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4화
신조차 당신을 외면해
모든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코앞에 당장 할 일이 들이밀어졌을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얼추 끝내고 나서야 뼈저리게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떨어져 있지. 하고 통렬하게.
그날 저녁(겸 점심)은 엉망이었다. 지금 처지에서 더 엉망일 수가 있다니!
웅덩이에서 건져낸 것 같은 몰골의 나타를 욕실로 인도해 최소한의 조치를 끝낸 로톨로는 혹시 자기가 잘못 본 걸까 봐 스튜의 김으로 뿌예진 안경을 한번 닦았다. 그러나 작금의 난장판이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벽에 튄 진흙과 젖은 이파리, 둘이 끌고 온 작은 나뭇가지, 진흙과 색이 같아진 카펫, 여기저기 전위적인 동물 발자국으로 꾸며진 바닥, 더러운 나타의(엄밀히 말하면 로톨로의)옷까지. 이 와중에 욕실에 수도까지 연결되지 않았다면 로톨로는 비명이라도 질렀으리라.
로톨로는 나타가 끌고 온 정체불명의 짐승이 늑대와 비스름한 동물 ‘파피야’임을 기억해 냈다. 동물 백과에서 몇 번 봤던 동물이었다. 늑대와 달리 꼭 사슴이나 말처럼 단단한 발을 가져 운송수단으로도 쓰이며 털이 풍성해 겨울옷 따위를 만들 수 있는 귀한 가축이었다.
수집가들은 독특한 색의 파피야 털 장식을 모으려고 눈에 불을 켠다고 쓰여있었다. 다만 전문가나 기르는 동물이었다. 게다가 그 가격은 금괴 하나는 우습게 부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로톨로는 이제야 이해한다. 식재료나 가구가 시원찮았던 건 전부….
“이름을 뭐라고 지어줄까? 로톨로가 나한테 저녁으로 꿀꿀이죽을 줬으니까 꿀꿀이?”
나타가 활짝 웃으면 식탁에 털을 왕창 날리도록 쓰다듬고 있는 저 동물을 구하느라 예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자기 요리가 꿀꿀이죽이라고 불리는 건 기분 상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동물먹이만 못했다)
농장이라고 했으니, 가축이 어련히 있거나 구입하라고 할 거라 여겼지만 파피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애초에 개인 가정에서 한 마리만 데리고 키울 가축이 아니었다. 밥으로 고기를 줘야 할까…? 백과사전에선 파피야가 잡식이라고 했었던 것 같았는데…
로톨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나타님. 혹시 또 다른 동물을 요청하신 게 있나요?”
욕실에서 머리를 헹구고 대충 닦아 물이 뚝뚝 흐르는 나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평범한 가축도 하나 고르라기에 양 비슷한 걸로 골랐는데? 아마 짐이란 오거나 좀 걸릴 걸?”
로톨로의 머리에 파피야가 양 비슷한 것을 물어뜯는 이미지와, 양 비슷하게 생긴 짐승이 울타리를 박살 내는 이미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정하는 건 로톨로의 오랜 버릇이었다.
“내일 시내로 외출할래.”
“네?”
“마구점을 찾아보자고 했잖아? 그리고 파이랑 케이크가 먹고 싶어.”
이런 나타를 시내로 데려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건 내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일까? 로톨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타님, 아, 아직 좀 더 여독을 푸시고 집에 적응하실 시간을 갖는 편이…”
“페퍼.”
“네?”
“날 페퍼라고 불러. 정체를 숨겨야 하잖아? 나타란 이름은 흔치 않아서 눈에 띄어.”
“네, 페퍼. 하지만, 제 말은…”
“그리고 너랑 난 무슨 사이라고 하지? 자작의 막내아들이 이상한 또래랑 다니는 걸 설명할 그럴듯한 핑계가 뭐가 있을까? 해외에서 온 먼 친척은 어때? 사업을 성공한 갑부라서 나에게 이 나라를 구경시켜 주면, 큰돈을 주겠다고 한 거지.”
“페퍼…”
“나참, 뭘 그리 걱정하는 거야? 넌 위대하신 성 나타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을 만큼 지혜로운가?”
