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추억의 단편선

[GL] 내 절교를 받아라 - 3화

봄쌀 by 봄쌀





한 달 전. 내 자취방은 오빠의 삼수 성공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던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었다. 나는 삼수를 하는 데에 내 등록금보다 더 많은 돈을 쓰는 오빠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알바를 뛰었다. 오빠가 돈을 쓰는 만큼 나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부모님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며 느꼈다. 나는 열심히 '아껴'생활했다. 장학금을 받았고, 용돈은 직접 만들어 썼다. 바나나우유 하나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교통비가 아까워 본가에 거의 내려가지도 못 했다. 오빠는 다행히 삼수를 성공했고, 그 성공의 정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되었다. 우린 그런 걸 로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빠는 등록금과 입학금이 면제가 될 정도로 수능 대박을 터뜨려왔다. 오빠의 잭팟으로 할아버지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동안 고생한 아연이 하고 싶은 거 하나 해줘라."하고 아빠에게 명령했고, 나는 온갖 범죄적 루머가 가득 맴돌던 반지하 동네에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사계절 내내 곤충채집에 최적화된 반지하의 싸구려방에서 3층의 최신식 원룸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진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향에 깔끔한 몰딩, 심플한 벽지와 리모델링 된 욕실. 





내게도 봄이 오는구나.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해.





나는 권선징악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도 믿는 사람이었다.

 

 

  

 

"아연아, 너..."

 

  



이 날이 오기 전까지는.





"혼자 산... 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내 앞엔 남자가 있다. 그것도 엄청난 훈남이... 눈만 마주쳐도 떨릴 정도로 딱 내 스타일인 우리 과 최고의 훈남이.

 

 

  

 

"아닌데에에- 나랑 같이 사는데에에-"

 

 

 

  

그리고 내 옆엔 여자도 있다. 줘패고 싶지만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임산부가.

 

 

  

 

쾅.

 

 

 

 

현관문을 닫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보며 씩 웃는, 임산부 정수현이 있다.

 

 

 

 

 

 

 

내 절교를 받아라 3화

 

3. 남자는 태교에 좋지 않아

 

 

 

 

 

 

남쪽으로 향한 집들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즐길 수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어떤 작은 화분이라도 잘 자랄 것이었다. 다육이, 선인장, 공기 정화식물 같은 것들을 창틀에 올려두기만 해도 잘 자랄 거야. 또 빨래를 널었을 땐 얼마나 잘 마를까. 이불이나 베개 같은 것들도 가볍게 건조대 위에 올려놓으면 그 다음날 뽀송뽀송하게 자연 살균되고 말이야. 가을엔 창문을 좀 열어두기만 해도 시원하겠지. 겨울엔 난방을 조금만 해두고 햇살이 쫘악 늘어지게 들어오는 방바닥에 누워서 귤이나 까먹어야지... 헤헤 내 인생 아름다운 인생...






"안녕."





...아름다운...






"네가 여기 왜 왔어."






....개 같은 인생.






개가 찾아왔다. 개수현이 찾아와버렸다. 내 파라다이스에. 이틀 전 통보하듯 임신과 가출소식을 내게 알려주더니 어제부로 차를 끌고(정수현의 여섯 번째 애인은 중고차 딜러였다. 그것도 외제차만 전문으로 하는. 정수현은 100일째 선물로 그 남자에게서 아담한 소형 외제차를 받고 제 명의로 등록을 하자마자 남자를 차버렸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위풍도 당당하게 내 원룸이 있는 빌라 앞에 떡하니 주차를 한 정수현은 커다란 짐가방을 두 개 가지고 들어왔다. 아니, 들이닥쳤다.


 

  

 

"아니지?"

  

"응?"

  

".... 아닐 거야."

 

 

 

 

설마, 저게 옷가지가 가득한 짐가방이 아닐 거야. 정수현이 새로 이사한 내 스위트홈에 저 짐가방을 들고 올 리가 없어. 만약 신이 있다면 내 유일한 삶의 낙인 이 집에, 그것도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이런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실 리가 없어.





나는 현관문 너머에서 들리는 정수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진심으로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줘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내가 정수현을 만나서 늘어난 게 있다면 눈치와 직감이었다.

 

 

 

그저께 카페에서 폭탄선언을 들은 이후, 나는 정수현의 모든 것이 질려버렸다. 친구에게 실망하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게다가 정수현에게는 특히나 1년 365일 실망의 연속으로 살았던 터라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진심으로, 실망해버려서 그냥 나와버렸다.

