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1)
많이들 알법한 얘기를 구태여 하려니 이대로도 괜찮은지 모르겠는데... 뭐 어쩌겠는가. 창작은 원래 비대한 자아가 없으면 못하는데. 앞으로 더 뻔뻔해지도록 힘내보겠다.
페미니즘과 사이가 안 좋은 게 있다는 거야 이젠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과 로맨스의 사이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이가 안 좋음'을 그러니까 공격해도 된다는 소리로 이해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렇게 오도하지 말라는 말로 시작하겠다.
여성주인공의 서사에 사랑만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은 사랑 외의 가치도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이지 여성에게 사랑이 가치 없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여성향 안에서 이게 잘 먹힌다, 잘 팔린다고 말하는 요소들이 진짜로 그런 건지 아니면 으레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지는 게 아닌지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여성이 여성향으로 나온 컨텐츠에 냉담한 이유는 대체로 후자니 말이다. 그리고 장르소설 안에 페미니즘이 일상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무심코 넘어가게 되는 미소지니에 대해서도 일부 얘기해볼까 한다. 그럼 시작해보자.
여성주인공 판타지의 계보를 다시 떠올려보자. 1, 2세대 여성주인공 판타지는 태동기였기 때문에 오히려 굉장히 자유로웠다. 세상을 모험하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도 받고 반대로 사랑을 하고 사랑도 받고 성장하고 수련도 하고 강해지고 배신도 당하고. 어떤 의미로는 가장 심플하게 남성주인공의 성별 반전에 가장 가까웠다고도 할 수 있다.
3세대부터 분류폭력과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의 어마어마한 백래시 때문에라도 여성주인공 판타지의 서사에 있어 그 성질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고깽 얘기를 하면서 세상이 험해지면 다른 세계로의 도피를 꿈꾸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했는데 여성의 경우엔 다른 세상말고도 로맨스로 도피하는 경향이 추가적으로 발생한다.
이걸 천천히 생각해보면 금방 납득할 텐데, 당장 전세계 어디를 돌아보더라도 공통적으로 우파가 득세했다. 트럼프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극우정당들이 정권을 잡았고 스웨덴에서도 네오나치즘 정당이 원내에 진입했으며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우파가 득세했다.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글로벌 팬데믹 이전에는.
이러한 우파의 득세 자체는 별로 놀라울 건 없다. 세상 살기가 팍팍해지면 세계 경제 경향이 어떻든 간에 자신들만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주겠답시고 포퓰리즘적으로 접근해서 반난민 정책이니 자국우선주의니 어쩌고 하면서 모든 게 쉽게 해결될 것처럼 구는 걸로 정치적 효능감을 주는데엔 우파만한데가 없다. 의외일지도 모르나 자신의 계급과 무관하게 기득권층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이 미래에 얻을 지도 모르는 권력을 지키려 드는 이상한 경향도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에 살기 팍팍해지면 보통은 우파가 득세한다. 괜히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는 게 아니다.
최근의 우파 득세 경향은 신자유주의 어쩌고 하면서 양극화를 방치해둔 업보를 씨게 맞는 측면도 사실 있다고 보는데... 뭐 여하튼 이렇게 살기가 팍팍해지면 여성이 로맨스로 도망가는 것도 당연한 게, 자신보다 약하고 다른 이들을 모멸하고 폭력적으로 행동할 여지를 남겨두는 남성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여성은 현실의 남성을 쉬이 사랑할 수가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성은 권력 구조에 있어 언제나 소수자의 위치에 가깝다. 사견을 덧붙이면 사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소수자성을 단 하나도 가지지 못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딱히 저런 우파들의 사상에 반대하지 않는 여성이라고 해도 다른 이유로 로맨스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엔 역사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문명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과거 문명권의 여성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양이고 서양이고 마찬가지다. 이혼이 법제화된 것 자체가 근대의 일이긴 한데, 법제화 이전에도 관습적으로 이혼이 있기도 했다지만 대체로 결혼할 때 여성이 가져온 패물과 선물로 받은 패물 말고는 여성의 재산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문화권이고 여성에게 비싼 물건을 주는 걸 매우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거고 이건 달리 말하면 여성이 재산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름다워지는 것 말고는 수단이 없었단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대라고 과거와 대단히 다르냐고 묻는다면 또 애매해진다. 아름다움은 아직까지도 여성에게 강요되는 가치 중 하나며, 여성에게 남성만큼의 임금을 애초에 주지도 않거니와 여전히 고위직이나 양질의 일자리에는 남성이 압도적인 비율로 채용된다. 대충 8 : 2 정도의 비율로 말이다. 젠더 페이 갭으로 따지면 OECD 가입국 중 불명예스러운 1등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게다가 여전히 여성의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쳐주지도 않는다. 이혼하며 위자료를 산정할 때조차 전업주부의 성별에 따라 편차가 있다. 똑같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했어도 남성에게 더 많은 위자료가 산정된다. 하여간 대한민국 사법부는 끝내주는 차별주의자들의 집합소다. 괜히 사법 개혁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성범죄 생존자를 보호할 줄도 모르고 여성이 남성을 죽이는 건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남성이 여성을 죽일 때는 10년도 양형하지 않는 개자식들에게는 그 특권을 해체해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수밖에 답이 없다고 믿는다.