나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톨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톨로는 더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확신과 권위로 찬 두 눈에 저항하는 법을 로톨로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로톨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찻집에 들렀다가 즉시 돌아오셔야 해요. 저도 처음 와본 지역이니 제가 완벽하게 보필해 드릴 자신이…”
“아아, 그거야 오늘 저녁만 봐도 아니까 변명은 됐어. 그렇게 해 줄게.”
나타는 스푼을 들어 스튜의 껍질도 까지지 않은 당근을 푹 찍어 로톨로 앞에 흔들었다. 로톨로는 수치심을 느꼈다. 아까 화덕에서 느낀 뿌듯함은 이미 싹 사라진 뒤였다. 나타는 식기에 꽂힌 당근을 한입에 집어넣고 씹어 삼켰다. 로톨로또한 식기를 들었지만, 제가 만들어 놓고도 차마 먹기가 힌든 모양새였다.
“내일 아침은 꼭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게요. 죄송해요.”
나타는 대답도 없이 스튜를 떠먹었다. 그 모습에 로톨로도 제 몫을 꾸역꾸역 비웠다. 헛구역질이 나는 맛이었지만, 오래전부터 로톨로는 자기가 일으킨 사고는 책임져야 한다고 배웠다. 그릇을 겨우 다 비우고, 로톨로는 자기가 친 사고를 웃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고 수습하는 나타를 슬쩍 쳐다보았다. 로톨로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파피야는 처음 만난 나타를 어찌나 잘 따르는지, 나타가 밖에 나가 놀라고 하자마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며 뒷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로톨로는 저녁의 일을 거기까지 떠올리고 또 속이 콱 막혔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도 로톨로에겐 일이 남아있었다. 나타가 더럽힌 자기 옷과 파피야가 더럽힌 카펫을 세탁해야 했고, 바닥과 벽을 청소해야 했다. 당연히 이쪽도 요리만큼 곤혹스러웠다.
세탁이고 청소고 결코 제 손으로 해본 일이 없었으니, 로톨로는 세탁실로 옷을 가져가 셔츠와 바지, 양말을 모두 물에 담갔다. 선반을 보니 세탁비누 한 덩이가 보였다. 로톨로는 이것과 그냥 비누를 구분할 줄도 몰랐지만, 세탁비누를 잘라다가 마치 입욕제 풀듯이 물 안에 집어넣고 손으로 섞은 다음, 세탁실을 나왔다. 이제 집을 정리해야 했다.
결과를 알려주겠다. 로톨로가 닦은 바닥은 걸레를 덜 짜는 바람에 바닥에 물기가 덜 말라 번들거렸고 카펫은 옷과 마찬가지로 물에 담가뒀고, 벽은 물걸레질했다간 젖을 듯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집은 여전히 지저분했다.
손에 붙지도 않은 집안일을 일단락한 뒤 겨우 잠자리에 누운 로톨로는 앞으로 자신이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한단 사실에 오싹해졌다. 어째서 막연히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살던 대로 이 극비 임무 속에 사용인이라도 고용되었길 바란 건가? 스스로가 너무나 바보 같았다.
자책을 하고 있자니 어릴 적 질리도록 따라다닌 형님들의 빈정거림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로톨로는 마음을 다잡았다. 바로 그 빈정거림이 얼씬도 못 하도록,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자작가의 일원이 되려고 이곳에 왔다. 반드시 잘 해내야 했다.
로톨로는 ‘다 큰 녀석이 창피하게 울지’만은 않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피곤했지만 잠은 쉬이 오진 않았다.
†
로톨로의 잠을 깨운 건 다름 아닌 나타였다. 나타는 로톨로의 방문을 힘차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나와, 로톨로! 네 짐이 왔다!”
로톨로는 허둥지둥 일어나 협탁에 놓아둔 제 안경을 들었다. 제대로 쓰기도 전에 나타가 문을 뻥 차서 열었다. 잠옷 바람에 머리까지 여기저기 뻗치고 곱슬머리로 돌아온 로톨로는 눈이 휘둥그레져 그 순간 세상 무엇보다도 담당 하인이 그리웠다.