 

 

  

내가 ㅇㅇ카페를 나와 터벅터벅 신호등을 걸어가면서 정수현은 어쩜 저렇게 무책임하고 문란하게 사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 2층에서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정수현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마음이 덜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애 낳는 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아? 넌 도대체 나이를 어떻게 처먹은 거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그땐 정말, 너무 화가 났다. 정말 정말, 너무너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뻗친 화가 그대로 목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평소 같으면 내 말에 어떻게든 능구렁이같이 조목조목 반박했을 정수현이 내 말을 그냥 담담히 들으며 수긍하듯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기분도 더 더러웠다. 아니 찝찝했다.

 

  

 

그래서, 차마 현관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자마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짝 눈웃음치는 얼굴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내 앞으로 커다란 짐가방을 불쑥 들이미는 정수현이 있다.

 

 

 


"힘들었어... 3층이라 끙끙 올라왔어. 전화도 안 받고. 칫."

 

 



아니, 개수현이 있었다.  





"아니지?"

  

"뭐가?"

  

"...... 지금 너 마치... 여기서 살겠다고 들어오는 것 같은 거... 이거 내 착각이지?"

  

"아이, 우리 사이에 네 집 내 집이 어딨어어어?"

 

 

 

내가 주춤하는 사이 그냥 막 밀고 들어오는 수현에 의해 내가 주춤 물러나자 정수현은 쏘옥 현관으로 입성하여, 원룸의 한쪽에 있는 소파 겸 침대에 몸을 날렸다. 나는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짐가방을 보고 앞이 깜깜해졌다.

 

   

 

"수현아."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짐짓 나름 심각하게 정수현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정수현은 엎드린 채 고개만 슬쩍 돌려 나를 쳐다봤다. 새침하고도 순진한 얼굴. 오늘따라 그 갸름하고도 예쁜 호를 그리는 얼굴선이 너무도 천진해 보인다. "응?"하고 되묻는 그 목소리까지도 너무 순수하게만 들렸다. 신은 불공평하다. 애가 미우려면 확 미워야지. 어쩜 생긴 건 어찌 보면 꼭 좋은 것, 귀한 것, 선한 것들만 접할 것 같은 말간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 참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용서 빌고 거기서 제대로 살아. 여길 왜 와."


"......"


"임신했다며. 그럼 당장 힘들더라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김아연."

  

"어?"

  

"많이 보고 싶었어."

  

".... 야, 난 진짜 진지..."

  

"지울까,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스르르, 몸을 일으키며 벽에 몸을 기대며 두 무릎을 끌어모으는 정수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뭔가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뒤바뀌었다. 안돼, 또 저기에 말리면 안 돼. 나는 정수현의 다음 말을 듣지 않으려고 황급히 몸을 돌려 냉장고에서 음료수라도 꺼내올까 하다가 이내 등 뒤로 꽂히는 목소리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안돼, 하는 마음속의 목소리와 그럼에도 결국 돌아보고 말 것이라는 체념이 뒤섞였다. 내 뒤에 꽂히는 정수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조금 애틋해서 뿐만은 아니었다.

 

  

  

"정말 그런 생각까지 막 들어서..."


"......"


"그래서병원 간 거였어. 그런데......"

 

"......"

  

"그냥 그때..."

 

  

 

숨을 한번 들이키며 말을 끊는 정수현 때문에 내 다짐은 또 흔들리고 있었다. 정수현이 저렇게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말하는 게 낯설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 생각이 났어. 그리고 낳기로 했어. 그냥, 막, 막, 막... 네 얼굴이 떠올랐어."

  

"......."

  

"역시 안되나..."


"......"


 

 

 

슬쩍, 뒤돌아 본 소파 위엔 어느새 정수현이 무릎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왜 하필 그런 포즈로 있는 거야. 정수현은 좀처럼 약한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 인간에 속했다. 그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내가 제일 잘 나가'하는 마음으로 사는 애였다. 세상에 자신의 관심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애였고, 가끔 심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내게서나 보일 법한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사람 마음...




.......약해지게...

 

  

 

그런데 그렇게 소파에 잠시 기대어 쭈구려 앉은 정수현의 뒤로 비취는 따뜻한 햇살을 보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상상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도대체 왜 떠오른 건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그냥 언뜻 내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그림이 있었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지금 이렇게 햇살이 비취는 집에, 만삭인 정수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배를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 싱긋 미소 짓는 장면.