다른데로 얘기가 샜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가부장 사회 안에서 경제적 자립을 얻지 못한 게 현실이기 때문에 노동으로 얻는 가성비 나쁜 경제적 자립이 모든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백날 열심히 일해봤자 월급은 쥐꼬리고 승진도 먼 얘기니 이 구질구질한 일상에 누가 쨘~ 하고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싶은 욕망이 들지 않겠는가. 그 누군가가 잘 생기고 돈 많고 몸 좋은 이성이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내면 무조건 사랑에 빠질 법도 하다.
그래서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더 여성들에게 로맨스가 먹히는 면이 있고, 이래서 페미니즘이 로맨스 서사와 사이가 좋기 어렵다는 거다. 현실의 로맨스는 뭐 그렇다 치자. 인간은 어쨌든 생물학적 종이고 여성에게도 성욕은 존재하며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 받고픈 욕망도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서 행복해질 선택을 했다면야 얼마든지 괜찮은 일이다.
하지만 로맨스 서사 안에서 여성 주인공은 절대 홀로 온전할 수가 없다. 끊임없이 사랑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묘사되고 남성과 여성의 외모는 대체로 가부장적 가치에서 추구되는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가끔 진심인가 싶을 정도로 이성애 중심주의고 해피엔딩으로 결혼, 임신, 출산, 양육을 마르고 닳도록 써먹으며 '정상성'을 확보하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전세계적인 경향이다. 으레 불려나오는 미국 사회도 사실 백래시의 영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면 사회제도적으로 불리한 점이 많아서 로맨스를 더 아름다운 무언가로 만드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동네기도 하다. 헝거 게임의 엔딩을 생각해보면 감이 올 텐데 결국은 주인공 캣니스는 두 명이었나, 세명이었나 어쨌든 아이들의 엄마로 남는 걸로 심신의 평안을 얻는다. 이게 정치 혐오 때문인지 아니면 미소지니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약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대체 주인공이 혁명 당사자인데 권력을 잡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특히나 로판에서 자주 낭만화 되는 무도회가 실제 프롬파티 문화로 있는 미국에서는 프롬 시즌만 되면 여자애들이 계획에 없는 임신을 하거나 데이트강간약과 술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다 보니 갖은 사회 문제가 생기는데 굳이 그런 '성애와 가정이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에서 혁명가 여성이 두 아이의 엄마로 남는 게 바람직하냐는 비판이 붙을 수 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로맨스 서사는 대체로 현실의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이 개인적인 구원으로 묘사되고는 있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사회나 제도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아무리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상이 주인공으로 인해 바뀌지 않는데다가 주인공을 사랑하게 될 남자 주인공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주인공에겐 어떠한 종류의 '구원'도 존재할 수 없던 거다. 끊임 없이 불안한 현실에 안주해있는 여성주인공이 끊임 없이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안정과 안전을 확인하는 게 로맨스 서사의 기본적인 골조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인공의 서사를 로맨스로만 채우는 게 재미 없다는 여성 독자층이 엄연히 있는 거다.
소설은 갈등이 있어야 재밌다. 그런데 로맨스는 그 특성상 연애에 있어서의 기대를 배신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어질 듯 말 듯한 관계까지는 밀고 당기고 하며 긴장감이 조성되지만 연인/혼인관계를 맺고 나서부터는 나올 수 있는 레퍼토리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사귀고 나서도 마냥 잘 해주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낀 여성 독자층이 분노하기 마련이라서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을 약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로맨스 서사에 있어서는 약속되어있는 공식이다.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주인공이 커플이 되는 순간 진행될 시놉시스가 확정되어버리니 그 전까진 흥미진진하게 읽다가도 이어지는 그 순간부터 특정 독자층은 더 읽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러니 여성주인공의 서사를 쓸 때 목적이 포르노가 아니라면 로맨스 서사 외의 서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독자의 시선을 계속 끌어두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슬슬 체력과 기력이 빨려 나갔으니 접고 다음 글에서는 여성에게 왜 그렇게 로맨스가 여성들의 장르로 권장되는 현황이 여성의 사회진출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요즘 사회에서 왜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건지 얘기해보자. 옛날에는 그게 좋은 방법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늘상 얘기하는 것처럼 세상은 변한다. 그런 맥락 위에서 요즘 시대 얘기를 해보려 하는데... 틀릴 가능성도 엄연히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반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논의해볼 생각이니 많은 관심 부탁한다.
사족 1.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그럼 이만 떡국 끓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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