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중에 나는 어둠 속에서 조그만 불빛이라도 발견하기 위해 눈을 부릅 떴다. 점점 무서워졌다. 다행히 핸드폰이 있으니 정 안되면 도움이라도 요청해야겠다 싶었다. 헤드라이트의 사정거리엔 오로지 비포장도로여서 나는 도중에 기름이 없는 정수현의 풍뎅이가 멈춰버리면 어쩌나 싶어 계속 운전을 하는 정수현과 창밖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찹쌀떡."
"왜."
"무서워?"
"..... 무섭긴 누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정수현을 콕콕 찌르며 불빛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수현은 핸들을 그 방향으로 돌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나 방금 든 생각인데. 지금 이거 나쁘지 않아."
"무슨 말이야?"
"지금 기분 좋아. 무섭지 않고."
"나도 안 무섭거든? 운전이나 집중해."
"안 무섭다는 게 아니라 기분이 좋다고."
"뭐라는 거야."
또라이 정수현은 또라이의 언어로 나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난 또라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수현의 말을 이해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어쨌든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조용한 차 안.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외의 밤은 정말 적막했다. 그리고 정수현의 목소리도 차분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정수현에게 돌리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수현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이 세상에 너랑 나만 있는 거 같아."
"뭐래..."
"으응- 그냥 그렇다구우우."
눈썹을 으쓱하며 배시시 웃는 정수현의 옆얼굴이 문득 어두운 시야에서 아득하게 보였다. 이런 분위기만으로만 보면 또라이고 나발이고 천상 소녀 같고 여린 여자일 뿐인데,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너 잠 다 깬 거 맞지? 헛소리하지 말고 앞이나 잘 봐."
"으응- 근데 찹쌀떡."
"응?"
"저기..."
정수현이 나를 슬쩍 돌아보며 눈썹을 으쓱했다.
"모텔이야."
무인모텔, 하면서 또 정수현이 배시시 눈을 휘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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