 

  

 

이건 도저히 어떤 상상에서 비롯된 장면인지 알 수 없었다. 절대로 정수현과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장면...인데... 그 잠깐의 상상 속에 정수현이 나는 조금 예쁘게 느껴졌다. 그걸 동정이나 우정 같은 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딱 꼬집어 결론 내릴 수도 없었다. 적어도 결코 정수현의 눈빛이 슬퍼 보여서 내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니다. 




아니, 아니라고, 아니라고 믿고 싶다.

 

  

 

"... 마셔."

 

"찹쌀떡. 나... 나 지금 사실 좀... 좀 많이 무서운데."

  

"지우지 마. 애기가 무슨 죄야."

  

"응?"

  

"책임 져야지."

 

  

 

나는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아 정수현에게 내밀었다. 정수현의 친구가 되면서 늘게 된 두 가지. 눈치와 직감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 했을 거라고. 정수현은 내 말에 잠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바나나 우유를 건네받아 쪽쪽 빨기 시작했다.

 

  

 

"학교는... 이번 학기는 마저 다닐 거지?"

  

"응."

 

 "홀몸도 아닌데 왜 밥을 굶어."

 

  

 

대답도 없이 쪽쪽쪽, 꿀꺽꿀꺽, 잘도 쳐 먹는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말끔히 비워진 바나나우유를 보니 마음이 좀 그랬다. 오늘은 라면을 먹으려고 했는데... 임산부에게 높은 나트륨과 인스턴트는 몸에 좋지 않으니까 밥을 해야겠다. 쌀이... 있었나. 슬쩍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는 정수현을 돌아보며 나는 체념하듯 말했다.

 

  

 

"집 열쇠 줄게. 도어락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응!"

 

 

 

동거인이 생겼다. 5년 친구이자, 임산부이자, 내 인생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기 전문인, 성은 정 씨요 이름은 수현이라 참하고 고울 것 같은 이미지는 개나 갖다 줘도 좋을, 뻔뻔하고 능글맞기 짝이 없는 여우와의 동침이 시작된 것이다.

 

 

 

 

 

 

 

 

 

 

 

 

 

 

 

 

 

 

 

 

 

 

 

 

 

 

 

 

 

 

 

 

 

 

"안돼. 키가 너무 커."

 

"별로야. 너무 정우성처럼 생겼어. 느끼해."

 

"몸매가 너무 좋은 남자는 피곤해. 네 몸매를 관리하려 들 테니깐."

 

"가부장적이야. 네게 맨날 밥해라, 빨래하라 그럴걸?"

 

"패션 센스가 꽝이야. 연애 센스도 꽝일걸."

 

"음, 똑똑해 보이긴 한데, 똑똑한 게 밥 먹여줘? 탈락."

 

  

  

정수현에게 남자가 액세서리였다면, 정수현에게 있어 내 썸남들은 평가의 대상이었다. 아니, 까임의 대상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스물넷이면 한창 연애에 흠뻑 빠질 나이지. 아마 추측건대, 정수현에게 스물넷이란 나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의 숫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게 스물넷이란 지금까지 갈아치웠던 알바의 개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혹은 정수현에 의해 쫑난 썸남의 숫자.

 

  

 

고등학교 땐 공부하느라(라기 보다는 정수현의 방해 때문에), 대학에 갓 들어왔을 때에는 사는 게 바빠서(도 있었지만 정수현의 방해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아, 아연..."

 

 "자기야아~ 수현이 배고파아."

  

"....?!"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수현의 뇌 속엔 내 위치를 추적하는 장치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배가 고플 때마다 제 눈에 나만 뛰는 것일까.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마주치는 학회의 훈남 선배와 함께 학식을 먹으러 가는데 그새 어디선가 나타나 내 팔짱을 끼고 나를 보며 싱긋 웃는 얼굴이 있었다. 정수현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웃긴 건, 이 기집애는 그냥 옆에 다가서 인사를 건네면 되지, 꼭 나와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팔짱을 낀다는 게 문제였다. 언젠가 이런 등장에 진지하게 충고를 해준 적이 있음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분명했다.

 

 

 

"너 아까 문자로 밥 먹었다고 했..."

 

"아니, 내가 고픈 게 아니라~ 우리 애. 기. 가."

 

 

 

헐, 미친. 내가 입모양으로 '미쳤어?!'하고는 황급히 옆에 인성 선배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아, 친구랑 선약이 있었어?"

 

"네? 아, 아니..."

 

"네. 김아연 저랑 밥 먹기로 했어요."

  

".....?"

 

  

 

 

뼛속까지 베어든 신사의 품격을 보여주던 인성 선배는 정말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그럼 내일은 꼭 같이 밥 먹자. 꼭." 이라고 말에 힘을 주면서 정수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내일은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줄..."