정작 나타는 그게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로톨로에게 꾸러미를 던지고 다시 나갔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전 일곱 시였다. 로톨로는 꾸러미에 옷이 들어있길 빌며 종이 포장을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빗과 헤어 오일, 여분의 안경, 깃펜과 잉크 여러 개, 몇 권의 수첩과 즐겨 읽는 책이었다.
짐을 소분해서 보낼 테니 중요한 순으로 정리해 놓으란 캄파사제의 말에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로톨로는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재킷 하나라도 맨 앞에 둘 걸 그랬다.
†
나타는 유명세에 비해 그의 얼굴을 정확히 아는 이가 매우 적었다. 나타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는 처음부터 딱 열점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난 현재도 그 개수는 변함이 없었다. 재현율이 여타 초상화보다 훨씬 높긴 했어도 열점 중 다섯 점은 중앙신전이 보관했다. 공식 석상이나 순회 때에도 얼굴을 가리거나 흰 천막이 덮인 가마 안에 있었다. 로톨로도 나타의 성화를 집안이나 신전이 아닌 나타의 성화를 어렵게 구해냈다고 자랑하던 공작가의 연회에 초대되었을 때 잠깐 보았을 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나타의 초상화를 보고 다소 실망했다. 그들이 원하는 고전적인 아름다운 인물상이 아니었으므로. 속으로는 나타의 피부색과 생김새를 언짢게 여기면서도, 차마 그런 불경한 이야기를 뱉을 용기는 다들 없었다. 가뜩이나 나타의 기적이 일어난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때였으니.
그 탓에 순진한 도련님 로톨로는, 그 연회의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은 마음이라고 여겼다. 모두 성 나타를 다른 마음 하나 없이 우러러본다고. 눈을 반쯤 감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는 우아한 그 옆모습에 모두 감동했다고.
성녀의 얼굴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널리 퍼트리는 것이 사제들에게 좋게 보일 리 만무하였고, 성녀의 흠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성녀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라 여겼는지 성화를 본 자들은 나타의 생김새를 주변에 묘사할 때 인종 이야기는 빼놓았다.
튀어나오려고 준비 중인 ‘이국적이다’라는 말 또한.
그렇다고 해서 나타가 마음껏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 있단 이야기는 아니었다. 입조심한다 한들, 결국 나 타의 생김새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걸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디메인 자작가처럼 나타가 어찌 생겼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시골에도 한둘 정도는 돌아다닐 수 있으니.
때문에 로톨로는 불안감에 전차 안에서 계속 손가락을 깨물어대다가 나타에게 정강이를 얻어맞았다. 로톨로는 설마 맞기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놀란 눈을 들어 나타를 바라보았다.
자기는 누구도 걷어차지 않았단 듯이 전차 창을 내다보는 나타는 품이 넉넉한 셔츠에 멜빵 반바지 차림이었으며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아침 시내로 나가기 전에 약초 몇 가지로 머리를 물들인 탓이었다. 새치였던 부분은 선명한 붉은색이 되었으나 다른 부분은 어두운 빨강이 되어 갈색에 가까웠다.
거기에 더해 나타는 별장 문단속을 할 때부터 눈을 감고 다녔다. 로톨로는 나타가 무슨 신성술을 사용해 눈을 감고도 잘만 걷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타는 그런 변장들 덕에 자길 알아볼 사람이 없다 여긴 건지 행동거지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탓에 몇 사람들은 나타가 남자라 여기는 것도 같았고, 나타도 그를 알고 있는 듯했다.
로톨로는 나타에게 옷을 두 벌이나 빼앗기고 그중 한 벌은 진흙 덩어리가 되었다가 서툰 세탁을 거쳐 빨랫줄에 매달려있었으니, 장례식 정장을 빼고 로톨로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이제 딱 두 벌 뿐이었다. 세일러칼라 셔츠와 쪽빛 조끼, 그리고 끝단을 단추로 잠그는 어두운 푸른색 면바지.
그리고 마지막 한 벌은 잠옷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