  

"내일은 나랑 병원 가기로 했잖아. 아기 사진 찍어봐야지."

  

"....?!"

  

"으응~ 그치? 그치? 내일은 병원 가는 날이... 우읍!"

  

"하, 하하... 서, 선배 저, 저 그럼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나는 정수현의 입을 틀어막고 선배의 반대편으로 걸으며 황급히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정수현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학관 맞은편 한적한 보도로 나오자마자 정수현을 보고 따지기 시작했다.

 

 

 

"너 미쳤어?!"

  

"저 사람 별로야."

  

"갑자기 무슨 병원 이야기가 나와?!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

  

"너한테 안 어울려. 김아연은 왜 이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지?"

 

 

   

 

.....?

 

 

  

 

인성 선배는 진부한 표현으로 킹카였고, 훈남이었으며, 간판이었다.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했고, 친해지기 원했으며,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성 선배를 보고 이런 평을 남기는 여자는 정수현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아주 팔짱을 끼고 표정을 살벌하게 하면서 쯧쯧, 하는 폼이라니... 네가 여태까지 만났던 겉만 번지르르했던 똥차들보단 오천 배 멋지거든? 이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다시금 수현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너 왜 자꾸 나 밥 먹을 때마다 나타나는 거야?"

  

"네가 하얘서 눈에 튀잖아. 김아연이 나빠."

  

"......"

  

"아까 그 사람이랑 썸 타는 중?"

  

"뭐래... 그런 거 아냐."

  

"... 흐음."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약속해."


 

  

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고 생각하는 찰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려고 해서 그런지 햇빛 알레르기에 팔뚝이 간지러웠다. 피부가 하얀 건 둘째치고, 민감하고 약하기 때문에 툭하면 따끔따끔해지는 팔뚝이었다. 그래서 여름은 두렵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팔뚝을 톡톡 조심스레 긁으면서 정수현에게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생각했다. 안 그래도 팔뚝이 따끔따끔한데 소름까지 돋게 생겼어...

 

 

 

"그럼 약속해." 라는 저 한마디.

 

 

 

그러고 보니,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얘는 왜 내가 남자를 만날 때마다 저 소리를 하는 걸까. 그 사람을 좋아해?라는 질문에 내가 누누이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 정수현은 꼭 저렇게 말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럼 약속해." 하고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것이었다.

  

 

 

"뭘 약속해..."

  

"저 사람이랑 밥 먹지 마."

  

"같은 학회 선배 셔. 같이 밥 먹을 수도 있지..."

  

"뭐야?"

 

  

 

하, 하고 한숨을 터뜨리는 게 꼭 비극을 연기하는 여배우라도 되는 듯 정수현은 손등을 이마에 얹고 오마이갓, 하고 외친다. 그리고는 마치 인생의 진리라도 알려주는 사람처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에 제 얼굴을 쑤욱 들이밀었다. 나는 정수현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정이 들고 사귀게 되는 거야."

  

"...... 그럴 수도 있지!"

 

 

 

인성 선배 미안해요. 선배 같은 훈남이 설마 나를 요만큼이나마 여자로 봐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철딱서니 없는 내 친구에게 자존심은 좀 지켜야겠어요,라고 생각하는데 정수현은 오히려 더 당당하게 외쳤다.

 

 

 

"태교해야지!"

  

".... 뭐래?!"

  

"아빠가 바람을 피우면 어떡해? 아기는 다- 안댔어. 교감, 이라구 알아? 멀리 떨어져 있어도..."

  

"너...."

 

 

 

진심으로 또라이같아,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또라이라는 말이 태교에 안 좋을까 봐 말은 못하고 그냥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정수현을 바라봐 주었다. 정말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정수현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지는 느낌이 드는 걸까? 나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표정을 한껏 드러내주며 정수현을 무시한 채 걸어갔다.

 

 

 

"어디가아-"

  

"배고파. 밥 먹을 거야."

  

"으응 집에 가서 먹으면 안 돼? 나 다리 아파 쉬고 싶은데..."

  

"너도 배고프다며?"

  

"그거 뻥인데?"

  

"뭐야!?"

 

  

 

아 진짜 도대체 뭐야? 그럼 나와 인성 선배의 늦은 점심,이라 쓰고 황홀한 시간이라 부르는 그 엄청난 기회는 어떻게 보상되는 건데? 내가 황당하게 쳐다보는데 정수현은 그저 스윽 다가서더니 핸드백에서 초록색의 화장품 통을 꺼내 내 손목을 잡아 올렸다. 조금 갑작스러웠다. 내가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바라봐도 정수현은 그냥 눈을 내리깔고 내 팔을 쳐다볼 뿐이었다.

 

  

 

"뭐야?"

  

"찹쌀떡이 딸기찹쌀떡이 됐어. 빨개졌다아."

  

"......"

 

 "여전히 햇빛에 약하구나?"

 

 

 

코 끝을 찌르는 시원한 알로에 향이 났다. 그리고 순간 딱 기분이 좋을 만큼 청량한 느낌의 맑은 젤이 온 팔뚝에 스윽스윽 퍼진다. 검지와 중지로 꼼꼼하게 내 팔뚝에 젤을 바르는 정수현은 시선을 내리깔아 집중하는 것처럼 있다가 이따금 나를 휙 쳐다보았다.

 

 

 

"나랑 있을 동안엔 아무도 사귀지 마. 관심도 주지마."

 

  

 

응?

 

 

 

아, 뭔가 이야기가 좀 이상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누가 들으면 질투하는 연인들의 대화 같잖아?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정수현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냥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정수현. 잘 생각해 봐. 난 아무도 사귄 적이 없었어. 아니, 사귀지 못했어. 네가 그렇게 다이내믹하게 남자를 갈아치울 때, 나는 살기 바빠서 연애 따윈 생각도 못했잖아. 그리고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연애라는 것을 해보려 할 때, 네가 홀몸이 아닌 채 내게 와서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에 끼어들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니?

 


 

하고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수현이 그냥 개수현이 아니라 임산부 정수현이라는 사실은 나를 자꾸만 착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현이 꼼꼼하게 내 팔이며 목이며 볼에 발라주는 시원한 알로에 젤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잠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답이 없어, 딸기찹쌀떡."

  

"...... 연애는 내 자유야..."

  

"태교에 안 좋아."

 

"무슨 소리야?"

 


 

정수현은 여전히 내 팔을 문지르며 싱긋 웃었다. 여우꼬리처럼 아름답게 말려올라간 눈매와 애교살이 새삼 내가 아는 정수현이다, 싶었다. 그리고, "태교에 안 좋아."하고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하는 이 이상한 면까지도.

 

 

 

"딸기찹쌀떡. 집에 같이 가줄 거지?"

  

"응... 뭐... 이제 가야지..."

  

"딸기찹쌀떡. 배 많이 고파?"

  

"응... 나 아침도 제대로 못 먹어서..."

  

"딸기찹쌀떡. 녹차 카푸치노랑 치즈케이크 사줄까?"

  

"헐 진짜?"

  

"딸기찹쌀떡. 지금은 팔 안 가렵지?"

  

"응. 그러네 신기하다... 이거 뭐야?"

  

"딸기 찹쌀떡..."

 

  

 

내가 두 팔을 뻗어 신기하게 내 팔뚝을 쳐다보는데 정수현이 뻗어져있는 내 한 쪽 손에 깍지를 끼었다. 뭐야? 하고 의아하게 정수현의 옆얼굴을 쳐다보는데 정수현은 저 멀리 앞만 보고 있다. 자연스럽게 팔을 흔들흔들거리며 나란히 걸어버리는 정수현 때문에 나도 마지못해 그렇게 걷게 되었다. 휙휙 깍지 낀 두 손이 공중에 스칠 때마다 시원했다. 분명 따갑고 가려웠던 팔이었는데, 지금은 상쾌하고 시원할 뿐이다.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웃고 있는데 정수현이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딸기찹쌀떡... 그 남자는 진짜 안돼. 알았지?"

  

"......"

 

 

 

아, 녹차 카푸치노...를 생각하고 있는데 정수현의 말이 무슨 최면처럼 들렸다. 뭔가, 정수현의 대화에 빨려 들어가는 이 익숙한 느낌. 나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내 속에 들어와 정수현의 충복스런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너무나 익숙한, 지금까지 6년간 느껴왔던 그 느낌.

 

 

 

"응...."

  

"착해."

 

  

 

툭툭, 정수현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듯 툭툭 건드렸다. 뭔가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는 역시 뭔가 말린 느낌이었지만 아무렴 어때. 밥도 먹고 녹차 카푸치노도 얻어 마시게 되었으니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정수현의 차를 타고 편하게 집으로 갈 수 있단 생각에 뭔가 인성 선배 따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말이다. 정말... 그러니까 진짜 녹차 카푸치노 때문에...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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